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일본연구패널 보고서 No.7

 

저자

최희식_국민대 국제학부 조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박았다. 최근 저술로는 《歴史としての日韓国交正常化Ⅱ: 脱植民地化編(공저)》, 《박정희 시대 한일관계의 재조명(공저)》, “일본에서의 열린 지역주의(open regionalism) 개념 형성 과정 연구,” “일본 분점국회의 교착상태에서 본 양원제의 문제점과 해결방안,” “현대 일본의 아시아 외교전략: 내재적 접근에서 외재적 접근으로,” “전후 한일관계의 구도와 민주당 정부하의 한일관계.” 등이 있다.

 

 


 

I. 서론

 

영국의 웨스터민스터 모델처럼 ‘제도 효과’로써 강한 리더십이 기대되었던 의원내각제는 일본에서는 반대의 현상을 노출했다. 파벌정치로 인해 자민당이 분권화되었고 수상 관저 기능이 정비되지 못하였으며, 관료정치와 족의원 및 자민당 법률 사전심사제가 수상의 리더십을 제약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시 내각의 미일안보 개정, 사토 내각의 오키나와 반환, 다나카 내각의 중일 국교정상화와 같은 정치화된 외교 이슈에 있어서는 강한 리더십이 발휘되었다. 하지만 전후 일본 수상의 정치 리더십은 ‘약한’리더십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이토 미쓰토시 2007; 다테바야시 마사히코 2007; 이원덕 2007).

 

반면,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는 ‘대통령형 수상’이라 불리울 정도로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국영기업의 민영화, 방위비 GNP 1%제한 규정 의 철폐, 무기수출 3원칙 의 미국에 대한 예외적 적용 등, 국내정치 및 외교 양 측면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었던 내각은 요시다 내각 이후 처음이었다. 수상의 리더십을 제약하는 제도적 요소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소수 파벌 출신 나카소네는 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본 논문의 문제의식이다.

 

선행연구는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나카소네의 개인적 자질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퍼포먼스에 능한 그의 언설 정치, 소수파벌 출신으로써 파벌 정치의 역정에서 일궈낸 뛰어난 권력 감각을 강력한 리더십의 원인으로 파악한다. 다음으로 심의회 정치(혹은 자문 정치, 브레인 정치), 유력 파벌과의 연대 및 당내 유력자의 포섭 등 파벌정치의 활용, 족의원의 활용, ‘영향력 연합’의 구축 등 나카소네 리더십의 행태적 측면을 주요한 원인으로 거론한다. 마지막으로 구조적 요인과 그의 정치 이념이 정합되었음을 강조한다. 그의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국제적 흐름과 더불어 행•재정 개혁이라는 국내적 흐름과 일치함으로써 강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 논문은 그의 리더십이 내재화된 변혁적 리더십(embedded 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어서, 기존 시스템을 변혁하려는 개혁성을 보이면서도 기존 시스템에 내재화되었기에 기존 체제와의 전면적인 마찰을 회피하고 오히려 기존 체제의 특정 측면을 이용함으로써 정책 실행력을 담보할 수 있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정치 리더십은 그 정치적 목표에 따라 개혁 리더십(reform leadership), 혁명 리더십(revolutionary leadership)으로 분류하는 게 일반적이다. 번즈(James MacGregor Burns)는 정치 리더십에 나타나는 지도자(leader)와 추종자(follower) 사이의 관계를 유형화하여, 거래적 리더십(transactional leadership)과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으로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개혁 리더십과 혁명 리더십은 지도자의 카리스마, 지적 자극 등으로 추종자를 일체화시켜 정치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으로 변혁적 리더십에 해당한다(Burns 1979, 169-240).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의 관계보다는 그 정치적 목표 및 이념에 대한 분석에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따라서 변혁적 리더십은 개혁 리더십과 혁명 리더십을 포함하여 체제 변혁을 이루고자 하는 정치 리더십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변혁적 리더십은 체제 자체를 개혁하려 하기에 체제 밖에서 공명하는 속성이 있다. 그에 따라 기존 체제와의 전면적 대결이 나타나고 다방면에서의 대립구조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장달중 2007). 하지만 나카소네의 리더십은 후술하듯이, 그가 변혁하려 했던 기존 체제에 뿌리박고, 이를 통해 변혁의 씨앗을 뿌리려는 속성이 강했다. 그가 ‘전후체제’를 부정하면서도 그 전후체제에 의해 배양된 ‘국제 자유주의’의 가치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며 이를 활용하고자 했던 것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리더십은 변혁적이면서도 동시에 체제 그 자체를 활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재화된 변혁적 리더십은 나지타(Tetsuo Najita)가 일본의 정치리더십을 설명하며 사용했던 ‘유신주의’(restorationism)와는 다르다. 유신주의는 ‘관료주의’(bureaucratism)에 대한 반발로 문화적 이상주의 혹은 복고주의에 바탕을 두고 급진적으로 기존 체제를 변혁하려 했던 이상론에 가깝다(나지타 T. 1992, 19-35). 나카소네의 정치 이념 속에도 전통으로의 복귀 등 이상주의와 복고주의 요소가 강하게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 체제에 대한 이중적 평가로 인해 기존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해체하려는 급진성이 없으며 오히려 기존 체제의 긍정적인 측면을 활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동시에 내재화된 변혁적 리더십은 ‘리얼리즘적 이상론’혹은 ‘기회주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리얼리즘적 이상론은 이상주의적 정책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 변혁의 우선순위와 강도를 조절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에 따라 이상론을 절대화하는 세력과 그 이상론을 반대하는 세력 모두에게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기회주의는 견고한 정책이념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대립적 정책에 대해 양면적 대응을 하는 것이기에 개혁성을 결여하고 있다. 반면 내재화된 변혁적 리더십은 체계적인 개혁 아젠다로 개혁성을 전면화시키면서도, 변혁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이중적 평가가 전제되어 있어 개혁 찬성파와 반대파 모두를 아우를 수 있거나 그들의 도전을 약화시킬 수 있는 유연성이 확보된다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내재화된 변혁적 리더십’이 나카소네의 정치적 리더십의 주요한 특징임을 밝히고, 이러한 속성이 강한 실행력을 발휘케 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80년대의 국내외 구조적 요인 및 제도적 요소가 나카소네의 정치 리더십을 강화시켰던 주요한 요인 중 하나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본 논문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구조적 요인조차도 ‘내재화된 변혁적 리더십’때문에 강한 리더십의 토대로 전환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구조와 제도라는 상황적 변수를 권력 자원으로 변환시키는 것이 리더십이기 때문이다(Samuels 2003, 6).

