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현실 이익 중시 가치관

  • 2005-10-14
  • 이재열 (중앙일보)

한국인은 어떤 가치관을 지녔을까. 다른 나라 국민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미국의 정치학자 잉글하트는 국가 발전의 목표에서 물가와 인플레 억제, 사회질서 유지를강조하는 경제주의적 태도를 "물질주의"로, 언론자유 보장과 정부정책 결정에 국민의 의견수렴을 우선시하는 문화주의적 태도를 "탈물질주의"로 정의해 각 국민의 가치관을 비교분석한 바 있다.

이번 조사엔 잉글하트의 방법론에 따른 항목도 포함됐다. 여기서 물질주의는 "대한민국 국정운영의 화두가 주로 부국강병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탈물질주의는 경제보다 "참여와 인간적 가치, 환경 등 탈인습적 가치"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혼합형은 두 가지 모두에 어느 정도 긍정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 척도를 이용해 분석해 본 결과 응답자의 36.7%가 물질주의자로, 5.8%가 탈물질주의자로, 나머지 57.5%가 혼합형으로 분류되었다.

국제적으로 비교하면 비교대상이 된 국가 중 중국 다음으로 한국인의 물질주의자 비율이 높다. 물질주의자 비율은 중국.한국.독일.일본.미국.스웨덴 순으로 낮아진다. 독일의 물질주의자 비율이 높은 이유는 통일 후 물질주의적 가치관이 강한 동독 주민들이 대거 표본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서는 국민의 20% 이상이 탈물질주의자로 분류되곤 하는데, 이들은 환경보호와 언론자유, 그리고 소수자의 인권보호 등에 매우 민감한 태도를 보였다. 이들을 지지기반으로 녹색당과 같은 사회운동단체나 정당이 그 사회에 뿌리깊이 내리고 있다.

한국인 중에는 단기적으로는 여전히 물질주의자의 비중이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감소세를 보인다. 지난 25년간 물질주의자의 비중을 보면 외환위기를 겪은 직후인 1998년 57%로 최고에 달했다가 서서히 낮아지고 있다. 한편 탈물질주의자의 비중은 6% 수준에서 고정되어 있다. 가까운 미래에 서구의 녹색당과 같은 신종 정당이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지닌 집단이 부상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주력이 될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학생과 청년층이다. 이들의 탈물질주의적 태도는 경제적 불황과 취업난으로 인해 10% 내외에서 억제돼 있지만, 앞으로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보수적 물질주의자"들은 고도성장기에 대한 강한 향수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만한 수적 비율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주의와 탈물질주의의 지향은 지금까지의 진보 대 보수의 갈등 전선을 다원화해 나가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지지자 간에는 물질-탈물질주의적 가치관 구분에서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다. 탈물질주의는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에게서 10% 수준으로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는 민노당 지지층 중 상당 부분이 고학력.중산층.화이트칼라에 집중된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여전히 경제 문제는 한국인의 관심을 끄는 핵심 사항이다. "경제안정과 범죄소탕"을 인간적인 사회나 창의성보다 중요한 국가 목표라고 우선적으로 고른 비율은 87%로서 작년에 이어 최고 수준이었다.

환경 개선이나 개인발언권 확대보다 "높은 경제성장과 방위력 증강"을 선택한 비율은 82%였으며, 언론자유나 국민참여보다 "물가, 인플레 억제와 사회질서 유지"를 선택한 비율도 72.8%로서 압도적이었다. 한국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 가치"와 생활정치가 주는 매력보다는 "부국강병"을 원하는 현실주의자들인 셈이다.

이재열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