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이승주 EAI 무역·기술·변환연구센터 소장(중앙대 교수)은 2024년 한 해 동안 미국의 대중국 규제와 중국의 규제우회 전략이 충돌하고 양국 모두 상호 취약성을 낮추기 위한 공급망 재편 노력을 지속하게 될 것이라 전망합니다. 동시에, 미국은 첨단기술 경쟁과 자국 기업의 이익 추구 간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 디리스킹 전략을 본격적으로 이행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저자는 한국이 가치와 규범을 공유하는 유사 입장국 및 같은 도전 과제에 직면한 유사 상황국과 협력을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고, 중국의 경제적 강압 정책에 대응하는 입체적 전략을 마련하여 대외 불확실성을 줄여나갈 것을 강조합니다.

1. 미중 전략 경쟁의 기로: 봉합 vs. 재파열

 

2024년은 미국과 중국이 갈등을 봉합할 것인지 아니면 재파열의 길을 걸을 것인지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미중 양국은 2023년 11월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정상 회의 기간 중 개최된 바이든-시진핑 정상 회담을 통해 날개 없이 추락하는 미중 관계에 일단 브레이크를 걸고, 관리 모드로 전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탐색하였다. 그 결과물이 군사 대화의 제도화, 펜타닐 원료 유통 차단,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에 의한 핵무기 통제 금지 등으로 나타났다. 양국은 현상 악화를 방치할 수 없다는 데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하였으나, 협력의 기반을 넓혀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여전하다. 전략 경쟁이 지속되는 한 미국과 중국은 첨단기술과 첨단산업이 서로 연계된 경쟁과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2024년 미국과 중국이 협력을 확대하기 위해 갈등을 관리하는 데 다소나마 성과를 낼 수 있는지는, 첨단기술 경쟁을 지속하는 가운데 상업적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딜레마의 완화 또는 해소 여부에 달려 있다. 미국은 첨단기술에서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고 격차를 유지⋅확대하는 가운데, 2024년 대통령 선거를 맞아 제2대 교역국인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미국 테크 기업들의 요구에 반응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공세에 대하여 토착 기술 자립도를 높이는 수세적 대응을 하는 가운데,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수출 통제 조치로 인해 미국 기업들이 거대한 중국 시장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의 수위를 높여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더 나아가 중국은 자국 기업들이 첨단산업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점을 내세우며 미국과 미국의 동맹 및 파트너에게 공세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전망된다.

 

2. 미국과 중국: 이동하는 “작은 마당, 높은 담장” vs. ‘토착 혁신 역량’의 강화

 

이러한 공방의 단초는 2023년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023년은 미국과 중국이 첨단기술 경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가운데, 대화 채널을 복원한 동시에 지구적 차원에서 탈세계화와 재세계화의 힘이 팽팽하게 맞선 한 해였다. 바이든 행정부는 첨단기술 경쟁을 전개하며 스스로 표방한 “작은 마당, 높은 담장(small yard, high fence)”의 기조를 유지하는 한편, 중국의 기술 굴기에 대응하여 장벽을 쌓는 전략을 추구하는 가운데 수출 통제 조치의 허점이 발견되는 즉시 과녁을 신속하게 이동하여 장벽을 더욱 높이는 기동성 있는 전략을 추구하였다. 중국은 미국에 공세에 직접적으로 맞대응하기보다 미국의 수출 통제 조치의 허점을 파고들어 우회하는 수단을 발굴하여 무력화하는 한편, 자체적인 혁신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흡사 창과 방패의 대결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2년 10월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 통제를 단행한 지 불과 1년 만에 한층 수위를 높인 통제 조치를 부과하였다. 미국이 신속하게 통제 조치를 강화한 것은 기존 조치의 허점을 메워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2022년 8월 양쯔메모리(Yangtze Memory Technologies Corp: YMTC)가 232단 낸드칩을 공개하자, 미국 정부는 2022년 10월 양쯔메모리를 엔티티리스트(entity list)에 포함시키는 조치로 대응하였다. 이어 애플은 양쯔메모리를 공급자 리스트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나 2023년 9월 양쯔메모리가 70억 달러에 달하는 국영 투자 자금의 투입에 힘입어 램 리서치(Lam Research) 등 미국산 핵심 부품을 대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자체 개발의 돌파구를 마련하였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2023년 9월 화웨이가 SMIC와 협력하여 개발한 7나노 칩이 장착된 메이트 60 프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의 우회로 찾기는 AI 분야로 확대되었다. 중국 AI 기업들이 중개업체와 밀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엔비디아(NVIDIA)의 A100와 같은 AI 칩을 구매하였다. 중국이 이러한 경로를 통해 구매한 AI 칩의 수가 4만 개에서 5만 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의 미국 제재 우회가 가능성을 넘어 현실화되고 있다는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2023년 10월 미국의 조치는 기존 조치의 허점을 메우기 위해 AI 칩에 대한 규제와 반도체 제조 장비에 대한 제한을 강화하고, 13개 중국 기업을 엔티티리스트에 추가하였다.

