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이숙종 EAI 시니어펠로우(성균관대 특임교수)는 민주주의 진흥을 위한 공적개발원조(ODA) 현황을 분석하고, 한국의 ODA 개혁 전략을 제시합니다. 저자는 개발원조와 민주주의 지원을 통합함으로써 권위주의가 확대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소개하면서, 수원국의 레짐 유형에 따라 거버넌스 지원의 효과에 차이가 있음에도 공여국들이 레짐 유형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아울러 한국의 ODA 전략으로 자유 선거, 시민사회, 언론 자유 등 지원 분야 확대, 지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집중, 시민사회 및 가치를 같이하는 공여국과의 협력 등을 제시합니다.

원조와 민주주의 지원

 

한국은 2022년 기준, 27.9억 달러(국민소득 대비 0.17%) 규모의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 이하 원조)를 지원해 경제개발협력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30개 국가가 소속된 개발협력위원회(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 DAC)에서 16위 공여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DAC에 2010년 가입한 이래 한국의 원조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빈곤국에서 공여국으로의 성공적 전환은 세계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취이다. 하지만 한국의 높은 자유민주주의 위상에서 보자면 민주주의 원조 수준은 낮은 편이다.

 

민주주의 원조에 관한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통상적으로 민주주의 옹호와 지원에 쓰이는 원조를 통칭한다. 민주주의 원조가 자칫 협력대상국 정부의 내정 간섭으로 비쳐질 수 있어, 빈곤 퇴치와 사회경제적 발전이 주요 목표가 되는 개발협력(development assistance)에서 민주주의 원조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DAC도 원조를 “개발협력과 유관 정책들을 도모해,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경제개발, 국가 내 · 국가 간 평등의 진전, 빈곤 퇴치, 개도국의 삶의 여건 개선 등을 포함하는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2030에 기여함을 목표로” 두고, 개발, 통상, 산업 등은 물론 환경, 성평등, 반부패, 시민사회 강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원조정책의 표준을 만들고 제언을 해 오고 있다. 한마디로, DAC 차원에서 민주주의 확산을 원조의 목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OECD n.d.).

 

한국의 국제개발협력기본법 역시 “국제개발협력정책의 적정성과 집행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국제개발협력의 정책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게 함으로써 국제개발협력을 통한 인류의 공동번영과 세계평화의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이 법은 국제개발협력의 기본원칙으로 국제연합헌장의 제반 원칙 존중, 협력대상국의 자조노력 및 능력 지원, 협력대상국의 개발 필요 존중, 개발경험 공유의 확대, 국제사회와의 상호조화 및 협력 증진을 명시하고 있는데, 원조를 민주주의에 연관시키는 어떤 자구도 없다(OECD 2005; Korea Legislation Research Institute n.d.).

 

오랜 기간 되물어져 온 “원조가 과연 효과가 있느냐”는 질문은 주로 경제적 개발 효과가 있는지에 초점을 뒀고, 공여국들의 원조도 이에 따라 국가역량 및 제도 구축과 관련한 사업들이 중심이 되어 왔다(Riddell 2007). 2005년 천명된 파리 선언도 원조효과성 5대 원칙 — 수원국의 오너십, 공여국의 수원국 간의 전략 연계, 공여국 사이 조정과 공여국과 수원국 사이의 협력 등의 조화, 결과중심 관리, 상호 책무성 — 의 목적을 원조의 사회경제적 발전 효과에 두고 있다. 현행 원조체제의 근간이 되는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 17개 가운데서도 민주주의 옹호와 관련되는 것은 16번째 목표인 “평화, 정의, 강력한 (포용적) 제도” 정도이다.

 

내전, 분쟁이나 재난 등 갈등적 상황에서 인도주의적 지원이 실시될 때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무해(Do No Harm)’ 원칙을 민주주의 지원의 관점에서 어떻게 봐야 할지는 신중을 요구한다. 이 원칙은 원조 간섭(aid intervention)으로 인해 의도하지 않았는데 협력대상국 내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거나 국가 건설을 방해할 수 있는 부정적 결과에 대한 경각심에서 정립되었다.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UNHCR)은 무해원칙을 공평성, 중립성, 투명성, 책무성 등의 윤리적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다(UNHCR 2019). OECD는 공여국들이 원조 제공 시 현지 정치 역학과 역사적 배경에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포용적 정치과정, 국가 정통성, 건설적 국가-사회 관계, 적절한 국가기능 역량 강화에 집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1] 권력 집단 간 정치적 대립, 엘리트와 사회세력 간 갈등 등 현지의 권력관계에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통합적 국가건설에 원조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지원 요소보다는 국가건설과 사회통합에 더 초점을 두는 것이다.

