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캔사스 대학(University of Kansas)에서 동아시아학 학사,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도쿄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방문 연구원, 남가주 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강사, 브라운 대학교 왓슨 국제연구소(Wat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Studies, Brown University) 및 동아시아학과 프리만 펠로우, 오클라호마 대학교(University Oklahoma) 중미 연구소 연구위원, 동대학 정치학과 및 국제지역학부 조교수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The Japanese Challenge to the American Neoliberal World Order: Identity, Meaning, and Foreign Polic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8)가 있고 편서로는 《동아시아 금융지역주의의 정치경제 : 제도적 발전과 쟁점들》 (아연출판부, 2012)이 있다.

 

 


 

 

I. 들어가는 말

 

외교정책은 정책적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성되어있다. 정책적 목적은 국가가 국제정치의 장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일이며, 수단은 정책적 목적에 따른 방법론에 해당한다. 종종 국익이란 개념으로 표현되는 정책적 목적의 설정은 국가가 구조적으로 처한 정치, 경제, 안보,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전략적 맥락에 영향을 받기도 하며, 또한 국내 정치의 산물이기도 하다. 정책 수단은 물리적 압박, 협상 및 협력, 설득 등이 있으며 이러한 메커니즘은 일방주의, 양자주의, 다자주의적 형태로 전개된다. 국제정치 질서의 규칙제정자(rule-shaper)가 아닌 규칙준수자(rule-taker)인 비강대국인 경우 정책적 선택의 폭은 상대적으로 넓지 않으며 정책 수단도 제한적일 수 있다.

 

국제정치에서 금융과 통화의 영역은 세계경제질서의 근간으로서 권력, 이익, 아이디어를 매개로 한 경쟁과 협력의 장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자본 자유화와 금본위제가 영국의 패권과 무관하지 않고 2차 대전 후 제도화 된 브레튼우즈체제(Bretton Woods system)의 성립과 몰락, 그리고 신자유주의 금융 및 통화 질서의 발흥은 미국과 G-7으로 불리는 경제 강대국의 경쟁과 협력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Cohen 1966; Kindleberger 1971; Krasner 1982; Ruggie 1983; Keohane 1984; Cox 1996; Strange 1998; Ikenberry 2001). 다시 말해, 지난 150년에 걸친 국제 금융 및 통화 질서는 변화와 지속의 역사이다. 변화와 지속은 시장과 국가의 상호성 속에 글로벌, 지역, 국가 차원의 제도화를 통해 나타났다. 제도화의 핵심은 규칙제정(rule-making)과 규칙변환(rule-transformation)의 과정이고(예. 국제기준의 정치, Politics of Global Standards), 규칙은 “Ruler”와 “the Ruled”를 동반한다(Onuf 1989). 브레튼우즈 체제의 중추인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세계은행(World Bank),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의 제도적 작동방식은 이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규칙준수자로서 비강대국은 변화하는 국제 금융 및 통화 질서에의 적응을 주요 정책적 목적으로 삼게 된다. 다시 말해, 정책적 목적의 선호도가 자율성이 크지 않는 제한적 선택(constrained choice)을 띄게 됨을 의미한다. 이제 막 시작된 21세기 초는 세계도 변했고 한국도 변하였음을 보여준다. 세계경제질서는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고, 한국은 지난 반 세기 동안에 걸친 경제발전의 과실로 국제정치의 장에서 규칙준수자에서 잠재적이나마 규칙제정자의 일원으로 이행하고 있다. 2009년 출범한 세계경제질서 협의체인 G-20에 한국이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향후 1여 년은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경제질서의 큰 변환기(Great Transformation)로 기록될 수 있고 한국은 ‘적응’을 넘어선 ‘주도’로의 역할 변화기를 맞이할 수 있다.

 

2008년 미국 발 글로벌 금융위기는 기존의 미국 주도적인 신자유주의적 국제 금융 및 통화 질서의 변화를 글로벌, 지역적 차원 모두에서 요청하고 있다. 먼저 통화 질서를 보면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패권은 흔들리고 있고(Helleiner 2009; Eichengreen 2010), 신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을 기초로 탄생한 유로도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McNamara 1998; Gillingham 2005). G-2로 부상한 중국은 위안화 국제화를 추진하며 달러 의존성을 줄이려고 한다(이용욱 2011). 또한 남미, 아프리카, 중동에서는 지역차원의 통화 동맹을 이미 출범 시켰거나 추진 중에 있다. 동아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지역적 차원에서 역내 환율 안정을 위해 동남아국가연합(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 ASEAN)과 한중일 즉, 아세안+3(ASEAN Plus Three: APT)는 아시아개발은행(The Asian Development Bank: ADB)과 함께 지역통화 설립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의 말대로 세계경제는 달러체제의 종식과 함께 복수 기축통화 체제로의 이행을 목전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Eichengreen 2010).

