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남한과 북한은 1991년 유엔 동시가입 이후 상반된 길을 걸어왔습니다. "남북 유엔 동시가입의 명암"에서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한국유엔체제학회장은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까지의 과정과 냉전종식이라는 당시 구조적 배경 속에서 남북한이 어떠한 전략적 판단으로 동시가입을 추진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며, 30년이 지난 오늘의 관점에 남과 북이 걸어온 길을 평가합니다. 저자는 북한이 지속적인 유엔안보리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의 고립을 피하고, 미중갈등과 같은 국제정치 역학관계의 지배를 받는 유엔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앞으로도 유엔 국가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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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전 9기’의 유엔 가입을 위한 한국의 외교 여정

 

올해는 1991년 남북한이 유엔(국제연합)에 동시가입한 지 30주년인 되는 해이다. 한국은 1948년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유엔의 인정을 받았다. 그 해 유엔 총회에 옵서버로 참석한 한국은 그 이듬해 1월부터 유엔가입을 위한 노력을 펼쳤다. 이후 1991년 한국정부가 5차례, 우방국들이 3차례 등 총 8차례 가입신청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기까지 42년이 걸렸다.

 

유엔 회원국이 되려면 5개(미, 소, 영, 프, 중) 상임이사국과 10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된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승인이 필요한데, 유엔 헌장의 규정에 의거하여 안보리 결의안이 채택되려면 상임이사국 중 어느 한 국가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 차례에 걸친 한국의 유엔가입 권고 결의안이나 재심 신청은 다수 회원국의 지지를 받았지만, 번번이 소련이 장벽이었다. 더욱이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 대신 중국을 대표하게 되면서 가입장벽은 더 두터워졌다.

 

냉전기 분단국들은 자국만이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며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으려 했다. 따라서 자국의 유엔가입 노력뿐 아니라 상대국의 가입을 반대하는데도 외교 총력전을 벌였다. 그러나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 일명 6.23 선언이 발표되면서 한국의 유엔가입 정책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동서독의 유엔 동시가입안이 안보리를 통과한 바로 다음 날 발표된 이 선언의 제 5항에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 한 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라고 명기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은 ‘두 개 조선 조작책동’이라 비난하며 ‘고려연방 공화국’이란 단일 국호로 유엔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였다.

 

1975년 한국 정부는 남•북 베트남의 유엔가입 신청을 계기로 한국의 신청에 대한 재심을 2차례 요구하였으나 안보리 채택과정에서부터 실패하였다. 이로써 총 8번에 걸친 한국의 가입 신청은 4번은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다른 4번은 안보리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 가입이 불발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은 가입 당위성에 관한 회원국 설득작업을 이어갔고, 유엔의 제반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가입을 위한 유리한 국면조성에 외교력을 집중하였다.

 

특히 1988년 노태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활발한 북방외교를 통해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도 대거 참가한 서울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한국의 유엔가입을 지지하는 국제여론이 확산되었다. 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구권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1990년 9월에 소련- 2 -과 수교, 10월에 중국과 무역대표부 설치에 합의한 것이었다.

 

1991년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단독가입이라도 추진하겠다는 노태우 대통령에 대해 김일성은 ‘하나의 조선을 둘로 갈라놓는 천추에 용서못할 대죄’라 비난하며 남북한이 단일 의석을 가지고 공동가입해야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1947년과 1967년 각각 유엔에 가입한 북예멘과 남예멘이 1990년 5월 통일한 후 예멘이란 하나의 회원국이 되었고, 동서독도 1990년 통일 후 하나의 국가로 유엔을 대표하게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분단 고착화 주장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결국 71개 회원국이 한국의 가입을 지지한 반면, 아무도 북한의 단일의석 가입안에 호응을 보이지 않자, 1991년 5월 북한도 유엔가입의사를 밝히게 되었다. 1991년 8월 8일 안보리 15개국 전원의 찬성으로 남북한 회원가입 권고결의안이 통과되었고, 9월 17일 총회에서 영어 알파벳 순에 따라 북한(D.P.R.K.)이 160번째로, 한국(R.O.K)이 161번째로 유엔회원국이 되었다.