 

그런데,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민주주의 원조를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융합하여 옹호하는 흐름이 생기고 있다. 공여국들의 원조는 협력대상국 수요 중심으로 효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지만, 공여국들의 이해관계가 원조정책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Lancaster 2007; Haan 2009). 민주주의 공여국들도 안보나 경제적 이해관계 또는 외교적 영향력 확보를 민주주의 옹호 자체보다 우선시해 왔다. 이렇다 보니 민주주의 옹호론자들은 서방 공여국들이 해외 원조 시 민주주의 가치와 인권 존중을 게을리하고 있다고 종종 비판해 왔다. 특히, 원조 총액 면에서 제1위 공여국인 미국의 경우는 안보와 외교 협력이 원조정책의 주요 동인이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민주주의 대 전제주의로 국제정세를 보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민주주의 지원을 원조정책을 비롯한 미국의 외교정책에 보다 강력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Task Force on US Strategy 2021).

 

바이든 대통령은 전임자와 달리 민주주의를 대외 정책에 반영하는 데 적극적이며, 이러한 취지에서 민주주의정상회의를 만들어 2021년 12월 첫 회의를 열었다. 세계 민주주의 진흥을 위한 미국의 노력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더 커졌는데 ‘민주주의 재생을 위한 대통령의 창안(Presidential Initiative for Democratic Renewal)’ 아래 독립 미디어, 반부패, 민주주의 개혁가 지원, 민주주의를 위한 기술 전진, 선거 및 포용적 정치과정 보호 등 다섯 가지 분야에서 미국원조청(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을 중심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White House 2022). USAID의 수장인 서맨사 파워(Samantha Power)는 전제주의에 맞서는 옳은 길은 그간 개인의 권리 옹호에 치중했던 가치중립적 경제개발 원조 간의 벽을 허물고 민주주의 지원을 원조를 포함한 모든 경제적 프로그램에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Power 2023).[2]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시민의 자발적인 저항 운동이 있을 시, 내정 불간섭 원칙에 절대적으로 구속되지 말고 국제적으로 인정된 인권 옹호의 연장선상에서 외부의 민주주의 지원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민주주의) 지원을 받을 권리(right to assistance)” 규범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Merriman, Quirk, and Jain 2023).

 

이처럼 민주주의 지원을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연계하는 움직임에 대한 비판도 있다. 개발 중시나 지정학적 관점에서 민주주의 지원을 하지 말고, 소수 집단의 인권이나 언론인 및 반정부 인사의 정치적 자유 등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민주주의 지원 본연의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Pepinsky 2021). 이러한 주장은 민주주의 원조를 공여국의 안보나 경제적 이해관계에 종속시키지 말고 일관되게 민주주의 지원에 충실하자는 기존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두 주장은 민주주의 지원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있지만, 민주주의의 보호와 진흥을 위해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한국의 윤석열 정부는 자유, 인권, 법치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외교정책에 통합시키고 있다. 그 일환으로 제2차 민주주의정상회의 인태지역 회의 기조 연설에서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에게 전자정부, 디지털, 기술 역량 강화, 투명성, 반부패 등 민주주의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분야에서 향후 3년간 1억 달러 규모의 개발협력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발언 이후 외교부는 5월 무상원조 관계기관 협의회를 열고 2024년도 무상원조 후보사업 지원액을 총 3조 4,281억원 규모로, 전년도 대비 29.3%나 늘렸다. 다만 정상회의에서 천명된 원조는 주로 전자정부와 디지털 기술 제공과 같은 기술지원이나 협력대상국 정부의 역량강화 사업이어서,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 지원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권위주의가 득세하면서 서구 공여국들에서는 민주주의 원조 적극론에 대한 지지가 강해졌고, 자유민주주의를 외교정책에 적극 표방하고 있는 한국 정부도 이러한 접근 방식을 공유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 한국이 어떤 분야의 민주주의 원조를 확장해야 할지, 민주주의 원조를 집중할 수 있는 협력대상국의 여건은 무엇인지, 효과 있는 민주주의 원조를 위한 집행 방식은 어떤 것인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이 확장해야 할 민주주의 원조 부문