 

통화질서가 무역과 투자의 기초로서 결제, 비축, 회계의 기준이 되는 통화의 수요 및 공급의 안정적 운영을 통한 환율의 문제라면, 금융질서는 무역과 투자의 촉진을 위한 자본 자유화 정도를 포함한 자본 시장의 형성 및 발전, 그리고 금융위기 방지와 금융위기 시 효과적인 관리를 위한 금융안전망 확충에 관한 것이다. 1980년 이래로 진행되어온 세계화(globalization)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유화를 의미하였는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IMF 개혁을 필두로 자본 규제론이 힘을 얻고 있고, 지역적 차원에서는 유럽 안정화 기금과 같은 역내 금융위기 방지 메커니즘 설립에 대한 논의가 남미, 아프리카, 중동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와 함께 서구 자본 시장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지역 금융 시장 발전 방안들이 지역중심의 권역별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도 아세안+3를 중심으로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후 제도적 협력 장치의 구성을 통해 지역 금융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구제적으로, 금융위기 방지 및 금융위기 시 효과적인 대처방안은 2000년 양자간 스왑(swap) 협정에서 출발하여 2010년 다자화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hinag Mai Initiative Multilateralization: CMIM)를 통해 제도화 되어왔고 아시아판 IMF 인 아시아통화기금(Asian Monetary Fund: AMF) 창설 논의로 확대되고 있다. 아세안+3는 2011년 5월 싱가포르에 CMIM의 자매기관으로서 역내 금융 감시기구인 아세안거시경제감시기구(ASEAN Plus Three Macroeconomic Research Office: AMRO)를 성공적으로 출범시켜 AMF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역내 금융시장 활성화는 지역 채권시장 발전에 방점을 두고 있으며 2002년 출범한 아시아채권시장 이니셔티브(Asian Bond Market Initiative: ABMI)로 대표되고 있다. 아세안+3는 아시아 채권시장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기제인 신용보증투자기구(Credit Guarantee Investment Facility: CGIF)를 2011년 5월 발족시켰으며, 역내 채권거래에 대한 결제 서비스를 제공할 역내 예탁결제기구(Regional Settlement Institute: RSI)의 설립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금융 및 통화 외교의 구조적 맥락으로 작용할 대변환기의 국제 금융 및 통화 질서는 큰 틀에서 보면 서로 관련된 세가지 흐름으로 압축 하여 볼 수 있다. 첫째, 글로벌 차원에서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제도적 틀의 변화와 그 변화의 깊이, 정도, 방향성이다. 둘째, 점증하는 지역 금융 및 통화 시스템의 출현과 공고화 정도이다(Katzenstein 2005; Powers and Goertz 2011). 마지막으로, 글로벌 차원과 지역 차원에서 발전하고 있는 금융 및 통화 질서의 관계적 성격이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지역 차원의 금융 및 통화 질서의 발전이 배타적인 형태를 취해 글로벌 차원과 지역 차원의 경쟁뿐 아니라, 지역간 경쟁체제의 형태로 제도화 될 것 인가?

 

이러한 국제 금융 및 통화 질서의 대변환기에 한국은 어떻게 글로벌과 동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며 규칙제정자 역할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환율 안정, 금융안전망 확충, 경제 발전을 위한 원활한 자본 공급과 관리가 큰 틀에서 금융 및 통화 외교의 정책적 목표라고 볼 때 어떠한 방법으로 이들을 추구하여야 하며, 동시에 어떻게 최대한 정책 자율성(autonomy)을 확보하여 한국의 선호도를 글로벌 및 동아시아 지역 금융 및 통화 질서에 반영 할 수 있을까?

 

본 보고서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가 한국 금융 및 통화 외교가 추구해야 할 정책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비강대국으로서 한국은 다자주의를 정책적 수단으로써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으로 추구하여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은 중개인(honest broker)역할 수행을 통해 이미 진행중인 동아시아 금융 및 통화 협력의 제도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며 동아시아 지역적 기반을 토대로 G-20 등의 글로벌 차원의 금융 및 통화 질서의 규칙제정 과정에 참여하여야 한다. 다자주의를 통한 지역과 글로벌의 연계 전략이며, 이와 같은 전략적 선택이 다른 전략에 비해 한국의 정책 선호도가 세계경제질서 재확립 시기에 가장 많이 확보되고 반영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지역 다자주의의 공고화를 통해 중국과 일본과의 신뢰 관계 형성과 정책 공조의 경험을 쌓고 정책을 함께 개발하여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의 정책 선호도를 구현하는 방안이다. 비강대국이 특정 이슈에 관해 다자주의를 출범시키고 제도적 틀을 짜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으나 이미 작동 중인 다자주의 틀은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먼저 왜 다자주의가 한국과 같은 비강대국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기존 연구를 중심으로 논하여 본 보고서의 주요 주장에 대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한국의 금융 및 통화 외교의 주요 대상인 지역차원의 동아시아 금융 및 통화 협력과 글로벌 차원의 G-20의 발전과정, 쟁점 사항들, 그리고 미래 방향성에 대해 살펴본다. 위의 논의를 토대로 한국에 있어서 지역과 글로벌을 아우르는 다자주의 연계 전략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논하고 다자주의 틀 안에서 효과적인 한국의 역할을 위해 정책 네트워크 역량 강화를 제안하며 마무리한다.

