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김준석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논문으로는 “국가연합(Confederation)의 역사적 재조명: 미국, 독일, 네덜란드 그리고 유럽연합”(〈국제정치논총〉, 2008), “규범권력과 유럽연합”(<국제지역연구>, 2009), “유럽정체성의 규범적 기초”(〈국제지역연구〉, 2009) 등이 있다.

 

 


 

 

I. 경제위기, 미국주도 세계질서의 상대적 쇠퇴, 문화질서의 변환

 

경제의 변화와 문화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관련 짓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글로벌 경제위기가 세계 문화질서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혹은 미칠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직은 매우 희미하게 인식되고 있기는 하지만 경제위기의 발발과 지속, 그리고 이것이 가져온 미국주도 세계질서의 상대적인 쇠퇴는 문화 분야에서 잠재적으로나마 일정한 변화를 불러오고 있고, 또 그럴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것은 논의의 초점을 흐릴 뿐이다. 이는 사실상 정확한 답변이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본 장에서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에서 모든 이들이 합리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만큼의 것들을 문화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문화는 문명, 종교, 지식, 정체성, 가치, 규범, 넓은 의미에서의 제도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초반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는 세계 문화질서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할 것인가?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볼 때 경제위기로 인한 국제적인 힘의 분배에서의 변화는 이전까지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던 문화와 열세에 있던 문화들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촉발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위에 있던 문화는 힘의 축소와 함께 상대적으로 움츠러들면서 좀 더 큰 결속력을 보이게 되고, 열세에 있던 문화는 힘의 상대적인 증가와 함께 좀 더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문화 간의 상대적인 위상의 변화가 전면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 정체성, 세계관이 긴장 속에서 일정하게 공존하는 상태가 앞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90년대 초반에 등장하여 큰 관심을 모았던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 충돌론’ 의 타당성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은 그 이론의 단순성과 결론의 과격함으로 인해 국제정치학자들에 의해 더 이상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만큼 그에 제기된 수많은 비판이 문명충돌론을 재론하는 것을 터부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제기된 모든 단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문명충돌론은 여전히 중요한 이론이고, 적어도 국제적인 차원에서 문화에 관한 논의의 출발점으로 매우 유용하다. 특히 많은 이들은 헌팅턴이 문화/문명을 본질주의적인 관점(primordialism)에서 이해한다는 점을 들어 그의 이론을 거부해 왔는데, 그러한 비판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와 문명의 ‘물화’(物化)에 일방적으로 반대하는 사회학적, 포스트모던적 반(反)본질주의 문화개념이 과연 국제문화의 분석에 적합한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피터 카첸스타인(Peter Katzenstein)이 헌팅턴 식의 본질주의를 상당히 완화한 형태의 문명 개념을 국제정치 분석의 중요한 개념 틀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첸스타인에 따르면 단일한 문명적 핵심을 가정하는 대신 문명의 중층성, 다차원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문명 내에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다양성을 인정할 경우 문명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과학 개념일 수 있다. 우리는 카첸스타인의 접근법을 통해 헌팅턴식 본질주의와 포스트모던적 탈본질주의 사이의 적절한 타협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Katzenstein 2010).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아래에서는 주로 경제위기를 전후하여 미국과 중국이 세계문화질서 내에서 각자의 영향력과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그리고자 한다. 특히 양국 간 ‘문화경쟁’을 ‘문명표준’(standard of civilization)을 둘러싼 경쟁의 차원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II. 서구 문화권의 변환: 미국의 민주주의 증진 정책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북미와 유럽 대륙의 서구 문화권 국가들은 보편적 문화의 전파자, ‘문명 표준’(standard of civilization)의 확산자로서의 정체성과 위상을 유지해 왔다. 그 전반적인 양상에 관해 어느 정도의 견해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적어도 20세기 이전까지 세계 여러 지역 간 문화의 전파는 서구에서 비서구지역으로의 일방통행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국가들은 문명 표준국으로서 '바람직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규범들을 비서구권 국가들에 제시했고, 이들 비서구권 국가들은 그러한 규범들을 때로는 강압과 체념 속에, 때로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16~17세기 유럽에서 처음 등장하여 자리 잡은 근대적 국제정치 체제의 규칙과 규범 역시 유럽 열강들의 해외진출과 함께 새로운 문명 표준으로 비유럽권 국가들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서구 문화권 국가들의 문화 전파자로서의 정체성과 위상은 20세기 들어 양차 세계대전의 발발, 미소 간 냉전 대립, 탈식민화와 제3세계 운동 등의 영향으로 일정 정도 잠식되고 약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20세기 말 냉전의 종식과 함께 사회주의에 대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우위가 확인되고 미국이 국제질서 주도국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함에 따라 서구 국가들은 다시 서구식 문명표준의 확산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이래 효과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재정긴축과 무역자유화, 사유화와 탈규제 등의 ‘구조조정 프로그램’(Structural Adjustment Program: SAP)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정책 모델로서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가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세계은행(World Bank)와 같은 국제금융기관을 통해 반(半)강제적으로 각 국가들에 의해 채택되거나 혹은 주로 미국의 대학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 공동체의 지적 헤게모니를 통해 자발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보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서구 문화권 국가들은 탈냉전 시대 들어 민주주의, 인권, 법치주의(rule of law)와 같은 제도와 규범의 확산을 시도해 왔다. 특히 민주주의의 증진과 확산은 많은 서구 국가들의 중요한 외교정책 어젠다로 채택되었다. 민주주의의 확산은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 혹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미국의 외교정책 전통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고, 탈냉전 시대 들어서는 클린턴(Bill Clinton) 행정부와 조지 W. 부시 (George W. Bush) 행정부가 그러한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로 자처했다. 부시 행정부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정당화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확산과 증진은 많은 유럽 국가들의 중요한 외교정책 목표이기도 하다. 1990년 냉전이 막 종언을 고하고 있던 당시 유럽안보협력회의(Commission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CSCE) 회원국 정상들은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 헌장’(Charter of Paris for a New Europe)을 채택하여 ‘민주주의를 우리 회원국들의 유일무이한 정부형태로 확립하고 강화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또 나토와 유럽연합의 회원국들은 민주주의를 새로운 회원국이 되기 위한 자격 요건에 포함시킴으로써 다수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주의 국가로의 변신에 일정 부분 기여하기도 했다.

