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아사노 토요미(淺野豊美) 와세다대 교수는 한일 양국에서 ‘국민’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바탕이 된 역사 인식이 국내외 정치와 결합하며 분쟁을 일으키는 구조에 주목하여, 역사 문제 해결을 통한 관계 개선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인권 가치에 기초한 역사관이 부상하며 일본의 식민 지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반면, 일본은 경제 발전 및 국제법 준수 등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우선시하며 양국 간 인식 차가 벌어졌습니다. 저자는 이처럼 상이한 역사 기억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감정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고, 국내외 정치가 상호 공진하며 양국 간 갈등을 낳았다고 지적합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양국 국민이 감정과 가치의 차이를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배려와 연대의 기초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서론: 동아시아에서의 국민감정 악화

 

2023년 3월 한국 외교부의 강제동원 해법 발표와 뒤이은 한일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일관계 개선의 계기가 마련되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일관계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는 것은 세계 저널리즘의 일반적인 통설이다. 같은 민주주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고, 경제 발전과 민주화 등 사회적 변화에 따라 거의 동등한 경제 발전 수준이 되었음에도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어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관련된 가치로서 인권, 자립 강화로 인해 경쟁 관계로 접어든 양국 경제, 그리고 북한의 장래를 둘러싼 안보 정책 등 모든 분야에서 한일 정부 간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론 보도나 여론조사 등의 결과를 보면 정부 간 관계뿐만 아니라 국민 간의 관계마저 악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본고는 양국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공유하고 동일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가 왜 악화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이를 국민이라는 사회의 통합 원리의 차이에서 찾고자 한다. 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국민이라는 주체가 구성될 때 공유되는 가치와 기억에 주목하면서,[1] 가치의 유형론의 논리에 집중하기보다는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의 ‘공진’이라는 문제를 고려하면서 복합적인 정치 구조를 논의해 나가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다음 두 가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첫째, 제도로서 기능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집단이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이라는 집단을 구성하는 요소를 현실 정치와 연결시켜 분석하지 않은 채 ‘민주주의라는 제도’ 또는 ‘가치의 공유`라는 슬로건 형태로 국제정치의 장에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 양국이 서로의 국민 의식 고양에 의해 양자 관계 악화의 책임을 상대국의 정치나 사회, 나아가 문화에 겨누는 경향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국민을 형성하는 요소로 주목하는 것은 공유된 기억이다. 국민이라는 사회가 인간이 직접 인식하지 못하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지만 그것을 인간의 상상에서 현실로 인식시키고 사회를 기능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에게 공유된 역사기억이다.

 

확실히 한일관계에서의 역사 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안전 보장이나 경제상의 국익이 중국의 부상에 의해 변화해 왔다는 점과 한국의 경제 발전에 의해 한일 양국 간 세력 균형이 비대칭적인 상태에서 균형된 상태로 변화했음이 지적된다. 그러나 국력이나 국익 논의 자체는 그것을 그렇게 인식시키고 그 인식이 정당한 것이라고 공유하는 주체인 국민 수준의 변화와 분리할 수 없다.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변화된 국내 정치 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국민 통합의 기본 방향 및 그 변화가 국제정치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그 연동을 고찰하기 위한 기본 개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2] 즉, 국익이나 국력을 분석 개념으로 할 때 전제가 되는, 국민 집단을 구성하는 요소가 국익이나 국력과 어떻게 연동되는가를 고찰해야 한다. 그것이 본론의 문제의식이다.[3]

 

국민을 지탱하는 공유된 역사의 기억이 국내외 차원을 초월한 정치 과정과 결합되는 가운데 어떻게 분쟁을 야기하는지에 주목하여, 본론에서는 한일 간에 전개되어 온 역사 문제를 예시로 기억과 관련된 가치가 모종의 복합체를 형성하고 그 단층이 국력과 국익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면서 국내외 다른 수준에서 공진하는 가운데 관계 악화를 일으키고 있는 구조를 밝혀 나갈 것이다.

 

Ⅰ. 대립의 정체: 민주주의와 감정, 가치, 기억

 

