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일본연구패널 보고서 No.5

 

저자

한의석_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강의전담교수.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및 올바니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7월-2008년 7월 도쿄대학교 객원연구원을 거쳐, 2010년 남가주 대학교에서 일본의 지역 간 격차를 주제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연구논문으로 “고이즈미의 등장과 자민당 정책변화: 도시유권자와 선거정치.”(<한국정치학회보> 2011) 등이 있다.

 

 


 

I. 서론

 

자민당의 전통적 정치방식과 정책은 2001년 고이즈미의 집권 이후 크게 변화하였다.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고이즈미는 구조개혁과 자민당의 구태정치 타파를 통해 침체하는 일본의 변화와 성장을 이끌겠다고 약속하였고, 총리 임기 중에는 재정투융자 개혁, 삼위일체개혁, 우정민영화 등 전통적인 자민당의 이익유도(利益誘導)정치와는 괴리되는 신자유주의적 성향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이즈미는 자민당 내 정치인들은 물론 관료집단과 다양한 이익집단으로부터의 강한 저항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고이즈미의 개혁정책들은 자민당의 전통적지지 기반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민당 내 의원들의 반발로 이어져 자신의 총리직까지 위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는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행 할 수 있었고, 자민당은 고이즈미의 재임기간 동안 중의원 및 참의원 선거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우정민영화를 둘러싼 자민당 내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2005년 9월 중의원 선거에서는 총 480석 중 296석을 획득하여 113석에 그친 민주당에 압승을 거둠으로써 정치적 승부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고이즈미의 개혁정책들이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표면적인 변화에 그쳤다는 일부 비판적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고이즈미와 고이즈미의 개혁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90년대 말 지지율 저하로 정치적 위기에 처해있던 자민당이 2000년대 들어 되살아 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90년대 초반 버블경기의 붕괴와 함께 침체된 일본경제를 살리기 위한 개혁시도는 계속 있었으나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과거의 총리들은 큰 변화 없이 전통적인 자민당 방식의 정치와 정책을 지속하였다. 자민당 정부가 개혁에 제대로 착수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총리가 강한 리더십을 갖기 어려운 일본정치의 특성 상 파벌 간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정책이나 족(族)의원들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고이즈미는 임기 동안 상당한 수준의 정책변환을 통하여 부실채권처리, 공공사업의 축소, 우정민영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자민당 정치의 부정적인 유산인 파벌정치 또한 상당히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가 고이즈미 총리 아래서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제도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소선거구제로의 선거제도 개혁과 총리의 권한을 강화시킨 성청개혁의 결과를 고이즈미가 향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고이즈미 이후의 일본 총리들이 강한 리더십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뚜렷한 개혁적 정책들을 수행하지 못했음을 반추해보면, 고이즈미의 신념과 정치적 기술을 포함한 개인적 리더십에 주목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첫째, 고이즈미의 정치적 경험과 신념, 둘째, 정치적 기회구조의 인식과 활용, 셋째,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 전략에 중점을 두고 고이즈미의 리더십을 분석하였다.

 

고이즈미는 2001년의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불리한 파벌구도를 극복하면서 자민당의 총재이자 일본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또한 총리가 된 이후에는 전통적 자민당 정책들을 변화시키면서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에 처해있던 자민당의 지지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자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선거공학적인 관점에서 높은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미일동맹의 강조 등을 통하여 자민당의 보수적 지지층을 여전히 강력한 지지기반으로 묶어 놓을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재정건전화 정책이나 민영화 정책 등은 관료집단, 족의원 등 다양한 이익세력들의 저항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해진 수상의 권한과 경제재정자문회의 같은 제도를 잘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에 따른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당내 기반이 취약한 자신의 권력기반을 보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개혁정책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도록 노력하였다. 고이즈미는 임기 동안 발생한 다양한 권력 갈등과 정책 갈등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구조개혁의 지도자로서의 자신과 반개혁적인 파벌정치로 연상되는 전통적 자민당 정치인들과의 대립구도로 틀 짜기(framing)함으로써 확고한 권력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다. 물론 고이즈미의 개혁정책이 그가 공언한 만큼 성취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1980년대 이후 일본이 당면한 정치경제적 문제 해결에 지지부진하던 과거의 총리들과는 달리 고이즈미는 구조개혁을 통한 새로운 일본이라는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에 나섰다. 또한 우정 민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는(risk-taking)전략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신념과 정책적 선호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지닌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II. 위기의 자민당과 고이즈미의 등장

 

1. 자민당 정치의 위기와 총재 선거

 

