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동아시아연구원은 2022년 3월 9일로 예정되어 있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와 대선캠프, 정치권, 미디어, 인플루엔서를 예상 독자로 하는 <2022 대통령의 성공조건>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EAI 대선 특별 논평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으며, 시리즈의 두 번째 보고서로 이대근 우석대 교수ㆍ前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글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국론통일 상황에서 국정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을 배제하고 국회를 존중하지 않는 분열 정치를 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분열 정치는 격렬성 때문에 권력 강화의 효과가 있는 듯하지만 사실상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을 가로막습니다. 선악 대결 구도를 조장하고 '대안'을 마련하려 하지 않아 정치 참여 비용을 높이고 민주주의의 활력을 떨어뜨립니다. 이에 저자는 정치 '분열' 대신 '협력'을 권고하며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권력이 아닌 국회를 비롯한 여러 정치 주체들이 권력을 나누어 갖는 정부를 강조합니다.

 


 

I. 문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역대 대통령은 모두 불행을 겪었다. 그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한국 현대 정치사를 실패한 대통령의 역사로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국정이 실패의 연속극이었다면 산업화, 민주화, 인권의 신장, 삶의 조건 개선을 설명할 수 없다. 실패한 대통령이 성공을 불러왔다는 말은 닭이 오리 알을 낳았다는 이야기처럼 이상하게 들린다. 역대 대통령이 모든 일을 다 망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성공한 대통령을 꼽으라면 선뜻 누구라고 지목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통령 문제가 아니라, 좀처럼 만족할 줄 모르는, 까다롭고 성마른 시민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대통령은 예외 없이 실패했다’는 인식이 퍼진 이유가 과도한 시민 요구로 인한 것인지, 너무 적은 국정 성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작용한 결과인지 미처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우리 앞에 또 하나의 정부가 끝나가고 있다. 우리는 현 정부를 평가하고, 다음 정부를 선택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의 압박 속에 있다. 시민들은 문재인 대통령도 실패 사례에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임기 말 지지율로 따지면 문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다. 하지만 11월 현재 다른 숫자를 보면 다른 측면이 보인다. 임기 말 정당 지지율, 대통령 후보 지지율, 정권교체 지지율 모두 야당 쪽이 높다. 세 숫자 모두 문재인 대통령 평가를 반영하고 있다. 여당 후보 지지율은 후보 개인 경쟁력의 정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현 정권에 대한 평가도 일정 부분 반영한다. 이 숫자들은 시민이 적어도 이 시점에 문 대통령에 실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5년 전 압도적인 다수 시민은 촛불을 들어 하나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새 정부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문재인 정부는 ‘국론통일’ 상황에서 국정을 맡는, 전례 없는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랬던 정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나의 정부가 정말 실패했는지 냉정하게 판단하려면 더 많은 시간을 견뎌야겠지만, 지금 임기 말을 지켜보는 시민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

 

문 대통령의 5년은 다음 대통령이 성공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은 잘 말해주고 있다. 누가 다음 정부를 맡든 기대와 실망의 반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문재인 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II. 오만한 ‘신성 권력’에서 성찰하는 ‘세속 권력’으로

 

문 대통령에 관한 많은 문제는 권력의 오만함에서 시작되었다. 어쩌면 문재인 정부가 출범 초기 다수 시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것이 축복이 아니라 악재였을지 모른다. 촛불혁명론은 문재인 정부를 자만에 빠뜨렸다. 민주화 주도세력이라는 자부심에 촛불 시민의 위임을 받았다는 생각이 더해져 자신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신성한 존재라고 여긴 것 같다. 신탁이라도 받은 듯한 오만한 집권세력의 눈에 야당은 성스러운 과업 수행에 방해되는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야당은 주요 현안을 두고 협력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접촉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금기였다. 야당의 악마화였다.

 