 

첨단기술 경쟁에서 장벽을 높여 중국의 추격을 불허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지는 지나 러만도(Gina Raimondo) 상무장관의 2023년 12월 연설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러만도 장관은 “우리는 그들이 최신 기술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것”이며, “국가안보를 수호하는 것은 단기적인 수익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러만도 장관은 구체적으로 “엔비디아가 AI 칩을 재설계하여 규제를 우회할 경우, 정부는 바로 다음 날 새로운 규제를 도입할 것”임을 언명하였다. 엔비디아가 A100의 성능을 낮춘 A800과 H800를 개발하여 중국에 AI 칩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미국 정부의 규제를 회피한 데 대한 경고를 보낸 것이다.

 

첨단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 또는 확대하겠다는 미국의 의지와, 이를 우회하여 자체적인 혁신 역량을 축적하겠다는 중국의 필사적인 노력이 부딪치는 파열음은 2024년에도 지속될 전망이다. 첨단기술 생태계에서 중국의 약점을 찾아 날카롭게 파고드는 미국의 창과 미국의 공세를 막아내고 무력화할 중국의 방패 구도 역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대중국 견제 조치의 허점이 발견되는 즉시 장벽을 더욱 높고 촘촘하게 세울 것이다. 미국은 이를 통해 핵심 첨단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추격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반면, 중국은 토착 첨단기술 개발을 통해 기술 자급도를 높이는 전략으로 대응할 것이다.

 

3. 첨단산업: 디리스킹과 상업적 이익의 추구

 

