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 퇴행 진단 시리즈] ② 한국 대통령제의 민주주의 퇴행 요인](/data/bbs/kor_workingpaper/20250515145548733110491.jpg)
배진석 경상국립대 교수는 비상계엄 선포 이후의 헌정 위기가 대통령제의 구조적 속성과 정당 정치 및 정치 문화의 요인이 결합한 복합적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배 교수는 헌법에 규정되지 않은 대통령의 공천, 예산, 인사 등 권한 및 대통령과 국회의 이원적 정통성, 선거주기 불일치에 따른 분점정부하의 정치적 교착 등 구조적 병리가 작동하여 대통령의 책임성이 약화되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아울러 저자는 이러한 양상의 해결 방안으로 개헌을 통한 선거주기 통일 및 대통령 권한 조정, 정당 민주화와 시민 참여 확대 등 개헌 외의 정치개혁 과제를 함께 제시합니다.
Ⅰ. 서론: 위기는 권력구조에서 비롯되었는가?
2024년 12월 윤석열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선포한 비상계엄은 단지 한 정권의 통치 실패나 일시적 정국 혼란으로 이해되기 어렵다. 이 사건은 곧이어 극심한 진영 갈등을 겪으면서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일련의 헌정적 위기로 확대되었고, 한국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구조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음을 시사했다. 그렇다면 정치권과 언론이 한 목소리로 지적하듯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대통령제라는 권력구조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윤석열 대통령이라는 특별한 개인적 특성의 오류로 발생한 사건인가?
이 글은 이러한 질문을 단순한 이분법적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대통령제의 제도적 설계, 정당운영 구조, 정치문화의 특성 그리고 이를 운용하는 정치 행위자들의 통치 행태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민주주의의 기능을 마비시키는지를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한국 정치에서 반복되어온 '강한 대통령-취약한 정당' 구조와, 포퓰리즘적 감정 동원에 의존하는 대결 정치의 반복은 대통령제라는 제도가 가진 위험성과 결합해 민주주의의 기반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켜왔다.
이 글은 첫째, 대통령 권력의 구조적 집중이 제도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둘째, 정당과 국회는 왜 독립적 정치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는지, 셋째, 이러한 제도 운영이 실제 정치에서 어떠한 민주주의 퇴행 양상으로 나타나는지를 단계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Ⅱ. 민주주의의 퇴행 혹은 위기?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민주주의 퇴행(democratic backsliding)과 민주주의 붕괴(democratic breakdown)는 구분된다. 민주주의 퇴행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복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정이 내부에서 서서히 잠식되는 체제 변동이다. 시민의 지지를 받고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정치인들이 합법적 제도 범위 내에서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칙을 훼손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행정부 권력이 비대해지고, 야당 괴롭힘이 본격화되며, 국가권력의 선거 개입도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Bermo 2016).
한국 역시 민주주의 퇴행의 틀 내에서 주로 논의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윤석열 정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 퇴행의 전형적 조짐이 감지되었다. 행정부의 권력은 커졌지만 의회의 견제에 대한 행정부와 대통령의 반응성은 떨어졌다. 검찰을 활용한 야당 수사는 정치권을 요동치게 했다. 그 결과 민주적 선거 과정에 행정부의 권력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피했다(권혁용 2023). 심각한 것은 이 모든 민주주의 퇴행의 과정이 진영 정치의 형식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정서적 양극화는 정당 간 이념적 대립을 대체했고, 선거는 이 진영 간 감정의 대리전으로 변질되었다. 송호근(2025)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시민은 정치의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참여 민주주의는 기능 불능 상태에 빠진다. 게다가 대통령과 야당 간에 법률안 거부권과 탄핵안을 두고 벌어지는 격한 대결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서 암묵적 규범이었던 제도적 자제와 상호존중의 실종으로 이어졌다. 양쪽은 자신에게 주어진 법률적 권한을 거침없이 행사했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시민들도 이념적 양극화에 포획된 결과, 대결적이고 더 나아가 적대적이기까지 한 정치환경은 협치와 타협이 들어설 공간을 앗아갔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민주주의 퇴행이라는 틀 안에서 논의되던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을 새로운 차원으로 몰아갔다. 그 동안의 민주주의 퇴행 논의는 모두 합법적 수단을 동원한 점진적 퇴행이라면, 이번 사건은 민주주의 붕괴 유형에서 발견되는 친위 쿠데타 시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한 민주주의 전복 시도였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민주주의 퇴행 논의의 가이드라인을 넘어섰다고 보는 것이 옳다. 