 

서구 문화권 국가들이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명 표준을 옹호하는 것이 단순히 이들이 더 많은 경제적 지배 혹은 더 많은 안보와 평화를 확보하기 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Ayers 2009). 문명 표준의 전파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서 이제 이들 서구 국가들에 의해 하나의 ‘문화 권력’으로 행사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Hobson 2008; Clark 2009). 즉, 서구 국가들의 문명 표준은 문명화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이러한 과정이 새로운 국제 규범의 창출과정으로 이해되기를 원할 것이다. 혹은 국제사회의 규범적 통합이 보다 더 심화되는 과정으로 간주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비서구권 국가들의 관점에서 서구 국가들의 문명표준 제시는 명목상으로나마 엄격하게 유지되었던 국가들 간 평등의 원칙을 포기하고 배제와 차별의 원칙을 도입하려는 조짐으로 읽힐 수 있다. 혹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문명화된 사회와 야만적인 사회의 구분을 부활시키려는, 국제사회를 소수의 특권적 국가와 그 이외의 국가로 구분하려는 시도로 비춰질 수 있다.

 

최근 전 세계적인 차원의 금융경제위기가 도래하면서, 또 미국의 패권적 지위의 잠식이 그러한 경제위기와 직간접적으로 맞물려 진행되면서 서구 문화권 국가들이 문명 표준을 제시하는 방식에도 일정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지난 20여 년 간 추진해 온 민주주의의 증진과 확산 정책이 명백한 한계에 직면하면서 이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민주주의 증진 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전쟁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민주화임을 천명한 이라크 전쟁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민주주의의 증진을 위해 군사력의 사용조차도 용인될 수 있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세적인 미국의 민주주의 증진 정책에서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정책의 대상이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매우 선별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미국은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자 ‘반(半)봉건적인 독재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민주주의와 인권원칙의 확산을 심각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다. 반면에 현재 중동에서 미국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이란은 중동지역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민주화’된 국가라는 점이 이 나라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부분적으로나마 반영되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물론 여기에서 외교정책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갈등과 절충이라는 원론적인 문제를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는 없다. 어떤 국가도 이상주의적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현실적인 국가이익을 일방적으로 희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민주주의 증진 정책은 그 레토릭의 강력함이 실제 정책 내용과 선명하게 대비되면서, 그리고 여기에 정책의 주체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이라는 점이 더해져서, ‘오만하고 위선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 국내적으로는 초당적인 합의사항이던 민주주의 증진정책이 정책의 과도함을 비판하는 민주당 중심의 정치세력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떤 부담을 짊어지더라도’ 정책을 지속해야 한다는 공화당 중심의 세력 양자 간의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는 점도 매우 뼈아픈 변화로 꼽히고 있다(Rachman 2009, 121)...(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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