다양한 체험 중 특정한 기억이 선택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보편적인 가치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인권이나 민주주의, 자유로 상징되는 보편적 가치는 어떻게 사람들의 역사적 기억과 결합되어 국민으로서 갖는 감정을 만들어 내고 일정한 구조 속에서 계속 논쟁이 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관찰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기 어렵다는 데 대한 자각인데, 이를 전제로 하면서도 역사 분쟁에서 논쟁이 일어날 때 양국 주장의 근거가 되는 보편적 가치는 양극단에 있는 경우가 많다. 한편에는 ‘피해자 중심주의’와 ‘여성의 존엄’으로 상징되는 인권이라는 보편적이고 자명한 가치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법의 준수’와 ‘(국가 간 협정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라는 주장으로 상징되는 법과 질서, 안정, 번영이라는 또 다른 보편적 가치가 있어 대화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양분된 가치가 역사 문제에서도 서로의 주장에 동원되고 있다는 것은 현실적 감각으로 보아도 들어맞는다고 할 것이다.[4] 인권이나 여성의 존엄과 대치되는 법적 안정과 부유함이라는 가치는 어떻게 한국과 일본 각각의 국민적 기억과 결합하는가? 이런 가치와 기억의 결합은 어떤 조건 하에서는 체제를 지탱하는 사회 규범이 되고, 또 어떤 조건에서는 그 체제에 대한 이의 제기를 정당화하는 ‘정의’로 등장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는 소수자 혹은 현상의 변혁을 시도하는 측이 내세우는 가치를 정의라고 부를 수 있다. 한국 시민 사회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운동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의와 결부되며 강화되어 온 역사적 기억을 한국 국민들은 공유하고 있다. 그 기억은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초국가적 운동체를 통해 일본 국민이 공유하는 기억과도 상호작용을 하며 공감 또는 반발을 일으킨다. 이러한 과정은 한국 정부의 요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본 국내 정치의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5]

 

1. 한국의 국민적 기억과 가치로서의 인권과 발전: 일제의 이면

 

그렇다면 민주화에 따른 한국의 국민 통합의 변천 속에서 국민적 기억은 어떻게 가치와 연결되고 변화해 왔는가? 지금까지 논한 틀의 연장에서 한국 국민에게 공유되는 기억은 민주화에 따라 다른 가치와 결합하게 됐다고 주장할 수 있다.

 

확실히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체제하의 개발 우선 시대에는 한국에서도 발전과 부유함이라는 가치와 국민적 기억이 결합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내세운 ‘극일’ 구호, ‘유신체제’로 명명된 메이지유신에서 유래한 헌법 무시 체제, 그리고 일본과의 차관(借款)을 우선시하여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木宮正史 2021). 그러나 정치 체제의 민주화 과정을 통해, 정부에 저항하는 세력이 내세운 인권이라는 가치가 한국의 국민적 기억과 융합되는 전환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발전이나 부유함이라는 가치에서 인권이라는 가치와 결합된 역사 기억으로의 전환은 어떻게 발생한 것인가?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는 과거 박정희의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근대나 문명을 표준으로 해 일본을 뒤쫓아 발전을 추구하던 경향에서 전환되어, 인권에 의거한 민중 주체의 저항에 중점을 두는 계기가 되었다. 즉 한국의 민주화는 “새로운 역사해석을 통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증거로 민주화와 일체가 된 저항 논리의 변화는 ‘식민지 근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형태로 근대라는 개념을 긍정적인 것에서 회의적인 것으로로 변화시켰다. 근대를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로 여기게 되었고, 발전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온 근대를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없어진 것이다(宮嶋博史 外 2004, 249). 한국의 민주화는 민중을 주체로 하는 역사를 바탕으로 하면서 ‘국민사의 해석권’을 독재 정부에서 민중으로 탈환해 옴으로써 진행되었고, 그 해석의 갈림길이 된 것이야말로 근대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가 역사와 얽힌 인권의 문제로 상징되듯, 그 피해자들은 인권이라는 가치와 일체화되어 존엄을 유린당했다는 강한 감정과 결합된 ‘인권 피해’라는 기억의 상징이 됐다. 이처럼 과거의 피해자가 영원히 추구되어야 할 이상으로서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는 현상은, 복수정당제나 언론의 자유가 정착되는 제도적 민주화에 이어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근대 일본이 서구를 모방하면서 발전이나 개발이라는 문명적 논리를 민주주의의 성과로 내세워 온 반면, 한국의 민주화는 오히려 그러한 근대의 부유함이나 문명이라는 논리 자체에 대한 저항이 인권이라는 논리와 결부되는 방식으로 진전되어 근대나 문명의 부정적 측면을 반복하여 점검하게 되었다(宮嶋博史 外 2004). 그 연장선상에 경제적 풍요라는 가치로만 결합해 온 일본의 민주주의 정치 체제 및 그 안에서 형성된 일본 국민의 정서와 한국 국민 정서 사이에 극심한 역사의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

 