 

OECD 보고서는 DAC의 거버넌스와 시민사회 지원 분야를 국가건설(state building)과 민주주의 지원(democracy promotion)으로 양분해 비교하고 있다. 전자는 공공정책 및 행정관리, 공공재정관리, 분권화와 자치정부 지원, 반부패 조직과 기관 지원, 세수 증대, 공적 획득, 법적 사법적 발전, 거시경제 정책 등으로 구성되며, 후자는 민주적 참여와 시민사회 지원, 입법부와 정당, 미디어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 인권, 여성의 평등을 위한 조직과 기관, 여성과 소녀에 대한 폭력 근절, 질서 있고 안전하고 책임 있는 이민과 이동 활성화 등으로 구성된다. 2010년에서 2019년 사이 모든 원조 공여국들이 124개국 수원국에 지급한 원조를 분석한 OECD 보고서에 의하면, 동 기간 거버넌스 원조의 73%가 국가건설에, 27%가 민주주의 진흥에 사용되었고 이러한 비율은 매년 별 변동이 없었다고 한다.[3]

 

한국의 원조에서 민주주의 지원은 무상원조를 통해 구현된다. 무상원조 집행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KOICA)의 웹사이트에 열거된 12개 활동 분야 중, 민주주의와 관련된 분야는 거버넌스 및 평화, 성평등, 인권 3개 분야이다. 그 가운데 핵심적인 거버넌스 및 평화 분야에 관한 중기전략을 보면, ‘참여적이고 포용적인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관련 전략 목표이다. 이 목표 실현을 위한 프로그램으로는 포용적 선거 및 입법활동 지원과 참여적 민주주의 기반 확대가 제시되고 있다. 나머지 ‘분쟁 예방 및 평화로운 삶’은 공동체와 사회 통합에,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법 및 치안제도’와 ‘책임있고 효율적인 행정제도’는 공공기관 및 제도에 관한 것이다(KOICA n.d.). 평화 및 거버넌스 분야 지원액은 2016-2019년 사이 전체 원조에서 15-18%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중 81%가 거버넌스, 19%가 평화 관련 원조였다. 거버넌스 원조는 행정제도에 62%, 사법치안제도에 19%, 입법지원에 5% 순으로 지원되어, 결국 KOICA의 거버넌스 원조는 행정제도 개선과 공공행정 역량강화 및 초청연수에 대부분을 사용한 셈이다(김태균 2021). 문제는 사법 및 치안제도나 행정기관 역량강화는 국가건설에 해당되어 민주주의 원조로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국이 국가역량 부문을 거버넌스 분야로 분류해 원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발전국가 또는 행정국가 모델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역사적 경험이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좁은 의미의 민주주의 원조 기준에 충실하자면, KOICA의 프로그램 중 선거 및 입법활동 지원, 참여 민주주의 기반 지원, 성평등이 해당된다. 한국 선거관리위원회가 창설하여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는 세계선거관리협의회(Association of World Election Bodies: A-WEB)가 민주적 선거 지원과 각국 선거관리기관 간 교류를 담당하고 있어 이 분야 활동 기반이 마련되어 있다. 다만 보조금과 함께 지원되던 정부 예산이 대폭 삭감되어 현재는 충분한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다. 기왕에 한국이 주도해 선거관리위원회들의 국제적 협의체를 만들고 사무국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협의회의 법적, 재정적 위상을 개선해 민주주의 원조의 창구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민주적 참여의 경우는 한국 사회의 온 · 오프라인 능동적 시민 참여가 활발한 만큼 협력대상국 맥락에 맞춰 이를 프로그램화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방정부 예산 수립 시 활용되어 오던 시민참여예산제나 디지털 청원제도 및 정책 제안과 같은 것은 협력대상국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도울 수 있다.

