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여자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중국 북경대학교 국제관계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통일부 정책자문위원과 현대중국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동아시아연구원 중국연구 패널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중국 대외관계, 중국 소수민족, 중국의 민족주의 등이다. 최근 연구로는"시진핑체제 외교정책의 변화와 지속성,"  "중국 민족주의 고조의 대외관계 및 한중관계 영향," “China’s policy and influence on the North Korea nuclear issue: denuclearization and/or stabil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중국 미래를 말하다》(편저), 《중국의 영토분쟁》(공저), 등이 있다.

 

 


 

 

 

 

 

 

I. 서 론

 

2012년 2월 시진핑(習近平) 당시 중국 부주석은 미국을 방문하여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 라는 중미관계의 새로운 구상을 제시했다. 1972년 2월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통해 미중 데탕트의 새로운 역사를 창출한지 40년이 되는 시점에 공교롭게도 중국이 선제적으로 중미간 ‘신형 데탕트’를 제안한 것이다. 시진핑은 방미중에 40년 전 닉슨의 중국 방문이 수십 년간 양국을 단절시킨 두꺼운 얼음벽을 깨트린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미중이 21세기 두 번째 10년을 맞이하는 새로운 시기에 ‘신형대국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하자는 화두를 제시한 것이다.

 

시진핑이 구상하고 있는 신형대국관계의 속내는 “중국은 미국이 아태지역의 평화, 안정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환영하며, 동시에 미국이 중국과 역내 국가들의 이익과 관심을 분명하게 존중해주기를 희망한다”는 시진핑의 언급에서 엿볼 수 있다(<中国日报网> 2012/02/16). 요컨대 아태지역에서 상호 핵심이익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공존•공영하자는 것이다.

 

40년 전 중국은 미소 양 초강대국으로부터 협공의 위협에서 탈출하고자 미국의 데탕트 제안을 수용하는 전략적 도박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중국은 자국의 부상 일정을 완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특히 반(反)중국 연대 형성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미국에게 새로운 데탕트를 제안하고 있다.

 

40년 전 중국이 두려움과 의구심 속에서 미국이 내민 데탕트 손길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역으로 미국과 국제사회가 중국이 내민 신형대국관계라는 새로운 데탕트 제안에 의구심을 가지고 주저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 글은 2012년 중국이 제안한 신형대국관계가 어떠한 의도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중국의 부상과 새로운 데탕트 제안이 국제질서와 세력관계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할지, 그리고 미중의 신형대국관계 논의가 한반도에는 어떠한 함의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현재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40년 전 역사적 사건을 복기하려는 것이다. 1972년 전후의 역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재검토가 현재의 문제에 분명한 해답을 주지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역사적 맥락에서 중국의 의도와 전략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중국 역시 1972년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고자 하는 만큼, 2012년 중국이 제안한 신형대국관계가 40년 전과 비교하여 어떠한 변화와 연속성이 있는지 발견하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 글은 1972년 상해공동성명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한 중국의 렌즈에 초점을 맞춰 복기하고자 한다. 우선 중국이 어떠한 국내외적인 배경과 인식에서 미국의 데탕트 요구에 응답하게 되었는지를 재검토한다. 둘째, 보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중국이 1969년부터 1972년 약 2년여의 기간 동안 미국과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내부적 논의와 전략적 판단을 가지고 협상을 진행했는지를 검토한다. 끝으로, 이러한 복기를 바탕으로 중국에게 1972년의 역사적 경험이 현재에 어떤 영향과 의미를 가지는지 탐색한다.


II. 냉전시기 중국 ‘반패권주의’ 외교의 의미

 

냉전시기 중국외교는 이데올로기와 안보가 주요한 동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은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한 직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양극체제가 고착화되는 국제환경에 직면하여, 외교정책을 결정할 때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주의주의(主意主義)를 통해 혁명의 열기를 국가통치의 주요 근간으로 견지해왔던 마오쩌둥(毛澤東)의 입장에서 1960년대까지 대외관계에서 세계 공산주의 혁명과 이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태생적 대외정책 목표의 하나였다. 따라서 중국은 건국과 함께 소련과 동맹을 맺어 ‘소련 일변도’(對蘇一邊倒) 외교를 전개하고, 제3세계 국가 내 공산당 또는 친공세력의 민족해방운동과 혁명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냉전시기 중국이 세계혁명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표방하기는 했지만 실제 대외정책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국가 안보였다.  이는 냉전시기 중국 외교전략과 외교이론의 변화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냉전기 중국 외교전략의 변화에 따른 시기 구분이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매 10년 단위로 변화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른바 ‘외교이론’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는 양대진영론에 따른 소련일변도외교, 1960년대에는 세계혁명론에 근거한 반제반수(反帝反修)의 반미반소전략(反美反蘇戰略), 그리고 1970년대 3개 세계론을 기치로 한 반소 국제통일전선전략으로 변화가 진행되었다. 