버블경기의 붕괴 이후 침체된 일본경제는 몇 차례의 경기회복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못했고, 고령자 인구의 증가와 재정적자의 확대는 경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한편 1994년 선거제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자민당의 나눠먹기식(pork-barrel)정치와 파벌정치는 국민들의 기대만큼 개선되지 않았으며, 농촌지역에 대한 과도한 공공사업지출 등은 특히 도시유권자들을 중심으로 자민당의 정치에 대한 불만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구조개혁이 일본정치의 주요 의제로 등장하였다. 1996년 1월 출범한 하시모토(橋本龍太郎) 정부는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성향을 보여주긴 했으나 전통적인 자민당의 이익유도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계획과 달리 경기부양 정책을 채택하였으나 이 또한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어서 출범한 오부치(小渕恵三) 정부 또한 경기부양책을 택함에 따라 정부의 장기채무는 급증한 반면 부실채권 처리 등 근본적인 경제 문제 해결은 지체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민당은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였고 하시모토 총리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되었다.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자민당은 233석을 획득하는데 그쳐 사실상 패배하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경제정책의 실패, 자민당의 파벌정치와 부패, 소극적 개혁 움직임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도시지역 선거구에서의 패배가 두드러졌는데 2000년 중의원 선거의 경우 자민당은 인구 30만 이상의 도시에 속해있는 145개 선거구 중 61개 선거구에서만 승리하였다(<日本経済新聞> 2000/07/11). 도시유권자들은 비효율적인 공공사업 지출과 같은 나눠먹기식 정치에 더욱 비판적이었다(<産経新聞> 2000/08/03). 오부치에 이어 등장한 모리(森喜朗)총리는 잦은 실언과 정치적 실수를 반복하면서 2001년에는 한자리 수 지지율을 기록하게 되었고 총리직을 사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Kabashima and Steel 2007a, 79).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민당은 새로운 총재선출을 위한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2001년의 자민당 총재선거에 비록 내부적인 갈등은 있었으나 당내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파에서 하시모토가 출마하기로 의견을 모았을 때, 자민당의 전통적 총재선거 방식에 비추어 하시모토가 당선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더욱이 경쟁자인 고이즈미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정책들과 작은 정부론 같은 자민당 주류와 반대되는 정책지향성을 가지고 있었고, 자민당 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한 적도 없는 당내 비주류로서 전통적인 자민당 총재 선출 사례를 보면 당 총재가 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자신이 속한 자민당의 구태 정치를 강하게 비판하고, 개혁가로서의 자신과 기득권 세력인 자민당 주류 정치인들을 대비시킴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총재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이즈미가 당선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으로는 도시지역 유권자들의 불만을 들 수 있다. 수 십 년간 자민당은 도시 보다는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다져온 정당이었으며 나눠먹기식 정치와 연계된 다양한 집표 조직(예를 들어, 농협이나 특정우편국, 건설업 단체 등)을 통한 득표가 집권의 기반이었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전통적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는 선거 전략을 고집하는 자민당의 주류 정치인들과 달리 자민당이 정치적 생존이 도시지역 무당파의 지지확보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박철희 2011, 330). 고이즈미는 전통적 자민당 정치 방식의 탈피와 구조개혁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점차 인기를 얻어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미디어는 200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고이즈미의 당선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이즈미는 미디어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정치인이었으며(Kabashima and Steel 2007a, 80), 미디어 또한 고이즈미의 당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반응하였다. 미디어는 파벌지도자, 장막 뒤의 지도자로서의 하시모토를 부각시킴으로써 나름 개혁지향성을 보여주었던 하시모토를 반개혁적인 인물로 비추도록 한 반면, 자민당 파벌정치의 타파와 성역 없는 구조개혁 등을 강조하는 고이즈미는 개혁가로서 묘사하였다(Kabashima and Steel 2007a; 2007b). 고이즈미는 선거기간 대중을 상대로 한 연설회 및 TV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명료하게 전달하였으며, 국민적 인기가 높던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의원의 선거지원 유세를 적극 활용하여 개혁적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적극적이었다(이기완 2007, 99; 이이범 2006, 43). 본인 또한 자민당의 주요 정치지도자 임에도 ‘자민당을 깨부순다’(自民党をぶっ壊す)등의 선동적 표현을 통한 반(反)자민당 노선을 강조함으로써 자민당의 핵심 정치인들과 자신을 대비시켰다. 이를 배경으로 자민당 비주류 이던 고이즈미의 인기는 더욱 상승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고이즈미는 총재 선거를 앞두고 차기 수상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계속)

6대 프로젝트

세부사업

미래 일본 2030

Related Public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