1987년을 정점으로 한 한국의 민주화를 되돌아보면, 1997년부터 전 6권으로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지음, 한길사)은 인권이라는 가치를 과거에 소구하여, 대한민국 건국 시점에는 존재했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계기를 연구했다고 할 수 있다. 회복되어야 할 가치로서 인권과 자유를 근대사 속에서 재구성해 보인 것이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중 해방에 의해 자유로워진 공간이 미국이나 냉전 질서하에서 다시 억압의 공간으로 전환된 역학을 해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부의 기원과 독재자가 정통성을 주장하는 근거에 이용된 민족 분단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과 그 흐름을 이어가는 군사 정권이 주장해 온 개발과 그로 인해 정당화된 인권 억압을 극복하는 역사적 해석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1985년 한국에서 등장한 『한국민중사 〈현대편(1945-1980)〉』(다카사키 소우지 옮김, 한국민중사연구회, 1987)는 발전이라는 가치로 본 한국 근대사 정체의 근본 원인을 인권과 연계된 자유의 억압에서 찾았다. 우선 역사의 범위를 조선시대로 확대하면서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필연성’과 인간의 주체적 자유를 결합하면서(316쪽), 근대화를 위한 ‘맹아’가 존재했으나 제국주의에 의해 짓눌렸다는 논리를 제공했다. 이로써 발전이라는 가치로 본 민족의 ‘정체’를 민족의 자유로운 발전이 억압되었다는 논리로 설명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즉 민중의 자주나 자유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발전이라는 가치와 결부되는 문명 논리가 적용되지 못하는 역사 해석을 만들어 근대 자체의 의미도 변용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민주화 과정이 인권 규범과 융합된 새로운 역사 해석의 틀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과거 발전과 결부된 역사의 기억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남미 같은 경우와는 달리, 새로운 역사 기억은 한국 내 분열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반일종족주의』(이영훈, 문예춘추, 2019년)로 상징되는 문명 및 근대의 논리에 의거한 한국사도 한국 보수의 일부에서 아직 건재하며, 이는 일본의 우익 보수파와의 연계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여 한국 국내와 국경을 초월한 일본과 역사를 둘러싼 분쟁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2. 가치와 기억의 재편 과정으로서의 민주화: 역사 해석권의 쟁탈과 정착과 동아시아

 

일본이라는 국민사회에 공유되고 있는 역사적 기억은 어떤 가치로 뒷받침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응을 예로 들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에 대응하여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부수적인 지위에 놓인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지향하는 운동이 가부장주의나 매춘 관광에 대한 반대 운동의 형태로 여성의 존엄, 인권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6] 일본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전반까지는 가해 책임도 마주해야 한다며 인권이라는 가치를 상당히 고려하는 대응을 보였다(浅野豊美 2015).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조치들이 과거의 조약이나 정책과의 정합성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라는 조건이 딸려 있었다. 인권이라는 가치를 고려하면서도 과거의 법령과 정합성을 취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도의적 대처’였으며, 구체적으로는 정부와 민간의 협동에 의한 재단 설립이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 재단은 이른바 ‘국민기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국민의 기금을 모아 정부가 책임지고 피해자에게 전달하는 식의 협조가 전제되어 있었다. 즉, 정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국민 모금의 방식으로 과거의 무상 경제 협력이라는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실제 모금을 전달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과 이를 위한 사무(직원 고용 · 재단의 대지 비용 · 파견 여비 · 홍보 비용)를 정부가 책임지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和田春樹 2016; 大沼保昭 2017). 더욱이 모금이 규정액에 미달할 때에는 정부의 의료복지 지원 사업에서 예산을 충당함으로써, 정부가 중심이 되지만 정합성을 취하기 위해 민관 협력이라는 형식을 유지하면서 인권이라는 가치와 과거 조약에 따른 안정과 발전이라는 양쪽 가치에 균형 있게 대처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시민사회를 양분하는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한국의 피해자들에게 수용되지 못하면서, 그리고 한일 간 초국가적 네트워크에 의거해 인권이라는 가치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시민사회의 요구를[7] 한국 정부가 재판 투쟁을 통해 최종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그 결과 일본의 민간뿐만 아니라 정부 담당자들 사이에서도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었다. 과거 행정적인 궁리를 거듭하면서 노력을 거듭한 만큼 불신은 더 높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정부의 요구가 과격하게 ‘골대’를 움직이는 것으로 비춰지면서 한일관계의 긴장이 고조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 외교 당국자들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이 요구한 사과나 진상 규명은 인권적 가치로서 여성의 존엄과 얽힌 피해자 구제의 문제로서가 아닌, 한일 청구권 · 경제협력협정의 해석의 문제로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제 조약과의 정합성이나 국제 조약 준수만이 판단 기준에 이른 배경에는,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제기된 위안부 문제가 적십자 간호사나 일본인 위안부를 포함한 일본 국내 여성 및 민간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정도 있었다. 즉 일본에도 역사의 피해자는 존재했지만, 이는 일본 국내에서 발전이나 평화라는 가치에 동떨어진 사람들의 구제 문제로 취급되었다. 적십자 간호사에게도 시베리아 억류자에게도 일정한 보조금이 발전이라는 가치로 본 위로금으로서 지급되는 가운데, ‘인권 피해자’는 이미 구제되고 있다는 논리가 강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1990년대 초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재단 설립에서 보였던 도의적 대처와 그 제도화라는 접근법은, 초국가적 시민사회의 일부에서 거절당함으로써 민중사의 틀에서 인권 유린의 문제로서 ‘식민지 책임’을 자각할 수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일본 내 정치적 기반을 상실해 갔다고 할 수 있다.

