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일본연구패널 보고서 No.2

 

저자

이정환_국민대학교 국제학부 조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 저술로는 “고이즈미 정권 하의 지역개발정책개혁의 이중구조,” “민관협동의 양면적 발전,” “대외적 투자유치 대 내재적 네트워크 강화” 등이 있다.

 

 


 

 

I. 서론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는 현대 일본 정치인 중에서 가장 이단아적 존재이다. 그는 정치에 입문한 후 높은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면서도, 기성정치질서의 통치체계 내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주변적 위치에 머물러왔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대중과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받아왔다. 1968년 최고득표율 속에 참의원에 당선된 후 25년 이상의 의원 생활과 1999년 첫 당선된 후 4선의 도쿄 도지사 재임 성공은 그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전후 체제의 근간인 평화헌법에 대해 강렬하게 비판하며 핵무장의 필요성을 공공연히 언급하고,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폄하하면서 일본 중심의 아시아주의를 주장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차별적 무시의 발언을 내놓으며, 이시하라는 현대일본의 배타적 자국중심주의적 보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화려한 정치경력에 비해 그의 기성정치질서 내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저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자민당 의원 생활 동안 자민당 주류와는 거리가 있었던 이시하라는 그의 보수적 사상을 뒷받침할 토대를 보수정치집단 내에서 확고하게 구성해 내지 못했다. 그는 통치자의 경험보다는 체제비판의 아웃사이더적 경험을 통해 명성을 쌓아왔다.

 

본 논문은 이시하라가 일본 사회에서 높은 인기 속에 수용되는 원인과 또한 그가 기성정치질서 내에서 주변적 위치에 머무르는 한계의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시하라의 정치적 입장을 단순히 우익적 사상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이시하라에 대한 높은 대중적 지지를 통해 일본 사회 저변의 강력한 우익적 성격을 찾아 볼 수 있다는 판단은 분명 일정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이시하라와 그에 대한 수용자들 모두를 우익적 성향으로 단순화하여, 일본 정치와 사회에 대한 면밀한 관찰의 가능성을 매몰시키는 문제점이 있다. 본 논문은 이시하라의 높은 대중적 인기와 그의 정치조직화의 한계를 그의 정치적 사고의 성격과 그 정치적 입장의 전달 방식의 성격 양면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이시하라의 정치적 입장은 전후체제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정리된다. 외교적 측면에서의 그의 배타적 자국중심주의적 사고는 미국에 의해 구성된 전후체제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다. 또한 그는 전후체제의 국내적 기반으로 전후 일본의 정치 안정과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관료 주도의 정책과정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주체적 선택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서 외부의 제약 요소인 미국과 내부의 제약 요소인 관료집단은 이시하라에게 동일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제약 요소들과 타협하여 전후체제를 유지해온 자민당 보수 주류는 정치공동체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의무가 있는 ‘아버지’ 또는 ‘사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비겁한 정치집단으로 간주된다. 호방한 ‘사내다움’의 분출이 일본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이 이시하라의 정치적 사고의 토대가 된다. 이시하라에 대한 높은 대중적 지지는 안과 밖 모두에서 꽉 짜여 있는 전후체제 특히 관료지배의 숨막히는 성격에 대한 대중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열망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유기적으로 매우 완성도 높게 조직화된 전후체제를 뒤흔들 변혁의 시도는 유신과 같은 체제전복이 아니면 달성하기 어렵다. 이시하라의 정치적 사고가 현실 정치무대에서 가지는 한계는 이 부분에서 출발한다. 그는 체제전복이 아닌 제도보수권 내에서 정치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사고를 투영하는 방법을 선택하였지만, 보수 주류는 이시하라적 정치 인식에 의해 잠식될 만큼 취약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 활동은 우익의 체제전복적 사상과 제도보수권의 안정적 통치질서 사이에서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이시하라는 그의 정치적 입장을 전달하는 방법에서 매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스스로의 입장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이시하라적 정치의 방식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생명력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시하라는 정치적으로 대중적 주목도를 높이는 언어 사용의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언어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인식하고 있었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언어를 사용하여 기성체제를 비판하는 이시하라의 자기표현 방식은 많은 일본인들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주었기 때문에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카타르시스 제공의 능력은 체제비판의 비주류의 위치를 넘어서는 통치 능력과 정치 조직화의 능력으로 연결되지 않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기성질서와 제도를 비판하는 차원에서 주로 이루어진 이시하라의 정치경력은 그가 자민당 주류가 되기 어려운 조건이 되었다.

