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Henry Ford II Professor of the Social Sciences Emeritus)는 미국 학계의 대표적인 동아시아 전문가로, 특히 유교 윤리가 접목된 동양식 자본주의 모델에 관한 연구로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하버드대 교수, 하버드대 동아시아연구센터 소장, 페어뱅크센터(Fairbank Center) 소장 등을 역임했다.

 

전재성 EAI 아시아안보연구센터 소장은 미국 노스웨스턴대(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북한이 지난해 12월 정치권력 2인자이자 후견세력의 핵심인물로 알려진 장성택을 처형함에 따라 2014년 김정은 정권의 향방에 국제사회의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이에 동아시아연구원(East Asia Institute: EAI)은 2014년 북한의 선택과 이에 대한 한국 및 국제사회의 대응방향을 모색하고자 시리즈 스마트 Q&A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첫번째 순서로 1월 20일 에즈라 보겔(Ezra Vogel) 하버드대(Harvard University) 명예교수와 전재성 소장(EAI 아시아안보연구센터; 서울대)을 초빙하여 대담을 진행했다. 보겔 교수와 전 소장은 덩샤오핑(邓小平) 시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과 이것이 2014년 북한 김정은 체제에 시사하는 바에 대해 논의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덩샤오핑 개혁개방 정책의 성공요인

 

“덩샤오핑의 지도력: 풍부한 관료경험, 점진적 변화 추구, 보수세력과 타협하거나 사소한 관료 부패 용인하며 개혁 동력 마련”

“평화로운 대외환경 조성: 미중국교정상화, 중일평화우호조약 체결, 중소관계 개선”

 

전재성(이하, 전) 덩샤오핑 시대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성공요인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국내정치적으로는 어떤 요소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보나?

 

에즈라 보겔(이하, 보겔) 1978년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시작되었을 때 이를 가능하게 했던 몇가지 국내정치적 요인들이 있었다. 우선 1976년 마오쩌둥(毛泽东)이 사망한 이후 마오가 추진한 정책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있었다. 마오의 심복이자 후계자였던 화궈펑(华国锋)조차 근대화를 강조하며 마오와는 다른 길을 가고자 했다. 문화대혁명(이하 문혁) 시기 중앙무대에서 축출된 많은 고위관료들의 복귀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문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죽어갔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중국 사회 전반의 지지가 있었다.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 공산권 국가들, 이를테면 동유럽국가, 베트남, 북한 등이 사회주의 체제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생각해 볼 때 중국의 성공은 예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시점에서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오랫동안,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서구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러한 성공을 이끈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단연 덩샤오핑의 지도력이다. 첫째, 덩샤오핑은 다방면에서 풍부한 경험을 보유한 노련한 관료였다. 군에서 12년을 복무하고, 프랑스에 5년간 유학생활을 했으며, 새로운 경제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에 소련에서 1년간 거주하며 공산당 정치권력과 시장경제체제가 공존하는 것을 경험했다.

 

1949-52년 아직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되기 이전의 중국 서남지방(당시 인구 약 1억 명 가량)을 다스린 경험도 있다. 1952-66년에는 중앙정부의 경제 및 대외관계 부처를 포함한 여러 부서에서 고위직을 두루 지내며 마오와 저우언라이(周恩来) 가까이에서 일했다. 1950년대 초반 수많은 공산권 지도자들을 만났고, 1974년 이후에는 여러 자본주의 국가 수장들을 만나기도 했다. 1978년 정권을 장악했을 때 그는 군, 지방정부, 국제정치 등 모든 방면에서 지도력을 발휘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주지사나 상원의원으로 일한 경력을 토대로 선출되는 경우가 많은데, 전자의 경우 국정운영에서, 후자의 경우 대외정책에서 강점을 보인다. 덩샤오핑은 이 둘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덩샤오핑은 하버드대(Harvard University) 걸건(David Gergen) 교수가 강조한 “광야”(wilderness) 생활을 한 경험도 있다. 당대 많은 업적을 남긴 리더들 중 상당수는 드골(Charles de Gaulle)이나 처칠(Winston Churchill)의 경우와 같이 고위직에 있다 실각하는 경험을 한 바 있다. 걸건 교수는 이를 광야 경험이라 부르는데, 이 시기를 통해 리더들은 과거 그들이 추진했던 정책들을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다시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 후 다시 정치무대로 돌아왔을 때는 더욱 발전된 형태의 정책을 보다 힘있게 추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덩샤오핑 역시 문혁시기 광야 경험을 통해 그가 추진하고자 하는 개혁개방 정책의 핵심기조와 추진방법에 대해 면밀히 검토할 수 있었다.

