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전략연구소(INSS) 책임연구위원. 북한과 한반도 관련 정책 개발에 대한 자문을 맡고 있다. 통일부 정책보좌관(2006),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행정관(2003-2006년)을 역임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한국외교사, 한국외교정책, 동아시아 국제관계 등이다. 주요 논저로는《유교적 사유와 근대국제정치의 상상력》, “한국의 근대국가 개념 형성사 연구”, “환재 박규수와 시무의 국제정치학”, “김정은 시대의 북한과 대북정책 아키텍처”, “North Korean Nuclear Threat and South Korean Identity Politics in 2006,” “Rebuilding the in-ter-Korean Relations,” “Understanding the Dokdo Issue,” “2013년 북한의 전략적 선택과 동아시아 국제정치,” “청대 한국의 유교적 대중전략과 현재적 시사점” 등이 있다.

 


 

 

I. 북한식 판 읽기와 전략적 선택

 

역대 북한 정권의 노선은 국내정치 및 국제정치적 수요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주체노선’은 내부적으로는 1950년대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연안파, 소련파 등 정적을 제거하고 김일성의 권력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외부적으로는 냉전과 1950~60년대 중소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북한의 외교 자원을 극대화하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김정일의 ‘선군노선’은 19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을 강행해야 할 정도로 취약했던 북한 체제의 위기 속에서 가장 의존할만한 세력인 군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동시에 선군노선은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한·소수교, 한·중수교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치 환경이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핵을 체제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내포한 것이었다.

 

김정은 정권이 내세운 ‘병진노선’ 역시 2012년 이후 북한 체제가 직면한 국내외적 도전들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선군노선이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한계를 직시하여 다양한 개혁조치로 경제의 활력을 제고하는 동시에 기성 세력과 신흥 세력의 갈등을 미연에 봉합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말하자면 ‘병진노선’은 상호모순적 수요를 봉합하기 위한 솔루션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등 대국들을 대상으로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아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렇듯 역대 북한 정권의 노선은 대개 북한 체제가 당면한 국내정치 및 국제정치적 상황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본 연구는 그 중에서 주로 국제정치적 측면을 다루고자 한다. 즉, 국제정치에 대한 북한식 판 읽기와 대응이 얼마나 정확하고 성공적이었는가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이른바 미·중시대의 단초가 형성되기 시작한 김정일 정권 말기부터 오늘날 김정은 정권까지, 대체적으로 2009년부터 2013년까지를 다룬다.

 

결론부터 말해서 김일성의 주체노선과 김정일의 선군노선이 일정하게 국제정치 흐름에 조응하는 판단을 토대로 적어도 북한 체제의 생존을 확보하였다고 한다면, 김정은이 지난 2년여 동안 보여준 모습은 그다지 스마트해 보이지는 않는다. 주체노선과 선군노선이 나름대로 장기간 숙성된 전략적 선택이었다면 병진노선은 매우 급조되고 설익은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병진노선의 대외적 유용성은 한국, 미국, 중국 등 주변국들의 동시 거부로 처음부터 실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김정은 정권은 주변국들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2012년 12월 장거리 로켓 발사와 2013년 2월 3차 핵실험을 강행하여 주변국 신정부들의 대응 의지를 시험하였으며,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뒤따르자 급격히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며 한반도 전략구도의 현상변경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2013년 들어 수개월간 지속되었던 북한의 소위 “판가리” 시도는 전략적 실패로 판가름 났으며, 미·중 중심의 대국정치에 대한 북한의 무모한 도전은 굴욕적인 특사 외교와 대화 구애로 귀결되었다.

 

본 논문은 지난 수년간 북한이 보여준 북한식 판 읽기와 대응 과정을 복기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국제정치적 현실에 조응하고 있는지 평가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이 시기가 이른바 미중시대의 도래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북한의 미중 읽기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또한 미·중시대의 도래라는 시기적 변수를 고려하고 김정은 정권과의 비교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김정일 정권 말기부터 검토하기로 한다.

 

II. 김정일의 마지막 3년: 저무는 선군시대와 생존 외교

 

김정일은 2008년 하반기부터 지병인 뇌경색으로 인해 건강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 본인의 살아생전 업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안정적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작업을 서두르게 된다. 김정일은 선군시대의 최대 업적을 우주개발과 핵보유국 지위 획득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우선 이를 공고화하는데 주력했다. 소위 2012년 김일성 탄생 1백주기, 강성대국 원년의 해를 맞이하기 이전에 자신의 치적을 충분히 쌓아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북한이 2009년을 “혁명적 대고조”의 해로 명명하고 제2차 핵실험을 강행한 주된 배경이었다.

 

2008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소위 불량국가들과의 직접 대화 의사를 표명한 오바마(Barak Obama) 대통령이 당선됨에 따라 북핵문제 협상이 가속화되리라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다. 비록 6자회담이 검증 문제로 2008년 12월 중단되기는 했지만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 협상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검토 과정이 끝나기도 전에 2009년 4월 장거리로켓을 발사하고 5월에는 2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는 북한의 국내정치적 수요가 그만큼 절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둘러 선군노선의 업적을 마무리하고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와의 협상은 2차 핵실험 이후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추진해도 늦지 않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말기에 접어든 김정일 정권의 이러한 행보가 국제정치적 상황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굉장히 민감한 반응이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김정은 정권 말기가 이른바 미·중시대의 단초가 형성되는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다. 2008년 미국의 리만브라더스 사태 이후부터는 세계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주요 20개국(Group of Twenty: G20)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등 신흥국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그 중에서도 국력이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역할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9년 들어서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등에 의해 주요 2개국(Group of Two: G2) 회의가 주창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개최된 미중 정상회담은 미중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미·중시대는 양국 간의 협력뿐만 아니라 경쟁도 동시에 격화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2009년 11월 정상회담 이후에는 오히려 갈등과 견제의 패턴이 부각되었다. 미중 양국은 2010년 이후 대만 무기판매, 달라이 라마 면담, 위안화 절상, 구글 문제 등 이른바 4대 현안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마찰을 노정했다.