 

42년의 긴 외교여정 끝에 한국이 유엔 회원국이 된 이유로 흔히들 냉전종식이라는 국제관계의 구조적 변화와 한•소 수교에 따른 소련의 지지확보를 꼽는다. 물론 우리 정부의 범정부적 차원의 외교총력전도 주효했다. 그러나 중국의 ‘감초’ 역할도 결정적 동인(動因)이었다. 1991년 5월 리펑(李鵬) 총리를 수행하여 북한을 방문한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의 회고록 에 따르면, 중국은 ‘한국이 먼저 가입한다면 북한이 가입하기 힘들 것’이란 일종의 최후통첩식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당시 안보리 역학을 설명하며 한국의 가입신청만 승인되고 북한은 거부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묘수(妙手)인가 악수(惡手)인가?

 

비록 각각 다른 의석으로 ‘불완전한 가입’을 하였지만, 남북한 동시가입은 동아시아 냉전구도를 종식하고 한반도가 평화공존의 길로 향하는 기념비적 사건이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그러나 동서독이 유엔 의석수를 한데 합치는 데 17년이 걸린 데 반해, 30년이 지난 지금 남북한은 오히려 국력 격차만 더 벌어지고 북한의 핵무장 등으로 한반도 불안정성은 더 높아진 실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시 가입에 대한 평가에 있어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남북한이 유엔 정식 회원국이 됨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체제와 이념이 다른 별개의 주권국가가 되었고, 양측도 이 사실을 서로 인정한 격이 되었다. 또한, 전쟁을 불법화한 유엔에 가입하였으니, 양측 모두 무력통일 방식을 택할 수 없다는 국제법적 인식에 동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북 간 아무런 기본 합의 없이 강대국들의 타협에 의해 내려진 결정으로 분단상태가 고착화된 것이란 비판의 소리도 적지 않았다.

 

동서독의 경우, 1969년 집권하며 유럽평화정책과 분단체제의 평화적 관리를 - 3 -골자로 하는 신(新)동방정책(Ostpolitik)을 내세운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서독 총리는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와 더불어 햘슈타인 원칙(서독만이 독일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공산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한다는 외교정책)을 폐기하면서 동서독은 서로가 특수한 관계임을 국내외에 공표하였다. 그 후 양독 간 인적, 물적 교류 증대를 도모하였고, 유엔 동시가입까지 이끌어 냈다.

 

반면 남북한의 경우는 이러한 절차없이, 특히 북한의 경우 1991년 5월 김일성의 급작스런 결정으로 동시가입에 동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남북 간 사전 조율작업 없이 유엔에 들어갔다. 비록 동시가입 3개월 후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로 서로를 규정하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했지만, 내부적 제도 및 법적 정비 없이 이루어진 사후 협정들은 이후 냉•온 관계를 넘나드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남북관계 속에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한국은 가입을 전후로 소련과 중국과 수교를 이루었으나 북한은 이제껏 미•일과의 관계 개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즉, 양독과 남북한의 동시가입을 비교해 보면, 1970년대 데탕트와 1990년대초 냉전종식이라는 국제정세의 구조적 변환 시기라는 점과 서독의 동방정책과 한국의 북방정책의 성과라는 면에서 유사점이 있었다. 그러나, 양독 간 체결된 사전 합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주변국들의 교차승인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남북한 동시가입은 큰 차이를 보일 뿐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이나 분단상태 극복에 있어 한계를 노정하였다.

