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아기 고양이를 들였다. 2개월 남짓된 이 작은 생명체는 꺅 소리 나게 귀여웠고, 아주 많이 어려웠다. 직업병(?) 탓인지 덕인지, 집사 행동 수칙이란 수칙은 싸그리 섭렵하고 고양이 행동 대백과도 여러 권 읽었지만, 저렇게 꼬리를 치켜드는 건 날 두려워해서인지 반가워해서인지, 이렇게 냐옹거리는 건 먹겠다는 신호인지 싸겠다는 신호인지, 아기 고양이의 의중을 읽는 데에 그간 섭렵한 지식은 대체로 무용했다. 그보다는, 바닥에 엎드려 아기 고양이와 눈을 맞추고 한참을 그 시선을 쫓으며 두리번대거나 아기 고양이의 리듬을 따라 온전히 하루를 뒹굴어보면서 비로소 이 작은 생명체와 주파수를 조금씩 맞추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시선과 지식으로 고양이를 관찰하고 분석하기를 멈추었을 때, 그리고 고양이의 시선과 리듬으로 살아내려 노력했을 때, 그제야 각자의 지평이 서로를 파르르 건드리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누군가의 지평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나의 지평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는 걸, 그리고 그건 아주 많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나는 사랑방에서 배웠다.

 

한 학기 동안 우리는 매주 상당량의 리딩을 하고 그에 대해 예습일기를 써가야 했는데, 이 예습일기에 대한 선생님의 주문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학생으로 10년 이상 짬을 채운 나는 여느 과제를 하듯 리딩들을 꼼꼼히 읽고 저자의 주장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분석'한 페이퍼를 들고 갔는데,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주간의 '지적 연애기'를 써올 것을 당부하셨다. 구체적 지침은 이랬다. 예습일기 문장들의 주어는 '나'로 할 것, 그러나 '내 생각'을 쓰려하지 말 것. 나를 주어로 하되 내 생각은 적지 말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또다른 지침은 이랬다. 리딩의 저자와 한 주간 치열하게 연애하고, 그 과정을 상세히 적어올 것. 지적 '연애'라니, 그리고 연애의 결과도 아니고 과정을 쓰라니, 낯간지러움은 차치하더라도 대체 한 주 동안 리딩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처음 몇주간의 난감함을 뒤로 하고, 선생님의 흥미로운 연애기를 듣고, 해석학적 방법론을 배우고, 무엇보다 동학들과 함께 헤매어 가며 우리는 점차 텍스트의 저자들과 지적으로 연애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연애법의 핵심은 상대의 관점에서 문제로 여겼던 것이 무엇이었을지, 그리고 그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었을지 끊임없이 상상하는 데에 있었다. 이렇듯 상대의 지평에 서기 위해 내가 먼저 연습해야 했던 것은 머릿 속을 떠다니는 여러 생각들 중에 무엇이 '나'의 목소리인지 분간해내는 일이었다. 문장의 주어를 '나'로 삼아 서술하다보니 상대의 목소리라고 매끈하게 포장해두었던 어떤 생각이 사실은 상대에게 투사했던 '나'의 목소리였음을 식별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 생각'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다보니 그렇게 식별한 나의 목소리를 지워내고 상대의 시선으로 사유하고자 자꾸 도전하게 되었다.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하고자 노력하고, 그 노력의 결과 속에서 다시금 나의 목소리를 식별해내고, 다시 그걸 지워내고 상대의 지평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해나가는 여정,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감정의 파고를 겪어내는 것. 아마도 이것이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경험케 해주려 하신 '지적 연애'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 여정의 끝에 우리는 저자들의 지평에 다가가는 데에 성공했던가? 이제 우리는 기라성 같은 각 시대의 국제정치이론가들이 분투했던 고민의 지평을 음미해보았다 말할 수 있게 되었나? 아기 고양이의 지평에 내가 충분히 다가갔는지의 여부는 이 작은 생물체의 반응을 보며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만, 이미 죽은 텍스트의 저자들에게서 나의 지적 연애가 성공적이었는지 가늠할 반응을 이끌어낼 도리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 여정을 나서기 전과는 다른 곳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 학기 여정의 끝자락에 선생님과 동학들과 함께 규슈를 누비며, 나는 내가 출발했던 지평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지평에 서 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우리가 새로이 서게 된 이 지평은 어쩌면 저자들의 지평과 우리의 지평을 섞어낸 지점일지 모른다. 여기에 선 우리는 이제, 저자들의 고민을 온전히 헤아리지는 못할지언정, 그것을 과거의 유물로 치부하거나 섣불리 현재의 문제에 끌어대지 않는다. 텍스트에 담긴 주장을 분석과 비판과 교훈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그것과 함께 숨쉬며 상호작용하려 애쓴다. 그렇게 과거와 공존하려 애쓰는 한 우리는 현재의 지평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미래로 움직여 갈 것이다.

 

사랑방 여정을 시작하며 나는 자기소개서에 이렇게 적었었다. "세계정치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언어를 비판적으로 학습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향후 제가 (조선 후기) 사료에 드러나는 담론을 현대의 학술 언어로 유의미하게 설명하는 지적 과업에 도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조선 후기 정치사상사를 공부하던 나는 과거 조선인들이 세상에 대해 펼치던 논의를 현재에 적실한 방식으로 재서술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근현대의 세계정치를 논해 온 여러 이론가들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익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방 여정의 끝에 선 지금, 나는 조선인들의 논의를 나의 지평에서 재서술하기에 앞서 그들의 지평에서 재서술하는 과업에 도전해야 함을 안다. 아니, 그보다도 두 작업이 그렇게 순차적으로 나뉘기보다 그들과의 '지적 연애'를 통해 만들어갈 해석학적 사이클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걸 안다.

 

과거를 우리의 언어가 아닌 과거인들의 언어로 낯설게 재구성하는 작업은 역사를 쓰려는 이에게도, 역사를 바탕으로 미래를 쓰려는 이에게도 꼭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현재의 지식체계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운 우리의 인식적 조건을 받아들이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과거의 지식체계로 접속하기를 시도하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과거인들의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없다는 인식적 한계를 인식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점에 서기를 끊임없이 시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의 기존 관점으로부터 거리를 둔 어떤 지점에 서고자 하는 시도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의 지평도 과거인들의 지평도 아닌, 두 지평이 얽히는 지점(fusion of horizons)에 나아가고자 하는 시도다. 그런 시도를 하는 법을 우리는 사랑방에서 연습하고 또 연습해왔다. 어설플지언정 이러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기존의 지식체계가 우리에게 허락한 지평과는 거리를 둔 어떤 새로운 지평에 서서 과거와 공존하게 될 것이고, 그 거리는 어쩌면 우리에게 미래를 빚어갈 공간을 허락할 것이다.

 

한 학기 내내 고투하며 함께 멀리 떠나온 동학들에게, 우리의 모든 여정을 이끌어주고 보듬어주신 선생님께, 그리고 다방면의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동아시아연구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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