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국제학부 러시아학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영국 글라스고우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특별연구원, 고려대학교 세계지역연구소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주요 연구분야로는 러시아정치 및 역사, 여성정치 등이 있다. 저서 및 편저로는 《러시아의 미래와 한반도》(2009, 공저), 《러시아의 선택: 탈소비에트 체제전환과 국가•시장•사회의 변화》(2006, 공저), 《한•러관계사료집 1990-2003》(2005, 공저), “러시아 체제전환:민주화 이행과정에서의 시민사회의 역할과 한계”(2012), “스탈린의 산업화 전략과 소련 공산당 기능의 변화, 1928-1932: 레닌그라드의 사례연구”(2002) 등이 있다.

 

 


 

 

I. 머리말

 

1969년 소련 외교에서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모스크바와 워싱턴 간 비밀외교루트(back channel)가 만들어지고 전략핵무기제한협정(SALT) 교섭이 시작된 것, 서독에서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집권하자 서독과의 불가침조약 교섭에 들어간 일, 그리고 우수리 강 다만스키 섬에서 중소간 무력 충돌이 발생한 것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은 1970년대 소련 외교의 방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즉 소련은 미국 및 서유럽에서 적극적인 데탕트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중국과의 분쟁을 해결하지 않은 채 방치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중소 분쟁이 제공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국을 끌어들여 미중 화해라는 극적인 변화를 도출해냈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 전반 데탕트 시기에 일어난 일련의 국제정세 변화는 냉전을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기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정책으로서의 데탕트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고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더불어 끝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데탕트 시기에 이루어진 미중 화해 및 국교정상화는 1980~199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의 중국의 부상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세계질서 재편에 중요한 초석을 놓은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1970년대 당시 미국과 더불어 세계의 슈퍼파워로 전세계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소련은 데탕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미중 화해를 얼마나 자국에게 위협적인 사건으로 이해했었는가? 소련은 중국의 부상 가능성을 간과하였던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렇게 오판을 하였던 것인가? 본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1970년대 전반기 소련 지도부의 대외 인식과 외교 정책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1970년대 소련 지도부의 대외 인식이나 외교정책 결정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러시아 내부 1차 자료를 활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적, 재정적 제약으로 인하여 본 연구는 2차 자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데탕트 시기의 국제관계를 보여주는 1차 자료로는 러시아연방대통령문서고(APRF), 러시아연방외교정책문서고(AVPRF) 등이 소장하고 있는 회의록 및 공식문서 , 1971년과 1976년에 각기 열렸던 24차, 25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 회의록, 소련 정부 및 공산당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였던 프라브다, 이즈베스치아 등의 신문 사설 등이 존재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 중 소련공산당 전당대회 회의록만을 참조하였다.

 

한편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가 제공하는 웹사이트(The National Security Archive), 미국 우드로윌슨센터의 국제냉전사프로젝트(CWIPH: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등에서 러시아 문서고의 일부 자료와 미국 국무성 등의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 외에 미국에서 출간된 냉전사 관련 단행본들도 본 연구에 주요 자료를 제공하였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주미대사였던 도브리닌(Anatoly Dobrynin)의 회고록(Dobrynin 1995), 미국 및 러시아 문서고 자료를 활용한 냉전사 연구서(Zubok 2009), 키신저 회고록(Kissinger 1982) 및 녹취록(Burr 1998), 가토프 (R. Garthoff)의 데탕트 및 냉전사 연구(Garthoff 1994)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본 연구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전반기의 소련 지도부의 국제 정세관이나 대중국 인식을 살펴보기에는 자료가 여전히 부족하여 많은 부분에서 추측에 의존하거나 의문점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추후의 연구가 이를 보완하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II. 중소 분쟁의 심화와 소련 지도부의 대중국관

 

1969년 중소 국경 분쟁이 발발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소련과 중국 관계는 균열되기 시작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리 이후 견고해 보였던 중소 관계는 1950년대 말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1959년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의 중국 방문 이후 양국 지도자 간의 인신공격이 시작되었고,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毛泽东)은 후르쇼프의 소련을 마르크스-레닌주의 수정주의 세력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이에 소련은 중국에 근무하던 자국 전문가를 소환함으로써 중국 경제에 압박을 가하였으나, 중국은 ‘자력갱생’을 외치며 소련과는 다른 사회주의 길로 들어섰다.