2024년은 미국이 선언적 수준에 있었던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을 구체적인 실행 단계로 이행하는 원년이 될 것이다. 미국이 디리스킹 전략을 공식화한 데는 국내외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였다. 2023년 3월 우르술라 폰데어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유럽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위원장이 중국을 ‘파트너(partner), 경제적 경쟁자(economic competitor), 체제적 라이벌(systеmic rival)’로 규정하면서 대중국 전략의 새로운 기조로서 디리스킹을 표방한 데 대한 화답의 성격을 갖는다. 미국과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이 중국에 대한 정책 조정을 한층 강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정치적 고려 역시 디리스킹의 채택에 영향을 미쳤다. 디리스킹은 세계 경제의 약 40%를 차지하는 미중 양국의 경제적 단절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현실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디리스킹은 미국과 중국 간 상호의존의 현실과 상대국에 대한 구조적 취약성이 초래하는 리스크를 관리하는 위협 기반 전략이다. 디리스킹은 또한 첨단기술에 대한 통제가 낳은 부작용에 대한 미국 테크 기업들의 불만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첨단기술 분야의 대중국 견제 조치는 불가피하게 미국 테크 기업의 중국 매출 감소와 같은 손실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2023년 미국 테크 기업들의 우려와 불만이 연속적으로 표출되었다. 2023년 7월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emiconductor Industry Association: SIA)가 미국과 중국 양측이 더 이상 갈등을 확산시키기보다는 긴장을 완화하고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기를 촉구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수출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가 발표된 직후인 2023년 11월 SIA는 한층 더 강경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일방적 수출 통제가 미국의 국가안보를 증진시키는 효과도 없으면서 미국 반도체 생태계를 저해하는 리스크를 증대시킨다는 우려를 표한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동맹 및 파트너의 불만에도 직면하였다. 대중국 수출 통제 조치가 미국 반도체 업체에 오히려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는 곧 다른 국가들에 대한 정책 동조화의 필요성으로 전환되었다. SIA는 중국이 미국 첨단산업 제품의 수입을 다른 국가로 전환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하지 않을 경우, 미국 정부가 스스로 자국 기업들에게 불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드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바이든 행정부는 자국 기업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동맹 및 파트너에게 미국과의 정책 동조화 수위를 높이도록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2024년은 중국의 첨단기술 추격을 저지하겠다는 정책적 의지가 강한 것과 비례하여, 미국 정부가 예상되는 국내외 도전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응할 것인지에 귀추가 주목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이는 첨단기술 경쟁과 첨단산업의 상업적 이익 추구 사이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첨단기술 경쟁을 우선시할 경우 상업적 이익이 저해되는 반면, 상업적 이익을 과도하게 추구할 경우 첨단기술의 우위를 유지⋅확대하려는 미국의 전략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4년은 미국이 이러한 딜레마를 해소하는 방안으로서 디리스킹 전략의 실행 전략을 수립하여 집행하는 해가 될 것이다.

 

4. 표류하는 세계 경제 질서: 국내 정치와 대외정책 간 상호작용의 불확실성

 

2024년에는 세계 경제 질서의 불확실성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미중 전략 경쟁뿐 아니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및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의 발발과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는 글로벌 통상 환경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요인이다. 미중 전략 경쟁과 지역 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 수출 통제 및 금지와 같은 경제적 강압이 일상화되고 있다. 문제는 경제적 강압의 확대로 인해 세계 경제의 블록화가 촉진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방 진영의 광범위한 제재에 직면한 러시아가 중국, 인도 등과 협력을 강화하고, 중국 또한 글로벌 사우스로 영향력의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해소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지정학적 리스크의 증가는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주의 유혹의 증가로 이어진다. 세계 각국이 자국 산업 구조의 취약성을 완화하고 상대국에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산업정책의 확산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주요국들이 경제와 안보를 연계함에 따라 경제의 안보화, 때로는 과도한 안보화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2024년은 ‘대선거(big election)의 해’라고 불릴 정도로 76개국에서 40억 명 이상이 참여하는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2024년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국내 정치와 대외정책이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으며 만들어낼 변화의 불확실성의 파고가 어느 때보다 높을 것이다.

 

5. 공급망 재편과 재세계화

 

미중 전략 경쟁은 무역에서 시작되었다.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고율 관세를 부과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의 관세와 중국의 보복 관세 부과라는 확전의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미국과 중국의 상대국 제품에 대한 평균 관세율은 각각 19.3%와 21.1%에 달한다. 가히 무역 전쟁이라 할 만하다. 무역 전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미국과 중국은 상대국에 대한 취약성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양면적 평가가 가능하다.

