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세계 거버넌스 체제 재구축 과정에서 신흥강대국들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다양한 국가들의 선호와 입장 차이를 조율하고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가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은 2010년 G20 서울회의의 성공적 개최 이후 신흥 중견국으로 주목 받고 있으며, 앞으로의 외교행보에 따라 국제무대에서 그 위상이 달라지게 될 전망이다.

 
동아시아연구원은 한국이 중견국 외교를 통해 대외 영향력을 제고하고, 미중간 세력균형 변화에 따라 증대되는 지역 불안정성의 문제를 해소하는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한국 외교의 미래 비전으로 중견국 외교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13년 4월 3일 데이비드 채터슨(David Chatterson) 주한 캐나다 대사를 초청하여, “캐나다의 중견국 외교 전략과 한국의 중견국 외교 방향에 대한 제언”이라는 주제로 제1회 주한외국대사 초청 라운드테이블을 개최하였다. 채터슨 대사는 캐나다의 다자외교 경험을 토대로 향후 한국외교의 방향에 대해 제언하였고 이어서 토론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주요 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캐나다의 경험

 

캐나다 다자외교의 역사 및 전개

 

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 시대”(Great Power Era)의 종언은 캐나다가 국제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 동맹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구 사회주의 연대의 부상 속에서 캐나다는 외교적 독립성 및 기동성(maneuverability) 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국제제도 구축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추구하였다.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life, liberty, and pursuit of happiness)가 미국의 가치라면 캐나다의 가치는 “평화, 질서, 그리고 좋은 통치”(peace, order, and good government)라고 할 수 있다. 전후 세계질서 형성과정에서 중견국으로 부상한 캐나다가 국제제도 구축에 외교력을 집중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캐나다는 탁월한 전문성을 갖춘 대표들을 국제제도 구축 논의에 파견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여러 국제기구 규범의 초안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유엔(United Nations: UN),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GATT),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 서방 선진 7개국 정상회담(Group of Seven: G7),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등 대부분의 주요 국제기구들의 제도형성 과정에서 캐나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동시에 캐나다는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 관련국에 대한 동기유발, 윈윈(win-win)의 대안제시 및 다양한 연대구축을 통해 “건설적 외교”(constructive diplomacy) 를 추진해 왔다. 그러나 캐나다의 역할을 “정직한 중개자”(honest broker)나 “합의 도출자”(consensus builder)로 규정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캐나다는 언제나 국익을 기초로 주요 동맹국이나 “뜻을 같이 하는”(like-minded) 국가들과 협력하는데 집중해왔다. 1956년 수에즈 위기 당시 유엔 긴급군(United Nations Emergency Forces) 창설을 제안하고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였던 것을 포함하여, 1차 걸프전쟁(1990년), 코소보 분쟁(1998년), 아프가니스탄 전쟁(2001년), 리비아 전쟁(2011년)에 참전하였던 것 등에서 보듯 캐나다는 지속적으로 서구 동맹국들과의 협력을 강조해 왔다. 따라서 캐나다의 외교적 행보는 ‘중견국 외교’라는 용어보다 ‘건설적 외교’로 설명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함의

 

1. 모든 사안을 다자외교로 풀어갈 필요는 없다. 코소보 사태나 리비아 사태의 경우 캐나다는 유엔안보리(UN Security Council) 회부가 아닌 나토(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군의 개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모든 사안의 해결을 위해 언제나 많은 국가들의 포괄적 지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2. 중견국일수록 국제제도의 규칙제정 과정에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초강대국 미국과 200년 동안 이웃으로 지내온 캐나다는 규칙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언제나 권력이 모든 상황을 결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강대국보다 힘이 약한 소국이나 중견국은 규칙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어 강대국의 힘을 견제하는 것이 이롭다. WTO 창설 이전과 이후 무역분쟁이 해결되는 과정을 비교해 보면 중견국이 왜 국제제도 규칙제정 과정에 외교력을 집중시켜야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 국익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토대로 국제연대의 형태를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중견국은 단독으로 어젠다를 설정하거나 자국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연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탈냉전기 국제사회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이슈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얽히고설켜 있는 상태이므로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국의 이익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며, 사안에 따라 국익에 부합하는 연대를 구축할 수 있도록 되도록 모든 국가들과의 갈등 및 분쟁을 적절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세계질서의 특징

 

