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일본연구패널 보고서 No.4

 

 

저자

이지영_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술로는 《지역통합의 국제정치경제(공저)》, “일본의 이주자정책이 여성이주에 미치는 영향,” “민주당의 생활정치 이념과 복지정책,” “일본의 고용평등정책과정분석-가치•신념, 여성대표성, 제도적 구조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I. 서론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며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권리로서 보장하는 법과 제도를 통해서 발전해왔다. 그러나 개인은 남성만을 전제한 것으로 여성은 배제되어 자유와 평등은 남성만의 권리였고 자유롭고 평등한 남성시민이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공통의 문제와 관심을 다루어왔다. 공적인 문제와 관심을 다루는 정치는 여성의 문제와 관심을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법과 제도에는 여성의 경험과 이익, 요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것이었고 그 역사는 길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여성을 발견하고 법과 제도에 있어서 성차별을 시정하려는 여성운동 은 민주주의의 불완전함을 넘어서려는 민주화 운동이며, 여성의 주체성 확립과 성평등의 실현은 민주주의를 공고히 한다고 하겠다.

 

19세기 말 일본도 근대 민주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메이지헌법을 공포하고(1889년), 의회를 개설(1890년), 선거도 실시하지만 일본의 민주주의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선거권은 제한선거권으로 국세 15엔 이상을 납부하는 남성 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인정되었고 이후 제정된 보통선거법(1925년)에서도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또한 민법(1898년)은 전통적인 일본의 이에제도 를 법제화한 것으로 가독에게 이에의 전권을 인정하는 한편 가독이 될 수 없는 여성은 무능력자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성차별을 시정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은 전전부터 시작되었으나 전후 점령개혁 하에서 본격화되고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다. 여성참정권이 부여되었고(1945년) 성평등을 천명한 신헌법 제정, 이에제도를 폐지하는 민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성평등과 여성의 주체성 획득은 점령개혁 하에서 일본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개혁은 점령당국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지만 일본 여성들이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패전 직후부터 일본 여성은 자발적으로 성평등과 일본의 민주화 실현을 위해 단체를 조직하고 단체 간 연계를 꾀하며 운동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일본의 여성운동에 대한 서구 일반의 견해는 일본 특수론에 입각해 있다. 즉, 일본여성운동의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주부페미니즘’논의이다. 일본의 여성운동은 정치제도나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에 무관심하고 사생활과 개인의 선택을 우선시하며 성평등보다 여성의 모성, 주부로서의 역할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여성운동의 구조적 특수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일본의 여성운동은 단일이슈 중심, 분권 지향, 지역 중심이라는 분석이다(Gelb 2003, 27-38). 본 글은 이러한 일본 여성운동의 특수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일본 특수론은 전후 일본의 여성운동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성평등과 그의 제도화 노력, 특히 여성운동이 결집하여 전후 민주화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성평등을 점령 초기의 과도한 민주화를 시정한다는 역코스(逆course)속에서 지켜낸 점과 여성차별철폐협약비준운동을 통해 성평등정책에 있어서의 국제표준을 국내법화해 온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글은 전후 일본의 성평등과 민주화 추진 과정을 이치카와 후사에의 리더십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리더란 사회정치적 집합행위를 위한 주체로서 그 권위를 부여받은 자이다. 리더십은 리더의 이념(idea), 그리고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리더의 자원동원 능력과 정치적 기회구조(political opportunity structures)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Samuels 2003, 6) 리더의 이념과 사회정치 구조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현되는 리더의 행동양식이라 할 수 있다.

 

가치다원적인 사회에서는 여성의 경험과 이슈는 단일하지 않다. 또한 여성의 이슈로서 성평등을 추구한다고 해도 성평등은 명확한 개념으로서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생물학적 기능의 차이, 즉 남성에게는 없는 임신•출산•수유의 모성기능을 지닌 여성을 남성과 평등하게 처우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어떠한 정책수단을 이용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모성기능을 특별한 가치로서 보호할 것인가, 모성기능의 보호는 평등과 모순되는가, 모성기능은 여성개인의 기능인가, 사회적 기능인가(Scott 1988, 174-207). 성평등에 관한 리더의 이념이 어떠한가에 따라 모성기능을 특수한 가치로서 보호할 것을 요구할 것인가,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요구할 것인가 운동의 방향이 결정되고 산출로서의 정책이 달라진다고 하겠다(이지영 2009, 174-175). 이러한 리더의 이념에 대해 사회적 합의와 지지, 물리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지가 운동의 성패에 있어 중요하다. 여성운동의 경우 일반적으로 인적, 재정적 자원이 빈약하다. 또한 운동리더의 이념은 기존의 제도와 남성의 기득권에 대한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폭넓은 사회적 합의와 지지, 대량의 물리적 자원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자원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가 네트워킹이다. 리더는 여성단체, 다양한 운동단체 간 네트워킹을 통해 부족한 물리적 자원을 보완하고 자신의 이념을 확산, 공유시키며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지지를 조달한다(塩原勉 1989). 리더의 자원과 지지 동원 전략, 나아가 운동의 전개를 촉진 또는 제약하는 것이 정치적 기회구조이다. 정치적 기회구조란 행위자를 둘러싼 환경적 요인으로 리더가 직면하는 정치적 기회와 제약의 구조라고 하겠다. 리더가 이러한 기회구조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용하는지에 따라 운동의 성과는 달라진다.