 

첫째, 무역 전쟁이 발발한 2018년 6,574억 달러였던 미중 상품 무역 규모가 2022년 6,903억 달러를 기록한 데서 나타나듯이, 양국의 무역은 마치 무역 전쟁의 무풍지대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전체 무역에서 상대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기준으로 할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미국 전체 수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21.6%에서 2021년 상반기 13.3%로 하락하여 2003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였다. 불과 4년 만에 8.3%p의 하락은 무역 전쟁의 영향을 제외하고 설명하기 어렵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비록 무역의 절대 규모가 증가하였을지 모르나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적 접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2023년 미중 무역은 절대 규모마저 감소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2023년 10월까지 미중 무역 규모는 4,795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이는 2022년 같은 기간 5,868억 달러 대비 약 22% 감소한 수치이다. 비록 미국과 중국이 디커플링을 명시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상대국에 대한 취약성을 완화하는 과정에 진입한 것이다. 디리스킹은 구조적 취약성의 원인을 파악하여 제거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국에 대한 취약성을 완화하려는 노력은 공급망 재편에서도 나타났다. 재닛 옐런(Janet Yellen) 미 재무장관은 수 차례의 연설에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및 동맹들과 공급망의 다변화를 의미하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이 미국 경제의 복원력과 안보를 강화하는 첩경이 될 것임을 확인하였다. 북미의 멕시코와 캐나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한국, 대만, 베트남이 프렌드쇼어링의 일차적 대상이다.

 

2024년은 프렌드쇼어링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는 해가 될 것이다. 미국의 무역 구조 변화에서 나타나듯이 이미 프렌드쇼어링 과정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미국의 전체 수입에서 중국의 비중이 하락한 것은 리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2023년 7월 멕시코가 중국을 제치고 미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하였다. 2023년 미국이 중국을 제치고 20년 만에 한국의 최대 수출 상대국이 된 것도 프렌드쇼어링의 결과이다.

 

그러나 프렌드쇼어링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프렌드쇼어링의 4대 우선 분야 가운데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 ICT) 분야의 경우, 중국 ICT 기업들이 미국의 프렌드쇼어링을 활용한 결과 미국의 대중국 의존도는 45%에 달하였다. 미국 정부가 부과한 고율의 관세에 직면한 중국 기업들이 이를 우회하기 위하여 프렌드쇼어링 국가인 멕시코,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으로 공급망을 재편한 결과이다. 중국의 대멕시코 수출은 2018년 835억 달러에서 2022년 1,186억 달러로 급증하였다. 첨단기술 경쟁과 마찬가지로 중국이 멕시코를 우회한 대미 수출이 증가한 것이다. 중국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그린에너지(green energy)와 핵심 광물 분야에서도 여전하다.

 

리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으로 촉발된 공급망 재편은 세계화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코로나19의 전세계적 확산과 지정학 리스크의 증가는 복원력 강화와 자국 우선주의라는 이중의 목적을 추구하는 공급망 재편을 촉진하였다. 둘의 목적이 상이함에도 공통분모는 취약성의 완화에 있다. 이는 가히 혁명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Just-in-Time”(JIT)로 상징되는 효율성 패러다임에서 공급망 교란의 재발에 대비하는 “Just-in-Case”(JIC)로의 전환이다. 이는 기존 세계화가 성과에 못지않게 한계를 안고 있다는 자성에서 비롯되었다.

 

공급망 재편의 과정은 2024년 이후 세계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자유무역과 심층 통합을 추구하는 초세계화(hyper-globalization)는 ‘세계화의 역설’(paradox of globalization)을 초래하였다. 이는 반세계화(anti-globalization)를 넘어 탈세계화(de-globalization)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초세계화가 그렇듯이 반세계화와 탈세계화가 지속 가능하리란 보장은 없다. 재세계화(re-globalization)를 위한 실행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초세계화의 문제를 완화하되, 외부와의 단절이 아닌 연결을 지향하는 세계화여야 한다. 오콘조 이웰라(Okonjo-Iweala)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 사무총장이 주창한 ‘과도한 의존 없는 상호 의존’(interdependence without overdependence)이 요구된다.