결과적으로 비상계엄 시도는 시민과 국회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들의 지지로 당선된 정치인도 권력 확대를 위해 친위 쿠데타를 고려할 수도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모범적 민주화 사례였던 한국 민주주의가 점진적 퇴행도 아니고 폭력적 친위쿠데타에 의해, 짧은 시간이나마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비상계엄 이후 탄핵 과정에서 확인된 정황들은 한국 민주주의를 더 어렵게 몰고 가고 있다. 정서적 양극화는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가이드라인을 쉽게 넘나들었다. 집권 여당이 노골적으로 부추긴 탓도 있지만, 야당 정치인에 대한 혐오는 명백히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대통령의 탄핵을 수용하지 않는 흐름으로 여론조사에 감지되었다. 윤석열 대통령 수사 및 체포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격앙된 일부 극단세력이 폭력을 사용해 법원을 침탈하기까지 했다.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은 이 과정에서 극단적 세력에게 포획 당하는 수준이 아니라 일부 정치인들은 이들을 명백히 선동했다. 헌법기관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극단적 세력이 주류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을 경유해 권력의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측면에서 한국 민주주의에 적신호가 켜진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Ⅲ. 대통령제의 제도적 취약성과 민주주의의 후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제도나 구조의 문제인가, 아니면 주요 정치 지도자들의 결함에서 비롯된 문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분명 갈린다. 대통령제의 일반적 특성 또는 한국 대통령제의 고유한 성격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대통령 개인의 통치 역량 부족이나 리더십 결함에 주목하는 접근도 존재한다.
우선 구조적 접근을 우선시하는 입장이 있다. 최광은(2025)은 대통령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병리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핵심원인이라고 파악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쿠데타 시도는 특별한 성격을 가진 어떤 대통령의 개인적이고 돌출적인 행동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과 이를 견제하기에는 역부족인 입법부와 사법부는 우리 헌법의 구조적 취약성으로 지적된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과 언론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해법은 대통령의 권한 분산이었다.
반면 윤여준/한윤형(2025)의 접근법은 반대다. 책임 있고 유능한 리더가 등장하면 제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문제는 오히려 통치 철학이나 행정 능력이 부족한 정치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는 구조이다. 해법은 제도 개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올바른 통치자의 선택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자격 리더’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혼란도 가중된다는 것이 이들의 관찰이다.
송호근(2025)은 이 두 입장을 종합하는 제3의 입장을 제시한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개혁 독주, 박근혜 정부의 권위주의, 윤석열 정부의 군사적 비상조치 시도 모두가 대통령제라는 동일한 제도 안에서 반복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제도의 병리와 개인의 문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박상훈(2018) 역시 대통령 개인의 행태가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를 가능케 하고 반복시키는 구조 자체, 즉 청와대 중심 통치 구조와 정당의 종속성 또한 반드시 함께 개혁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행위자적 관점과 구조적 관점은 비상계엄 선포를 해석하는 입장에서도 뚜렷하게 대비된다. 두 관점의 원인 규명도 다르지만, 이에 따라 강조되는 제도 개선의 우선순위와 재발 방지 방향도 크게 달라진다. 행위자적 관점에서는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 미숙, 소통 능력 부재 등을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고, 소통능력과 리더십을 겸비한 정치지도자의 양성과 발굴을 대안으로 제시할 것이다. 반면, 구조적 접근법은 비상사태 관련 헌법 조항의 미흡함과 청와대 중심의 통치 방식을 근본 원인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권력분산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과 법률 정비를 해결책으로 볼 것이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 논쟁도 유사한 맥락에서 논의될 수 있다. 대통령 권한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보는 입장은 그 집중된 권력이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판단한다. 이들에 따르면 다른 대통령제 국가와 비교할 때, 한국 대통령은 헌법적으로 과도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문제의 핵심은 막강한 대통령 권한이 아니라 취약한 정당정치에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들의 관찰로는, 한국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은 지나치게 광범위하지 않다. 양측의 관점 차이와 무관하게, 역설적이게도 한국 정치는 임기 초반에는 '제왕적 대통령'의 모습으로, 중후반에는 '취약한 대통령'의 모습으로 현실에 존재하게 된다 (Bae and Park 2018).
