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겸 원장. 미국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도쿄대학교, 와세다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방문교수를 거쳤고, 현재 동아시아연구원 일본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주 연구분야는 일본 및 국제정치경제, 동아시아 지역주의, 글로벌 거버넌스 등이다. 최근 연구업적으로는 “지역공간의 개념사 : 한국의 ‘동북아시아’”, “한미FTA와 통상의 복합전략”, “동아시아에서 지역다자경제제도의 건축경쟁”, “Japanese Market Opening Between American Pressure and Korean Challenge” 등이 있다.

 

 


 

 

I. 들어가며

 

중화세계의 변방인 일본이 메이지유신과 근대화로 급부상하면서 시작된 중국과 일본 사이의 백년 경쟁은 1972년 국교정상화로 역사적 전기를 맞이하였다. 주은래(周恩來)의 표현에 따르면 진나라 이래 2000년의 우호관계란 긴 “정상상태”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신시대를 모색해온 양국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전략적, 군사적 경쟁을 벌이는 “비정상 상태”로 빠져들고 있고 따라서 동아시아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위협하는 주요인으로 자리잡았다.

 

1972년 이전 일본의 대중관계는 1945년 패전 6년후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동아시아에 냉전체제가 형성되면서 미국의 대중정책, 미일관계에 의해 구속받았다. 일본은 미국의 대중포위 전초기지화 압력에 직면하여 대만과 중국 사이에서 전자를 선택해야 했다. 1952년 대만(중화민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지만 대만과 국교관계를 기본으로 하되 대륙중국과는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경제적 관계를 축적해가는 실용주의 정책을 함께 펼쳤다. 그러나 1957년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수상의 타이베이 방문으로 중국은 정경분리 원칙을 파기하였다. 60년대 장기집권한 사토 에이사쿠(佐藤英作) 정권은 기본적으로 친대만파인데다가 당시 최대 외교과제인 한일 국교정상화교섭과 오키나와 반환에 몰두하여 문화대혁명으로 혼란스런 중국과 관계개선에 나서지 못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결정적으로 바꾼 역사적 사건은 1971-1972년 미중 데탕트이다. 전후 중일관계의 결정적인 장애요인이 미중대립이었기에 미중관계의 신국면이 열리면서 일본과 중국은 신시대를 열 기회의 창과 마주하게 된다. 중소관계의 악화에 따라 중국의 주적이 미국에서 소련으로 교체되면서 새로운 안보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중국 정부와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상대적 쇠퇴의 추세를 돌려놓으려는 미국의 닉슨(Richard Nixon) 정권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데탕트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1971년 7월 15일 키신저(Henry Kissinger) 방중 발표는 미국의 급속한 대중접근을 전혀 예상치 못한 당시 일본사회에 ‘닉슨쇼크’라 불릴 정도의 충격을 주었고 친대만, 친미성향 사토 정권의 정치적 기반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또한 10월 26일 중국대표권 문제 표결로 대만이 유엔(United Nations: UN)에서 축출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동시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선정된 사건은 국내정치적으로 일본에 큰 반향을 가져왔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변화 속에서 1972년 7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정권이 탄생하고 중일관계 개선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러나 정작 교섭을 주도한 측은 주은래(周恩來) 수상을 필두로 한 중국이다. 1971년 미중 간(키신저과 주은래) 진행된 상당히 솔직한 대화 속에는 주은래의 적나라한 일본관과 강한 대일경계의식이 표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본과 수교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전략적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일본은 무엇을 원하였는가? 중일수교가 갖는 역사적, 전략적 의미는 무엇인가? 기존의 여러 중일국교정상화 연구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해 왔다(Lee 1976; 金熙德 2002; 添谷芳秀 2003; 毛里和子 2006; 高元明生•服部龍二 2012; 손기섭 2012; 최은봉•오승희 2012). 이 글은 중일수교 교섭 과정에서 미중 양국의 대일전략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FRUS)와 일본측 수교교섭문헌으로 《記錄 考證 - 日中國交正常化ㆍ日中平和友好條約締結交涉》(石井明 外 2003) 두 일차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하여 중일접근이 썩 달가울 수 없는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 다루기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일본과 중국은 이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분석한 다음, 1972년 일-중-미 관계의 현재적 함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II. 중국의 대일전략

 

1971-1972년 미중 대화에서 일본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는 주은래이다. 그가 이 문제를 제기한 이유는 미국이 아시아로부터 철군하는 경우 일본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여기서 양국 지도자들이 토로한 대일전략은 대단히 흥미롭다. 주은래는 일본위협론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일본인에게는 팽창주의적 경향이 있다. 일본의 경제적 확장은 필연적으로 군사적 확장으로 이어질 것이어서 […] 미국이 아시아에서 군대를 모두 철수시키면 아시아를 통제할 전위로서 일본의 능력을 강화하는 게 미국의 목적인 것이 아닌가 (毛里 2004, 1971/07/09)

 

주은래는 “일본군국주의자의 야망”을 걱정했다. 일본이 대만으로부터 자국의 생명선인 말라카 해협까지 군사적으로 진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한국으로부터 미군철수 이후 일본군이 한반도로 진출하지 않을까 등 수차례에 걸쳐 우려를 표명한 후, 일본위협론을 간단히 펼친다. 일본의 천황제는 “군국주의를 지탱하는 시스템의 기초”로서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있으며 미국의 대일정책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이런 인식하에 미일안보체제 강화를 강하게 비난하였다.