 

이처럼 중소 갈등 초기 양국의 대립 양상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갈등으로 비추어졌지만, 그 내면에는 현실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Zang 2010; Radchenko 2010). 무엇보다 중국의 핵무기 개발 시도에 대해 소련이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중국의 소련에 대한 불만과 의혹이 커졌다. 소련은 원자폭탄 기술의 중국 이전을 거부하였고, 1963년에는 미국이 제안한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중국의 불만을 샀다. 이에 더하여 후르쇼프의 스탈린(Joseph Stalin) 격하운동은 중국 내 마오쩌둥의 위상에 부정적 함의를 주는 것이었기에 마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몹시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1964년의 말리놉스키(Rodion Malinovsky) 사건 이후 마오쩌둥은 소련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한편 1965년 소련의 베트남 쿤밍 공군기지 건설계획,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사건 등은 중국 지도부가 소련의 대 중국 군사개입의 가능성을 실질적 위협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1969년에는 중소 국경에서 무력분쟁까지 일어났으니 소련과 중국의 양자 관계는 최저점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당시 소련은 왜 중국과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분쟁이 고조되게 만들었을까? 사실 소련이 중국 지도부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유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주복(Vladislav M. Zubok)의 연구에 따르면, 후르쇼프 실각 후 성립된 소련 집단지도체제 시기(1964-1968)에 소련 지도부는 소련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자본주의 서구와의 데탕트가 아니라 “형제”국가인 공산주의 중국과의 화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Zubok 2009, 197). 그러나 소련 지도부는 중국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격변 상황(문화혁명으로 치닫고 있는)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베이징의 소련 외교관들이 현지 상황에 대한 보고를 모스크바에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보고서는 적절한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이다. 1965년 체르보넨코(Stepan Chervonenko)를 대신하여 주중대사가 된 라핀(Sergey Georgyevich Lapin)은 냉소적인 당 관료 출신으로서 현지 상황에 대한 적절한 분석조차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Zubok 2009, 197). 한편 1965년 코시긴(Alexei Kosygin) 수상은 하노이 방문 시 2차례에 걸쳐 베이징을 방문하여 각기 저우언라이(周恩来)와 마오쩌둥을 만났으나 회담 결과는 낙담할만한 것이었다. 중국 대표는 매우 완고했고 이념적으로 공격적이었으며,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판하였다. 코시긴 수상은 베트콩에 대한 원조 문제를 두고서도 중국과의 정책 조정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1969년 중소 국경지역 분쟁 발발 초기 소련은 중국에 대해 군사•외교적 수단을 모두 동원해 대응하였다. 3월 최초의 교전 발생 이후 소련은 중국의 군사행동에 대해 군사보복을 가하는 한편, 코시긴 수상은 중국 지도부와 전화통화를 시도하였으나 중국 지도부는 정상적인 외교채널을 통해 연락을 하라며 통화를 거부하였다. 소련은 1964년에 중단된 중소 국경문제에 대한 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8월 중순 중국 신장과 카자흐스탄 간의 국경지역에서 갑작스럽게 발발한 교전 이후 소련의 태도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8월 28일 프라브다(Pravda)지는 중국의 모험주의로 인해 중소 전쟁이 발발한다면, 이것은 핵전쟁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와 더불어 극동•시베리아 지역 소련군 증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9년 25개 사단이었던 소련군은 1973년 45개 사단으로 증강되었으며 전술전투기는 200개에서 1200개로 증가하였고, 이 지역에 있었던 50여 개의 SS-4, SS-5 중거리 탄도미사일들은 120개의 신형 SS-11로 대체되었다. 이에 대해 가토프는 소련이 극동-중앙아시아 지역 내 모든 군사 전력을 증강함으로써 위기가 발생할 경우 유럽과 아시아 양쪽 2개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것을 결정했다고 해석하였다(Garthoff 1994, 231-232).

