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선진 경제로 가는 길] 上. 정부·국회가 '성장 치어리더'로 나서야

  • 2005-08-15
  • 장훈 (중앙일보)

민주화 이후 시대에 한국의 정치와 경제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은 아마도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절반만 유효하다.

이 시대에 폭발하는 사회집단들 간의 갈등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정치사회(대통령.국회.정당)의 무능력을 고려한다면 이는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경제가 수준 낮은 정치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통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통념은 그릇된 것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험은 경제가 결코 정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수준 높은 정치 없이 경제의 선진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경제 선진화를 이끄는 질 높은 정치의 핵심은 "일하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정치사회의 능력"이다. 여기서 일하는 관계란 한편으로 기업.노조.민간단체들 사이의 일하는 관계다. 다른 한편으론 대통령과 국회, 정당 사이의 일하는 관계다.

유감스럽게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치사회는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 일하는 관계를 조성하는 데 실패해 왔다. 집단들 사이의 갈등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한 얼굴이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집단 사이에, 비록 이익을 놓고 다투기는 하지만 여전히 함께 일을 도모하는 관계라는 의식이나 판단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민주화 이후 이익의 줄다리기 과정에서 상식과 양식은 물론 최소한 "게임의 규칙"으로서의 법질서마저 자주 무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게임의 규칙이 실종된 데에는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회피와 무능력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의 정치사회가 사회집단 사이에 게임의 규칙이 자리잡도록 하는데 실패한 것은 정치권 스스로가 자신들 사이의 일하는 관계를 원활하게 꾸려 오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여소야대는 이제 우리 정치에서 일상적인 현상이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대통령과 국회는 주어진 상황 하에서 맡은 일을 추진하는 노력보다는 "어려운 상황" 그 자체를 바꾸는 데에 몰두해 왔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 제안은 일리 있는 측면도 있지만 여전히 국민이 부여한 상황 하에서 국회.야당과 일하기보다 그 어려움을 회피하려는 데에 관심이 기울어 있다. 다시 말해 게임의 규칙에 대한 합의가 정치권에서부터 제대로 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대통령과 국회가 기업과 노조 사이에, 농민과 시민단체와 기업 사이에 일하는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떠맡아야 하는 역할은 엄정한 심판과 치어리더의 역할이다. 민주화와 세계화로 인해 국가가 경제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 사이의 갈등을 권위적으로 조정하거나 규제하는 "호랑이 선생님"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다만 대통령과 정부는 반칙행위를 정밀하게 골라내 엄격하게 제재를 가할 때 경제주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게임의 규칙이 자리잡게 된다. 규칙이 바로서야만 경제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선수들의 역량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다.

일하는 관계의 구축은 비단 경제 주체들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국회, 야당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긴요하다.

대통령이 국회나 야당을 규제하거나 조정할 능력이 없다면 힘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주 앉아 함께 일을 의논해야 한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경, 함께 일하는 파트너 의식과 같은 정치권 특유의 게임 규칙은 헌법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다. 가시적으로 일의 성과를 내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단순 비교의 위험을 무릅쓰자면 한국의 국회는 미국의 의회에 비해 생산성이 낮다.

경제 선진화를 촉진하는 민주주의 환경을 만드는 것은 온전히 정치권의 몫이다.

무엇보다 정치권은 단기적인 목표에 몰두하는 기업과 노조, 농민들과 달리 장기적인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국민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한 미래로 나아가는 비전이 선명하게 제시될 때에만 사회의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모일 수 있다. 야무지면서도 실현 가능한 비전을 통해 경제주체들에게 신바람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21세기 경쟁국가의 정치다.

 

장훈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AI "10년 비전" 토론 참여 교수=김병국(고려대.정치외교학과), 김은미(이화여대.국제대학원), 김의영(경희대.정치외교학과), 나성린(한양대.경제금융학부), 송호근(서울대.사회학과), 윤영철(연세대.신문방송학과), 이내영(고려대.정치외교학과), 이종훈(명지대.경영학과), 이홍규(한국정보통신대.경영학부), 장훈(중앙대.정치외교학과), 정진영(경희대.국제지역학부) 교수 <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