 

성장이나 발전이라는 가치,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조약과 국제법의 준수를 인권보다 우선시하는 접근법에 의해 인식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이는 인권과 발전이라는 양극화된 민주적 가치에 대한 시민들의 분열이자, 이와 연계된 한국과 일본 정부의 입장 분열이라 할 수 있다. 과격한 시민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 측의 법적 정합성을 바탕으로 한 민관 협력에 의한 재단 설립이라는 조치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피해자에 대한 ‘국가 책임’을 모호하게 하는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Ⅱ. 문제를 둘러싼 분쟁의 구조: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공진

 

1. 역사 문제는 구축된 국민의 위상 차이에서 유래한다

 

시민사회의 분열이라는 사태의 배경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국경이 없어야 할 시민도 구체적 현실 생활 공간에서는 국민으로서 살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기에 언어, 교육, 신산업 육성, 그리고 안전 보장 측면에서의 경쟁이나 재원을 제공하는 단위로서의 국가와 그 주체이자 구성원인 국민이라는 집단이 불가결한 데서 유래한다. 이른바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동일한 보편적 가치를 신봉한다고 해도, 한일 각각의 국민이라는 집단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인 기억의 선택은 상기한 바와 같이 각기 다른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 더욱이 ‘타자’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를 얻었다는 역사적 기억이 한국 국민에게 공유되고 있기 때문에, 과거 ‘동화’ 정책을 전제로 민족을 말살시키려 했던 일본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 제국적 지배와 전쟁의 의미가 한국 국민의 기억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일본의 국민적 기억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전후 70년 담화에서 상징되듯 영미와의 전쟁이며, 그 원인으로서 자국이 무력에 의한 일방적 해결을 시도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전후 70년 담화에서는 국책의 과오로서 평화적 분쟁 해결 원칙의 유린과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반역이라는 두 문제를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 병합 문제를 민족자결의 유린 사례에 포함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국민적 기억 속에 발전이라는 가치에 비추어 민주주의가 발전하였고, 이런 맥락에서 1931년 이후 만주사변에서 2차대전에 이르는 시기에 대하여는 ‘군국주의의 대두로 인한 일탈’로서의 의미만 부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 간에 역사 문제가 발생하는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권이나 인간의 존엄이라는 가치는 사회 정의나 그 실현을 위해 필수적인 ‘자유’라는 가치를 당연한 전제로 하는 반면, 문명이나 근대라는 가치는 법적 안정성이나 질서 및 그 위에 구축되는 ‘부유함’이나 발전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다. 각각의 가치는 본래 상호 보완적이다. 즉 사회 전체의 발전도, 사회 속 개인의 자유나 인권도 양쪽 모두 불가결한 문제이고 상호 보완적이지만, 한일 역사 문제에서는 일본이 전자를, 한국이 후자를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 각각 다른 기억과 논리를 이용해 대립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배경에 있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기억의 사회적 기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안부 피해자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함께 등장한 역사 해석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일제의 통치뿐 아니라 독재 체제를 규탄하기 위한 상징이었다. 민주화 과정에서 극복되었어야 할, 청산해야 할 과거의 잔재로서 알기 쉽게 보여 줄 공감을 집결할 피해자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국내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과거 한일관계의 비리를 드러내는 대상으로 위안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강제징용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실제 피해자가 국민적 공감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만큼 그 구제에 대해 조약을 방패 삼아 응하지 않으려 하고, 한국이 제시한 제3자 변제안에도 적극 호응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높아지는 것이다. 위안부 및 강제징용 피해자 구제 문제는 식민지 지배의 기원 및 그 종결을 위한 법적 틀과 맞물리면서 양측의 국민 사회와 국내 정치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기억과 가치, 그 해석과 결합을 둘러싼 문제들, 즉 역사 문제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쟁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연구자나 시민 스스로가 국민으로서의 감정을 자각하면서 상대방의 감정이 생겨나는 역동성을 기억과 가치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국민 사회를 창출하는 요소로서 고찰하고, 그 원인에 대한 인식을 일치시켜 심화해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민주주의 사회의 감정 · 기억 체제: 공진의 원인과 위상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역사 문제에 관해 감정적 분쟁이 전개되는 구조를 국내 정치와 국제정치를 연결시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국민을 집단으로 성립시키는 의식‧무의식의 집합적 감정 기억은 국내 정치 체제 및 국제적 체제와 어떤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가?

 