문재인 정부에 맡겨진 권력은 신화화되고 추상화된 촛불 시민의 신성함 때문이 아니라 실존하는 시민들의 이익을 위임받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다. 현실의 시민은 촛불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욕망하는 존재이고 이익을 두고 갈등하는 복합체이다. 그럼에도 집값 폭등의 구조를 통제하지 못하는 정권은 집을 사려는 시민(그들의 눈에 촛불 시민 답지 않아 보이는 시민)을 모욕하고, 시민에 책임을 전가했다. 문재인 정부가 개혁을 실현하는 주체라고 자부했지만 정작 신성의 제단에 바칠 개혁의 성과는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문재인 정부는 선한 권력이라는 자기 인식에 걸맞게 권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정당하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좋다는 발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몇 가지 일을 했다. 다수 시민의 공적 이익을 위해 써야 할 권력 자원을 대통령 측근 그리고 대통령과 사적 인연이 있는 특정인을 위해 소진했다. 무리한 ‘조국 지키기’는 문재인 정부의 잠재적 지지층을 조국 지지와 반대로 분열시켰고, 지식인 사이 탈 문재인 정부 행렬을 촉진했다. 문재인 정부 지지와 비판 이유를 가치, 이념, 노선, 정책도 아니고, 시민의 삶과도 아무런 인연이 없는 조국 문제로 좁힘으로써 시민을 너무나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런 현실에도 민주당은 야당의 한계 때문에 얻은 반사이익으로 총선에 승리했다. 그러나 집권세력이 총선 직후 한 일은 ‘한명숙 명예회복 운동’이었다. 부패행위로 징역 2년을 살고 나온 한명숙이라는 개인의 명예를 위해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낭비한 것이다. 시민의 신임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권력은 현실의 시민에 의해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재위임된다는 점에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유동하는 존재다. 때문에 시민의 이해, 요구, 정서에 응답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공한 권력자가 되려면 항상 긴장하고 성찰하며 변화하는 시민 요구에 응답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III. ‘분열 정치’에서 ‘협력 정치’로

 

문 대통령은 박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다수파 연합을 통해 국정을 이끄는 쉬운 길을 포기하고 어려운 길로 들어섰다. ‘민주당 정부’라는 명분 아래 야당을 배제한 소수파 전략을 택한 것이다. 야당 배제는 차이와 차별로 정당화했다. 차이는 이념, 정책, 쟁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막연한 부정적 감정 유발을 통해서 부각됐다. 그리고 이 부정적 감정은 자연히 정치 언어를 혐오 표현으로 오염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차이는 협력할 수 없을 만큼 크지 않다. 이념과 정책, 쟁점에서 집권세력과 반대세력 간 차이가 크다는 관념은 허구이다. 문재인 정부가 야당일 때 반대하던 정책을 도입하고 야당일 때 주장하던 정책을 포기한 사례가 한두 건이 아니듯 말이다. 그럼에도 집권세력이 격렬하고 과격한 대결을 마다하지 않고 분열을 일으킨 것은 그렇게라도 해야 지지자들에게 차이라는 환상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열은 차이의 증거가 아닌 차이 부재의 증거이다.

 

분열 정치는 당내 결속을 필요로 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내부 분열 때문이라고 믿은 집권세력은 내부 단결을 위해 당내 이견을 억압하고 대안적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 밖으로는 대통령 열성 지지자를 조직해서 국정 기반으로 삼았다. 집권세력이 복숭아라면, 대통령은 보호해야 할 복숭아 씨앗, 열정 지지자는 그 씨를 보호하는 단단한 껍질, 당은 열성 지지자를 감싸는 과육 역할을 했다.

 

분열 정치는 즉각성, 격렬성, 가시성 때문에 권력 강화의 효과가 있는 듯하지만 임기 말에 확인되듯이 상당한 부담을 안겨준다. 우선 대통령과 정당, 지지자들이 양 진영으로 결집해서 대결하는 분열 정치 상황은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을 막는다. 민주당이 언론통제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조작 기사에 징벌적 배상을 하는 내용의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강행하려 한 것이 좋은 예다. 야당과 언론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여당이 주춤하자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타협하지 말라는 압박을 받아야 했다. 타협은 배신행위로 간주되었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당 단독으로 강행 처리한 부동산 정책, 임대차 3법과 같은 민생 법안도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야당과 충분히 협의하고 숙고를 거쳐 도입했다면 일부 부작용이 생겼더라도 정부를 향해 비난이 집중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열 정치는 정부 책임성도 약화시킨다, 결집한 지지자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도 통치가 가능하다고 믿으면 시민 요구에 따라 국정 방향을 재조정하고 정책 대안을 잘 다듬으려는 유인을 낮추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 결속도 좋은 결과만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열린우리당 같은 내부 갈등은 피할 수 있었지만 경직성으로 인해 시민 요구에 대한 반응성을 떨어뜨리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같은 경직성은 상호 견제를 통한 자율 교정, 자기 조절의 기회도 앗아갔다.

