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EAI 사랑방, 그 후!

  • 2019-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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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경 사랑방 12기(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정직한 공부를 하고 싶다.’ 사랑방을 함께하였던 동기의 말이기도 했던 ‘정직한 공부’는 사랑방을 하는 5개월 내내 저를 괴롭힌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정직한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해온 20년 남짓의 공부는 입시와 성적을 받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고, 공부의 중심은 저자의 핵심을 빨리 파악하여 소화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또한, 저는 손톱만큼 아는 것을 집채만 한 바위처럼 포장하는 것에 능한 사람이었기에 저의 공부는 정직하기보다는 얄팍하였고, 결과적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에 가까웠습니다.

사랑방을 통해 하영선 선생님을 만나고 저는 정직한 공부를 하기 위한 두 가지 태도를 배웠습니다. 하나는 학문에 대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학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였습니다. 첫 수업 때,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던 ‘지적 연애’는 학문에 대하는 태도와 직결됩니다.

 

8평 남짓의 연구실에 50년 가까이 있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답답해하리라 생각하지만 나는 전혀 답답하지 않다. 책상에 앉아 나는 세계를 보고, 死者를 살려와 대화를 나눈다. 지루할 틈이 없고 답답할 틈이 없다. 여러분들도 나와 같은 지적 연애에 빠지기를 바란다.

 

저에게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지적 연애는 작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지적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적 연애’가 필요조건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의 한 학기 사랑방 과정은 어쩌면 지적 연애를 체화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지적 연애에 빠지게 된 계기는 사랑방 2주차 때였습니다. 대학원 학기가 시작하면서 일주일 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읽기 자료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양의 자료를 소화하기 위해서 저는 지적 사랑꾼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지적사랑꾼으로 거듭나기 위한 고군분투가 제게 남겨준 것은 내가 이렇게 애정이 메마르고 차가운 사람이었느냐는 좌절감이었습니다. 패인은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요령이 부족했던 점도 있지만, 절실함이 부족한 데에서 기인한 마음가짐이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랑방의 기간을 많은 자료를 단시간에 볼 수 있게 능력을 키우는 훈련 기간이라 생각하고 지식생산자가 되기 위해서 지식습득자로서 거듭나는 과정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같은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어로도 읽고, 한글로도 읽고, 관련 논문을 찾아 읽고,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으면 북리뷰라도 읽어가면서 제 연애 상대가 하는 말이 무엇일까 고민하였습니다. 동시에 많은 자료를 단시간에 볼 수 있도록 저만의 방법을 고민하였고, 사랑방 회차가 지속될수록 시행착오를 겪으며 저만의 방법을 만들어나갔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던 것은 훈련할수록 변화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공부 속도에 탄력이 붙는 것과 동시에 지적 연애를 할 수 있는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모하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지적 연애는 다시 난관에 빠졌습니다. “이 많은 자료를 읽고 나는 무엇을 남들한테 전할 것인가. 전할 메시지가 있는가?”라는 고민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료를 단시간에 보는 데 급급하여 자료를 해석하는 눈을 키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민을 할 무렵, 선생님께서 제 마음을 읽으신 것처럼 다음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국제정치학을 배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국제정치학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부와 석사과정 동안 국제정치학 공부를 해왔고, 공부하는 이유가 나름 명확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선생님 말씀의 울림은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런 연유는 국제정치학 공부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제 목표가 과연 국제정치학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국제정치학 공부를 통해서 무엇을 얻어야 하고, 얻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고민하던 저의 상황을 알기라도 하신 듯 선생님께서는 국제정치학도라면 응당 제국적인 마인드와 전략적 사고를 가져야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한국은 제국이 아닌데 왜 제국적인 마인드를 가져야하며, 제국이 아닌 국가에서 태어나 어떻게 제국적인 마인드를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은 사랑방 세미나가 진행되면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방에 오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평화 질서 구축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중이 바라보는 세계는 어떤 모습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들의 국제정치학을 알아야 했고, 사랑방 세미나는 이 부분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2천 년이 더 된 고대 천하질서부터 명·청 시기의 천하질서를 배우며 21세기 중국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눈을 키울 수 있게 되었고, 냉전질서와 데탕트를 공부하며 현재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읽기 위한 포석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아시아태평양을 넘어 인도-태평양을 바라다보고 있는 미국의 제국적 마인드를 분석하며 미·중을 주연으로한 동북아시아의 연극 공간 속에서 미중의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어떤 연기가 펼쳐질지 예측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 예측이 곧 한국이 놓인 정치적 현실이기에 사랑방의 공부는 늘 현실과 맞닿아있는 살아있는 공부였습니다. 더불어 국제정치학도로서 제 공부에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광복이 왜 우리에게는 분단질서로 다가왔는지, 전 세계가 데탕트의 평화시대로 나아갔는데 한반도는 왜 그러지 못하였고, 아직도 냉전질서가 자리 잡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앞선 예측이 현실과 어긋날 때 어떠한 비극이 한반도를 엄습하였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

천하의 근심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

 

중국 북경의 유리창을 답사할 때, 찻집 주전자 판에 놓인 문구입니다. 북송의 유명한 정치가인 범중엄이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남긴 문구로 답사를 통해 사랑방의 한 학기를 마치는 저희에게 어떤 태도를 지니고 사랑방을 나서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방을 통해 저는 이전과는 다른 국제정치학도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제가 느꼈던 귀중한 시간을 경험해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더불어 제가 고민했던 방법들이 궁금하시다면 사랑방에 들어오셔서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한 학기 동안 고민한 제 방법을 공유해드리겠습니다.)

 

EAI 사랑방, 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