 

이시하라의 리더십을 자기표현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이단아적 리더십으로 정의하는 본 논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이시하라 정치적 사고의 성격을 현대 일본의 보수와 우익의 길항 구도와 그의 문예활동과 초기 정치활동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3장에서는 그의 정치적 사고가 일본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수용될 수 있던 배경으로써 전후체제에 대한 불신의 기회구조를 살펴볼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이래 관료불신과 정치불신이 어떻게 이시하라에게 정치적 성공의 기회를 제공했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4장에서는 중의원직을 사퇴하고 도쿄 도지사직에 도전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실천하면서, 총리취임의 대망을 꿈꾸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이시하라의 부침에 대해 다루고, 그의 리더십 스타일의 성격을 밝힐 것이다.

 

II. 전후 일본 보수주의 구도에서 이시하라 신타로의 위상

 

1. 전후 일본의 보수와 우익

 

전후 일본정치는 일본의 국제정치적 자리잡기와 역할에 대한 보수와 혁신의 갈등 구조 속에서 발전하여왔다. 미일안보동맹에 입각한 냉전구조에서 일본의 자리잡기에 대한 논쟁이 보수와 혁신의 핵심 갈등이었다(박철희 2011c, 102-112). 성장과 분배 중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의 경제정책적 대립은 보수와 혁신의 갈등 구조보다는 자민당이 개발지향 산업정책과 이익유도정치를 통한 선별적 재분배정책을 모두 주도하면서 보혁대립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보혁 대립구도만으로는 보수와 혁신의 각각의 범주 안에서의 다양성과 내부적 갈등을 고찰하는 데 한계가 있다. 또한 보혁 대립구도의 관점은 혁신에 대한 대항의 개념으로 ‘보수우익’을 사용하면서 보수와 우익을 구별하지 않고 일본의 정치담론을 단순화하는 한계가 있다(박철희 2011b, 2). 보수와 우익은 일본의 전후체제에 대한 상이한 접근을 하고 있다. 보수와 우익을 차별화하여 둘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제도보수권 내에서 우익적 사고를 발신하는 이시하라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초적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제도보수권 내에서 보수 리버럴과 보수 우파의 논쟁은 미일동맹 중심의 전후체제를 기본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속에서 일본 국가의 전략적 선택에 대한 상이한 해석에 기반을 둔다. 이와 반대로 일본의 우익은 제도보수권에 의해 유지되는 전후체제 자체에 대해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미일동맹 안에서의 헌법개정을 주장했던 보수 우파와 큰 주장의 차이가 없던 순정우익세력과는 달리 1970년대 미일동맹을 포함하는 전후체제 전체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신우익이 우익세력의 중심이 된다. 1968년 신좌익 학생운동에 대한 대항차원에서 등장한 신우익세력은 1970년 즉 일미안보조약의 개정시기가 오면 다시 혁신세력의 저항운동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대응 논리와 조직을 개발하는 시도로 성장하였다. ‘일본학생동맹’(日本学生同盟) 등의 학생조직으로부터 출발한 신우익은 얄타-포츠담 회의에 의해 규정된 전후체제로부터의 탈출을 주장하면서 기존우익세력과 차별화하는 이론을 발전시켰다(김채수 2008, 110-112). 그들은 패전을 가져온 얄타-포츠담체제를 타도하여 패전 전의 상태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며 친미반공의 기성우익과는 달리 반미의 논리와 기성보수제도권에 대한 비판의 내용까지 담고 있었다. 신우익의 단계에 와서 우익은 미국과 기성제도권에 의해 유지되는 전후체제를 전복하여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하게 되면서 제도보수권과 확실하게 차별화한다. 이와 같은 차별화의 배경에는 1970년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에서 할복 자살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영향이 크다. 신우익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지도자였던 스즈키 쿠니오(鈴木邦男)는 미시마의 죽음 당시에 1965년 이래로 신우익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모리타 힛쇼(森田必勝)가 자신들과는 달리 체제전복 운동을 지속하여 결국은 미시마와 함께 자신을 희생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미시마와 모리타의 죽음이 1970년대 신우익운동의 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鈴木邦男 1988).