 

자유로운 미디어 활동 지원은 민주적 거버넌스에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한국의 원조 기관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이는 한국 원조가 정부 대 정부 간의 계약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민간 언론 지원이 어렵고, 미디어 지원은 자칫 국내 정치 간섭으로 비칠 수 있어 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독립적 언론 매체가 다양하고 그 숫자도 매우 많은 상황에서 자유 언론 지원을 게을리하는 것은 갖고 있는 역량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경우 양자원조보다는 다자기구나 자유언론을 지원하는 서방의 민간 기관과 파트너십을 맺어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민자와 난민에 관한 지원 역시 민주주의 원조 차원에서 주목받고 있다. 난민과 이민 유입에 대한 통제가 강한 한국 정부도 이제 사람들의 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입장이 되고 있는 만큼, 국제적 원조 활동을 통해 국내 이민과 난민 거버넌스 개혁의 동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주요 성취 중 하나인 성평등의 경우, 교육과 고용을 통한 여성 권리 신장이 한국 민주주의 원조의 강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자면, 한국의 거버넌스 원조는 행정제도 역량강화에 집중되어 있고, 전형적인 민주주의 원조는 취약하다는 점이다. 국가역량이나 기술 지원보다는 시민사회 강화나 언론자유와 같은 민주주의 원조가 수원국의 민주적 거버넌스 진흥에 효과가 있으므로 이 분야의 원조를 보강해야 함을 알 수 있다.

 

한국 원조: 신생민주주의국에 민주주의 원조를 집중하라

 

DAC 공여국들이 굿 거버넌스에 도움이 되는 원조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들의 원조는 협력대상국 정치체제 형태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다. 최근 발표된 OECD 보고서는 2010년에서 2019년 사이 10년 간 공적개발원조가 레짐 형태별로 어떻게 지원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이 기간 OECD DAC 회원국과 비회원국을 포함한 모든 원조 공여국이 124개국 수원국에 지원한 추세를 보면, 전제주의 국가들로 흘러간 원조 총액은 2010년 전체 공적개발원조액의 64%에서 2019년 79%로 15%포인트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전제주의 레짐 가운데 직접선거도 하지 않는 폐쇄 전제주의 국가들에 대한 공적개발원조는 178%가, 선거는 치르되 비민주적인 선거 전제주의 국가들에 대한 원조는 41%가 늘어난 것으로 집계된다.[4] 이는 10년 간 전제주의 국가가 68개국에서 75개국으로 늘었고, 전제주의 국가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원조가 19배나 늘어났기 때문이다. 2015년 이후 시리아와 예멘 사태는 전제주의가 강화되어도 이들 국가들로 인도주의적 지원을 늘릴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잘 드러낸다. 나아가 동 기간에 튀르키예,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신흥 공여국들은 전제주의 국가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대폭 늘렸다. DAC 회원이 아닌 이들 국가는 인권이나 민주적 거버넌스를 중시하는 위원회의 원조 원칙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공적개발원조가 빈곤 퇴치와 경제개발이 주요 목적인 만큼 원조 총액의 흐름이 협력대상국 정치체제를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거버넌스를 개선하려는 목적의 원조는 어떨까? 동 보고서는 2010년대에 거버넌스 원조가 전체 공적개발원조 총액의 65%에서 73%로 증가했지만 이는 전적으로 폐쇄전제주의 국가들로 거버넌스 원조가 150%로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보고한다. 이는 거버넌스 원조도 레짐 형태를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진흥 원조만 따로 보아도(즉 전체 거버넌스 원조에서 국가건설을 위한 원조를 제외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민주주의진흥 원조 가운데 동 기간 참여와 시민사회 지원이 항상 가장 크고, 선거지원은 줄어든 반면 인권과 여성 지원은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런데 민주주의 원조 역시 필요와 기회가 상당히 다를 협력대상국 정치체제 특성을 별로 고려하지 않은 채 지원된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5개 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들인 미국, 유럽연합, 스웨덴, 영국, 독일은 전체 민주적 참여와 시민사회 원조액의 70%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들마저도 레짐 형태에 따라 차별화를 별로 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2010년과 2019년 사이에 폐쇄 전제주의 국가들에 대한 민주주의 진흥 원조가 72% 늘어났는데, 이 범주의 원조는 소말리아, 요르단, 남수단, 중국, 모로코, 시리아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추세를 본다면 민주주의 원조라고 하면서도 민주화 기대효과 없이 전제주의 국가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원조가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수원국의 레짐 형태와 무관하게 민주주의 원조가 지원되었다고 해서 민주화 효과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실증 연구들은 민주주의 원조가 민주화를 돕고 있음을 발견한다. 2002-2012년 사이 OECD 국가들의 원조 전후를 비교한 Lührmann 등의 연구는 선거민주주의 수준, 핵심적 시민사회, 시민자유 수준에 대한 민주화 효과가 있음을 발견한다. 수원국 체제의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국가역량 강화 원조보다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민주주의 진흥 원조가 효과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Lührmann et al. 2018). 2002-2018년 사이 EU 민주주의 원조 지원을 분석한 Gafuri의 연구도 EU의 126개 수원국 대상 민주주의 원조가 V-Dem 선거민주주의 지표의 0.01점 상승을 가져오고, 수원국 1인당 지급된 1달러의 민주주의 원조가 2년후에 0.009점의 선거민주주의 지표 상승을 가져오는 등 크지는 않지만 민주화 효과가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Gafuri 2022). 25년 간 스웨덴의 민주주의 진흥 원조 효과를 분석한 Niño-Zarazúa 등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반적인 효과는 미미하지만 수원국이 민주화 상승 추세에 있을 경우 민주주의 지원 효과가 크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직 민주주의 공고화 단계에 이르지 않았을 때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되었다고 원조를 줄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공고화에 필수불가결한 인권, 참여 및 시민사회 강화, 자유언론과 같은 부문에 민주주의 원조를 집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Niño-Zarazúa et al. 2020).

