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이숙종 EAI 시니어펠로우(성균관대 특임교수)는 오늘날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내부 민주주의 약화와 리더십 붕괴에 따른 자유주의 질서의 불확실성 가운데 한국 민주주의 외교의 과제를 제시합니다. 저자는 반세계화의 역풍, 대규모 난민의 유럽 유입, 자유주의에 대한 철학적·문화적 비판이 세계적 비자유주의 확산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하며, 초국가적 협력과 유연한 인종 및 문화 통합 정책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방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아울러 한국은 초당적 협력과 제도 개혁으로 계엄 및 탄핵 정국을 타개하여 민주주의 회복력을 보이고, 미국의 민주주의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민주주의 보호 및 신생 민주주의 지원에 보다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Ⅰ. 들어가는 말

 

2025년도 새해를 맞는 한국 외교는 국내 민주주의 위기로 얼어붙게 되었다. 12월 3일 밤 내려진 계엄령은 대통령이 국회의 해제 의결을 수용해 선포 여섯 시간 만에 해제되었다.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로 이어진 이 중대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후의 수습 과정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권이 당파적으로 법의 해석과 적용을 주장하고 있고, 이를 해결할 국가기관들이 컨트롤 타워의 부재 속에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그 정점은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1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이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체포되는 장면을 세계에 보여주고 과연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능동적 외교가 가능할 것인가?

 

2025년을 맞아 미국과 한국 양국에서 민주주의 외교는 퇴행이 불가피할 것 같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중상주의적 자국우선주의, 힘을 통한 평화를 기치로 선택적인 군사적·외교적 관여, 다자주의 협력에 대한 경시, 민주적 규범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특징지어질 전망이다(O’Brien 2024; Foreign Affairs Podcast 2024).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가 우위를 유지하도록 적극적 민주주의 외교를 펼쳤던 바이든 행정부와는 180도 다른 셈이다. 한국의 실정은 더욱 심각하다. 윤석열 정부는 자유, 인권, 법치를 보편가치라는 키워드로 형상화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출범시킨 민주주의정상회의를 두 차례나 서울에서 개최했다. 윤 대통령은 시대착오적인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법치를 외면함으로써 그간 쌓아 가던 한국의 민주주의 외교에 타격을 주었다. 민주주의를 속히 복원해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내러티브를 구성해야 할 시점이다.

 

앞으로 세상이 어떤 질서 하에 놓일지, 과연 질서라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한 불확실성은 2025년도를 맞은 이 시점에 더욱 커져 보인다. 국제법과 국제적 규범을 좇는 ‘규칙기반 질서(rules-based order)’를 국제관계에서 주문처럼 말들 하고 있지만, 이 규칙들을 과연 누가 지켜낼 것인가? 흔히들 자유주의 질서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은 중국과 러시아를 필두로 하는 비자유주의 세력의 확장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니다. 불확실성의 근원은 바로 자유주의 질서를 담보해 온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내부 민주주의 약화와 이들의 대외 리더십 붕괴에 있다.

 

국제관계에서 비자유주의적 준동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이스라엘의 가자전에서 보여지듯이 직접적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일으키는 정치 지도자의 독재 때문이며, 간접적으로는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자유주의 국가들이 단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질서의 약화는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의 후퇴와 궤를 같이 한다. 각국에서 개인의 자유와 인권 중시, 법치 존중, 시장경제를 통한 성장은 국제관계에서 일국의 주권 존중, 국제법의 준수, 시장통합을 통한 효율 제고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 한국 외교는 경제와 안보를 국내정치로부터 디커플링하면서 방어적 외교에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러나, 정국이 안정되면서 다시 외교를 정상화하고 그간의 갭을 메우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민주주의 외교를 펼쳐야 한다. 민주주의의 기능 부전이 머나먼 개도국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기도 함을 직시한 만큼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제대로 지키기 위해 국제협력에 나서야 한다.