 

둘째, 덩샤오핑은 단계적으로 탈집단화와 대외개방에 나서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했다. 집단농업 방식에서 벗어나 개별 가구 단위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되, 이를 사회주의적 맥락에서 추진하여 중국의 자본주의화를 경계하는 사람들의 우려를 잠재우고자 했다. 예를 들어, 문혁시기 식량부족으로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은 안후이(安徽省) 성에서 탈집단화를 시도할 때, 처음에는 아사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농 체제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서는 것을 허락하는 단계에서 출발했다. 그 후 서서히 농가책임경영제를 도입하고, 2-3년 후 안후이 성이 농업생산량 차원에서 거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며 다른 지역으로 이를 확대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런 방식의 점진적 변화에 반대하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셋째, 덩샤오핑은 지방관료들의 사소한 부패를 용인하거나 보수세력과 타협하는 방식으로 개혁개방 지지세력을 확대했다. 문혁의 여파로 지방관료들은 새로운 시도를 꺼리고 기존의 것만을 답습하려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는데, 덩샤오핑은 이들이 적극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사소한 실수는 물론 다소간의 부패를 용인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후일 중국 정치 전반에 퍼진 부패의 시초가 된 측면도 있지만, 일반 민중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제난에 시달린 지방관료들에게 적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아울러, 개혁개방 정책을 시도하고 처음 2-3년 동안은 대외개방 속도를 조절하기도 하고, 여러 영역에서 이전 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용인하기도 하며 보수정치세력과 많은 부분에서 타협했다. 이는 모두 친 개혁개방 세력을 확대하고 정책 추진 동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내정치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의 크기를 고려한다면, 대외환경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성공적인 개혁추진을 위해 필요할 것 같다. 덩샤오핑 시기 중국의 대외환경은 어떠했나?

 

보겔 1977년 복권되었을 때 덩샤오핑이 가장 먼저 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미국 고위 관료를 베이징으로 초청하여 미중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여는 일이었다. 데탕트 국면을 연 1972년 닉슨(Richard Nixon)의 역사적인 방중 이후 미-중간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1977년까지도 양국 정부는 국교정상화에 합의하지 못했다. 처음 덩샤오핑이 벤스(Cyrus Vance) 미 국무장관을 초청해 회담을 시도하던 때에는 카터(Jimmy Carter) 정부가 처한 국내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논의에 큰 진전이 없었지만, 1978년 여름 미국 국내정치 상황이 나아지자 카터는 주베이징 연락사무소 대표인 우드칵(Leonard Woodcock)을 통해 국교정상화 회담을 재개하게 했다. 관건이 되었던 것은 미국의 대만무기판매 문제였는데, 덩샤오핑은 우드칵의 제안을 받아들여 먼저 국교를 정상화한 뒤 대만문제를 점차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합의해 미중 수교를 성사시킨다.

 

일본과는 기존의 평화조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78년 8월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한다. 한편 소련은 베트남 내 해공군기지를 통해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계속 보였는데, 덩샤오핑은 이것이 중국에게 중장기적 위협이 된다고 보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978년 말 베트남이 중국의 우방이었던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덩샤오핑은 이듬해 초 중국-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베트남에 직접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만약 소련이 베트남을 이용해 중국을 계속 압박할 경우 중국도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에게 중국의 경고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했다고 판단한 덩샤오핑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베트남에서 철군하고 소련과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후 진행된 중-소 회담에서 양국은 관계 정상화에 이르기까지는 못했지만 서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현저히 낮추게 된다.

 

결국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초기 주변 모든 강대국과 우호적 관계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바 주요 국가들간 ‘세계대전이 불가피한 상황’을 바꿔 평화로운 대외환경을 조성해 낸 것이었다.