21세기 세계질서의 가장 큰 특징은 각국의 이익이 국경 내의 사안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캐나다가 중견국으로 부상했던 1950년대와 2001년 9•11 이후의 세상은 모든 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과거에는 캐나다나 한국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무역•금융의 경제 거버넌스, 테러, 핵확산, 식량, 에너지, 환경 등 초국가적 이슈들이 이제 국익에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정보혁명은 비국가 행위자들의 역량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정보 자체가 권력의 원천이었으나 이제는 고급정보를 어디서나 쉽게 습득할 수 있다. 오늘날 외교는 더 이상 외교관들 사이의 비즈니스라고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중견국의 다자외교가 향후 다양한 국제 비정부기구(Non-Governmental Organization: NGO)와의 협력을 강화시켜 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의 변화 속도에 비해 국제 및 지역 기구들의 조정 및 변환은 더디게 이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국제제도 내에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초국가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상당한 이해관계가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국가적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우 소수의 국가들만이 이와 같은 세계질서 변환과 새롭게 등장하는 도전들을 직면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캐나다와 한국이 바로 그러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한국외교에 대한 제언

 

1. 성공적인 중견국 다자외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집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이슈, 기회, 그리고 도전과제를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일반적인 이슈 영역에서 포괄적인 권한을 가지는 것은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중견국은 자국이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려는 이슈영역을 구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중견국(middle power)라는 용어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는 마치 중견국이 되면 자연히 힘(power)을 가지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중견국에게 영향력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견국 외교”보다는 “건설적 외교”라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2. 중견국의 영향력은 평판(reputation)에 의해 좌우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일관된 가치를 추구하여 국제사회 내 한국의 신뢰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현실적으로 자국의 핵심이익이 걸려있는 사안들을 국제사회 포럼의 안건으로 상정하기 위해서는 지식력•기술력•경제력 등 분명한 역량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중견국의 경우 평판이 영향력 행사를 위한 중요 자원이 될 수 있는데, 평판 구축에 있어서는 위치설정(positioning)이 가장 중요하다. 즉, ‘가치’의 문제에서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의 인권문제를 지적하면서 이란의 인권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평판 구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평판은 얼마나 많은 국가들이 특정 사안에 대해 의견을 구해오는지, 얼마나 많은 실무그룹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국제회의에서 의장을 맡고 있는지 등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지식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의 경제성장 경험을 지역 내 여러 개발도상국에게 전파하는 경우에도, 막연히 그것이 한국의 평판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보다 전략적인 판단 하에 명확한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3. 어떤 국가와 어떤 이슈에서 협력할 수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다양한 국제 제도 내에서 특정 사안의 해결책을 두고 여러 국가군들이 경합을 벌일 때, 한국이 어떤 국가와 협력을 해야 하는지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특정 나라와 모든 사안에서 협력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 협력할 수 있는 다양한 연대의 틀을 보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위자’ 보다는 ‘이슈’ 중심의 사고가 필요하다.

 

4. 중견국 다자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가 수준의 전략적인 판단에 기초한 리더십 발휘를 통해 국내정치 문제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중견국 다자외교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영역이 많다. 그런데 “모든 정치는 지역적이다”(All politics is local)는 말이 있듯이 정치 담론은 국가전략적 차원이 아닌 보다 협소한 이익의 관점에서 논의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국내정치 및 국민 여론 수준에서 중견국 다자외교 전략에 대한 포괄적 지지 및 이해를 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다.

 

5. 중견국 다자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개방성을 높여 전반적인 국가 역량을 향상시켜야 한다. 캐나다와 같이 한국도 국제제도 규칙 제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재 양성은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해당 국가의 전반적인 역량 강화와 맞물려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개방성을 높여 국제사회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게 함으로써 국제수준에 걸맞은 제도 및 역량을 구비해 나가야 한다.

 

6. 미중관계의 향방은 한국외교의 가장 큰 도전이나,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한국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미중 사이 다양한 의사소통의 채널을 구축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양국이 서로 자국의 전략적 투명성을 제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발표자

데이비드 채터슨 대사(마니토바 대학, 무역학사)는 1980년 국세청의 반덤핑 대응사무처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일본 도쿄에서 1984년 일등서기관으로, 1994년 참사관으로 두 번의 재직 경험이 있다. 1994년 일본 근무 전에는 캐나다 국제통상 재판소의 연구실장으로 재직하였다. 캐나다 외무성에는 1998년 일등서기관으로 입부하였고, 그 이후 다자통상정책과의 과장직을 수행하였다. 2005년부터 2009년 사이에는 프랑스 파리 주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캐나다 부대표를 역임하였고, 2009년부터 한국 부임 이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캐나다 대사로 근무하였다. 2011년부터 주한 캐나다 대사직(북한대사 겸임)을 맡고 있다.

 

사회자
이숙종, 동아시아연구원 원장

 

토론자
강찬호, 중앙선데이 정치에디터
서정건, 경희대학교 교수
이백순, 외교부 북미국장
전재성, 서울대학교 교수
황진하, 새누리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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