민주주의 사회 내부의 국내 정치 구조에서 최종 결정의 단위가 되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이다. 그러나 이 전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민이란 무엇인지 고찰하여야 한다. 국민은 주관적 감정과 그것을 만들어 내는 기억을 공유한다. 이성적 민주주의의 룰인 다수결도 감정적 존재로서의 국민 없이는 기능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누구를 그 구성원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민주주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업이든 지방자치단체든 그 장소의 상황에 따라 정해진 담당자나 집단을 확정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특정 집단을 구성하는 일원들이 집단 의사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川崎修 · 杉田敦 2006). 최종적으로 다수결에 의한 결정에 소수파가 마지못해 묵인하고 따르게 되는 것도 같은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의식이 집단 내에서 공유되기 때문이다. 국민이라는 집단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집단이지만 민주주의를 취하는 한 타자를 배제하는 집단이라는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공유된 감정은 형식적일지라도 의례에서 필수적이다.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규정한 헌법하에 민주주의를 전제로 하는 정치 시스템에서는 국민이라는 집단 구성원들이 같은 감정과 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고, 그에 따라 비로소 ‘국민대표’나 대표 간의 다수결에 의한 결정은 성립하는 것이다.[8] 언론의 자유에 의거한 대화와 설득이라는 숙의 과정 또한 언어뿐만 아니라 같은 집단의 구성원이며 집단의 존속이나 가치를 지킨다는 의식과 기억이 가리키는 감정을 공유해야 비로소 가능하다(シャンタル・ムフ 2006, 9).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국민 감정의 함양을 급속히 가능하게 한 것은 개인의 삶에 의미를 공급한 이른바 국민의 ‘역사’에 대응한 기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민이 고귀하고 의미가 있다는 의식이 과거의 영광을 알기 쉽게 표현한 역사 교육에 의해 뒷받침 됨으로써, ‘개인’은 어느 정도의 국민 감정을 언어와 함께 공유하는 ‘국민’이 되고 동시에 개인을 지배하는 도덕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시민’이 된다. 자유를 창출해 온 것을 국민 감정의 핵심으로 삼는 미국 등의 국민들조차도 워싱턴과 링컨으로 상징되는 역사적 기억은 대통령 선서식의 말이나 의례에서 빼놓고 논할 수 없다(アンソニー·スミス 1999).

 

국민적 기억과 그것을 알기 쉽게 구성한 이야기로서 역사, 그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야말로 한일 간에 대조적인 양상을 보이는 보편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발전’, ‘근대화’, ‘평화’라는 가치, 한국으로 치면 ‘인권’, ‘존엄’, ‘자유’(‘억압’의 반대)라는 가치가 중시되는 경향이 있음은 앞에서 서술하였다. 일본에서는 극심한 불평등 조약하에 국민이 차별적인 취급을 받아 발전이 저해되고 있었음에도 마지막에는 조약 개정을 쟁취해 청일, 러일 두 전쟁에서 승리해 열강으로 인정 받고 대등한 주권 국가가 되어 근대화와 발전에 성공했다는 스토리가 교과서에서 공유된다. 한편 한국에선 의병 학살과 인권 유린에 의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러일 전쟁 이후 ‘강점’하에도 민족이 주체성을 잃지 않고 저항하다가 결국 독립을 쟁취했다는 스토리가 국민사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국민이 세계 속에서 인정 받고 각 개인에게도 소중한 존재임을 전제할 때, 단순화하면 양국 국민의 기억은 한일 각각의 근대화와 인권에 힘입어 두 보편주의적 가치가 대립하고 있는 듯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각기 다른 보편적 가치와 결부되어 있다 하더라도, 국민적 기억의 공통점은 ‘용서받지 못하는’ 비참하고 위태로운 과거와 현재의 ‘자랑스러운’ ‘우리’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국민의 정치 활동이나 특정 정치 세력에 역사적 정통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미국이나 서구의 국민국가에서는 국민의 발전과 인권의 보장이 상호 보완적이었던 것에 비해, 급속한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이룬 동아시아, 특히 한일에서 두 가치는 대립적인 관계가 되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통상 근대의 부유함은 개인의 자립성이나 독립성을 뒷받침하는 것이겠지만, 강력한 국가에 의해 개인의 인권보다 부유함이 우선시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또 인권 피해자가 국가가 발동한 전쟁의 희생자로 자리매김하고 기억되기 때문에 두 가치는 개발을 주도한 동시에 부정한 전쟁을 주도했다는 양면을 가진 국가의 존재를 놓고 양극화될 수도 있다. 국가는 한편으로 부유함의 기원이자, 한편으로는 억압의 원흉으로 여겨져 한일 각각 국내에서 논쟁이 되는 동시에 양국 간의 역사 문제에서 양국 국민의 입장을 양극화시키는 것이다.

 

3. 공진에 의한 국민 감정의 충돌 구조

 

다음으로 왜 두 보편적 가치가 한일 간의 다른 기억과 결합되어 역사 문제의 대립을 가속화시키는 것인지 국내외 정치의 공진이라는 시각에서 논하려 한다.