 

Cheeseman과 Desrosiers의 최근 보고서도 권위주의 국가라고 원조를 중단해서도 안되지만 우선한다면 민주주의가 조금씩 약화되어 가고 있는 국가에 최우선적으로 지원할 것을 주문한다. 가장 중요하게는 수원국에 지속적으로 일관된 방식으로 관여하는 원칙을 지키는 것인데, 안보나 경제를 우선시하면서 수원국들에 관여할 때 민주주의를 해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장 우선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Cheeseman and Desrosiers 2023).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자면, 인도주의적 이유 등으로 권위주의 국가를 지원하더라도, 공여국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 지원을 집중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공여국들이 거버넌스 지원에 따른 민주화 효과를 기대하고 싶다면, 민주화 과정에 있는 신생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점진적, 장기적인 민주화 효과를 기대하면서 민주화 과정에 있는 특정 수원국이 필요로 하는 분야에 지원을 집중할 필요가 있겠다.

 

한국 원조: 시민사회 단체 및 민주주의 공여국과 파트너십을 통해 원조 집행방식을 다각화하라

 

한국의 해외 원조는 협력대상국 정부와의 계약에 기반하는 정부 간 원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정부 민간단체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지출되는 해외 원조는 아직 전체의 4%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 점은 협력대상국 시민사회 지원을 민간 루트를 통해 실시하는 서구 공여국의 원조 방식과 상당히 다른 부분이다.

 

국제개발협력기본법 제2조는, 국제개발협력을 “국가ㆍ지방자치단체 또는 공공기관이 개발도상국의 발전과 복지증진을 위하여 협력대상국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제공하는 무상 또는 유상의 개발협력(이하 “양자간 개발협력”이라 한다)과 국제기구에 출연ㆍ출자 및 양허성 차관 등을 통하여 제공하는 다자간 개발협력을 말한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여기서 국제기구란 OECD DAC이 정한 개발 관련 정부 간 또는 비정부 국제기구 가운데 한국이 재정적 기여를 하거나 공동사업추진 등을 통하여 협력하는 국제기구를 말한다. 따라서 이 법 조항에 따르면 비정부 국제기구를 통해 공동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법적 근거가 있는 만큼, 한국 정부는 국내외 비정부 단체와 민관 협력을 아우르는 혁신적 방식으로 원조 집행을 다각화해야 할 것이다.

