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일본연구패널 보고서 No.3

 

저자

김젬마_일본 간사이(関西)외국어대학교 조교수, 와세다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과대학원 객원조교수.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일본지역학 석사를 받은 후, 일본 히토쓰바시(一橋)대학교에서 국제관계전공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히토쓰바시 대학교 전임연구원, 국제공공정책대학원 강사 및 와세다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과대학원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최근 저술로는《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とアジア地域統合》, “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とニュー•リージョナリズム: 拡散と収斂の相互作用,” “東アジアFTAと国内政治: 韓国の事例から,” “Governance Reconsidered in Japan: Searching for New Paradigms in the Global Economic Downturn,” “日本のFTA政策をめぐる国内政治: JSEPA交渉プロセスの分析” 등이 있다.

 

 


 

I. 서론: ‘오래된 정치’(Ancien Régime)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의 대두

 

2009년 8월30일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 민주당은 총 480개 의석 중 308석(의석 점유율 64.2%)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어 역사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다음달 16일, 일본 국민들의 커다란 흥분 속에서 민주당, 사회민주당 및 국민신당 3당 연합으로 구성된 하토야마(鳩山由紀夫) 정권이 출범했다. 이 정권 교체가 일본 정당정치에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20년 전부터 기능장애에 빠져있었던, 족의원(族議員)과 이익 주도, 파벌과 후원회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자민당 정치의 종언을 고한 것이다(野中尙人 2008). 하토야마는 자민당정권 시대의 ‘오래된 정치’(Ancien Régime)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를 제창했다. ‘관료의 관료에 의한 관료를 위한 정치’를 종식시키고 ‘관료 주도로부터 정치 주도로의 전환’을 꾀했던 것이다.

 

당시의 하토야마 정권이 놓인 국제환경은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2007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금융 중심의 세계 경제의 현실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온난화 방지대책의 우선순위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사회적 공정과 부의 재분배 중요성이 재확인되는 등, 사회적 가치와 의식에 관한 전환도 급속하게 필요한 시기였다. 또한 세계적인 힘의 역학 관계에 있어서도 대규모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의 경제력이 급속하게 확대되었으며, 특히 중국은 경제성장률과 경제규모, 외환보유고 지표를 기준으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2025년에는 중국의 GDP가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며, 군사 면에서도 장비의 근대화를 급속하게 추진하는 등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경제 시스템의 재편성 및 국가 간 역학관계의 다원적 전환이라는 국제 환경 속에서 하토야마 정권 외교는 순조로운 출범을 시작하는 듯이 보였다. 특히 하토야마 수상이 유엔기후변동 정상회의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제창한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효과가스 25%삭감 및 핵 군축에 대한 적극적 관여 방침은 정권 교체에 의한 일본의 큰 변화를 세계에 강하게 각인시켰다. 하토야마의 공약은 대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역사상 최초로 일본의 지도자가 국제무대에서 일본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구체적으로 표명했기 때문이다(山口二郞 2009; 山口二郞 2012). 종래의 일본 정치가는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관료의 의사에 따라 정책 목표를 설정해왔다(山口二郞 2010; Hayao 1993). 그 목표는 국내의 경우, 각 성(省)의 관료조직과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목표에 따라 설정되었으며, 국제적 문제의 경우는 미국의 의향을 살피고 이와 상충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설정되어 왔다(Curtis 1999; George-Mulgan 2000). 바로 여기에 일본 정치 빈곤의 원인이 있었다. 이에 반해 하토야마는 스스로의 의지에 입각해서 목표를 설정하는 정치가 본연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하토야마는 대내적으로는 ‘약자를 위한 정치’라는 슬로건 하에 종래의 정부가 경시해온 빈곤, 홈리스, 실업 등의 사회문제에 주목했다. ‘모자가산(母子加算)의 생활보호’ 정책 부활이 단기간에 결정되었으며, ‘국민생활이 제일’이라는 구호의 실현을 위해 정치 공약의 핵심이었던 어린이 수당과 고교 무상화 실시를 위한 준비를 적극 추진했다. 이렇듯 순조로운 출범을 보였던 하토야마 정권은, 하토야마 수상과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郞) 간사장과 관련된 정치자금 문제 및 미군 후텐마(普天間) 기지 이전문제를 둘러싼 진통 등이 논란이 되자, 새로운 정치를 향한 정책과 국면 전환에 필요한 하토야마의 정치적 리더십이 발휘되지 못했다. 결국 2010년 6월 2일 하토야마 수상이 사임함으로써, 266일의 단명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하토야마 수상의 재임기간은 266일로서 현행 헌법 하에서는 6번째로 단명한 정권이었다. 내각 출범 당시 정권지지율이 72%(교도통신사 조사)로 매우 높았으며 이에 비례하여 일본 국민이 느끼는 실망감은 더욱 컸다. 실제로 2010년 5월 29일에 실시된 아사히신문 긴급 여론 조사에서 하토야마 정권 내각지지율은 17%(정권 출범 당시 지지율 71%)이었으며 민주당 내각지지율은 21%(정권 교체 이후의 최대지지율 46%)에 불과했다(<朝日新聞> 2010/05/29).