 

공유된 기억에 의해 국가적 감정이 생겨나고, 그것이 공유됨으로써 국민이라는 집단이 존재하게 되며, 국내 민주주의가 기능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을 감정화하는 데 필수적인 보편적 가치는 국내 정치 구조와는 별개로 국제 사회에서 보편적이기 때문에 국민적 소프트 파워의 한 요소로 기능하고, 따라서 기억을 둘러싼 분쟁은 국제정치에서 소프트 파워 자원의 쟁탈전 양상을 띠어 이른바 역사 전쟁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적 차원으로 고조된 국제 사회의 역사를 둘러싼 분쟁은 국내 정치의 동향도 좌우하게 된다. 즉 국내 정치에 국제 사회의 정의와 가치를 둘러싼 기억의 싸움이 역류함으로써 보다 강경한, 즉 국내적 논리로 볼 때 ‘바른’ 지도자의 정치적 정통성은 높아지게 된다. 다시 말해 더 많은 표가 몰리게 되어 포퓰리즘 현상이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역사 인식 문제’는 이 같은 국내와 국제라는 두 가지 차원에 걸친 국내외 정치 문제의 공진 현상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쟁해결학이나 국제법은 일반적으로 국내정치적 문화 구조에 사로잡혀 분쟁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대립 관계에 있는 한쪽 국민의 정의와 일체화되어 정치화되고 만다. 한국이 분쟁해결학에서 유래한 피해자 구제의 원칙을 주장하면 할수록, 일본은 평등한 주체 상호의 국제법 일반 논리나 발전 논리에 의거해 문제가 해결됐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국민의 감정과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뒷받침하는 보편적 가치가, 한일 간에 전혀 다른 단층이 국내 정치사회 구조에서 쏟아져 나와 국제정치상 갈등을 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 번째 이유는 단층이 발생한 원인과 관련된 것이다. 주권을 가져야 할 ‘국민’ 집단은 동아시아에서는 불과 150년 전까지만 해도 결코 자명한 집단이 아니었으며,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져 왔다(西川長夫 2012). 세계적, 지역적 국제 관계의 종속적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에 걸맞은 기억이 선택되고 보편적 가치로 보강되면서 국민적 결속을 호소하는 운동이 독립운동가와 ‘번벌(藩閥)’, 군, 당 등 건국 신화를 독점한 권위주의적 정부에 의해 전개돼 왔다.

 

국민이 역사 속에서 구축되어 왔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생겨난 기억과 감정의 결합은 이웃나라의 국민 이미지를 자국과 반대되는 것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려 시도하게 된다. 예컨데, 일본에서 한국을 보면 발전의 반대로서의 ‘정체(停滞)’와 결부된 것으로, 한국에서 일본을 보면 인권과 자유를 아무렇지 않게 억압하는 제국주의적 국민성으로, 각각이 자국 역사에서 소중히 여기는 가치의 반대에 해당하는 가치와 결합하여 규정한다. 일본 국민이 이웃나라를 지배하고 그 사람들을 일본의 국민으로 만들려고 했던 식민지 책임을 인식하기 어려운 이유도, 한국 국민이 제국주의 논리와 분리해 민족이나 국민의 근대적 성격을 인식하기 어려워지는 이유도 이런 구조가 만들어낸 것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국제 사회에서 인권 규범의 확대와 침투라는 현상 속에서, 한국은 민주화 과정으로 새로운 국민 형성이 이루어진 반면 일본은 그러한 물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 종반부터 세계적으로 확대된 ‘제3의 물결’로서 민주화가 세계로 파급되는 현상은 남미와 남아프리카에 머물지 않고 아시아에 1980년대 후반부터 밀어닥쳤다. 그 민주화가 한국에서 진전될 때 일어난 현상이야말로 새로운 민중 개념에 의거한 역사 해석의 등장과 그러한 기억이 보편적 가치로서의 인권이나 민주주의, 자유와 결합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남미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제 발전이 제대로 진전되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은 선진국으로서의 성장을 이뤘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 기억은 발전과 인권이라는 두 가치 사이에 놓여 있다.

 

한편 일본에는 이러한 아시아 민주화의 물결이 미치지 않았고, 일본의 정권 교체는 역사 인식의 교체를 수반하는 형태로 진행되지 않았으며, 그 기간도 극히 짧았다. 일본 국민은 19세기적 문명과 근대화 · 발전이라는 가치에만 의지해 통합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민주주의와 결합된 부유함이라는 가치는 근대화나 문명의 아시아 선구라는 말과 일체가 되어, 업계 및 단체에 이권을 배포하는 것을 중시해 온 자민당 정권과 일체화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佐藤誠三郎·松崎哲久 1986). 상징적인 천황제도 재난이나 불의의 사건으로 자유와 인권을 빼앗긴 국민에게 다가서면서 기능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개조 서약문’이나 ‘성단(聖斷)’에 의한 2차대전 종결 사실은 국민에게 평화를 회복해 주었다는 기억과 접합되어 근대화 및 경제 발전의 기점과 회복의 계기로서 의미를 가진다. 인권이나 자유라는 개인의 가치에 입각한 기억은 메이지 시대의 자유민권운동이나 ‘미연의 점령 개혁’ 등 단편적인 현상에서 부각되는 것에 불과하다. 일본의 역사 기억에서 인권 가치에 친화적인 현상이 소외되는 역학은, 한국에서 제국주의의 억압에 의해 짓눌린 ‘근대’의 맹아라는 개념에 의해 발전이나 문명이라는 논리를 제국주의의 억압 및 민중의 자유와 저항이라는 인권 논리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또 이런 감정과 얽힌 충돌은 상업적인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자극적이고 시청률을 높이는 대상으로서 선호되며, 이로 인해 갈등은 점점 가속화된다. 미디어에서는 상대의 국내 정치 정세에 대한 평론적 언설의 요구는 높지만, 반대로 ‘역사 인식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접근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土屋礼子 2021).