 

2014년 김정은 북한의 선택

 

“개혁개방 시기 중국-대만에 비해 현재 남북의 경제력 격차 엄청나, 북한 자신감 있게 변화 추진하기 어려워”

“덩샤오핑에 비해 김정은은 경험이 너무 부족: 장성택의 숙청은 대내 정치 불안을 야기해 북한의 개혁개방을 더욱 힘들게 만들어”

“현재 북한 내 진행중인 장마당의 확산은 덩샤오핑 개혁개방 초기 모습과 유사한 측면 있어”

 

중국의 개혁개방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성공이 매우 예외적인 사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규모가 중요한 변수가 될 듯 한데, 중국은 상당히 방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외 안보 위협에 상대적으로 덜 취약하고, 개혁을 시작할 때에도 먼저 제한된 지역에서 정책적 실험을 한 뒤 이를 확대하는 방식의 점진적 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중국에 비해 매우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대외안보 위협에도 훨씬 더 취약할 수 밖에 없고, 특정 지역에 국한시켜 개혁개방 정책을 실험해 보기도 어렵다.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개방 문제에 있어 규모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보겔 단순히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적 국력격차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이나 한국 모두 분단국가로, 내전을 치렀던 상대국과 대립하고 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에 나설 때 대만은 중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뤄내고 있었고 대외무역 규모도 훨씬 컸지만, 중국의 인구는 대만의 50배가 넘었기 때문에 실제 경제규모 면에서는 중국이 결코 대만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인구는 이미 북한의 거의 2배에 달하고, 경제규모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큰 격차가 나 있다. 이에 더하여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까지 동맹국으로서 한국을 지원하고 있다. 이런 압도적 열위(劣位)로 인해 북한은 자신있게 개혁개방에 나서기 어렵다. 1970년대 중국이 문호를 개방해 대만과 홍콩 사람들이 중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국가규모 차원에서는 중국이 이들보다 훨씬 컸지만 근대화된 복식과 장비를 보유한 이들에게 중국인들은 상당한 열등감을 느끼며 움츠러들었으며, 이 때문에 개방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중국 정부가 크게 우려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북한이 개방에 대해 어떤 공포를 가지고 있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타당한 지적이다. 한 가지 더 중국의 성공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리더십의 중요성인 듯 하다. 처음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김정은이 젊고 스위스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다는 점을 들어 북한의 변화를 기대했다. 특히 그의 후견그룹 중 핵심인물로 부상한 장성택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깊이 이해하고 친중국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큰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작년 말 장성택이 처형된 이후 최근 관련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는 북한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향후 북한의 개혁개방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는가?

 

보겔 덩샤오핑에 비해 김정은은 너무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다. 덩샤오핑이 권좌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70세를 넘긴 상태였고,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10년 이상 일한 경험이 있었으며, 여러 부처 중앙정부 고위직으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료들과 친분이 있었다. 이런 덩샤오핑에 비해 지나치게 어리고 미숙한 김정은이 그나마 큰 동요 없이 권력승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부터 김정일 가까이에서 그의 권력공고화를 도왔던 장성택의 후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장성택의 처형 이후 북한 정권의 내부 안정성 문제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김정은은 이미 자신을 지지하는 젊은 그룹 세력을 양성하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뒀겠지만, 장성택과 같은 인물을 숙청한다는 것은 그를 따르거나 그와 친분이 있었던 모든 세력을 축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상당한 동요가 불가피하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과 상대적 국력격차 문제가 있는 상황인데, 이처럼 내부 동요까지 있게 되면 앞으로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서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다소 희망적인 소식도 있다. 현재 많은 북한 주민들이 한국 영화나 방송 비디오를 시청하고 있어 한국의 발전상황에 대해 인지하고 있고, 다분히 시장자본주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장마당에서 비공식 경제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런 비공식 시장들은 최근 북한 군부의 보호아래 거래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보겔 휴대폰도 상당히 많이 보급되어 있다고 들었다. 이제 북한 주민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정보를 정부가 완전히 통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 북한 사회 곳곳에 소규모 비공식 시장들이 상당히 확산되어 있다고 들었다. 최근 북한 경제가 다소간 성장세를 기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 정부 입장에서 보면 암시장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정부가 눈감아 주지 않으면 이런 시장은 존재할 수 없다. ‘눈감아 주는 것’과 ‘허가하는 것’ 사이에는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현재 북한은 작은 규모의 시장경제가 성장하도록 용인하고 있는 셈인데, 이는 개혁개방 초기 단계에서 덩샤오핑이 추진한 정책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중국의 경우 1980년대 초반부터 소규모 시장이 허용된 지역 주변의 농민들이 여러 농산물을 가지고 와 시장에서 매매하기 시작하고, 이것이 점차 품목 면에서나 물량 면에서 발전하게 되면서 보다 많은 곳으로 시장이 확대되었다. 유사한 일이 북한에서도 발생하고 있으리라 본다.

