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미국으로부터 추가파병 요청이 있은 후 거의 1년간 지속된 고통스런 논쟁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째, 이라크 전쟁은 과연 역사적 명분을 찾을 수 없는 잘못된 전쟁인가? 둘째, 이라크 파병을 통해 추구하려고 하는 한국의 국익은 과연 무엇인가? 셋째, 이라크 파병이후의 한미관계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1988년 자국민 쿠르드족 5,000명을 화학무기로 학살하고 수많은 인권유린을 행한 후세인 정권은 1991년 걸프전 종료 직후부터 2002년까지 무장해제에 관한 유엔 안보리 결의 이행을 17차례나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유엔이 외교적 압박과 경제봉쇄를 통해 제재를 가했지만 사담 후세인은 ‘부분적인’ 협력을 통한 지연전술을 폈을 뿐 ‘전면적인’ 협조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후세인의 ‘WMD 게임’은 WMD 보유 가능성에 대한 미 행정부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후세인의 폭정은 WMD 의혹과 결부되어 비록 ‘절차적 정당성’ 획득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내용적 정당성’을 상당히 제공한 상태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를 ‘선제공격 독트린’의 즉각적인 대상으로 삼아 군사적 공격을 가하기에는 WMD 관련 정보가 불충분했다. 결국 이라크전의 정당성 문제가 논란의 핵심이 되었으며, 이러한 논란은 종전 후 이라크 내 저항세력의 사기를 올려주어 사태의 악화를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사태의 해결여부는 중동전체의 미래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데 국제사회가 공감하고 있으므로(유엔 결의 1546호), 한국의 이라크 파병은 한국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거시적 중동질서유지와 이라크에 대한 인도주의적 기여를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미국이 이라크에서 열어놓은 ‘판도라의 상자’를 어떻게 해서든 닫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국제사회의 주요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가운데 반테러전쟁이 미국만의 문제인 것처럼 방기할 경우 결국 무질서가 난무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세상이 도래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이 한국의 이라크 파병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9․11 이후 국제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미국은 동맹관계를 평가하는 데 있어 미국이 주도하는 반테러전쟁에의 참여 여부를 가장 큰 기준으로 적용해오고 있다. 냉전시대에 미국은 동맹국들을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대가로 미국의 리더십을 따르도록 요구했었으나, 21세기 미국의 동맹개념은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세계화된 국제사회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신용’을 제공하는 대신 미국의 리더십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동맹은 20세기적 ‘혈맹’(血盟) 개념으로부터 21세기적 ‘신맹’(信盟) 개념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이라크 파병은 미국과의 신맹을 이룩하기 위한 투자, 즉 ‘용신’(用信)의 과정이다. 미국은 이라크의 재건을 통하여 바그다드를 중동의 민주주의 및 시장경제의 중심지로 만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라크가 재건에 성공할 경우 한국은 미국과 함께 카스피해 서쪽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어 에너지 안보를 제고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이라크 평화재건을 통해 이라크인의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한미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인간안보를 위해 한미양국이 협력한다는 것은 한미동맹이 전통적인 군사안보적 성격을 뛰어넘어 인류의 보편가치를 지향해 간다는 것을 뜻한다.


한미동맹의 지속 필요성에 한미 양국이 공감하는 이상, 북한의 위협이 사라진 이후에 한미동맹을 재조정하기보다는 그 이전에 동맹의 ‘21세기적 비전’을 설정해 나가는 것이 한미관계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기본가치를 공유하고, 위협에 대응하기보다는 평화를 주도해 나가는 동맹, 보다 유연하고 독자성이 제고되는 가운데 수직적 관계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실현하는 동맹, 더 나아가 상호 운용성이 지금보다 더 확대된 ‘포괄적 지역안보동맹’(comprehensive regional security alliance)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한미 포괄적 동맹 관계는 전통적인 군사 위협에 대처한다는 차원보다는 새로운 안보 위협, 즉 테러, 마약, 환경오염, 불법인구이동, 해적 행위 등에 포괄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21세기형 ‘인간안보동맹’(human security alliance)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며,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의 여부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통해 한미양국간 신뢰가 얼마만큼 회복되는지에 달려있다. 상호신뢰에 바탕을 두고 미국과 한국이 정치․안보․경제 분야를 망라한 신용거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진정한 21세기형 동맹, 즉 신맹(信盟)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반테러전쟁을 미국만의 전쟁이라고 치부해버릴 경우 미국 혼자만의 힘으로 반테러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는 이상 국제사회는 무질서와 혼돈이 뒤범벅된 세상, 즉 테러리스트들이 바라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유엔이나 다른 강대국들이 미국의 힘을 대신할 수 없는 이상 미국이 국제관계를 보다 현명하게 관리해 나가도록 국제사회의 성원들이 지원하고 조언해야 한다.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당장의 ‘보이는 죽음’과 미래의 ‘보이지 않는 죽음’을 구별할 수 있어야만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순간의 전략적 판단 실수로 당장의 보이는 죽음을 피할 수 있을지언정 미래에 보다 큰 규모로 더욱 치명적인 형태로 보이지 않는 죽음을 자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세계화된 국제금융사회에서 신용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IMF 사태’라는 뼈아픈 경험을 했고, 그나마 안보분야에서 쌓은 신용 덕분에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구의 지원을 받은 바 있다. 파병을 철회함으로써 당장의 보이는 죽음을 막을 수 있을지라도 우리가 제2의 금융위기를 겪게 되었을 경우 안보분야의 축적된 신용을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미래의 보이지 않는 죽음을 막기 위한 전략적 투자가 바로 이라크 파병인 것이다.

 

저자
김성한, 외교안보연구원

6대 프로젝트

무역ㆍ기술ㆍ에너지 질서의 미래

세부사업

국가안보패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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