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대 국제학부 부교수. 마상윤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과정을 마친 후 영국 옥스포드대학에서 196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국내정치개입에 대한 연구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대 국제교류처장을 역임하였으며, 미국 부르킹스연구소 및 우드로윌슨센터에서 방문학자로 선발되어 연구하였다. 주된 연구분야는 미국외교정책, 한미관계, 냉전외교사이다. 최근 출간된 논문으로는 “한국군 베트남 파병결정과 국회의 역할,”“1970년대 초 한국외교와 국가이익: 모겐소의 국익론을 통한 평가,” “‘특수관계’의 해부: 영국 블레어 정부의 자유국제주의 대외정책과 영미관계,” “오바마 행정부의 안보전략과 한미동맹: 현실주의 역외균형론을 넘어서” 등이 있다.

 

 

 


 

 

 

I. 머리말

 

 

미국과 중국은 아시아 냉전의 주요 당사국이었다. 두 나라는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기까지 했으며, 그만큼 양국 간의 상호불신과 경계심은 대단히 컸다. 미국에서 중국은 소련보다도 더 교조적인 공산주의 국가로 인식되어왔으며, 냉전의 상황 하에서 적대적 국가와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냉전적 불신과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1970년대 초 관계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72년 2월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중국방문은 그 하이라이트였는 바, 이로써 미중관계 개선은 데탕트기 국제정치에서 가장 주목 받는 사건이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1970년대 초 데탕트 국면에서 미국이 중국에 접근하여 외교적 관계를 개선하고자 시도하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그 교섭의 과정을 검토하며, 아울러 미중 접근의 국제정치적 결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다. 미중 양자관계는 <미국뿐 아니라 중국의 시각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으나, 이 글은 미국외교에 주로 초점을 맞추면서 다음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미국은 어떤 이유에서 냉전 대립의 주된 당사국이었던 중국과 관계개선에 나서게 되었는가? 적성국과 관계를개선하기 위한 교섭과정에서 나타난 어려움은 무엇이었으며, 미국은 이를 어떻게 극복하려 했나? 이 과정에서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Henry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미중교섭의 결과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오늘날 미국 외교 및 미중관계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미중관계 개선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그 자체로서 충분히 의미 있는 역사연구의 대상이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력적인 연구주제이다. 1970년대 초 미중관계의 일대 변화가 오늘날의 미중관계와 그에 따른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첫째, 오늘날의 국제정치는 중국의 급속한 부상과 함께 미국의 상대적 쇠퇴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물론 미국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회복에 가장 큰 국정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 대외정책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Nasr 2013). 그런데 이와 같은 미국 국력의 상대적 쇠퇴는 1970년대 초에도 비슷하게 관찰되었던 바, 당시에 미국이 여기에 어떻게 외교적으로 대응했는가는 오늘날 미국의 대외전략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기준점을 제시할 수 있다.

 

둘째, 오늘날 국제정치의 가장 큰 화두는 미중관계의 향방이다. 과연 기성 패권국인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과 대결로 치닫고 있는가? 아니면 양국은 앞으로 보다 협력적 관계를 구축하고 강화하게 될 것인가? 미래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이상 이 질문에 대해 주관적 의견 이상의 대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70년대 초 미국이 외교적 접근을 통해 공산주의 적성국이었던 중국을 “암묵적 동맹”(tacit ally)으로 변화시켰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오늘의 문제를 간접적으로나마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을 제공한다. 1970년대 초에 제시된 미중관계 방정식의 난이도는 오늘의 문제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당시의 해법에 대한 연구는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고 또한 미래를 전망하는 데 어느 정도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초의 미중관계와 양국 교섭에 대해서는 영미학계에서 2000년대 중반 이후에야 기밀 해제된 외교문서를 기초로 한 연구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국내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물론 1970년대 초의 미중 데탕트가 당시 한국의 정치 및 국제정치에 직간접적으로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의 정치와 외교를 다루는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미중관계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진 경우는 있다(홍석률 2012). 하지만 미중관계 자체가 연구의 주된 대상으로 설정되었던 경우는 없으며, 이런 점에서 본 연구가 우리 학계의 현대 미중관계사 연구에도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II. 미중 데탕트의 기원

 

 

1. 미국의 상대적 쇠퇴

 

 

1969년 1월 닉슨이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닉슨은 반공주의자로 유명했다.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행정부의 부통령을 지냈던 시기부터 이미 그는 반공주의자의 이미지를 확고히 굳혔다. 닉슨은 또한 현실

주의자이며 국제주의자였다. 그는 국제정치가 기본적으로 힘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굳게 믿었으며, 미국이 국제질서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미국과 국제질서는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었으나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피로를 가중시켰다. 1965년 존슨(Lyndon Johnson) 행정부가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 무렵 그 누구도 전쟁의 장기화를 예상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대규모 정규 병력을 투입한 만큼 공산세력은 곧 소탕될 것이고 베트남과 인도차이나반도 그리고 나아가 동아시아에서의 반공전선은 유지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미국은 수렁에 빠져든 듯 했다.

