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일본연구패널 보고서 No.6

 

저자

이기태_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BK21사업팀 박사후과정연구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학교(慶應義塾大学)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 연구로는 “ニクソン政権の在韓米軍削減をめぐる韓米交渉: 朴正煕政権の政策転換を中心に,” “カーター政権の在韓米軍撤退政策と日韓安全保障協力: 日韓議員安全保障協議会の設立を中心に,” “데탕트 말기 한일안보협력의 모색: 한일의원안전보장협의회의 설립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I. 서론

 

최근 일본 정계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인물은 단연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라고 할 수 있다. 오자와는 긴 정치인생 속에서 비록 총리가 되지는 못 했지만, 일본 정계에 커다란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또한 그의 정치적 이력, 즉 자민당 최대파벌(다나카-다케시타)의 실권자 및 여당의 간사장을 역임하였지만, 1990년대 초 자민당 탈당 이후 새로운 정당의 창당 및 연립정권의 형성,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야당 대표 및 막후 실력자로서 정권 교체의 실현 등 최근 20여 년간 일본 정치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그가 그 중심에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일본 정치와 외교의 중요한 순간에 오자와가 어떠한 정치적 및 외교적 활동과 성과를 이루어냈는가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외적으로는 1991년에 걸프전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 일본이 병력 대신 130억 달러의 전쟁비용을 부담하고도 ‘수표외교’(checkbook diplomacy)라는 해외의 비난에 직면했을 때 오자와는 ‘보통국가론’을 제시하면서 그 구체적 실행 안으로써 PKO법안을 형성, 법제화시켰다(Samuels 2007, 67). 국내적으로는 1993년 일본 정치의 개혁이라는 기치 하에 여당 최대파벌의 실력자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자민당 정권 붕괴의 계기를 제공하였고, 소선거구제로 대표되는 선거법의 개정을 주도하였다(信田智人 1999). 하지만 자민당 붕괴로 성립된 연립정권에서는 소비세 인상과 같은 정책에 있어서 일관되지 못한 자세 속에 연립정권 내 정당들간의 분열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거대야당 민주당의 지도자로서 자민당 정권의 장기집권체제를 종식시키며 2009년에 민주당 정권으로의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이후 격변하는 일본 정치의 풍랑 속에서 오자와가 일본 정치에 남긴 성공적 유산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오자와의 정치적 성과의 한계는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이 남는다. 이 글에서는 1990년대를 중심으로 오자와의 정치활동과 관련된 그의 성과 및 한계를 오자와 개인의 ‘정치리더십’의 관점에서 평가해보고자 한다.

 

II. 일본의 정치리더십과 오자와 리더십

 

1. 일본의 정치리더십

 

흔히 일본정치의 리더십 부재 문제를 논할 때 크게 2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첫째로, 정치제도적 요인으로써 의원내각제라는 일본정치제도 속에서 정책결정자가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구조적인 문제와 과거 자민당 내 파벌정치의 형성을 통해 파벌영수간의 경쟁을 통한 통합된 리더십의 형성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정치문화적 요인으로써 일본 특유의 ‘화’(和)를 중시하는 정치문화 속에서 하나의 정책결정에 있어 시간을 두고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가운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일본의 정치적 리더십 부재의 2가지 요인 속에서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과 사회적 안정을 위해서는 ‘화합형’정치적 리더십이 가장 이상적인 정치적 리더십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전후 일본의 국내적, 국제적 변혁기에 있어서 ‘화합형’정치적 리더십이 제대로 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오히려 국내적, 국제적 변혁기에 ‘선도적’인 입장에서 국내외적 혼란을 극복하고, 명확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출현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따라서 국내외적 변혁기의 일본의 정치적 리더십을 파악하는 데 있어 기존의 일본 정치문화, 제도적 요인에서 벗어나서 ‘개인’의 역할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국내적, 국제적 변혁기에 있어 필요한 정치적 리더십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단순히 일본의 정치적 리더십 유형을 2가지로 나누어 보면 ‘화합형’과 ‘선도형’으로 나눌 수 있다(이면우 2004, 214-215). ‘화합형’리더십은 앞서 설명한 전통적인 일본의 이상적인 리더십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반면, ‘선도형’리더십은 ‘상상력’과 ‘동원가능한 자원’을 묶어 구조가 주는 기회를 포착,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리더십’을 지도자가 선도적으로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내외적 변혁기 혹은 위기적 상황에서는 선도적 리더십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다.