 

본 논문은 하토야마의 리더십 형성과정을 하토야마 리더십의 원형, 민주당 창당 후 정권 획득까지의 과도기, 수상 재임 시 리더십 실패의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하토야마는 우애(友愛, fraternity)-‘좌익과 우익의 전체주의’(左右の全体主義)를 배제하고, ‘자유와 평등’, 및 ‘자립과 공생’의 균형을 실현하는 이념-를 내세운 ‘새로운 정치’를 제창하여 경쟁 원리와 효율을 우선시하는 자민당 정치와 확연히 선을 그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토야마의 우애는 ‘제 3의 길’(Giddens 1998) 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하토야마의 리더십을 세계화 속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이념적 리더십’으로 정의하고 그 성공과 실패의 요인을 살펴 볼 것이다.

 

II. 하토야마 유키오 리더십의 원형: 우애(友愛, fraternity)와 이념적 리더십

 

역사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 낸 하토야마는 어떠한 인물인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수상은 하토야마를 ‘천성의 정치가, 뭐든지 삼켜버리는 대단한 왕뱀(大蛇)’이라 평가한다(森省歩 2009). 일각에서는 ‘우애’를 정치 신조로 하는 하토야마의 이상주의적이며 온건한 태도를 지적하며 ‘우유부단해서 의지할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하며(山内昌之 2011,156-165), 독특한 언행으로 인해 ‘우주인’ 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정치를 과학적으로 하는 남자’(政治を科學する男)로도 비유되며, 이는 공학 세계에서 배운 이론과 사고를 정치 세계에 응용하고 싶다는 하토야마의 의지가 표명된 호칭이기도 하다(高橋洋一•竹内薫 2009).

 

이러한 하토야마의 사상적 근원은 ‘우애’(友愛, fraternity)에 근거한다(鳩山由紀夫 1996; 鳩山由紀夫ホームページ n.d.). 원래 ‘우애’는 하토야마의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초대 자민당 총재가 제창한 이념이었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가로 자유민주당을 결성하여 보수합동(保守合同) 실현을 통해 1955년 체제를 확립하였고, 1956년 10월에 일본과 소련의 국교 정상화를 이루어냈다(平和政治家研究クラブ 2009). 이러한 조부의 이념을 이어받아 하토야마는 ‘우애’를 ‘좌익과 우익의 전체주의’를 배제하고, ‘자유와 평등’, ‘자립과 공생’의 균형을 실현하는 이념으로서 제시한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쿠덴호프 칼레르기(Coudenhove-Kalergi)의 사상인 박애(fraternity)에 근거한다. 우애에 관해 하토야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일본인이 좋아하는 말 중에는 ‘사랑’이 있는데, 이것은 보통 love를 지칭한다. 따라서 내가 ‘우애’를 말하면 왠지 유약한 인상을 받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듯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우애’는 이와는 다른 개념이다. 이는 프랑스 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박애’의 박애(fraternite)를 의미한다.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가 쿠덴호프 칼레르기의 저서를 번역하여 출판했을 때, 이 프라타너티(fraternite)를 박애가 아니라 우애라 번역했다. 유약하기는커녕 혁명의 깃발이 된 전투적 개념인 것이다 (鳩山由紀夫 2009b).

