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부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학교(Pennsylvania State University)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서울시립대학교 국제관계학과 조교수 및 부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주요 연구분야로는 국제기구, 한반도와 국제정치 등이 있다. 주요 논저로는 “안보위협을 대처하는 중소국의 선택” (2010), “Bargaining, Nuclear Proliferation, and Inter-state Dispute” (2009, 공저),《고위관료들, ‘북핵위기’를 말하다》(2009, 편저) 등이 있다.

 

 


 

 

I. 들어가며

 

1970년대 데탕트 국면에서 박정희 행정부의 국내정책과 대외정책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대외적으로 보면, 박정희 행정부는 북한은 물론 공산권과의 관계에서 유화국면을 조성하려고 노력했다. 한국 정부는 남북 사이의 무한경쟁에서 벗어나 통일을 염두에 둔 남북대화를 시도했고,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막지 않았으며, 심지어 공산권과 관계 개선을 도모했다. 반면, 국내적으로 한국 정부는 남북대결이 임박하며 국가의 생존이 위험에 처한 듯이 행동했다. 국군현대화계획, 자주국방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중화학공업 육성, 핵무기 개발 시도 등이 그 예이다. 더 나아가 “남북 대화의 적극적인 전개와 주변 정세의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선포된 10월 유신으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암흑기를 맞이하였다.

 

한국이 데탕트 국면에서 국내외적으로 상이한 행보를 보인 원인에 대한 논쟁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전통적인 견해와 공개된 사료에 토대를 둔 연구에 따르면, 박정희 행정부는 미군 철수와 북한의 도발로 인한 안보불안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내적 통합과 자주국방을 모색하였고(e.g. 김형아 2005; 마상윤 2003, 176-184) 이를 위한 시간을 벌고자 남북대화와 주변국과의 긴장완화를 모색하였다(e.g. 윤홍석 2004, 78; 중앙일보 특별취재팀 1998). 둘째, 박정희 행정부의 장기집권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는 데탕트 국면에서 존재했던 안보불안이 과장되었으며, 거대 성장한 군부세력이 안보불안을 활용하여 장기집권을 모색하였다고 해석한다(e.g. 김정주 2008, 483-48; 김지형 2008, 34-36; 임혁백 2004, 235-238; 홍석률 2010, 305-311). 셋째, 한국 내부의 사회적 모순과 경제성장 경로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는 유신체제를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한 강제적 자본집중과 동원의 기제로 파악한다(e.g. 강민 1983, 353-360; 한상진 1988).

 

이 글은 1960년대 남북한 집권세력의 국가전략에 초점에 맞추어 데탕트 국면에서 남북한의 선택을 조망한다. 이 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국가전략이 엇박자를 보이는 현상을 기술한다. 1950년대 이승만 행정부는 실체가 없는 북진통일론을 내세우면서 군비보강에 국력을 투여하였다. 반면, 북한은 ‘민주기지노선’을 내세우면서 전후 복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남북한의 중점 영역이 뒤바뀌었다. 군사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행정부는 “조국 근대화”를 국가 목표로 정립한 후, 경제성장에 국가 재원을 투자하였다. 반면, 북한은 “병진노선”을 채택하여 국가 재원을 국방비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남북한의 국가전략이 엇박자를 보이면서, 남북한은 진실된 화해를 위한 접점을 찾지 못했다. 둘째, 데탕트 국면에서 박정희 행정부의 위기 인식을 검토한다. 북한과의 대결, 국내 경제성장전략의 단점, 국내정치적 취약성으로 인하여 이미 잠재적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박정희 행정부는 주한미군의 철수 상황에서 심각한 위기감을 가졌다. 셋째, 데탕트 국면에서 박정희 행정부의 생존전략을 항목별로 검토한다. 박정희 행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위험성, 북한의 도발 가능성, 경제성장의 지체, 국내 정치세력의 반발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주국방, 중화학공업 육성, 외교 공세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북한이 도발하지 않으리라 기대하면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박정희 1975/1/14 국가기록원; 국토통일원 1985; 국토통일원, 670). 마지막으로 박정희 행정부의 위기 요인과 대처 방식, 박정희 행정부의 대응책이 남긴 유산을 검토한 후, 현재 한국의 정치세력에 주는 교훈을 정리한다.

 

II. 민주기지 vs. 북진 통일

 

이 절은 1950-1960년대 초반 엇박자를 보인 남북한의 국가전략을 기술한다. 1950년대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후원 아래서 전후 복구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을 추진한 반면, 한국은 북진통일론을 채택하였다. 이 시기 북한은 성공적 전후복구와 한국의 경제문제로 인하여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한국은 북진통일을 구호로 외쳤지만 분단상황을 관리하는 데에서 열세에 놓였다.

 

(1) 북한의 선경(先經) vs. 한국의 북진통일

 

1953년 6.25 전쟁이 멈춘 후, 남북한은 상이한 국가전략을 채택하였다. 북한은 ‘민주기지노선’을 천명하면서, 전후 복구에 집중했다. 1954년 11월 3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에서 김일성은 통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국토통일원 1985a, 261).

조국통일을 위하여 우리는 두 가지 방면에서 일을 잘 해야 하겠습니다. 한 방면으로서는 남조선인민들에게 꾸준히 우리 당의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미제와 리승만 역도를 반대하여 궐기하도록 해야 하며 다른 방면으로는 북반부 민주기지를 더욱 철옹성같이 강화해야 합니다.

민주기지 노선은 북한의 경제건설에 초점을 맞춘다. 김일성은 (1) 북한을 “낙원”으로 만들 정도로 민주기지를 경제적으로 강화하면, (2) 남한 주민이 북한을 동경하고 남한에서 혁명기세를 높일 수 있고, (3) 북한의 물질적 토대와 남한의 노동운동이 결합되면 통일에 이른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김일성 1957/8/25 국토통일원 1985a, 341). 즉, 민주기지 건설은 한반도에서 “모든 정세변화의 기본적 요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김일성 1957/9/20 국토통일원 1985a, 345). 북한은 민주기지에서 통일로 이어지는 3단계 논리 아래에서 경제건설에 집중했다. 북한은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전후복구 3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시기 북한은 구소련으로부터 10억 루블의 경제원조, 중국으로부터의 식량원조, 그리고 북한 주민의 동원을 통하여 괄목할 만한 전후 복구를 이루어냈다. 1955년에는 6.25 전쟁 이전의 경제생산능력을 회복하였다(강인덕 1974상, 468).

 

북한은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인민경제발전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다. 김일성은 1차 5개년계획의 중심과업을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닦으며 인민들의 의식주를 기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즉, 사회주의적 경제발전을 위한 중공업과 주민들의 소비품을 공급하는 경공업을 균형적으로 발전시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천명한 것이다(김일성 1981a, 106-107). 북한의 1차 경제계획은 외형상 성공을 거두었다. 공업부분의 연평균 성장률은 36.6%였고, 농업부분에서도 수리화, 전기화, 기계화가 진행되었다. 식량문제와 의식주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선언할 정도였다(김일성 1981b, 157-18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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