 

둘째, 동시가입 30년이 지난 지금 남북이 받아든 성적표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오랜 숙원이었던 유엔 가입을 성사시킨 한국은 ‘준비된’ 회원국으로서 국익제고와 세계 기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가시적 성과를 거둬 왔다. 두 차례의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수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배출, 5회 연속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 이사국 피선 뿐 아니라, 개발협력분야와 유엔에 대한 재정기여면에서도 현재 세계 11위이고 2022년에는 9위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반면, 출발은 같았으나 북한은 국제사회 내 위상 면에서 전혀 반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북핵 및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유엔 무대에서 지속적인 제재와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고, 유엔분담금 면에서도 130위권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북한에게 유엔가입은 국제사회와 직접 소통•교류하며 자국의 외교적 입지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냉전기 소련과 중국의 후원 속에 대남혁명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김일성은 냉전질서 해체와 한•소 수교로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을 되려 우려하게 되었고, 정권의 생존전략으로 유엔진출을 결정하였다. 이후 북한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유엔을 교두보로 이용하려 했고, 유엔 산하의 국제아동기금(UNICEF), 식량농업기구(FAO),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경제난과 식량난 등을 크게 해소할 수 있었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북한에게 유엔 진출은 ‘가장 소통하고 싶은 나라’인 미국(뉴욕)에 북한대표부를 상주할 수 있고 대미 직접 대화의 기회를 얻게 - 4 -된 외교적 쾌거였다. 가입 전에는 소련, 중국 및 제3국을 통해 미국과의 소통 창을 모색해왔고,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미•중 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중국 채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 과정에서 반대급부로 중국의 대북 입김도 커졌었는데, 가입 이후 북한은 자국의 외교적 레버리지를 적극 활용하려 들면서, 중국을 포함한 주변국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었다. 실제로도 북한은 인권문제나 핵개발 관련 안보리 경고나 제재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유엔을 국제사회의 압박에 대한 항변의 장으로 삼고 있는 모양새다.

 

한편, 북한 핵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미•중 간 이견과 경쟁이 점점 심화되었지만, 미국은 이 문제가 중국과 협력할 수 있는 분야라고 강조해왔다는 점이다. 중국 또한 북한 핵개발과 도발행위에 대해서는 유엔 틀을 이용한 제재에 동참하면서 미국에 협력해왔다. 2018년 김정은의 신년사를 필두로 한반도 비핵화•평화프로세스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양 강대국이 북한 비핵화를 공동목표로 단합하여 강력한 대북제재를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역전쟁과 기술경쟁, 남중국해 분쟁, 대만문제, 글로벌공급망 문제 등과 관련하여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주의 다자동맹이란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대중국 압박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태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북•중 혈맹관계 과시를 위해 김정은과의 친서 교환 횟수를 늘리고 있는 시진핑 주석은 2021년 10월 러시아와 더불어 대북제재완화결의 초안을 안보리에 제출하였다. 비슷한 시기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 패널은 중국 측의 제재 불이행과 방해로 제재위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 역시 중국 위협설을 제창하는 미국이야말로 인도•태평양지역에서 일방적이고 불공정한 편가르기 식 대외정책을 통해 지역안정을 파괴하고 있는 진범이라 비난하며 중국 감싸기에 열심이다.

 

향후에도 북한은 지속적인 안보리 및 총회의 제재결의안들에 대해 유엔과 미국을 맹비난하면서도 탈퇴를 선언하지 않고 회원국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는 북한으로서는 여전히 강대국 힘의 역학에 휘둘리는 유엔의 구조적 한계가 실(失)보다는 득(得)일 것이라는 셈법이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

 


 

저자: 이신화_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유엔체제학회 회장.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후 메릴랜드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국제관계연구원CFIA 포스트닥 이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아프리카지역관, 유엔 르완다 독립조사위 특별자문관, 프린스턴대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Human Security and Cross-Border Cooperation in East Asia; South Korean Strategic Thought toward Asia, “Foreign Policy Dilemma in South Korean Democracy” 등이 있다.

 


 

담당 및 편집: 이승연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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