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헌재·대법원 등도 상위권

  • 2005-05-25
  • 강원택 (중앙일보)

중앙일보·동아시아연, 국민 1619명 설문


헌재·대법원 등 사법부도 상위권

"파워 조직의 영향력.신뢰도 조사"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대기업에 대한 평가가 권력기구를 포함한 모든 다른 기관을 압도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이제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 한 말을 실감케 한다.

삼성.현대차 등 4개 대기업의 영향력과 신뢰도가 모두 높다는 것은 이들의 의사 결정과 움직임에 국민이 큰 관심과 긍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아직도 반기업정서를 놓고 논란이 많지만 다수의 국민은 이미 친기업정서를 갖고 있는 셈이다. 국민 관심의 한복판에 서 있는 대기업들은 대신 감시와 견제가 더 심해지고 투명 경영과 사회적 책임도 더 요구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권력기관이었던 청와대.국정원.국세청 등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된 것도 흥미롭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분권화와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돼 온 긍정적 변화로 평가할 수 있겠다. 문제는 이들 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다는 데 있다. 권력기관이 국민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면 법과 질서의 유지 등 공동체 성립의 전제가 도전받게 돼 국민과 사회가 모두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국회와 정치권은 더욱 참담하다. 열린우리당.한나라당.민주노동당 등 조사 대상 세 정당이 모두 영향력에서 매우 낮게 평가됐고, 신뢰도는 형편없었다. 특히 열린우리당에 대한 신뢰도는 조사 대상 23개 기관 중 가장 낮았다.

반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등 사법부의 영향력과 신뢰도가 모두 높게 나타난 것은 국민 의식의 중요한 변화다. 국민이 사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결정을 흔쾌히 받아들일 자세를 갖춘 것이다.

대통령 탄핵 기각 결정으로 창설 후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헌재가 수도 이전 위헌 결정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게 평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사법부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제외하면 전통적인 국가 기관의 영향력과 신뢰도는 크게 낮아졌다. "신뢰의 위기"라고까지 할 수 있다.

노동계에 대한 평가는 대기업과 정반대로 나타났다. 최근 노조의 각종 비리 사건으로 도덕성에 손상을 입은 탓도 있을 것이다. 자본과 노동에 대한 국민적 평가의 격차는 "시장으로 넘어간 권력"의 비대칭성(불균형성)에 대한 우려를 낳을 수 있다.

◆ 통치에서 협치(協治)의 시대로=전통적으로 통치의 주체는 국가였지만 최근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공공 문제의 해결에 기업이나 노조.시민단체 같은 민간 기관의 참여 폭과 영향력이 커졌다.

이와 같이 사회 내 다양한 기관이 자율성을 지니면서 함께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변화된 통치 방식을 "거버넌스(governance)"라 부른다. 다양한 행위자가 통치에 참여.협력하는 점을 강조해 "협치"라고도 한다.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중앙일보의 이번 공동 조사는 각 영역 대표 기관들을 대상으로 한국 사회의 거버넌스를 경험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진행됐다.

조사 결과로 미뤄 볼 때 과거 경제개발 시절에 있었던 국가기관의 일방적이거나 강제적인 통치는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대신 관리 및 조정자로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무엇보다 청와대를 비롯한 국가 기관들의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 한국 사회가 기업이 존중받는 시장 중심 사회로 전환했다는 사실도 이번 조사에서 분명해졌다.

강원택 숭실대학교 정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