 

Ⅱ. 자유주의 국제주의 정치세력들의 쇠퇴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서구 주요국들의 ‘자유주의 국제주의(liberal internationalism)’ 외교정책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 자유주의 외교정책은 서구 및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의 동맹과 파트너십을 통해 시장 통합과 제도화된 다자협력을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공고했을 때 안정적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까지 30여개 국가들이 민주화되었는데,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이 시기를 민주화의 세 번째 물결이라 명명한 바 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부터 세계는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역행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의 민주주의 보고서 2024(Democracy Report 2024)는 오늘날 개인이 평균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민주주의 수준은 1985년도 수준으로, 국가 단위에서는 1998년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고 보고한다. 2003년에는 세계 인구의 절반이 전제주의 국가에서 살았지만, 2023년에는 71%가 전제주의 치하에서 살게 되었다.[1]

 

세계적인 비자유주의의 확산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주요 정당의 득표율이 하락하고 우파 정당들이 득세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다당제 서구 유럽국에서 두드러지는데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 자유진영의 대표주자인 독일과 프랑스의 리더십 퇴행이 우려된다. 독일의 경우, 2021년 9월에 실시된 독일 연방의원 총선거에서 중도 좌파 사회민주당(SPD)이 중도 우파 연합인 기독민주당(CDU)ㆍ기독사회당(CSU) 연합과 초박빙 접전 끝에 25.7% 대 24.1%라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둔 바 있다. 사회민주당은 녹색당과 자유민주당(FDP)을 끌어들여 이른바 ‘신호등 연정’을 구축했으나, 연정을 이끄는 올라프 숄츠(Olaf Scholz) 총리가 증세를 반대한 FDP 소속 재무장관을 해임하면서 12월 16일 의회에서 불신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3년 간의 신호등 연정이 붕괴되면서 독일은 2월 23일 조기 총선을 앞두고 있다. 한편, 우익 극단주의 성향의 독일대안당(AfD)은 2024년 6월에 치러진 EU의회 선거에서 15.9%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유럽의회에 진출했을 뿐만이 아니라 몇몇 지방정부에서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독일은 국내 정치 불안뿐만 아니라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상당 기간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기 어려워 보인다.

 

프랑스에서도 정치적 혼란이 만만치 않다. EU 의회 선거에서 자국 내 극우 정당인 국민연합(RN)에 패배한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 7월 7일 결선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좌파연합인 신민중전선(NFP)과 2위를 한 범여권(앙상블)이 공조해 3위에 그친 국민연합을 연립정부에서 배제할 수 있었다. 이후 마크롱 대통령은 좌파연합으로부터 소속 정당 총리를 임명하라는 요구를 묵살했다. 자신이 임명한 총리가 불신임을 받기에 이르자 마크롱 대통령은 12월에 프랑수아 바이루(François Bayrou)를 총리로 새로 임명했다. 극좌와 극우 양쪽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마크롱 대통령이 앞으로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 자유진영의 지도자로 목소리를 계속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24년 6월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 결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EU 집행위원장이 연임에 성공하고 그가 이끄는 중도 우파 정치 그룹인 유럽국민당(EPP)이 가장 많은 188석을, 이어서 중도좌파 정치그룹인 사회민주진보연합(S&D)이 136석을, 중도파 쇄신유럽(Renew Europe)이 77석을 얻었다. 이들 3개 정치그룹이 연대해 다수파를 구성하게는 되었다. 그러나 참패한 녹색당과는 대조적으로 강경 우파 및 극우정당 정치그룹이 득세하면서 유럽의회 총 720석 중 187석을 차지하게 되었다(European Parliament 2024). 중도 우파 EU 리더십은 단결을 위해 극우세력을 끌어안아야 하는 형편이지만 갈등은 커질 조짐이다. 재집권 이후 15년째 장기집권 중인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 헝가리 총리는 역내 대표적인 유럽 통합 반대론자로 친러, 친중 정책을 펼쳐 왔다. EU를 탈퇴하기보다는 회원국으로 남아 주권주의를 내세우며 갈등을 일으켜왔다. 그는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2년 늦어지도록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EU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해서도 계속 반대해 오고 있다.