다른 대통령제 국가들의 대통령 권한과 비교했을 때 한국 대통령의 권한은 제왕적이라고 할 만큼 월등히 강한가? 슈거트와 캐리(Shugart and Carey 1992)의 지표는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 비교에 가장 널리 활용되는 지표이다. 이 지표는 대통령의 권한을 입법적 권한과 비입법적 권한으로 구분한 후, 각 항목을 4점 척도로 계량화했다. 이들이 평가한 한국 대통령의 권한은 입법적 권한이 9점이고 비입법적 권한이 2점으로서 총 11점이다. 대통령 권한이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진 중남미 국가들은 브라질 19점, 아르헨티나 19점, 칠레 14점 등이다. 미국은 12점으로서 한국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따라서 한국 대통령의 권한은 헌법적으로 ‘제왕적’일 만큼 강하지 않다. 한국 대통령의 권한을 헌법적 차원에서 ‘제왕적’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한국 대통령제가 ‘제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명문화된 법적 권한보다 실제 정치적 영향력(de facto)이 훨씬 더 막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공천 개입, 예산 편성 주도, 인사 통제, 여론 형성 등 공식적 권한을 넘어서는 다양한 비공식적 수단을 활용해 정치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여당과의 관계에서는 당 대표를 넘어서는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으며, 국회의원 후보자 공천뿐 아니라 당내 경선 구조 전반에 개입할 수 있다. 아울러, 실질적인 국정 운영이 장관이 아닌 청와대 수석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청와대 정부’ 역시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음에도 대통령의 권력 집중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법적으로는 중간 수준의 권한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더라도, 실제 정치 작동 방식에서는 구조적으로 매우 강한 통치력이 가능하기 때문에 ‘제왕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결국 한국 대통령제의 문제는 헌법에 명시된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서, 실제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 속에서 증폭된다. 제도와 리더십 중 어느 하나에 원인을 귀속시키기보다, 양자의 결합 속에서 작동하는 구조적 악순환을 인식해야 한다. 대통령에게 허용된 법적·비법적 권한의 총합,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제도, 그리고 이를 활용하는 정치 행위자의 전략이 결합되며 한국 민주주의는 반복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Ⅳ. 대통령제와 집권당의 관계
한국 대통령은 헌법상 권한 외에도 다양한 비공식적 수단을 통해 집권당을 장악해왔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3김정치” 시기까지 대통령은 집권당 총재로서 당과 정부 모두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는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비록 노무현 정부 이후 당정분리 원칙이 강화되었지만, 대통령의 당 장악력은 구조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집권당 장악은 주로 공천권, 인사권, 예산편성권이라는 세 가지 수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먼저, 공천권은 공식적인 대통령 권한이 아니다. 다만 실제 정치 현장에서는 공천권이 강력한 집권당 통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가 심화되면서, 지역 정치 엘리트들은 공천을 정치적 영향력 유지의 핵심 수단으로 삼았다. 그 결과 국회의원 후보들은 본선 경쟁보다 당내 공천 과정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통령의 의중이 자연스럽게 공천 과정에 반영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둘째, 대통령의 인사권은 집권당 통제의 또 다른 핵심적 경로로 작용한다. 한국 대통령은 장차관급 공무원부터 공공기관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사를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다. 특히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임이 가능한 제도적 특성으로 인해, 대통령의 인사권은 입법부와 행정부 간 견제와 균형이라는 대통령제 본래의 취지를 크게 훼손한다.
마지막으로, 예산편성권 역시 대통령이 집권당을 장악하는 중요한 통로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순수 대통령제와 달리, 대통령이 예산안 편성의 실질적 주체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은 각 지역구 의원들에게 예산 배분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의원들에게 지역 예산은 재선 가능성과 직결되는 문제다. '쪽지예산' 같은 관행을 통해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구현되곤 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은 이명박 정부의 당·청 일체화 정책이나 박근혜 정부 시절 비주류 정치인 공천 배제 사례를 통해 잘 드러났다(Hur 2017).