 

중국은 안보에 최대의 위협이 누구인가 하는 판단을 바탕으로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우적(友敵)을 명확히 구분하는 ‘우적개념’(友敵槪念)의 변화에 따라 대외정책을 결정하였다. 냉전시기 중국이 대외 관계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주된 이데올로기였던 ‘반패권주의’ 역시 주변 안보환경에 대한 중국지도부 인식의 표출이었다. 즉 반패권주의의 주 대상은 수사적인 의미나 내용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해도 실질적인 내용상 항상 중국의 주된 위협세력이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건국 직후인 1950년대에 마오는 혁명시기부터 누적된 소련과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반미(反美)•반패권주의를 주창하고 소련과 동맹조약을 체결하며 전폭적인 소련일변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당시 최대의 위협으로 인식했던 미국으로부터 제기되는 안보 위협을 상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오의 입장에서 미국은 국공내전 중에 국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내전종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대만의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고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을 펼친 주적(主敵)이었다. 심지어 한국전을 통해 직접 교전을 벌이기도 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다.


1960년대 소련과 불거진 갈등이 국경분쟁으로까지 악화되자 미국에 더하여 소련에 대한 위협인식까지 고조되었다. 이로인해 대외적으로 세계혁명론과 반미 제국주의, 반소 수정주의 기치를 내세우며 미국•소련 양 초강대국 모두를 패권주의로 규정하고 이 들 양 강대국에 대항하며 독자노선을 견지하는 외교전략을 전개했다. 세계혁명론 자체는 이데올로기 성향이 강한 담론이지만, 실제로는 당시 대소련 관계악화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관계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불가피하게 ‘두 개의 전선’(兩條線)이 형성되어 협공의 위협에 직면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수사적 성격이 강하다(张小明 1997, 7-10).

 

중국은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의 극심한 혼돈기를 거치며 1970년대에 외교적 고립과 위협에서 탈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3개 세계론’을 주창하며 미소 양 패권국에 대항할 수 있는 견제세력으로 제3세계국가들과 반패권 통일전선을 기치로 관계발전을 모색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1969년 소련과 국경충돌을 경험한 중국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위기의식이 최고조에 이르며 소련을 최대의 위협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중국은 소련의 위협을 상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미국과 관계개선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즉 당시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있던 미국보다는 소련이 더욱 현실적 위협이라는 인식하에 미국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이른바 반소패권주의의 ‘연미항소’(聯美抗蘇) 전략을 전개해 갔다.

 

이와 같이 중국은 냉전기간 사실상 안보적 고려에 의해 미소 양극체제와 이른바 미-중-소 전략적 삼각관계라는 초강대국 관계에 깊숙이 개입되어 세계적 강대국이 아니면서도 마치 세계적 강대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처럼 냉전시기 중국 대외정책은 미소 양 초강대국 중에서 어느 쪽이 중국에 더 위협적인 존재인가 하는 판단을 기준으로 주적을 설정하고 이러한 주적으로부터 제기된 위협에 대항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외교는 표면적으로는 강대국 관계에 깊숙이 개입되어 마치 강대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상 내용적으로는 약소국 외교의 전형인 안보를 위한 반응적•수세적 양상을 띠는 기형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요컨대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던 냉전시기 전반에 걸쳐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반제국주의’, ‘반수정주의’, ‘반패권주의’ 등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대외전략 기치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본질적으로는 마오 등 주요 지도자들의 안보위협에 대한 인식이 대외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로 작동했다. 당시 마오의 안보위협 인식은 실체보다는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었으며,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2만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장 국경을 지닌 취약한 물리적 안보 환경, 소위 ‘100년 치욕’ 로 대변되는 근대 피침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내부 체제 및 국력의 취약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50년대 결과적으로는 매우 이례적이었던 소련과 동맹조약 체결을 통한 일변도 외교를 선택하여 국가발전과 안보 이익 확보를 추구했고, 1960년대 외교적 고립을 경험한 이후 1970년대 초 냉전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주적이었던 미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안보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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