 

선거의 해였던 2024년 대미를 장식했던 사건은 미국의 11월 대선이었는데, 트럼프 전 대통령은 매직넘버 270을 훌쩍 넘는 312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낙승했다. 함께 치러진 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은 하원 435석 중 220석을, 상원 100석 중 53석을 확보해 정부와 상하 양원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써 1월 20일 취임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외교정책은 의회의 견제를 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국은 양당제 정치구조의 나라인만큼 서유럽 다당제 민주국가들처럼 주요 정당이 약화되지 않는다. 대신에 미국 정치권은 양당 간 극심한 대립정치와 공화당의 우경화로 비자유주의(illiberalism)를 경험하고 있다. 공화당 내의 전통적 신자유주의자가 몰락하고, 탈자유주의(post liberalism), 백인 기독민족주의,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신우파가 득세하고 있다(차태서 2024). 공화당 내 신우파 정치세력이 포퓰리스트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운동과 연대해 얼마나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의 주요 정책이 달라질 전망이다.

 

주류 정당들의 쇠퇴와 우익 정당들의 득세를 반세계화의 역풍으로 진단하는 분석들이 많다. 반엘리트 이념과 국가 정체성 담론을 특징으로 하는 우파 포퓰리즘은 경제적 격차에 대한 반발, 이민 유입 반대, 초국적 규칙에 대한 주권 옹호 등을 내세운다. Trubowitz와 Burgoon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이 1990년대부터 무역 및 투자 자유화, 초국적 협정과 기구 강화에 적극 나서는 반면, 이전과는 달리 국내 사회경제적 보호정책을 게을리해 자유주의 대외정책을 지지해 오던 유권자들에게 ‘지불능력 갭(solvency gap)’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한편, 냉전이 해체되어 지정학적 위협이 사라짐으로서 사회경제적 불안에 직면한 종래 자유주의 지지층들이 반세계화 및 내셔널리스트 정당들을 지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Trubowitz and Burgoon 2023).

 

특히, 2015년 시리아 내전 등으로 인한 유럽으로의 대규모 난민 유입은 기존의 경제적 박탈감을 키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거의 모든 서유럽 국가에서 유권자의 10%에서 30%에 이르는 유권자들이 외국인 혐오주의를 갖고 극우 정당이나 극우운동에 가담하는데, 이들은 도심에서 먼 낙후지역에 거주하는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Levitsky와 Ziblatt는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서만 극단주의자 트럼프가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고, 2020년 대선 패배를 부정해 2021년 1월 6일 의사당 점거 사태까지 초래했다고 말한다(Levitsky and Ziblatt 2023). 이제 곧 트럼프 대통령의 2기 행정부가 시작할 것인데, 슈퍼파워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그의 외교정책이 미치는 국제적 파급력은 실로 막대할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금지옥엽으로 여기는 미국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철학적, 문화적 비판이 일고, 이를 MAGA 운동 세력들에 사상적 기반으로 삼기 시작한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비판론자인 패트릭 드닌(Patrick J. Deneen)은 외부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를 극대화하려는 자유주의는 관습과 공동체를 무너뜨렸지만 구속받지 않은 개인들의 행동을 규제해 질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행정국가(administrative state)를 확장하게 했고, 같은 논리로 경제 영역에서는 자유로운 선택을 위해 국경을 허물고 시장을 세계화시켜 버렸다고 주장한다. 자유를 위해서라는 미명 아래 만들어진 이 거대한 구조 하에 힘을 잃어버린 개인들이 통치불능 상태에 놓인 행정국가와 탈국가경제(denationalized economy)에 대해 정치적 통제를 다시 얻으려는 것이 MAGA와 같은 대중운동이라는 것이다(Deneen 2019).[2]

 