 

보혁 대립구도와 보수와 차별화된 우익의 구도는 1990년대 냉전의 종식과 함께 일본에서도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혁신세력이 정치권에서 급속하게 사라지면서 보혁 대립구도는 일본정치의 대립축에서 존재감이 상실되었다. 한편 전후체제 비판의 논리를 지닌 우익은 전후체제의 기틀인 냉전의 와해로 인해 존재이유인 비판대상을 상실하게 된다. 스즈키가 1993년 《탈우익선언》(脱右翼宣言)을 출판하면서 소련의 붕괴로 좌익이 사라진 상태에서 우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주장이 상식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에 ‘탈우익’의 시대가 왔다고 주장하였다(鈴木邦男 1993). 우익사상에 대한 대표적 연구자인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도 ‘우익의 종언’을 언급하면서, 우익의 가치가 보수 세력에 의해 충분히 인수되었기 때문에 우익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도 우익의 존재이유가 사라진 1990년대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마쓰모토 겐이치 2009, 271-277). 1990년대에는 제도권 보수가 우익의 사상을 많이 담아내는 상황이 되었다. 냉전 이전 전후체제의 수용과 부정의 수준에서 구분되던 보수와 우익의 구분은, 1990년대 이후 유엔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 역할론과 자국중심적 국가주의론의 보수 내 대립 구도로 변화하였다(Park 2011, 102). 유엔중심주의적 일본정부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사과의 정책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보수지식인들 사이에 중심적 논쟁의 대상이 된다. 유엔중심주의에 대립하여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이 서양제국주의에 대한 대항적 차원의 자위적 행위라는 논리를 통해 자학적 역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1990년대 이후의 보수 내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1990년대에 들어오면 전후체제 전체를 비판하고 전복하려던 우익의 운동기반은 약화되었지만, 전후체제의 기반이었던 태평양전쟁의 패전을 극복하여야 한다는 우익의 논리는 보다 더 제도보수권 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2. 제도화된 보수 속에서 전후체제 비판의 한계

 

이시하라는 전후체제 자체를 전면적으로 비판한다는 점에서 우익적 사고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정치활동에서 전후체제를 전복하고자 하는 진지한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전후 일본의 보수와 우익의 중간의 위치에서 전후체제에 대한 투덜거림, 조롱, 분노를 넘어서는 전복의 실천을 보여주지 못했다. 다만 제도보수권 내에서 전후체제의 기득권과 싸우는 투사의 이미지가 그의 대중적 인기의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이시하라의 정치적 사고의 핵심은 ‘사내’답지 못한 인간, 사회, 국가에 대한 분노이다. 그의 인간관, 사회관, 정치관, 국제정치관에서 일관되는 논리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당당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전후 일본의 일본인, 일본사회, 일본국가는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주체적이어야만 하는 모든 대상이 기본적으로 ‘사내’ 또는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石原慎太郎 1997, 247-249; 2010, 182-185). 아버지 또는 남성을 강조하는 한 모든 인간이 주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아버지의 부성에 기대야 하는 가족들과 남성의 보호 하에 있어야 하는 여성들은 주체의 대상으로 고민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사내’다워야 하는 대상은 일본인, 일본사회, 일본국가에 한정되어 있고, 일본의 경계를 넘어서는 개인, 사회, 국가에 적용되지 않는다. 주체적 대상의 한계가 일본에 국한되어 있기에 그의 정치관은 자국중심적이다. 이시하라의 자국중심적 사고의 핵심은 ‘사내’답지 못해서 비판되는 대상이 일본인, 일본사회, 일본국가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외국인과 외국국가들을 주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외국인과 외국국가들에 대한 차별적 언급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 즉 외국은 기본적으로 일본과 동격으로 논의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 일본에 국한된 논의에서 나오는 파생적 결과의 대상일 뿐이다. 이시하라의 일본 내의 대중적 인기는 그가 외국인과 외국국가들에 각을 세우는 배타적 부분에서 기인한다기 보다는 일본 자체를 비판하는 점에서 기인한다...(계속)

6대 프로젝트

세부사업

미래 일본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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