 

북한 군이 비공식 시장 거래의 뒤를 봐주고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다면, 군은 앞으로 더 많은 시장이 생기도록 만들어 수익 규모를 키우려 할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군이 민간물품 생산을 지원하고 이를 시장에 판매하는 형태가 될 텐데, 중국에서도 이런 수순으로 변화가 진행되었다. 중국이 처음 개방한 지역 중 하나인 션천(深圳)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중국 정부는 마오 시기에 적의 공습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내륙 깊숙한 곳 후방지역인 ‘3선’(三線)안으로 대부분의 군사산업 시설을 옮겼다. 상하이(上海) 지역의 기술자들 역시 대부분 1960년대 무렵 내륙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션천이 개방되자 해외시장에 물품을 팔아 이익을 남기고자 했던 중국 군은 일부 동부해안 출신 기술자들을 션천으로 돌려보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 민간물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도록 했다. 만약 개성공단을 둘러싸고 북한에 유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면, 개혁개방의 시초가 마련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향후 한국과 미국의 대북정책

 

“김정은 정권 공고화 및 급변사태 가능성을 모두 염두에 둔 정책마련 필요”

“북핵은 핵테러 가능성 차원에서 미국에 심각한 안보위협 제기: 북핵문제가 진전되기 전 북미관계 개선 어려워”

 

북한의 미래에 관해 여러 측면에서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여지가 많아 현재 한국 내에서 많은 논의가 진행중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장성택 숙청으로 인해 김정은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엘리트 그룹의 결속력이 제고되었기 때문에 김정은 정권이 보다 안정된 권력기반을 확보했을 수 있다. 이럴 경우에는 공고화된 권력기반을 가진 김정은 정권과 전략적 관계를 형성하여 북한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일이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유사한 형태의 숙청이 반복되면서 가중된 정치적 혼란의 여파로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는 시나리오 역시 가능하다. 현재 어떤 시나리오가 더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나? 아울러 지금은 어떤 대북정책을 펼쳐야 하는 시점이라고 보나?

 

보겔 중국은 당의 역할이 핵심적인 데 비해 북한은 군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현재 북한 군부세력이 어떤 양상으로 형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둘 필요가 있다. 강한 결속력을 토대로 김정은 정권에 대해 군이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수도 있고, 여러 파벌로 나뉘어져 대립과 갈등을 벌이고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두 가지 경우의 수에 모두 대비해야 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북한 급변사태를 대비한 계획 마련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과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 지난 130년간 한국은 아시아지역 수많은 문제들과 분쟁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현재 중국이 부상하고 있는 국면에서 북한 정권의 불안정성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한-미-일-중 사이에 공감대를 마련하고 급변사태 가능성에 충실히 대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북한에 대한 오바마(Barack Obama)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현재 미국은 이란 핵 등 중동문제를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상대적으로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관심이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이 대북정책 차원에서 다른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가?

 

보겔 미국 정책 커뮤니티는 충분히 커서 일부가 중동문제에 집중할 때, 다른 일부는 동아시아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고 본다. 케리(John Kerry) 국무장관이 이란 문제 등을 다루기 위해 중동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바이든(Joseph Biden) 부통령 등이 동아시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관심이 분산되고 있다고 해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현재 미국이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비확산 문제이다.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과 테러집단의 손에 핵무기가 들어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국민 전체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는 핵무기의 관리 및 사용에 있어 상당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 테러집단은 그런 의무에서 자유롭다. 따라서 테러집단이 핵무기를 가질 수 없도록 하는, 매우 높은 수준의 통제시스템을 전세계적 차원에서 구축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야기하는 확산 위협은 미국 입장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문제이다. 결국 북한 비핵화 과정에 진전이 있기 전 미국의 대북정책에 전향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북한은 여러 차례 비핵화에 합의하고도 실제로는 이를 이행하지 않은 전례가 있어, “같은 말을 두 번 사지 않으려는”(don't want to buy the same horse twice) 미국의 입장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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