 

평등을 추구하는 전체주의도, 방종하게 타락한 자본주의도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을 침범하고 본래의 목적이어야 할 인간을 수단으로 변질시킨다. 자유도 평등도 인간에게 있어 중요하지만, 원리주의에 빠질 경우 그것이 초래하는 참상과 화는 셀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도록 균형을 도모하는 이념이 필요하며 칼레르기는 그것을 우애에서 찾으려 했다(鳩山由紀夫 2009b).

 

하토야마는 우애가 동반되지 않으면 자유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을 초래하며, 평등은 폭군정치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목적이어야 하며 수단이 아니며, 국가는 수단이어야 하며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치학자인 우노 시게키(宇野重規)도 우애라는 이념이 주목할 만한 정치 이념이라고 지적하며, ‘우애’의 최대 특징은 자유와 평등을 매개로 하여 양자의 상극된 모순을 극복하려고 하는 지향에 있다고 해석한다(宇野重規 2010). 즉 우애를 시장원리주의를 배제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신자유주의적 측면을 지니며 다른 한편으로는 빈곤과 격차 등 새로운 사회문제에 전력을 다하여 임하는 정치적 방향성으로 해석한다. 이는 당내에 신자유주의 세력, 사회민주주의 세력, 보수주의 세력을 내포하는 민주당이라는 정당의 핵심부에서 그 접합점을 제공하려고 하는 하토야마의 정치적 의도와도 일치한다. 즉 우애란 자유와 평등 혹은 우익과 좌익의 중도에 위치하는 것이며 양자의 극단을 배제하고 오히려 매개하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토야마의 우애 개념은 정권 교체 후에 실제 정책으로 구현된다.

 

이처럼 하토야마는 ‘우애’를 정치 이념으로 내걸고 ‘새로운 공공’을 주창하며 정책운영에 있어서는 ‘정치주도’를 내세우는 등 개혁을 목표로 한 이념을 강하게 호소했다. 특히 ‘우애’에 기초한 ‘탈 관료의존’은 그의 정치 이념의 핵심을 이루었고 민주당창당 및 정권 획득에 이르기까지 일관적 정책 이념으로 존재했다. 역사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하토야마의 공적은 이러한 이념에 근거한 리더십(이념적 리더십)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정권획득 후에도 정치주도, 새로운 공공, 지역주권, 동아시아공동체 등을 소리 높여 주장하여 종래의 자민당 정권과 명확히 선을 긋는 –‘제 3의 길’(Giddens 1998)과도 일맥상통하는- 새로운 이념을 내세운 하토야마의 리더십은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토야마의 리더십은 ‘이념적 리더십’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III. 유토피아 연구회와 전후 정치의 전환

 

1. 파벌의 공죄(功罪)와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열망: ‘무로란(室蘭)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되자’

 

하토야마는 1986년 공학도에서 정치가로 변신하여 1996년에 민주당을 창당하기까지의 10년간을 ‘응축된 10년’이라고 자평한다(フジTV 2009/09/20) . 정치평론가인 이타가키 에이켄(板垣英憲)은 비록 하토야마가 이공계에서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정계로 방향을 전환했다고는 하나 그때까지 공학 세계에서 배운 세상을 생각하는 방법을 비롯한 이론, 지식, 경험을 역으로 정치 세계에 응용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하토야마가 품게 된 것으로 분석한다(板垣英憲 2009, 106). 이는 하토야마의 ‘정치를 과학적으로 한다’는 정치구호와도 연결된다. 이러한 하토야마의 정치가로서의 자질에 관해 당장 눈앞의 일에 좌우되지 않고 곰곰이 미래를 생각하는 태도는 종래의 일본 리더들에게는 없었던 타입이지만 역설적으로 정치가로서의 치명적인 결단력 결핍으로 볼 수 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佐野眞一 2009, 84-85)...(계속)

6대 프로젝트

세부사업

미래 일본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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