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AI 사랑방, 그 후! - 24기 최은호(서울대학교 외교학 석사과정)
| kor_reports | 2025-07-17
처음 강의실에 앉았을 때는 기대 반, 긴장 반이었다. 이용희, 김용구, 노재봉, 한국 국제정치학계의 1세대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았고, 그들과 나란히 앉았던 거봉巨峯 바로 앞에 앉아있노라니 압도되고 긴장되는 마음이 앞섰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 기수 선배들의 후기에서 재차 강조되었던 “지적 연애”, “상상”, “애환”이 교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니 호기심이 자극되었다. 내게 위 세 단어는 지나치게 모호하게 다가왔다. 아니, 국제정치학은 시급한 현안을 다루는 실용적인 학문인데, 존재하지 않는 질서를 상상할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무릇 학자라면 독자를 설득하는 것까지가 임무이고 뛰어난 학자라면 그 말뜻이 우리에게 자명하게 다가와야 한다고 믿었다. 독자에게 해석학적 방법론의 수련을 종용하는 것은 학자 역량의 부족으로 해석의 책임을 독자에게 미루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품었었다. 특히 학부 시절에 토론 동아리에서 받았던 수사학 훈련은 무슨 말이던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하면 뜻이 통할 것이라고 했고,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면 발화자의 책임이라고 반복했다. 그래서 발화자가 청중으로 다가가는 방향이 아닌, 청중이 발화자에게로 다가가는 과정에 대한 거부감이 더 강했던 것 같다. 4개월 동안 선진시대부터 화평굴기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질서의 건축사를 들으면서 기존에 있던 의문이 많이 해소되었고, 더 많은 질문이 축적되었다.
가장 큰 의문점은 사랑방에서 “상상”과 “미래”라는 키워드로 표상되는 “인간 의지로 조각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역사”와 천하와 같은 역사적 개념의 재발굴이 전제로 하는 “우리를 조각하는 역사”가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래 국제질서의 “상상”은 우리가 우리 미래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와 오늘날 국제관계의 조직원리는 수천 년간의 역사적 층위에 의하여 형성된 것, 즉 역사성historicity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의 행위자인가, 아니면 미래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데 무력한 관조자들인가. 또 우리는 우리를 지배한 시간을 거스르고 과거 사람들과 해석적 지평선을 같이 할 수 있는가? 과거 국제질서와 관찰자들의 기록을 공부하면서 21세기의 젊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나의 수많은 실패한 예습일기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한 인간에는 역사의 행위자로서의 인간, 역사를 기술하는 관찰자로서의 인간과 역사적 작용의 대상인 인간이 모두 공존하고, 상호 작용한다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로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경험의 대상이고,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표상된다. 우리의 시공간 개념은 우리의 정체성과 외부적 환경에 의해 확대되고 축소되기를 반복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 및 공간과의 관계를 변형할 수 있는 동시에, 우리가 만들어낸 시공간에 의해 조각되며, 우리가 만들어낸 시공간에 대한 인식은 다시금 변화한다. 기술의 발전(예: AI)과 같이 시공간의 생산자-소비자의 시스템에 외재적인 요소들에 의해 변하기도 한다.
하영선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시공간의 해석학”은 당시 관찰자들의 기록으로 관찰자들이 마주했던 시공간을 역추적하는 것에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경험된 시간으로, 행위자인 인간과 인간을 빚은 역사적 작용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같은 지리적 제약 (한반도) 속에서 이전 세대가 구상한 공간 개념은 무슨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인가?”라는 마법 주문을 외우면 다른 시간대로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월남 응우옌 왕조의 대중국/대프랑스 외교를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으로서, 나는 이번 학기에 사료의 표면적인 리딩이 아니라, 당대인들의 문제의식, 애환을 재구성함으로써 사료들의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배움을 얻게 되었다. 그 애환은 단지 합리적 국가 이익을 증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개인이 처한 어려움과 당시의 담론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보이는 것이었다.
다산이 귀양 갔을 때의 심정을 이해해야 했고, 유길준이 가택 연금당했을 때 불안감을 알고, 궂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일제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김명식이 말년에 일본에 타협적인 노선으로 전향하기로 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의 불분명한 미래를 그의 지평선에서 보아야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희망과 죽음과 같은 인간의 존재 조건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보편적이기에, 삼천 년 전 사람들에 다가갈 수 있는 지반을 마련해준다.
나의 지난 학부 시절부터 공부가 사료를 짜깁기하여 새로운 결론을 내고 논증하는 것에 급급했다면, 하영선 교수님은 당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죽어있던 사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부 시절 교수들이 줄곧 되풀이했던 “역사학자는 과거에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격언은 내게 그저 불문율이자 직업적 의무(deontology)로 다가왔으나, 당대 사람들과 해석학적 지평선을 같이 하려다 보니, 위 격언을 되뇔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체화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당시 사람들이 보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학생 하나하나를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도해주신 하영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이 힘든 과정을 함께 해준 학우분들과 따뜻하게 도와주신 EAI 선생님들께 깊은 고마움을 표하며 부족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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