 

이처럼 소련은 외교적 노력을 포기하고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방향으로 대 중국 외교 정책 방향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는 국경분쟁 후 소련 지도부가 가지고 있었던 중국의 비합리적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이 주요하게 작동했다. 주복에 따르면, 당시 모스크바에서 다음과 같은 농담이 돌았다고 한다. “극동의 소련 사령관이 급하게 크렘린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5만 명의 중국인이 방금 국경을 넘어와 항복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Zubok 2009, 210) 종합적 국력에서나, 핵 전력에서나 전혀 비교할 바가 되지 않는 중국이 소련을 상대로 군사 분쟁을 일으킨 사실은 소련인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비합리적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소련인들이 중국을 두려워했다면 그것은 공격성(혹은 공격 능력)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비합리성”에 방점이 있는 것이었다.

 

결국 1969년 국경분쟁에 대한 소련 측 태도는 중국을 겁주어서 중국인들이 다시는 소련 국경에서 도발하지 못하도록 억지하는 것이었다. 1969년 코시긴이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났을 때, 저우언라이는 소련의 선제 핵 공격에 관한 “소문”을 언급하였고 당시 배석하였던 소련 외교관은 이를 중국이 소련의 핵 공격 가능성에 대해 매우 겁을 먹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이 소련에 대해 전쟁을 계획하거나 시작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하였다. 이 대화가 있은 후, 소련 지도부는 중국에게 위협적인 시그널을 다시 보냈고, 중국은 소련과의 비밀 불가침조약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핵 위협을 통해 중국을 억지하려는 소련의 전술은 잘해야 절반의 성공이었다. 소련의 핵 위협은 결국 중국 지도부로 하여금 미국과의 화해를 추구하고 북쪽의 북극곰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을 추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고전적인 의미의 안보딜레마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미중 화해를 주도했던 키신저(Henry Kissinger)의 녹취록을 보면, 소련의 군사적 위협으로 인해 야기되는 중국의 안보 불안감은 상당히 컸고 미국은 이를 중국을 미국 측으로 끌어당기는 카드로 사용하였다.

 

한편 소련 측의 중국과의 관계개선 노력이 1969년 중소 국경분쟁 발발 이후에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9년 코시긴 수상과 저우언라이 회담 당시 양국은 대사급 외교관 교환을 합의하였고 , 1970년 톨스티코프(V. S. Tolstikov) 소련 대사가 베이징에, 리힌구안(Li Xinguan) 중국 대사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양국 간 무역도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1972년에는 2억 9천만 달러 규모에 달하기도 했다(Garthoff 1994, 241). 그러나 양국 관계는 상호 불신과 적대감이 지배하였고, 결코 미중 화해가 그랬던 것처럼 전격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았다. 1972년 미중 화해 직후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는 삼각외교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중국에게 불가침 및 국경문제 해결을 위한 “건설적” 제안을 하였지만, 중국은 이미 더 이상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이 필요하지 않았다(Garthoff 1994, 242). 그 결과 데탕트 시기 내내 소련은 삼각외교에서 불리한 한 축으로 남게 된다.

 

III. 미중 화해와 소련 지도부의 국제정세 인식

 

그렇다면 소련 지도부는 중국이 소련에 대항하여 미국과 결속할 가능성에 대해 왜 우려하지 않았을까?.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자면, 첫째, 중국이 이념적 요인 때문에 미국과 결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가능성, 둘째, 중국이 미국과 화해하더라도 양국 간에 현존하는 현실정치적 문제 때문에 미중 화해의 실질적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가능성, 셋째, 미중 화해가 소련을 적대시 하는 군사적 동맹이 되지 않는 한 소련에 대한 위협 요인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가능성, 넷째, 중국 및 미국의 외교 현황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한 오판 가능성 등을 상정해 볼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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