 

결론: 공진의 결과로서 역사 문제의 출현과 그 악순환 구조

 

이와 같이 국내외 정치 구조 속에서 피해자의 마음을 구제하는 문제는 확실히 국제 사회 전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인권의 문제이나, 이와 함께 국민에게 공유되어야 할 ‘알기 쉬운’ 역사 중 어느 쪽이 국제 사회의 주류여야 하는지 분쟁을 야기하고 악순환을 가속화한다. 그것이 역사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민주 사회라도 한일 간에 역사 문제가 끊이지 않는 현 상황의 역사적 배경에는 한국의 ‘피해자’가 인권이나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의 동조와 함께 양극화됨으로써 한국 국민이 공유하는 기억을 매개로 연결되는 현상이 있어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것이 역사 문제의 배경에 국민 형성의 단층이 존재한다고 본론이 지적하는 이유다. 한국의 경우 저항의 기억과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가 결합되면서 국민이 구성된다는 사회적 구조가 존재하는 반면, 일본 측에서는 발전이나 안정이라는 가치가 일본 민주주의에 얽힌 기억과 결합됨으로써 강한 감정적인 반발이 서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강한 감정이 창출되는 역사를 경제와 사회의 제도 및 그 변화 과정과 일체가 된 기억이나 기억을 선택하게 하는 가치 간의 역동적인 관계로 파악함으로써 각자 안에 살아 작동하는 감정의 존재를 먼저 인식하고 대화를 통해 함께 변화시켜 나가는 길이야말로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살아 있는 감정과 그것을 지탱하는 가치와 기억을 의식해야 반대의 의미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국민 기억의 핵심에 ‘인권 피해자’나 ‘여성의 존엄’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민족적 가치가 중첩되면서 한국인 위안부가 자리매김한 반면, 일본측의 국민적 기억 속에 ‘식민지 책임’과 관련된 사건이나 인물이 누락된 상황도 지금까지의 논의의 연장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양극화되기 쉬운 보편적 가치를 모두 포용해 나가기 위한 길은, 우선 각자가 공유된 올바른 기억이 아닌 국내로 눈을 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가치가 양극화되는 상황 속에서 애당초 기억이 다르다는 것은 서로 역사로서 보고 싶은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을 감안하면서도, 과거의 역사와 관련된 ‘명(明)’과 ‘암(暗)’의 ‘전체’를 서로의 국민사의 틀 안에서 각각 깊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암’으로서의 과거의 불행한 전쟁 시대를 잊지 않는 형태로 기억하면서, ‘명’으로서의 일본의 국민적 자존심을 지탱하고 있는 근대나 발전을 단순히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고차원적으로 명암을 함께 인식할 수 있어야 한국 국민의 자존심의 기저에 있는 가치나 기억을 배려하여 공감하는 길도 열린다고 볼 수 있다. 즉 명암 ‘전체’를 의식할 수 있어야 각자의 자의식, 국민의식 위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연대의 기초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민으로서 국경선을 넘어 연결될 수도 있지만, 국민이자 민주주의의 담당자로서 경계선 안에서 살아 가야 하는 숙명도 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으로서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나 그것을 지탱하는 가치를 의식하면서도 국내에서 주류가 될 수 없었던 ‘어두운’ 기억에도 눈을 돌림으로써 왜 단층이 존재하는지를 이해해야 연대와 공감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역사 문제의 기원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깊어져야 감정을 일깨우기 위한 공통 정책을 논의하는 일도 가능해질 날이 올 것이다.■

 

참고문헌

 

川崎修・杉田敦 編. 2006. 『現代政治理論』. 東京: 有斐閣.

 

木村幹. 2010. “日韓両国における歴史観と近代、そして近代的法秩序.” 日韓文化交流基金 編. 『第2期日韓歴史共同研究報告書 教科書小グループ篇』.

 

木宮正史. 2021. 『日韓関係史』. 東京: 岩波書店.

 

西川長夫. 2012. 『国民国家論の射程―あるいは「国民」という怪物について』. 東京: 柏書房.

 

シャンタル・ムフ. 葛西弘隆 訳. 2006. 『民主主義の逆説』. 東京: 以文社.

 

宮嶋博史・李成市・尹海東・林志弦. 2004. 『植民地近代の視座―朝鮮と日本』. 東京: 岩波書店.

 

佐藤誠三郎・松崎哲久. 1986. 『自民党政権』. 東京: 中央公論社.

 

徐京植. 1989. 『ナショナリズムと「慰安婦」問題』. 東京: 青木書店.

 

アンソニー・スミス. 1999. 巣山靖司 外 訳. 『ネイションとエスニシティ―歴史社会学的考察―』. 名古屋: 名古屋大学出版会.