이러한 우파로부터의 자유주의 비판에 대한 반박도 뜨겁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17세기 후반에 정립된 자유주의가 정당화되는 원리를 세 가지로 든다. 첫째는 실용적 정당성으로, “자유주의는 다양한 사람들이 폭력에 의거함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하는 제도적 해법이다”. 둘째는 도덕적 정당성으로, “자유로운 사회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살아가게끔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한다”. 셋째는 경제적 정당성으로, “개인의 소유권, 경제 성장, 근대화를 촉발한다”. 저자는 오늘날 증대하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 사상이 원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좌우 양편에서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변형시키면서 그 정당성에 훼손을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우파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 간섭 없이 팔고 사는 경제적 자율성을 추구하면서 오늘날의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해 경제적 정당성에 타격을 가했다면, 좌파는 개인의 가치와 자율적 선택을 절대시해 사회적 규범에 저항하고 자유주의 본연의 원리인 관용을 해치게 되었다는 것이다(Fukuyama 2022).[3]

 

20세기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자유주의가 마땅한 대안도 없이 미국 사회에서 비판받게 된 것은 우려스럽다. 아직 세계 곳곳에서 개인들은 권위주의적 관습이나 정부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만큼, 자유주의 가치에 기반한 민주주의 곧 자유민주주의는 방어되어야 하고 확산되어야 한다. 또한 경제적 자유주의 비판에서 비롯된 반세계화론이 안보나 통상에 관한 국제협력을 백안시하게 만드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특히 종교적, 인종적 배타성과 결합한 반세계화 주권주의는 자유주의 국제주의에 독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한다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초국적 국제협력과 국내 사회안전망 구축 간에 균형을 다시 맞추고, 보다 점진적이고 유연한 다인종, 다문화 통합정책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Ⅲ. 한국 민주주의 외교의 새 판짜기

 

세계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지원할 리더십이 약화된 오늘날 한국이 취할 수 있는 민주주의 외교가 가능할까?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어떻게 리더십을 말하는가 하는 회의론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 동안의 위기 국면을 잘 헤쳐 온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resilience)을 대내외에 보임으로써 비자유주의적 정치 변동이 발생할 때 이를 어떻게 저지할 수 있을지 국제적 레퍼런스를 제공할 수 있다. 순차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과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은 탄핵정국이라는 막중한 시험대에 올라 와 있는바 이 과정을 어떻게 잘 처리하느냐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국격 평가에도 매우 중요하다. 국회가 가결한 탄핵소추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절차대로 심판할 수 있도록 정치권은 도와주고 그 결과에 초당적으로 승복하는 것이다. 정치권은 이 과정에서 당파적 이익이 아닌 국가적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복원력을 입증할 책무를 갖고 있다.

 

둘째, 민주화 이후 초유의 계엄령 발동과 국회의 세 번째 대통령 탄핵소추를 겪으면서 정치권은 물론 우리 국민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세 번의 탄핵이 여소야대 국면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분점정부하 대통령제의 일반적 취약성을 보여주는데, 제왕적 대통령 유산이 강한 한국에서 야당이 주도하는 국회와 대립은 유독 심하다. 동시에 야당이 다수당일 때 대통령과 정부를 무력화시키려는 극단주의는 몇 번 대통령이 바뀌면서 더 심해졌는데 이는 형식상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 진행된다 하더라도 지양해야 한다. Levitsky와 Ziblatt는 제도적 권한을 당파적 라이벌을 제거하기 위해 남용하는 극단주의가 민주적 과정을 망가뜨린다고 경고한 바 있다(Levitsky and Ziblatt 2018). 오늘의 우리 정당들은 이러한 극단주의 대립을 여야 할 것 없이 벌이면서 정치로 풀어갈 일들을 사법부에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형국이다. 상호 관용과 절제의 민주정치를 정치권 스스로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극단적 정당정치가 회복 불가능한 국민 분열을 초래할 것이다. 승자독식적 선거법 개정과 같은 정치 개혁을 통해 정치 양극화를 완화할 길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번 시국을 넘겨도 또 다른 위기가 닥칠 수 있고, 그 모습은 더욱 추악할 수 있다.