 

1968년 말까지 미국은 536,000명의 베트남 참전병력 중 30,500명의 전사자를 냈다. 165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남베트남 및 북베트남에 쏟아 부었고, 500여대의 항공기가 손실되었다. 연간 200억 달러에 달하는 전쟁비용도 무시 못 할수준이었다.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은 1966년 7.9 퍼센트에서 1967년 9 퍼센트, 그리고 1968년 9.7 퍼센트로 늘어만 갔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경상수지적자와 이에 따른 금 해외유출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베트남전쟁에 따른 재정지출증가는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금 유출이 지속되었고, 인플레 압력 또한 높아져서 1968년 미국 경제는 연 5 퍼센트에 이르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되었다(Young and Kent 2004, 348-349).

 

국내정치적으로도 반전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본래 미국 시민들은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참전 결정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반전운동이 나타나고 확대되었다. 특히 1968년 음력설을 맞아 전개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대대적 공세는 공산세력의 건재를 과시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미국여론의 전환점이 되었다. 기성질서에 대한 청년층의 반감과 저항이 표출되었고(Gaddis 2010, 14), 이에 동조하는 여론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1960년대 말 미국은 국내적으로 가중되는 정치 및 경제적 어려움을 맞이하고 있었다.

 

국제질서 또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특히 국제적 세력균형 변화가 중요했다. 첫째, 서유럽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파괴를 딛고 경제적 부상을 이루었다. 이중 프랑스와 독일 같은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커진 경제력과 자신감을 배경으로 보다 독자적인 외교행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은 독자노선을 추구하면서 1966년 나토(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를 탈퇴했다. 독일도 1966년 12월 기독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대연정이 성립된 이래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외상의 주도 하에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개선을 추구하는 동방정책(Ostpolitik)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는 서방의 단결력 약화를 우려하게 되었다.

 

둘째, 미국의 입장에서 더욱 중요한 국제적 변화는 소련의 군사력 강화였다. 소련은 1960년대 중반 이후 핵전력 및 운반능력 확충에 집중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1968년경에는 미국과 대등한 수준의 전략무기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미소가 모두 상대방에 대한 제2차 공격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하영선 1989, 232). 이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 상실을 의미했다.

 

물론 소련도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경제침체가 계속되었고, 공산권 내부의 분열도 표면화되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루마니아가 독자노선을 추진했고, 후술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국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즉 미국의 국력만 일방적으로 약화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이 국제적 위상의 상대적 약화를 겪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도 회복을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1969년 출범한 닉슨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닉슨은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의 국제정치학 교수였던 키신저(Henry Kissinger)를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했다. 키신저가 공화당을 지지하고 국제문제에 정통한 학자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그의 임명은 다소 의외로 여겨졌다. 키신저는 닉슨이 아니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록펠러(Nelson Rockefeller)에게 오랫동안 정책자문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닉슨과 키신저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며 또한 국제주의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둘은 또한 공개적인 외교 접근보다 은밀한 협상을 통한 타협을 선호했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공식적 관료조직을 거치지 않고 계통을 뛰어넘어 일을 진행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미국의 상대적 쇠퇴를 특징으로 하는 국제적 환경변화 속에서 어떻게 하면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미국의 국익을 확보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함께 직면해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외교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Hanhimäki 2013, 37-39).