 

이에 김정일은 중국의 국력 급신장과 더불어 미·중시대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지했으며 중국에 베팅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게 된다.  즉, 김정일은 2010년 이후 본격화된 미·중 간 갈등과 견제를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그 중에서도 2010년 5월 김정일의 중국 방문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이후의 대북제재와 외교적 고립 탈피와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지지 확보로 요약된다. 중국은 실제로 천안함 사건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사실상 북한을 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한미가 서해상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하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미중 간 경쟁과 견제 관계 속에서 중국에 편승하여 실익을 도모하고자 했던 김정일의 계산이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김정일은 5월 5일 후진타오(胡锦涛)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국력”을 거론하며 중국측을 치켜세웠으며 비핵화 공약과 6자회담 재개 의지를 표명하여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조선중앙통신> 2013/05/08). 2013년 8월 김정일이 4개월 만에 다시 중국을 방문한 것도 5월 방문과 동일한 맥락에서였다. 특히 북한은 동년 가을 제3차 노동당대표자회를 통해 김정은 후계구도를 공식화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얻는데 주력하였다. 결국 후진타오 주석은 8월 27일 환영 연회 연설을 통해 김정일이 4개월도 못 되는 사이에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대표하여 조선노동당대표자회가 원만한 성과를 거둘 것을 축원”함으로써 김정은 후계구도를 사실상 승인했다(<조선중앙통신> 2013/08/30). 미·중 간 갈등이 우세한 정세 속에서 강화된 북한과 중국의 전략적 동맹은 2010년 11월 연평도 사태에서도 재확인되었다. 중국은 북한의 선제 도발이 명백하고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태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으로 관련국들의 긴장고조 행위 자제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촉구하는 등 사실상 북한을 외교적으로 지원했다.


2011 년 1월의 미·중 정상회담은 미·중관계에서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할만 했다. 모두 6개 부문 41개항으로 구성된 방대한 공동성명이 상징하듯 양국은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합의를 도출했다. 2009년 11월의 공동성명은 미·중관계의 발전을 위한 “전략적 신뢰”를 강조하는데 머물렀으나 2011년 1월의 정상회담은 미·중관계를 “협력적 동반자관계”로 명확히 정의했다. 또한 양국은 서로 다른 정치체제, 역사문화적 배경, 경제발전 수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긍정적, 협력적 관계의 ‘사례’를 형성했다고 평가하고 새로운 유형의 강대국 관계를 지향해 나갈 것임을 시사했다(The White House January/19/2011). 말하자면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 이후 미·중관계의 새로운 패턴이 시작되었으며 이른바 “신형대국관계”의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형대국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미·중 간의 협력적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이는 한반도 문제가 인권, 군사, 경제 등 여타의 핵심 이슈에 비해 미·중 간 합의 도출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1년 1월의 정상회담에서도 양국 정상은 이례적으로 한반도 문제 논의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남북대화와 6자회담 재개 등 한반도 문제에서의 합의를 정상회담의 핵심적 성과로 소개했다. 북한은 2011년 1월의 미·중 정상회담을 예의주시했으며 그 결과를 비교적 신속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했다(<조선중앙통신> 2011/01/22). 당시 북한은 미·중관계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협력 경향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중시대의 도래에 대응한 김정일의 선택은 북중관계 강화였다. 미중관계는 경쟁적 요소와 협력적 요소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어떤 경우이건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만이 북한 체제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김정일이 2010년 5월과 8월에 이어 2011년 5월까지, 일년 사이에 세 번째 중국을 방문했던 주된 배경이었다. 그의 마지막 중국 방문은 2010년 9월 당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체제를 공식화한 이후의 방문으로서 향후 김정은 체제의 안정을 위해 북·중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행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는 고리는 비핵화 공약, 그리고 경제중시 노선으로의 전환이었다.

 

김정일 체제하 북한은 2006년, 2009년 2차례에 걸친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비핵화 공약을 유지했다. 주지하듯이 김정일의 선군노선에서 핵심은 핵선군이었으며 반복적 기만 전술과 합의 파기로 진정성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비핵화 공약 자체를 폐기한 적은 없다. 6자회담을 통한 비핵화 공약은 중국의 지원을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으며 2010년 5월, 8월과 2011년 5월 정상회담에서의 핵심적 합의 사항이었다. 특히 2011년 5월 정상회담에서는 “전조선반도의 비핵화 목표를 견지하고 6자회담의 재개 등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며 장애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전반적 이익에 부합된다고 인정하면서 이를 위해 의사소통과 조율을 잘해 나가자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고 공언하는 등 매우 강한 톤으로 비핵화 공약을 재확인하였다(<조선중앙통신> 2011/05/26). 또한 김정일의 육성 신년사를 대신하는 신년공동사설은 2차 핵실험이 있었던 2009년을 포함하여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까지 한반도 비핵화 실현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김정일 생전 마지막 육성 기록인 2011년 10월 13일 이타르-타스 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위대한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우리 공화국 정부의 시종일관한 입장입니다”고 밝히고 있다(<조선중앙통신> 2011/10/19). 비핵화 공약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김정은 체제가 등장한 2012년 신년공동사설에서부터였다. 이어 2012년 4월에는 사회주의헌법 서문에 핵보유국을 명기하게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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