 

다자성 양자원조(multi-bilateral assistance)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다자성 양자원조는 협력대상국, 지역, 분야, 주제 등 용도를 지정하여 국제기구에 기금을 위탁하여 시행하는 제도로 국제기구가 의사결정권을 갖는 다자원조와 구별된다. 다자성 양자원조는 공여국이 국제기구의 경험과 전문성을 활용하면서 정부 간 양자원조와 비교하여 정치적 민감성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자연재해나 분쟁 등 취약국가에서 긴급한 구호 원조가 필요할 공여국들이 유엔 산하 국제기구들을 종종 활용하는데, 한국도 아프리카 최빈국이나 필리핀 등 재난 구호 시 이러한 방법을 활용했다고 한다(조현주 · 김은미 · 정헌주 2015). 이를 민주주의 원조에 활용한다면 민주주의 지원에 특성화되어 있는 국제기구의 전문성을 활용하고 협력대상국 정치 불간섭 원칙을 지키면서 현지 민주적 거버넌스를 도와주는 방향이 될 수 있다. 뜻을 같이하는 민주주의 공여국 간 파트너십도 가능하다. 목표를 공유하는 민주주의 공여국들이 수원국 원조에 드는 행정적 비용을 절감하며 개발원조의 규모를 확대하는 등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

 

한국은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모두 성취한 대표적 자유민주주의 공여국이다. 그러나 협력대상국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원조에 대해서는 뚜렷한 원칙과 규범 없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시점에 민주주의의 증진을 위해 민주주의 원조의 틀을 짤 필요가 커졌다. 본고는 기존의 경제적, 사회적 개발에 초점을 두어 온 한국의 원조 정책을 크게 바꿀 수 없을지라도 민주주의 원조를 시급히 정립해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기존 정부 역량강화나 기술지원 원조에서 나아가 선거지원, 시민참여, 자유언론 지원과 같은 분야의 민주주의 지원을 늘릴 것, 둘째, 수원국 선정 시 전제주의와 공고한 민주주의 사이에 있는 신생 민주주의에 집중할 것, 셋째, 국내외 민간단체들과 관민협력 파트너십을 통해 또한 국제기구나 뜻을 같이 하는 민주주의 공여국들과 협력하여 협력대상국의 시민사회와 언론을 직접 지원하는 원조를 집행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의 출발점은 DAC 공여국들과 원조 분류 방식이나 체계를 일치시키되 우리 실정에 맞게 프로그램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원조를 통한 기여외교는 빈곤 탈출과 경제개발에서 나아가 민주적 거버넌스를 진흥하는 방향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민주적 거버넌스가 자리잡지 못하면 지속가능한 발전도 안정적 평화도 어렵기 때문이다. ■

 


 

[1] 동 보고서는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치러지는 선거라면 이른 시일 내 선거 실시가 바람직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기대를 너무 높여도 갈등적 상황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보고한다. 취약국가의 정부가 기능적 역할을 못 한다고 시민사회 단체들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면 공공부문을 두 개 만드는 것과 같으므로, 이보다는 국가부문을 통한 원조 자원 분배가 바람직하다고 주문한다(OECD 2010).

[2] USAID는 활동 영역을 13가지로 분류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인권, 민주주의 및 거버넌스(Democracy, Human Rights, and Governance)’이다. https://www.usaid.gov/democracy

[3] 이 보고서는 원조와 협력대상국 레짐 유형 간 관계를 보는 만큼 국제기구 등으로 향한 다자원조는 제외하고 있는데, 총액 규모로는 전체 공적개발원조의 70%에 이르는 것이다. 민주주의다양성 연구에서 레짐 분류방식은 Lührmann et al.(2018)을 참조할 것.

[4] 이처럼 178% 늘어난 폐쇄전제주의로 지원된 원조는 주로 다자원조 형태로 공공부문에 투입되었는데, 분야별로는 인도주의 원조(34%), 사회 인프라와 서비스(29%), 경제 인프라와 서비스(14%), 물품 원조와 프로그램 지원(7%)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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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종_동아시아연구원 시니어펠로우. 성균관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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