결론적으로, 한국에서는 명목상 그리고 제도상으로는 당정분리가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대통령이 공천권, 인사권, 예산편성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집권당을 통제하며, 대통령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메커니즘이 구조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권력 집중은 한국 정치에서 선거의 중요성을 비정상적으로 증폭시키고, 정치적 긴장과 적대감을 고조시키는 원인이 된다. 대통령이 인사를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구조는 선거 결과에 따라 국가 자원과 주요 인적 구성이 전면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기대와 불안감을 동시에 낳는다. 그 결과, 선거는 타협과 경쟁의 장이 아니라 생존을 건 전면전으로 전환되고, 정당은 협력보다 정권 장악에 집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치에서의 협치는 사라지고, 정치의 논리는 감정 동원과 적대의 구도로 흘러간다.
정권 교체 시 반복되는 전 정권 인사에 대한 ‘적폐’ 규정과 수사·처벌 역시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형성한다. 이는 상대 정파를 범죄집단으로 간주하는 적대적 인식을 강화하고, 여야 모두 충성과 투쟁의 정치를 반복하는 구조를 고착시킨다. 실제로 퓨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은 정당 지지자 간 사회적 갈등이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는데(Silver 2022), 이는 권력구조의 제도적 설계와 극심한 진영 대립이 결합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Ⅴ. 민주주의 퇴행과 반복적 리더십 위기
한국 대통령들은 임기 중후반에 심각한 국정 동력 상실과 지지율 하락을 경험한다. 이른바 '레임덕' 현상은 제도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단임제로 인해 대통령은 장기적인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기 어렵고, 의회와 안정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결정적으로 빈번한 총선과 지방선거는 대통령 국정 운영의 동력을 급격히 약화시킨다. 대통령의 권력과 영향력은 취임 초기에 절정에 달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필연적으로 약화된다. 초기에는 과감한 개혁정책 추진이 가능하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정치적 고립과 방어적 국정 운영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불균형은 대통령 임기와 의회 선거 일정 간의 구조적 부조화에서 확산된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대통령과 국회 선거의 분리로 인해 자주 분점정부 상황을 초래한다. 미국 대통령제와 유사해 보이지만, 한국 정치의 취약한 정당 제도와 심각한 내부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정치적 갈등과 교착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대통령의 국정 주도 의지와 의회의 견제 기능 사이의 충돌은 일상적이며, 여당 내부 분열이나 대통령 지지율 하락과 맞물릴 경우 대통령의 정치적 고립은 더욱 심각해진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대통령은 의회의 견제를 회피하거나 우회하는 전략을 선택한다. 행정명령과 시행령 등 대안적 수단을 활용하거나 여론 동원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려 한다(O’Donell 1994). 이러한 접근은 장기적으로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인 권력분립과 의회의 위상을 훼손하면서 수평적 책임성을 저하시키고, 대통령 중심의 권력 집중을 심화시킨다. 결과적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균형 있는 견제 기능은 무너지고,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양극화는 더욱 깊어진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국민에 의해 직선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형태로서, 일정 수준 이상의 책임성이 전제된다. 하지만 이러한 책임성은 주로 대통령과 유권자 사이의 수직적 책임 구조에 집중되어 있으며, 국회와 사법부, 언론과 같은 수평적 견제기관의 실질적 통제력은 제한적이다. 특히 대통령이 높은 여론의 지지를 기반으로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정책 결정을 강행할 경우, 입법부와 정당은 이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권력분립이라는 대통령제의 민주적 핵심 원칙은 약화되고 민주주의는 위기와 직면한다(박상훈 2018).
현대 민주주의는 단지 선거 참여 이상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합리적이고 공개적인 토론을 중시한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는 이성적이고 심의적인 토론이 감정적이고 적대적인 정치 대결로 대체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이 여론을 활용하여 반대 세력을 압박하거나 국회의 권한을 무력화할 때, 정치적 담론은 합리성보다는 감정적 대립으로 전락한다. 송호근(2025)은 이러한 현상을 '정서적 동원의 정치'라고 지칭하면서, 숙의 민주주의의 토대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의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Ⅵ. 제도 개혁과 민주주의 회복의 과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행위자, 제도, 구조, 문화적 차원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그 양상이 매우 복잡하다. 제도 개혁에 접근할 때는 단순한 관점을 경계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 있어 개헌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 개헌을 통해서만 해결 가능한 영역, 그리고 개헌해도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현행 헌법의 권력구조를 건드리지 않고도 현행 법률들의 제개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치개혁 영역들이 분명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제도 개혁이다. 선거제도 개혁은 득표율과 의석률 간 비례성을 높이고 선출직 정치인들의 책임성을 강화함으로써 정당체계의 안정을 도모하고 승자독식 구조를 완화할 수 있는 핵심 영역이다.