 

과도한 의존 없는 상호 의존은 미중 전략 경쟁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를 흡수하는 재세계화의 방안이 될 수 있다. 미국과 중국뿐 아니라, EU도 구조적 의존에 대한 대응을 경제 안보 전략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이들이 공급망을 재편하고 무역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폐쇄와 단절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취약성의 근원을 완화⋅제거하려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2024년은 그간의 초세계화에 대한 반성과 지정학적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재세계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6. 2024년 한국의 대응 전략

 

1) 한국의 디리스킹 전략

 

세계 주요국들은 디리스킹을 추진하는 전략적 이행기에 있다. 한국도 디리스킹이라는 보편적 추세에 발맞추어 변화를 모색하되, 한국의 특수성을 담은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의 구조적 취약성은 미국 또는 EU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미국와 EU와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한 이유이다. 한국의 디리스킹 전략은 대응 가능한 리스크와 그렇지 않은 구조적 리스크에 대한 체계적 파악과 분석에서 시작된다. 대응 가능한 리스크에 대해서는 취약성을 완화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 메커니즘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모든 리스크에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현실적 한계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리스크에 대해서는 공동 대응 역량을 제고할 수 있는 유사 입장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노력을 일차적으로 추구하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첨단산업 제조 역량과 같은 지렛대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또한 한국의 취약성을 경제적 강압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시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데 동원할 수 있는 조임목의 확보를 보완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

 

2) 대중국 전략의 입체화

 

2023년 한국의 경제 안보 전략은 한미 동맹을 첨단기술 동맹으로 발전시키는 데 주력한 결과 기대 이상의 성과를 도출하였다. 반도체와 배터리를 포함한 첨단산업 공급망 강화, 사이버, 우주, 퀀텀 분야의 첨단과학기술동맹 구축, 59억 달러 규모의 첨단기업 투자 유치, 인적 교류 확대 등이 구체적 성과이다. 2024년은 대미 전략에 상응하는 대중 전략의 입체화에 주력할 시점이다. 그동안 대중 전략은 대미 전략의 이면에 머무른 감이 없지 않다. 한미동맹이 강화될수록 중국에 대한 대응 능력이 제고될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된 것이다.

 

2024년은 한중 분업 구조의 변화, 공급망 협력의 필요성, 경제적 강압에 대한 대처 등 포괄적 이슈를 아우르는 대중 전략을 수립할 시점이다. 정부와 민간이 중국에 대한 정보 공유를 강화하고 정부 정책에 대한 이해를 제고함으로써 오해와 불신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의 대미 협력이 초래할 수 있는 중국 리스크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대응 방안이 선행되어야 한다.

 

3) 유사 입장국 협력과 유사 상황국 협력의 결합

 

재세계화는 아직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어쩌면 유일한 대안이다. 다만 재세계화의 구체적인 방안은 여전히 미완이기 때문에, 한국이 유사 입장국과의 협력을 활용하여 재세계화 과정을 선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가치와 규범을 공유하는 유사 입장국과 협력을 중견국 외교의 근간으로 그리고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히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규칙 경쟁이 확산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유럽, 호주, 캐나다, 일본 등 유사 입장국과 경제안보 전략의 조정, 기후변화 대응, 공급망 협력, 첨단기술 협력 등 협력의 범위를 확대해 나가야 시점이다.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한국과 유사한 도전에 직면한 유사 상황국과의 협력을 추구하는 이익 기반의 전략도 역시 중요하다는 점이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멕시코,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은 다변화의 수혜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국가들은 ‘중국+1’이라는 공급망 다변화의 혜택을 누리는 대표적인 국가들이다. 동시에 이 국가들은 공급망 재편으로 대변되는 미중 전략 경쟁의 최전선에 있는 국가들이기도 하다. 미국은 중국 공급망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감소시키기 위해, 중국 또한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국가들로 다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국가들은 미중 경쟁의 장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유의하는 가운데, 미중 전략 경쟁의 반사이익을 누리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은 이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불확실성의 충격을 완화하는 현실적 전략을 추진하는 한편,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국제 환경을 헤쳐나가고 선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 가치와 규범 기반의 유사 입장국 협력 전략을 통합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

 


 

이승주_EAI 무역·기술·변환연구센터 소장,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담당 및 편집: 박한수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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