 

그러면 개인으로서 오자와의 정치적 리더십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제럴드 커티스(Gerald L. Curtis)에 따르면 오자와는 일본의 진로를 바꾸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자와에게 정치과정을 바꾸는 것은 정책변경에 관련되는 범위에 한해 의미가 있는 것이었고, 정치를 바꾸는 것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즉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고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하는 것보다는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드는 것이 오자와의 목적이었다. 커티스는 오자와가 자칭 혁명가여서 혁명가가 늘 그렇듯이 수단보다 목적에 중심이 놓여 있었다고 말한다(커티스 2003, 116).

 

이와 같이 오자와는 컨센서스 과정을 중요시하는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본 정치과정의 폐해를 지적하면서(오자와 이치로 2009, 61-64) ‘변환적 지도자’(transformational leader)로서의 선도형 리더십의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오자와는 혁명가적 숙명에 따라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서 자신의 ‘이상주의’적(나지타 T. 1992) 목적의 실현을 추구했다. 하지만 언제나 수단보다 목적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오자와에게 있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은 목적의 하부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는 오자와가 리더십의 3가지 능력, 즉 기회구조의 파악능력, 상상력 및 혁신능력, 필요한 자원의 동원능력을 국내적, 국제적 변혁기 속에 어떻게 선도적으로 발휘하였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국제적 변혁기로써 탈냉전 이후 오자와에 의한 보통국가론의 주장 및 실행과정(PKO법안 성립)을 통해 일본의 외교 및 안보정책영역에서 어떠한 리더십을 발휘했는지를 파악한다. 또한 국내적 변혁기로서 1990년대 비자민 연립정권의 성립 전후의 정계개편 과정 속에서 오자와가 어떠한 정치리더십을 발휘했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는 오자와 리더십의 한계로서 ‘전제적’리더십을 제시하려고 한다. 즉 오자와는 ‘목적의 하부영역에 머무른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설득하기 위한 여론(국민, 동료 정치지도자)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하는 수단의 부재 속에서 ‘전제적’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리더십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2. 오자와 리더십의 형성과 특징

 

오자와의 정치리더십을 파악하는 데 있어 그의 성장과정과 경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오자와는 1942년 5월 24일, 변호사이자 국회의원인 오자와 사에키(小沢佐重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사에키는 고학으로 변호사가 됐고, 동경시의원, 동경부의원을 거쳐 전후 중의원이 된 정치가였다. 사에키는 중의원이 된 후 요시다 내각과 이케다 내각에 입각하여, 운수상, 우정상, 건설상 등을 맡았지만, 정책보다는 국회대책과 선거대책의 베테랑으로서 유명했다. 특히 일본의 국론을 양분한 1960년의 미일안보조약 개정 때에는 중의원의 안보특별위원장으로서 전격 통과의 주역이기도 했다. 오자와는 ‘60년 안보’당시 아직 고교생이었지만, 좌익 데모대가 동경의 자택까지 밀어닥쳤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정치가로서의 부친의 일을 오자와는 학생시절부터 줄곧 관찰하게 된다. 정치생활 중에 오자와가 국회대책과 선거분야에서 활약한 것은 부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월간 조선> 1991/12, 229).

 

오자와는 유년시절을 부친의 고향이자 선거구였던 이와테(岩手)현 미즈사와(水澤)시에서 지냈다. 그리고 중학교 때 도쿄로 상경해서 게이오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게이오대 졸업 후에는 변호사를 목표로 니혼(日本)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오자와가 니혼대 대학원에서 사법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1968년, 사에키가 갑자기 사망한다. 오자와는 사법시험 1차 시험을 통과했었지만 변호사의 길을 단념하고, 부친의 후계자로서 정계 진출을 결심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69년의 총선거에서 이와테2구에 자민당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첫 당선을 이룬다. 그의 나이 27세였다(<월간 조선> 1991/12, 230).

 

사에키는 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朗)파벌의 간부였지만, 오자와는 입후보에 즈음해서 당시 간사장으로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에게 접근한다. 이 선택은 오자와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능력이 있어도 작은 파벌에 속한 까닭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정치가들이 많은 가운데 오자와는 다나카로부터 정치의 ‘ABC’를 배워 자신의 능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오자와는 1985년 나카소네(中曽根康弘) 각에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처음 각료가 되었다. 또한 다케시타(竹下登) 내각에서는 본래 입각 전의 정치가가 맡는 관방 부장관으로서 정권을 지탱했고, 가이후(海部俊樹) 내각에서는 대망의 간사장에 취임하여 당무•정무 양면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오자와가 간사장에 취임했을 때는 불과 47세였는데 정치적 스승인 다나카가 간사장이 된 나이와 같았다. 54세에 총리 자리에 오른 다나카처럼 오자와 역시 다나카의 정치수법을 배운 것을 토대로 언젠가는 총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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