 

浅野豊美. 2015. “第1章 歴史と安全保障問題・連環の系譜―戦後五〇年村山談話と戦後七〇年安倍総理訪米.” 木宮正史 編. 『シリーズ日本の安全保障(全八巻)第六巻 朝鮮半島と東アジア』, 15-44. 東京: 岩波書店.

 

______. 2021. “日韓の国民形成の断層と和解学─価値と記憶の融合をめぐる内外政治の共振.” 浅野豊美 編. 『和解学叢書第一巻 和解学の試み』, 315-350. 東京: 明石書店.

 

大沼保昭. 2017. 『「慰安婦」問題とは何だったのか―メディア・NGO・政府の功罪』. 東京: 中公新書.

 

和田春樹. 2016. 『アジア女性基金と慰安婦問題―回想と検証』. 東京: 明石書店.

 

土屋礼子. 2021. “東アジアにおけるメディアと和解 ̶戦争と植民地支配の記憶をめぐって.” 浅野豊美 編. 『和解学叢書第一巻 和解学の試み』, 315-350. 東京: 明石書店.

 


 

[1]  浅野豊美 2021. 기존 연구에서 국민형성의 단층을 가치와 기억을 나누어 논하고자 시도하고 있으나, 본고는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2] 몇몇 예외로 기무라 간은 한일 양국의 근대사에 관한 역사관이 분기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 교체와 함께 일본에서 등장해 한국으로 확산된 ‘내재적 발전론’이 논의되고 있지만, 개념 및 학설의 변화와 세대교체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일본의 중요성’ 저하로 귀결되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본고는 사회 전체의 변화와도 관련된 철학이나 사상의 동향과 연결시키면서 해석학적인 논의를 심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는 의식하에 전개된다(木村幹 2010).

 

[3] 그 원인에는 국익과 국력으로 상징되는 현실주의적 국제관계 이론이 있다. 그런데 ‘주권국가’라는 단위를 ‘국민’이 대표의 선출을 통해서 통제한다고 하는 민주주의적 규범이나 그 반대편에 있는 권위주의 체제와 같은 국내 정치체제 관련 개념이, 국제관계 이론에서 대전제가 되고 있는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간주되어 그 사이를 연결하는 접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된다.

 

[4] 운동단체나 구상된 재단의 명칭으로는 ‘정의기억연대’, ‘역사‧기억‧화해재단’ 등을 들 수 있다.

 

[5] ‘화해학’이라고 통칭되는 학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의 방향성이나, 그 문제성, 논의의 전개 방법에 대해 독자 여러분으로부터 의견을 받고자 한다. 미숙하지만 필자가 전개한 이후의 논의에 대해서는 『和解学叢書第一巻 和解学の試みー記憶・感情・価値』(明石書店, 2021)를 참조하기 바란다.

 

[6]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조류 속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민족의 딸로 자리매김하고 억압을 받아온 여성 인권의 상징이자 국민의 기억에 호소하는 형태로 등장했다. 즉, 한국에서 위안부는 여성의 존엄이라는 보편적 인권에 호소하면서도 그 초기 슬로건에서 상징되듯 주변국의 침략에 오랫동안 시달린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딸로서 옛 가족주의적 민족사관 위에 자리 잡았다.

 

[7] 和田春樹 2016; 大沼保昭 2017. 일본 정부에 협력하려 했던 시민사회의 분열에 따른 심포지엄 기록으로는 다음이 있으며, 위안부 문제 이외의 재일교포 처우 등 지금까지 정부에 대한 태도 차이로 인해 시민적 연대가 상실되었음을 보여준다. 초당파적인 연계는 양국의 과격한 세력의 암묵적인 승인에 의해 간신히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다. 徐京植 1989.

 

[8] 국민이라는 집단은 교육을 통해 재생산된다. 숙의와 다수결 원칙에 입각한 민주주의는 동일한 집단 의식을 전제로 비로소 기능한다. 같은 집단에 속해 있고 그 일원이라는 도덕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있어야 다수파는 소수파를 최대한 배려하고, 소수파도 결국은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침묵하는 형태로 민주주의는 유효하게 기능한다.

 


 

저자: 아사노 토요미(浅野豊美)_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 2015년부터 와세다대학에서 일본정치사 및 국제관계사를 강의하고 있다. 1998년 도쿄대학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하버드대학 문리대학원(GSAS) 방문연구원, 2021년부터 2022년까지 하버드-옌칭연구소 방문학자를 지냈다. 1999년 대만 중앙연구원(Academia Sinica) 근대사연구센터, 2006-2007년 조지워싱턴대학교 Sigur Center in Elliott School, 2009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방문학자를 지냈다. 2015년 우드로윌슨센터 펠로우를 지냈다. 저서 『제국 일본의 식민지 법제』로 2009년 3월 요시다 시게루 상, 동년 6월 제25회 오히라 마사요시 기념상을 수상하였다. 2022년 문부과학대신표창 과학기술상(연구부문)을 수상하였다.

 


 

담당 및 편집: 박한수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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