 

미국이 처한 국제정치의 환경 변화에 닉슨과 키신저는 어떻게 대응하려 했을까? 이와 관련해서 닉슨과 키신저가 최고정책결정자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남긴 연설과 글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닉슨은 1967년 7월 29일 보헤미안클럽에서 한 연설을 통해 미소 데탕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국제적 세력균형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련이 핵무기 톤수에서 미국을 앞서기 시작했고, 운반수단에 있어서도 1970년에 이르면 미국과 대등해질 것이며, 중국도 곧 핵 운반능력을 갖출 전망이라고 지적했다. 닉슨은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투자에 나서야 하며, 소련과 비교해 대등한 핵전력만 보유해도 충분하다는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닉슨은 경제적으로 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보았고, 외교적으로도 “소련 지도자들과 대화를 통해 오판의 가능성을 줄이고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영역을 모색하여 긴장을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닉슨은 또한 1967년 10월 외교 분야의 유력 시사매거진 <포린 어페어즈> (Foreign Affairs)에 기고한 “베트남 이후의 아시아”(Asia after Vietnam)라는 에세이를 통해 새로운 아시아정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닉슨은 미국이 장기화 되는 베트남 전쟁에 사로잡혀있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면서 미국 외교가 베트남에서 벗어난 새로운 아시아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의 아시아는 스스로 안보를 위해 노력해야”하며 미국은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후일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으로 정식화되었다. 이 글에서 또한 주목할 내용은 중국에 대한 것이었다. 닉슨은 10억 인구의 중국이 영원히 국제적 고립 상태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국가를 위협한다면 세계도 안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중국을 국제사회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Nixon 1967, 113-125; U.S. Department of State 2003b).

 

키신저는 1968년에 출간된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 쟁점들”(Central Issues of American Foreign Policy)이라는 에세이에서 미국 외교의 기본과제를 새로운 다극질서의 출현이라는 국제정치의 구조적 변화에 창조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미소 양극질서가 군사적으로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다극질서로 변화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키신저에 따르면 정치적 다극질서 하에서 미국은 더 이상 압도적 힘을 바탕으로 국제질서의 안정을 주도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은 여전히 물리적으로는 초강대국이지만 미국의 역할은 정치적 차원에서 여타 강대국들의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데 있다. 키신저는 또한 미국이 다른 강대국들과 국제질서의 성격에 대한 합의를 형성함으로써 국제적 안정을 도모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 스스로의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 키신저는 미국이 이런 역할을 담당하려면 외교적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외교가 도덕주의적이고 법률주의적 경향을 띄는 국내여론에 지나치게 얽매여서는 곤란하다는 의미였다(Kissinger 1968; U.S. Department of State 2003c).

 

닉슨과 키신저의 정세인식은 닉슨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키신저는 1969년 12월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미국외교의 기본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미국 외교정책을 새로운 기반 위에 세워야 하는 시점에 놓여있습니다. 전후 20년간 미국외교는 마샬플랜(Marshall Plan)을 이끌었던 원칙에 따라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크게 변했습니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다른 국가들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그들은 자신감을 되찾고 있습니다. 신생국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더 이상 단일한 세력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보다 덜 일방적으로 미국적인 기반 위에 국제관계를 건설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U.S. Department of State 2003d).”

 

1970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의회에 제출한 “1970년대 미국외교정책: 평화를 위한 새 전략”(U.S. Foreign Policy for the 1970s: A New Strategy for Peace)이라는 보고서에도 키신저의 구상이 반영되어있다. 닉슨은 이 보고서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어왔던 국제정치질서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평화의 구조를 갖추기 위한 원칙으로 다른 국가들과 맺은 파트너십(partnership), 미국의 힘(strength), 그리고 협상의지(willingness to negotiate)를 꼽았다(U.S. Department of State. 2003e).

 

요컨대 닉슨과 키신저는 미국의 상대적 쇠퇴를 맞이한 가운데 이에 외교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대외전략을 구상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련과 경쟁을 완화하여 여러 국내외적 곤란을 타개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소련과의 냉전적 대결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닉슨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지킬 수 있는 투자를 강조했다. 장기적 차원의 대립을 전제한 상태에서 이를 위해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가 강했던 것이다.

 

새로운 전략구상에는 대외개입 특히 아시아지역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국력 및 위상에 끼친 악영향을 고려할 때 이로부터 명예롭게 탈출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정책목표로 오른 점은 놀랍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닉슨은 중국과 관계 개선이 필요함을 또한 강조했다. 이는 국제질서가 미국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양극질서에서 다극질서로 변환하고 있다는 키신저의 인식과도 어우러질 수 있었다. 키신저의 주 관심은 유럽 및 소련과 미국의 관계여서 그가 닉슨만큼 중국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키신저는 미국 단독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 간 힘의 역학관계를 이용한 국제관계 관리를 구상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당시 악화일로에 있던 중소관계는 미국 외교 전략에 있어서 중요한 기회로 포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MacMillan 2008, 109)...(계속)

6대 프로젝트

세부사업

미중경쟁과 한국의 전략

국가안보패널

Related Public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