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변칙 판치는 승자만의 사회

  • 2004-07-25
  • 이재열기자 (중앙일보)

인도네시아의 한 국제학교에서 한국 학생들이 시험지를 훔쳐 시험을 치렀다가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높은 성적을 받는다면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는 도덕불감증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밖에서 샌 바가지만 탓할 일이 아니다. 대학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내신에 반영되는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고 시험을 치르는 것이 국내 고등학교의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던가.

일단 목표가 주어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면 된다"는 전법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 발전의 기본 전략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돌격 앞으로" 해 1천달러와 1만달러 소득의 고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밀어붙이면 2만달러 고지도 금방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전략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외환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선진국 진입이 단순히 투입 요소를 늘리는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소중한 각성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그 의미에 대해 제대로 학습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번영의 도덕적 토대가 곧 사회적 자본이요, 공적인 규범에 대한 신뢰라는 후쿠야마의 진단은 여전히 우리에게 뼈아픈 지적이다.

거국적이고 일사불란한 국가발전 목표를 잃어버린 돌격전략은 "민주화시대"에 엉뚱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권력을 목표로 하는 정파 간의 격돌은 선거를 흑색선전·야합·게릴라 전법이 난무하는 내전(內戰)으로 만들었고, 파이의 큰 몫을 차지하려는 밀어붙이기는 노사관계를 극단적인 파업과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다. 로비를 밑천으로 봉이 김선달 뺨치는 사업수완을 펼치려다 권력 주위에서 명멸하는 불나비 군상도 닮은꼴이다.

승자가 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고 믿지만, 사실상 승자 중심 사회에서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 결여는 덫이 돼 모두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팔이 비틀리고 다리가 걸려 넘어진 패자들은 악에 받쳐 있고, 규칙과 규범은 잔재주와 교활한 정치적 게임의 도구로 변형됐다. 그러니 투명성과 공정성을 기대할 수 없는 이해당사자들은 진흙탕 싸움을 하더라도 이겨야만 살 수 있다는 비장한 결의를 다질 수밖에 없다. "지는 놈만 바보"로 손가락질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치인과 기업인이 "교도소 담장을 타고 곡예"하는 현실에서 검찰은 어떤 몸짓을 해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에 들어서도 뇌물 받고 "재수없게" 걸린 공직자들과 권력실세들의 모습에는 여전히 억울함이 역력하다. 과거의 분식회계를 들춰내 회계법인과 현직 기업인을 처벌하는 것은 애를 밴 어미 대신 태어난 아이를 처벌하는 것만큼 부당하다는 볼멘 목소리도 나온다. 진짜 범인은 "돌격 앞으로" 시대의 관행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나 질서유지의 기본은 도덕이고 그 중 최소한이 계약과 규칙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적 의미의 계약도 없고, 전통의 미덕이라던 인격윤리도 망가졌다. 적나라한 집단이기주의가 판치는 와중에 사회의 공동체적 토대는 무너져 내리고 집단 간 갈등에 대한 도덕적 자정능력도 고갈돼 버렸다.

그래서 정치자금에 관한 옷벗기 시합을 하자는 대통령이나 당신이나 벗으라는 야당의 빈정거림 모두에서 "솔직한 고백은 웃음거리일 뿐"이라는 냉소가 묻어난다. 그러나 이제는 근본적인 변화가 절박하게 요구되는 상황이다. 그것은 이념이나 코드, 혹은 세대 이전의 문제다. 한 나라의 규칙을 만들고 집행하는 입법부와 사법부의 정당성을 세우는 일이며,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베버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당성의 원천은 권위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사회적 계약의 신성함을 스스로 지키지 않고 우리가 이 난국을 탈출할 길은 없다.

나는 제안하고 싶다. 일단 진흙탕 경기를 여기서 중단하자. 지금까지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 모두 고백하고 과거의 관행을 역사의 강물 위에 흘려 보내자. 지금부터는 원칙대로 게임을 하기로 심판과 선수 모두 모여 신사협정을 맺자. 그리고 새롭게 킥오프하자. 단, 지금 이후로 레드카드는 무조건 퇴장이다. 절대로 예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