 

주은래의 일본 군국주의론은 단순한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끊임없이 일본위협론을 제기하며 1970년대 초반 일본이 군국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음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이 전후 처리 과정에서 군국주의 세력과 절연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류 정치세력 즉,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주도한 보수본류는 전전의 군국주의 전통과 거리를 두는 한편 미일동맹으로 안보를 미국에게 위임하고 대신 경제성장을 신보수의 핵심 이념으로 삼고 매진하는 창조적 전략을 추구해 왔다는 점은 분명하다(Pyle 2008). 다만 1970년대 들어 사토 정권이 요시다 노선으로부터 탈선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 예컨대 1969년 닉슨-사토 코뮤니케와 당시 일본에서 진행 중이던 제4차 방위력정비계획 등을 전전회귀의 징표로 볼 수도 있었는데, 이조차 후일 역사를 비추어 볼 때 그릇된 판단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미일동맹과 전수방위의 틀 속에서 제한된 군비확장의 경우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래가 일본을 군국주의 부활로 경계하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대만문제에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이래 일본은 대만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사토 정권은 대만에 총액 1억5천만달러 규모의 엔 차관을 공여하여 대만의 수출지향형 산업화를 견인하였고 양국간 무역규모도 급속히 확대되었는데, 중국정부는 이를 “경제침략”이라 비난하였다. 안보 측면에서도 오키나와 반환을 확정한 닉슨-사토 코뮤니케 제4항에서 미일 양국은 대만지역에 대한 평화와 안전의 유지가 일본의 안전에 극히 중요한 요소라는 이른바 ‘대만조항’을 천명해 아시아지역 내 미국의 군사적 역할을 일본이 분담하려 한다는 인식을 중국에 줌으로써 반발을 샀다. 대만문제에 있어서 미국의 축소(retrenchment)에 따른 힘의 공백을 일본이 메울 가능성을 중국은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대만 등 이 지역에서 미국이 철퇴하기 전 일본의 무장세력이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일본과 대만은 장개석(蔣介石)이 맺은 조약, 이른바 평화조약을 유지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이를 강조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毛里 2004, 1971/07/07).

 

요컨대, 중국이 미중 데탕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중일국교정상화는 직접적으로 걸리는 과제가 아니었다. 반면, 미군철수에 의한 힘의 공백을 일본이 메우게 될 때 초래될 대만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고, 따라서 미국의 대만방위를 일본이 대신 담당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여 일-대만 관계를 단절시키는 과제가 중요하게 떠오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일본의 잠재적 위협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했다.

 

주은래의 집요한 일본위협론에 키신저는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내가 대학에서 가르친 이론에 따르면 우리[미국]가 일본으로부터 철수하면 일본의 재무장을 허락하고 태평양 저편에서 일본과 중국간 힘의 균형이 무너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의 정책은 아니다. 사실 일본이 대대적으로 재군비에 나서면 1930년대 정책을 되풀이할 지도 모른다(毛里 2004, 1971/07/09).  

미국의 정책은 “일본이 공격적 정책을 취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다는 이른바 ‘병마개(bottle cap)론’을 펼쳤다. 1972년 2월 22일 닉슨은 정상회담에서 “보증은 할 수 없지만 우리[미국]는 일본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정책으로 일본이 한국 및 대만에 대해 모험을 걸지 못하도록 저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반복했다(毛里和子 2006, 64 재인용, 1972/02/22).

 

반면 주은래는 평화를 원하는 ‘일본인민’에 기대를 걸면서 동맹에 의한 병마개론이 아닌 일본의 중립화를 역설하였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주은래와 키신저]는 일본의 팽창주의가 위험하다는 데 합의하였으나 이를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 중국은 이 문제에 대해 강한 선입관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모호한 입장을 보인다. 일본의 재군국주의화를 우려하면서 미일간 군사협력을 견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 나[키신저]는 그들이 원하듯 일본이 중립화하면 조악한 민족주의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毛里和子 2006, 65 재인용)

사실 키신저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듯이 일본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세계적 시야를 갖고 있으나 일본의 시야는 부족에 머물러 있고 장기적 비전이 없기 때문에 강한 일본과 강한 중국 중 후자가 팽창주의적이지 않다”며 자신은 “일본에 [순진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다”고 확언하였다(毛里和子 2004). 그에게는 일본보다 중국이 신뢰할 만한 국제정치 게임의 파트너였던 것이다.

 

닉슨의 일본관도 다르지 않았다. 1972년 2월 베이징 방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일본이 과거 군국주의로부터 변화하기를 희망한다. 만약 미국이 일본에 안보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일본은 첫째 생산성 높은 경제에 기반해 전쟁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채 자국 군사력 증강을 경주할 것이고, 둘째 미국의 대체제로 소련에 접근하는 선택지를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 (毛里和子 2006, 64 재인용).

미국은 자국과 안보관계를 맺고 경제지원을 받아 온 일본 및 기타 국가들이 중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정책을 취하지 못하도록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은래는 수차례에 걸쳐 일본을 불신하는 키신저와 닉슨의 태도를 확인하였고, 미국이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므로 일본의 야심을 통제하려 나설 것이라 믿었다. 이 가운데 주은래는 대일전략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일본 인민들에게 거대한 변화가 있기 때문에 현재 일본이 1930년대의 일본과는 다르다며, 미중이 일본정부의 팽창주의 정책을 좌초시키고 평화정책을 돕는다면 사태는 개선될 것이라 말하였고, 또한 미일동맹이 병마개 역할을 하는 한 일본이 대만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는 크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이제 중국은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동시에 대만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중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주은래의 기본인식은 미중 데탕트와 같았다. 중소대결 구도 속에서 미소 상호견제를 이용하여 미중관계를 풀어 나아갔듯이 중일관계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따라서 국교정상화 실현의 최대 과제는 일본의 의향에 있었다. 과연 일본이 미국이 하지 못한 대만과 단교를 선언하면서 중일 수교로 나올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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