 

본 글의 목적은 전후 일본의 민주화운동의 리더 이치카와 후사에에 천착하여 이치카와가 자신의 이념에 어떻게 지지와 자원을 동원하고 정치적 기회구조를 이용했는지 분석함으로써 이치카와의 리더십이 일본의 성평등 추진과 민주화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는 것이다.

 

II. 선행연구와 분석대상

 

이치카와에 대한 선행연구는 매우 적다. 특히 전후 이치카와의 성평등 추진과 민주화운동을 분석하거나 리더십에 초점을 두고 다룬 연구는 거의 없고 일본의 여성운동사에서 일부분으로 다루거나(田中寿美子編 1969; 1975; 伊藤康子 1974; 鈴木裕子 1989), 이치카와의 전전의 여성참정권획득운동을 고찰한 것(菅原和子 2002)이 전부이다. 이치카와 관련 자료는 자서전 중심으로 남아있으며 1994년에는 이치카와기념회가 1916년부터 1981년까지의 이치카와 관련 단체의 기관지, 잡지, 신문에 남긴 이치카와의 저술을 모아 출판한 자료집 이 있다. 본 글은 이치카와 후사에의 리더십에 천착하여 전후 일본의 성평등 추진과 민주화 과정을 살펴본 최초의 분석으로서 이치카와와 일본의 사회운동 연구에 시사점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본 글의 주요 분석대상은 전후의 매춘방지법제정운동과 여성차별철폐협약비준운동(이하 협약비준운동), 이상선거운동이다. 매춘방지법(1956년) 은 자민당에서 사회당, 공산당까지 좌•우, 보수•혁신을 넘어 사회단체가 연대한 사례이고 그 중심에 이치카와가 있었다. 이치카와는 1953년 참의원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중•참의원의 초당파 여성의원단을 조직하여 일부 남성의원들과 업자들의 맹렬한 반대 속에서 유엔의 인신매매금지조약의 비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매춘방지법제정운동은 70년대의 일본남성들의 섹스관광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다음으로 여성차별철폐협약(이하 협약)은 1969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여성차별철폐선언을 1979년에 법제화한 것으로 협약의 비준은 ‘성평등과 여성의 지위향상은 유엔의 기치 아래’를 표방했던 ‘유엔세계여성의 10년(1975년~1985년)’의 주요 목표였다. 이치카와는 협약 서명과 비준을 위한 통일된 활동을 추진하였다. 신구(新舊), 조직의 대소, 이념의 보수•혁신을 넘어 여성단체를 규합하고 기타 사회단체와 연대하며 경비조달과 운동 조직의 운영, 운동의 추진 등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해결하였다. 또한 유엔의 글로벌 차원의 성평등 추진을 정치적 기회구조로 인식하고 적극 이용하며 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한편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국내법 정비와 협약 비준(1985년)으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끝으로 이상선거(理想選擧)운동은 점령개혁의 실시로 여성참정권이 부여되자 여성참정권의 주체적인 행사를 위해 여성후보자의 발굴과 여성유권자 중심의 돈 안 드는 깨끗한 선거, 의회제민주주의의 건전화를 위해 이치카와가 조직한 운동이었다. 이치카와는 이상선거를 통해 정치의 주체로서 여성을 호명하고 금권정치를 비판하였는데 자신의 참의원선거에서부터 이상선거를 관철하였다. 이치카와는 1967년에는 도쿄도(東京都) 도지사선거에서 ‘미노베(美濃部)후보의 이상선거를 지원하는 모임’에 참여하였고 이후 이상선거운동은 특히 지방선거에서 힘을 발휘하여 혁신지자체 탄생과 여성의 지방정치 참여로 이어져 일본 정치의 풀뿌리민주주의를 추진하게 된다.

 

본 글은 이러한 매춘방지법제정운동, 여성철폐협약비준운동, 이상선거운동을 이치카와의 이념과 정치적 기회구조, 자원동원전략으로서의 네트워킹에 중점을 두고 분석함으로써 이치카와의 리더십이 전후 일본의 여성운동, 민주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치카와는 1893년 출생하여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를 거치며 전전에 여성참정권운동을 주도하였고 전시기 운동의 후퇴 속에서 전쟁에 협력하였으며 전후 점령개혁 하에서는 공직추방을 경험, 추방해제와 동시에 여성운동을 부활시켜 여성운동가로서, 여성정치가로서 1981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성평등과 일본 정치의 민주화를 추진하였다. 우선 전후 이치카와 리더십의 구체적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전전의 이치카와의 운동과 그것이 당시 여성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계속)

6대 프로젝트

세부사업

미래 일본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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