 

분열 정치는 선악의 대결 구도를 조장해 시민들로 하여금 악마와 천사 가운데 고르게 하는, 오도된 선택을 유도하고 서로 예의 없는 태도와 언어 사용을 당연시하게 만든다. 이는 다시 정치를 선택 가능한 대안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죽거나 살아남거나 하는 식의 사생결단을 해야 하는 일로 만들어 정치 참여의 비용을 높이고 민주주의 활력을 떨어뜨린다. 목숨을 건 정치는 민주주의를 죽일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여야정협의체 가동이 대화의 증거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치 대화의 본질은 형식이 아니라 실질에 있다. 역대 정부가 여야정협의체를 가동했지만 야당과 진지한 대화로 발전한 적은 전혀 없다. 일상적인 분열 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대통령이 드물게 여야 대표들과 만나는 공식적 의례는 대화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것은 분열 정치를 은폐하는 수단이자 분열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핑계의 장이며, 다른 방법에 의한 대결이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요구를 쏟아내고 이를 거부했다고 상호 비난전으로 막을 내리는 이벤트는 무용하다. 대통령은 의례와 형식을 넘어 여야 지도자들과 실질적 협의를 해야 한다. 국정 현안에 관해 사전 사후 야당 지도자와 협의하고 조언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연합정치의 일상화가 필요하다.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한때 설치를 검토했던 국민통합위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방식인 통합위원회 설치는 분열 정치의 아웃소싱이자 위험의 외주화이다. 외주화는 통합에 관심 없다는 정치선언이다. 통합은 국정을 책임진 자의 책무이지 경쟁 정당에서 영입한 인물에 맡길 일이 아니다.

 

정치 분열이 사회 분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집권자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이 온당한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정치는 대표의 체계이다. 분열 정치는 분열 사회를 대표한다. 그러나 정치는 사회의 기계적 반영물이 아니다. 정치는 사회의 기대와 희망, 미래도 대표해야 한다. 정치는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설득하고 이끄는 책임을 맡고 있다. 정치인이 ‘사회 분열로 인해 정치 분열도 피할 수 없다’는 운명론에 의존한다면 정치할 자격이 없다. 정치 분열이 사회 분열의 결과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정치 분열이 사회 분열의 원인일 수도 있다. 대중은 정치 엘리트 담론과 논리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는 규명하기 어렵지만 정치 분열과 사회 분열은 서로를 촉진하고 증폭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정치가 경쟁하는 두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결집한 채 서로 적대하는 정치적 양극화를 불러왔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때문에 정치 분열을 중단하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할 책무는 정치 지도자에게 있다.

 

정치 지도자는 선거 과정 중에도, 아니 선거 과정이기 때문에 이견을 다루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통치능력이기도 하다. 당파성이 강한 일부 세력의 큰 목소리가 다수 여론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지만 적지 않은 시민이 상호 존중과 예의를 기대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IV. 권력 집중에서 권력 분산으로

 

청와대 앞 광장에는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시민들은 보통 정부 정책이나 조치에 불만이 있으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라고 요구한다. 지난 11월 청와대는 경제수석 비서관을 갑작스럽게 경질했다. 요소수 품귀 사태 책임을 물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청와대가 그동안 크고 작은 국정 현안을 결정하고 책임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관련 부처의 장·차관이 아닌 경제수석이 책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사실 세상은 더이상 국무회의나, 현안 관련 장관회의 따위에 관심이 없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비서관회의가 국정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다.

 

대통령제는 본래 권력 집중이 아닌 권력 분산을 위해 설계된 제도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관료조직의 비대화, 쏠림 문화로 인해 집행기관인 행정부,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에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행정부가 입법부, 사법부보다 우위에 놓이고 3권 간 균형도 잃었다. 사실 민주화 이후 모든 정부가 예외 없이 입법부를 통제하고 판사의 행정부 고위직 임명 등을 통해 사법부의 독립성은 훼손했다. 행정기관이지만 중립성, 독립성을 보장해야 하는 검찰, 감사원에 관한 통제는 말할 것도 없다.

 

문재인 정부 역시 고위 판사를 청와대 비서관으로 영입하고 감사원과 청와대 간 인사교류로 감사원을 지배하려 했다. 대통령 가족 및 측근을 감시하는 청와대 특별 감찰관은 5년 내내 임명하지 않았다. 검찰개혁은 방향을 잃었다. 검찰개혁은 권력이 된 검찰을 분권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문 대통령의 검찰개혁은 대통령 권력 보호를 위한 것으로 변질됐다. 결국, 검찰개혁은 기득권 검찰 권력과 정치 권력 간 권력 대 권력의 충돌로 끝났다. 대통령 권력 사용의 정당성도 검찰개혁의 정당성도 모두 훼손되었다.