 

II. 왜 다자주의인가?

 

다자주의는 일방주의, 양자주의와 함께 국가가 외교정책을 실행하는 방법이다. 비강대국의 경우 일방주의는 선택하기 용이하지 않는 방법이며 따라서 양자주의와 다자주의가 선택지인데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다자주의가 비강대국의 정책 실현에 양자주의에 비해 우호적일 수 있다. 다자주의가 비강대국에 주는 이점을 먼저 일반론적으로 살펴보고 다음으로 지역과 글로벌을 연계하는 한국의 금융과 통화 외교에서 다자주의의 유용성을 살펴본다.

 

다자주의는 그 자체로 한국과 같은 비강대국에게 여러 가지 이득을 준다. 가장 일반적으로, 합의 지향적인 다자주의는 다른 형태의 정치과정에 비해 비강대국의 목소리가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들릴 수 있게 한다. 물론 최종 결정된 정책이 다자주의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들에게 언제나 대칭적 이득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현실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다자주의 역시 강대국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도 있다(Krasner 1985; Mearsheimer 1995; Grieco 1999).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다자주의는 양자주의에 비해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따른 이득의 분배를 완화할 수 있다(Ruggie 1990; Martin 1998). 다자주의 제도가 제공하는 규범, 규칙, 의사진행 과정을 활용하여 강대국과의 이해관계를 최대한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Hurrell 2005, 50). 이에 관해 루(Catherine Lu)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Lu 2009, 54-55).

 

While conflicts, especially over the distribution of goods and burdens, will inevitably arise, under conditions of political friendship among peoples [in a multilateral setting], they will be negotiated within a global background context of norms and institutions based on mutual recognition, equity in the distribution of burdens and benefits of global cooperation, and power sharing in the institutions of global governance rather than by domination of any group.

 

다자주의는 대변환기에 유리하다. 대변환기란 변화를 향한 다양한 의견과 정책 제안이 새로운 권력과 기존의 권력이 충돌하는 정치의 장에서 전개되는 격동의 시기(turbulent period)를 말한다. 다자주의의 틀은 이러한 변환기에 다양한 행위자들에게 토론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정보(정책 선호도 및 수단 등)를 공유하게 한다. 토론과 정보의 확충이 언제나 모든 행위자가 동의할 수 있는 좋은 결론을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자주의가 제공한 토론을 통해 무엇이 문제이며, 어떤 해결책들이 있는지 논의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각국의 입장이 표출되어 규칙준수자인 비강대국이 한결 수월하게 적응을 위한 정책적 예측을 할 수 있다(Pouliot 2011).

 

가령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출범한 G-20는 네 개의 클러스터로 구성되어 있다. 클러스터 1은 금융규제개혁(Banking Capital Requirements/Basel III Agreement)으로 은행의 자기 자본률에 관한 문제와 각종 은행 규제에 관해 논의한다(“Bonus Regulations,” “Accounting Harmonization,” “Credit Rating Agencies,” “Bank Tax, International Transaction Tax,” “Derivatives,” and “Hedge Funds”). 클러스터 2는 거시경제정책공조(Macroeconomic Coordination)이다. 거시경제 조정을 위해 논의되는 이슈는 “Sovereign Debt Management,” “Global Imbalances and Currency,” “Currency Valuations and Movements,” “Monetary System”(The Future of the Dollar as Core Currency), “글로벌 금융안정망”(Global Financial Safety Net(Korean Agenda)), “Trading System Coordination”(Prevention of Protectionism and Doha Round Completion) 등 이다. 클러스터 3은 공공재(Public Goods)에 관한 논의를 한다. 여기에 포함되는 의제는 “새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 “기후/에너지”(Climate/Energy), “식량안보”(Food Security), “혁신/교육, 부패”(Innovation/Education, Corruption) 등 이다. 마지막으로 클러스터 4는 제도화 및 거버넌스 프레임워크(Institutionalization and Governance Framework)인데, G-20 사무국(Secretariat) 설립 여부와 IMF를 비롯한 국제금융제도(International Financial Institutions)의 개혁을 다룬다. 이와 같이 다자주의의 틀 안에서 클러스터 별로 세부주제를 심도 있게 토론하게 된다. 의견의 일치와 불일치 과정 속에서 당면한 문제에 관해 각국의 입장을 중심으로 공론의 장(a shared framework of interaction)이 생기게 되어 문제 해결의 가능성과 방향성에 대한 정책적 예측이 높아질 수 있다...(계속)

6대 프로젝트

세부사업

국가안보패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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