 

II. 전후체제와 나카소네: 정치이념 측면에서의 나카소네 리더십

 

일본의 ‘전후체제’는 평화헌법과 미일안보조약의 두 기둥 위에 구축되었다. 평화헌법은 이른바 ‘얄타체제’의 산물로써, 초기 점령정책이었던 비군사화 및 민주화 정책을 보증하는 제도였다. 반면, 극동 안보에 관여하는 대규모 주일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오키나와 시정권 확보를 전제로 한 ‘비대칭적’미일안보조약은 ‘냉전체제’의 산물로써,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보좌하는 일본의 ‘기지국가’적 속성을 담보하는 기제였다(남기정 2001; Pyle 2007, 372-381).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55년 체제’로 불리는 보혁대립 구조는 전후체제를 일본 국내정치적으로 내재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Dower 1993, 4-5). 실제, 혁신세력은 평화헌법으로 대변되는 미군정의 비군사화 및 민주화 정책 속에 성장하였으며, 역으로 이러한 평화헌법의 수호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반면 보수세력은 미일안보조약으로 대변되는 ‘역코스’속에서 재기에 성공했고, 역으로 이러한 반공 혹은 자유주의를 정책의 핵심가치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55년 체제는 전후체제를 지탱하는 국내정치적 구조였던 것이다.

 

동시에 전후체제의 정책적 반영물이었던 ‘요시다 노선’은 미국에의 안보의존, 경무장, 중상주의를 핵심 요소로 정착되어갔다. 요시다 노선은 보혁대립 구도 속에 혁신그룹의 정책적 지향을 흡수하면서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불가피한 선택’의 측면이 강했다. 즉 요시다 노선은 평화헌법과 미일안보조약의 모순성을 양립시키려는 정책적 선택이었다(添谷芳秀 2005, 32-35).

 

이러한 전후체제는 자민당 우파 세력의 공격 지점이 되었다. 그들에게 전후체제는 강요된 민주주의, 주체성의 상실로 비춰졌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헌법개정,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에 집중되며 전후체제의 붕괴에 정조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하토야마 그룹과 기시 그룹의 노력은 전후체제의 견고한 벽에 부딪혀 요시다 노선으로 수렴하는 현상을 보였다. 전후체제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가 공고하게 55년 체제에 의해 내재화되어 있어, 이를 개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五百旗頭真 2010, 290-291).

 

나카소네 또한 헌법개정, 자주국방을 주장하며 전후체제의 해체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나카소네의 정치적 지향성은 평화헌법과 미일 안보조약에 대한 이중적 평가에 기반하고 있었기에 높은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나카소네는 40-50년대에 평화헌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주체적 헌법의 제정을 주장하였으나, 60년대에 접어들면서 평화주의와 민주주의 등 평화헌법의 기본적 가치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며 이를 계승할 것을 명확히 하였다. 그가 문제시 삼았던 것은 국민의 총체적 의사인 헌법이 미국의 ‘강요’로 제정되어 일본인의 주체성이 상실되었다는 점이다. 동시에 헌법에 의해 부정된 군대 보유와 개전권(開戰權)은 안보를 미국에게 의존케 만들어 일본의 주체성을 훼손한다는 점이었다(何力群 2005, 133-134). 따라서 헌법개정에 대한 국민적 반대가 높았을 경우, 헌법개정은 장기적 목표로 퇴색되어 갔고 평화헌법의 가치를 전면화하면서 혁신세력의 비판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반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될 때는 구체적 정책목표로써 기능하게 된다.

 

나카소네의 자주국방론 또한 50-60년대에는 주일 미군의 대폭적 축소와 미영동맹 수준의 대등한 동맹 체결을 주 내용으로 하면서 독자적 세력화까지도 연상되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방위청장의 경험을 통해 주일 미군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미일 안보분담론으로 전환되어 갔다(中島琢磨 2002; 中島琢磨 2005). 이는 미일 안보조약에 대한 이중적 평가 때문이었다. 그는 미일 동맹이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치 동맹’으로 일본에게 매우 긴요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미국에 일본의 안보를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일본의 자주성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자주국방론은 일본의 역할분담을 강조하는 적극적인 미일 협조노선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미일 동맹의 상대화’ 전략 혹은 일본의 ‘독자적 세력화’전략으로도 전환될 수 있는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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