 

다당제를 위한 부분적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일종의 분권적 제도였다. 정당도 국가 정책에 관한 결정권자, 혹은 거부권 행사자이다. 유력 정당이 양당이 아닌 3~5개로 는다면 더 많은 결정권자가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만큼 권력 분산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제, 검찰개혁의 왜곡이 그렇듯 연동형 비례대표제 역시 집권당이 선거용 위성정당을 통해 소수당에 돌아갈 몫을 차지함으로써 권력 분산 아닌 권력 집중으로 귀결되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지만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선거가 있고, 단임제가 있는 민주주의 하에서 권력 집중은 시한부에 불과하다. 권력 집중만 믿고 일방 강행하는 국정의 결말은 분명하다. 스스로 권력 견제가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고, 항상 견제와 균형의 긴장감 속에서 국가를 이끌어가야 한다. 사법부, 국회, 감사원, 검찰, 언론, 청와대 특별 감찰관과 같은 권력 내외부의 다차원적인 감시망 안에서 국정을 수행해야 한다. 당내 이견 그룹도 억제할 것이 아니라 존중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반대를 제도화한 체제이다. 조직된 반대를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소수파는 항상 소수파로 남아 있지 않다. 반대세력·이견 집단과 타협하려는 자세 없이는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

 

V. ‘국민과 함께’에서 ‘국회와 함께’로

 

문재인 정부가, 자신의 슬로건대로 ‘국민과 함께 하는 정부’였는지는 이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국회와 함께 하는 정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재인 정부 출범 때 국회는 여소야대였다. 야당 협력 없이는 국정을 원만하게 이끌 수 없는 조건이었다. 국회는 시민에 의해 선출된 시민 대표기관으로 대통령과 함께 권력의 정통성을 부여받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라는 두 수레바퀴가 함께 굴러가야 국가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21대 총선 전 ‘국회를 우회하는 국정’, 즉 대통령 행정명령에 의한 통치를 했다.

 

21대 총선에서 승리했을 때 국회와의 관계를 전환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문재인 정부는 여전히 ‘국민과 함께 하는 정부’를 고집했다. 여소야대 국회 때는 여소라는 이유로, 여대야소 국회 때는 여대라는 이유로 야당을 배제한 채 ‘국회 없는 국정’을 했다. 여당은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 모두를 여당이 독차지함으로써 야당과의 충돌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민의 국회 불신은 대체로 입법 내용보다 입법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수당이 소수당 설득 없이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시민은 매우 부정적이다. 여당의 법안 처리가 강행, 날치기, 단독 처리라는 언어로 통용되는 현상이 잘 말해준다. 국회 의사 결정 방법은 점진적으로 다수당 의사에 따르는 다수제에서 소수당과의 협의를 전제로 하는 합의제적 성격으로 변화해왔다. 다음 정부는 이 엄연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향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이 재집권하면 문재인 정부 후반기와 같은 여대야소가 계속된다. 문재인 정부가 야당과 협력하지 못했던 기억을 되살려 일방주의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야당이 집권하면 문재인 정부 전반기와 같은 여소야대 국회가 된다. 문재인 정부가 국회를 우회함으로써 초래했던 부작용과 혼란을 원치 않으면 국회와 대면하고 야당의 협력을 구해야 한다. 야당 몫을 나눠주고 야당과 함께 짐을 나눠져야 한다.

 

‘국민과 함께 하는 정부’는 집권자가 국민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권위주의, 혹은 포퓰리즘의 위험성이 있다. 집권자가 추상명사로서의 국민을 호명하고, 대표 없는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통치 행위는 매우 불길하다. 국민이 스스로 뽑아 대표자를 보낸 국회를 존중하는 것이 우선이다.

 

VI.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다시 찾겠다”라고 다짐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꼭 그랬으면 하는 희망을 품은 적이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런 정부 하나쯤 가질 때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의구심까지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했다. ‘과연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요즘 다시 같은 물음 앞에 서 있다. 다음 정부는 누구나 성공했다고 평가할 만한 일을 해낼까? 안타깝게도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성공하기 좋은 여건에서 출범한 문재인 정부도 임기 말에 이르러 출범 때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분열과 대립, 혐오와 분노로 가득 찬 대선 과정에서 탄생할 다음 정부는 말할 것도 없는 것 아닌가? 안타깝게도 주요 정당의 두 후보 모두 복잡한 갈등 상황을 조정하고 반대세력과 대화하며 타협해 본 경험이 없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인은 “어떤 난관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낙관 속에 출범해 안이해진 정부보다 비관 속에 탄생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정부가 실패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

 

다음 대통령이 과거 정부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핵분열 에너지보다 핵융합 에너지가 더 크다. ■

 


 

저자: 이대근_ 우석대학교 교수.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경향신문에서 편집국장, 논설주간을 지냈고 우석대학교로 옮겼다. 그의 글은 한국 정치의 여러 부분을 포괄한다.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대한 매서운 비판은 잘 알려져 있다.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의 선택이 어떻게 시민들의 기대와 엇갈렸는지에 대한 분석도 날카롭다. 한미 관계, 한일 관계 등 외교정책, 그의 전공인 북한과 남북 관계에 대한 글은 그만의 색깔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친다면 그의 글을 챙겨 읽고자 하는 열의를 계속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글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인간과 정치에 대해 그가 갖는 자세에서 비롯되는 바 크다. 지은 책으로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 『리얼 진보』(공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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