정당법 개정 역시 중요하다. 현행 정당법의 과도한 규제는 각 지역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결사체들의 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전국 정당 외에도 지방선거 참여만을 목적으로 하는 지역정당제는 한국 정치체제의 분권화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직선거법과 정당 내부 규정의 개정을 통해 공천 결정과정을 보다 민주적으로 전환한다면, 대통령과 집권당 사이의 수직적 종속구조 완화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 개정 없이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문제도 분명 존재한다. 대통령-총리-의회로 연결되는 정치 주체 간의 권한 설정은 권력구조를 명시하고 있는 헌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비상사태 대응권한, 군 통수권, 예산편성권 등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기본적 권한의 수정은 개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문제가 되고 있는 대통령-국회의 임기 불일치 문제도 개헌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실시할지, 중간 평가의 형식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정할지 등은 대통령 소속 정당의 원내 권력분포를 좌우할 만한 결정적 요인들이다. 동시선거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지만, 대통령-국회 관계의 책임성을 분명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반대로 중간선거는 대통령 권한 행사에 제약요인이 될 것이므로 권력 분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분점정부에서 책임의 불명확함으로 인해 교착상황이 지속되는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 혹은 4년 중임 대통령제로 권력구조를 대폭 개정할 경우 정치권의 신뢰회복과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결국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제도적 개혁은 단선적일 수 없다. 헌법 차원의 개정 노력과 법률 차원의 개정 노력이 동시에 차원을 달리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Ⅶ. 결론: 민주주의 위기의 총체적 진단과 대응 전략
한국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는 어느 한 가지 이유로 축소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다. 따라서 특정 대통령의 도덕성 부족이나 리더십 결핍 같은 개별적이고 인물 중심의 분석만으로는 이 위기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현 상황은 대통령제의 내재적 문제, 한국 정치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적 역량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은 “한국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본질은 권력 구조에 있는가, 아니면 지도자의 무능력에 기인하는가”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양자택일적 접근으로는 충분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이론적으로는 삼권분립을 추구하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대통령에게 권한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권력 집중 구조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견제와 균형을 무력화하며, 대통령 중심의 고립된 의사결정과 경직된 국정 운영 방식을 초래하고 있다.
이 분석은 민주주의 위기의 여러 층위에 초점을 맞춘다. 과도한 대통령 권한 집중과 견제 장치의 무력화, 정당의 제도적 미성숙과 대통령 중심 운영, 반복되는 리더십 위기와 선거 주기의 부조화, 감정 기반 동원 정치의 확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한국 정치가 이상적 민주주의 모델에서 상당히 벗어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전략들이 병행되어야 한다. 첫째, 개헌 없이 가능한 영역에서는 정치 행위자들의 자발적인 개혁 의지와 입법을 통해 정당 민주화를 실현하고, 시민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둘째, 개헌이 불가피한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중장기적인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리더십하에 권력구조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대통령-국회 관계의 조정, 의원내각제나 이원정부제의 검토, 선거주기 통일 여부, 불신임 투표제 도입 등이 그 예이다. 셋째, 어떤 제도 개편으로도 단기간 내 해결하기 어려운 문화적 병목, 즉 정치인들의 제도적 절제와 상호존중의 결여, 부정적 당파성에 기대고 있는 정치 양극화, 감정 동원 정치 등에 대해서는 교육, 시민운동, 공론장 복원 등 장기적 전략이 요구된다.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는 제도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문화와 태도, 그리고 제도와 현실 간의 끊임없는 조율 속에서 구현된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실천과 조율이 실패해 온 결과이며, 그 극복은 제도, 구조, 문화를 함께 아우르는 총체적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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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진석_경상국립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담당 및 편집: 박한수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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