 

셋째, 이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들은 미국에 민주주의 외교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리더가 없어졌다고 흩어지기보다는 보다 능동적으로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과 함께 민주주의를 보호하고 옹호하는 외교에, 나아가 역내 및 세계 신생민주주의 국가들을 지지하고 지원해 주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인태지역 자유민주주의 중견국가(middle power)들은 서구의 민주주의 리더십이 약화된 전환기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협력 동인이 더 커졌다고 말할 수 있다.

 

넷째, 바야흐로 강대국의 틈에 끼이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이슈별로 협력하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가 부상하는 시대이다. 글로벌 사우스에는 선거는 치르지만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기준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민주화보다 경제발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경제발전이 민주화보다 선행한 나라로 우리의 시행착오를 공유해 각 나라의 여건에 맞추어 포용적 발전과 민주화를 도모하도록 도울 수 있다.

 

다섯째, 한국의 시민사회와 민간단체는 국내 문제에 매몰되어 해외 민주주의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민주주의 외교가 지속가능하려면 정부 간 협력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외교(people-to-people diplomacy)가 중요하다. 한국의 민주적 성취를 국가적 자랑거리로 삼다가 이제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 만큼, 우리 개개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자유와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지구촌 시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참고 문헌

 

차태서. 2024. “신우파의 부상과 미래 미국.” EAI 워킹페이퍼. 12월 19일. https://eai.or.kr/new/ko/pub/view.asp?intSeq=22693&board=kor_issuebriefing (검색일: 2025. 1. 12.)

 

Deneen, Patrick. 2019. Why Liberalism Fail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European Parliament. 2024. “The Political groups of the European Parliament.” As of 16 July 2024. https://www.europarl.europa.eu/about-parliament/en/organisation-and-rules/organisation/political-groups (Accessed January 12, 2025)

 

Foreign Affairs Podcast. 2024. “The World of Trump 2.0: A Conversation With Daniel Drezner and Kori Schake.” November 8. https://www.foreignaffairs.com/podcasts/world-trump-second-term-foreign-policy (Accessed January 12, 2025)

 

Fukuyama, Francis. 2022. Liberalism and Its Discontents.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Levitsky, Steven, and Daniel Ziblatt. 2018. How Democracies Die. New York: Broadway Books.

 

______. 2023. Tyranny of the Minority. New York: Crown.

 

O’Brien, Robert C. 2024. “The Return of Peace Through Strength: Making the Case for Trump’s Foreign Policy.” Foreign Affairs. June 18. https://www.foreignaffairs.com/united-states/return-peace-strength-trump-obrien (Accessed January 12, 2025)

 

Trubowitz, Peter, and Brian Burgoon. 2023. Geopolitics and Democracy: The Western Liberal Order from Foundation to Fractur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V-Dem Institute. 2024. “Democracy Report 2024.” https://v-dem.net/documents/44/v-dem_dr2024_highres.pdf (Accessed January 12, 2025)

 


 

[1] 최근 42개 국가들이 전제주의로 빠져들고 있는데 이 가운데 28개 국가는 원래 민주주의였으며, 이 중 절반만이 2023년도에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었다고 보고한다(V-Dem Institute 2024).

 

[2] Deneen은 자유주의는 자연(예를 들어 남녀 구분) 정복, 무시간성, 무공간성, 무구분성(borderlessness)을 주요 특징을 가지면서 가족, 공동체, 종교 등의 사회적 기본 구조를 허문다고 주장한다.

 

[3] 저자는 오늘날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왜곡이 원인이었던 만큼 원래의 원리에서 개선 방향을 찾고 있다. 집단으로부터 개인 자유의 우선을 유지하나 절제를, 언론 자유와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서 공적 스피치는 규제를, 분권화된 정부와 정부 신뢰의 회복을, 성장보다 재분배 중시 등을 주장한다.

 


 

이숙종_동아시아연구원 시니어펠로우, 성균관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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