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 워킹페이퍼에서 김헌준 고려대학교 교수는 미중 경쟁 속 미국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으나 가치•규범 외교를 단순히 도구로만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신정부가 외교정책을 마련할 때, 가치•규범 외교의 세 가지 특징을 염두에 두길 권고합니다. 저자는 미국이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국제규범이나 국제법을 만들 것을 요구합니다. 한국이 그러한 규칙 제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특별히 차기 정부가 북한 문제에 미국의 가치•규범을 앞세우는 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국제사회에 북한 문제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한국의 기여 가능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가치와 규범 외교 3대 정책과제

 

1. 정부는 이제까지 우리가 이루어낸 민주주의, 인권, 법치, 시장 경제 등 우리의 국내 가치와 규범을 기초로 한국 외교가 큰 틀에서 추진할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규범과 원칙을 설정하고 이를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인권, 민주주의, 법치, 자유무역 등 국제 사회가 강력히 합의해 쉽게 부정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원칙이 가지는 힘 자체를 의존하는 것이다.

 

2. 미국이 적극적으로 추구할 민주주의 정상회의 혹은 민주주의 10개국(D10)에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 우리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설정하고 영향력을 증진할 필요가 있다. 특히,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통해 가능하면 우리에게 민감할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가치·규범 외교의 초점과 역량을 모으고 일관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3. 양자관계, 특히 대(對)중국 가치·규범 외교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특히 다자 차원에서 추진할 대중 외교 영역과 양자 차원에서 추진할 영역을 나누고, 다자 활동을 통해 위험을 분산하고, 양자 영역에서는 철저히 상호성을 추구해 선례를 쌓아둘 필요가 있다.

 

I. 서론

 

미중 간 가치와 규범의 극심한 갈등 상황에서 차기 정부는 어떠한 선택을 하고 이를 정당화할 것인가? 국제정치에서 인권, 민주주의, 법치는 가치·규범의 영역으로 국제정치의 전통적 시각에서는 주변적 요소로 이해됐다. 가치는 주로 가치는 주로 국가가 추진하는 원칙으로 이해됐고, 규범은 그런 원칙들이 국제 사회에서 모여 이룬 집합적 기대를 뜻하지만 두 용어는 자주 구별 없이 사용된다. 가치·규범 문제가 국제정치의 중심 이슈로 떠오르면 대개는 이들이 가진 도구적 효용성에 주목했다. 트럼프가 임기 말 인권과 민주주의 외교를 앞세운 것이 중국과의 통상 마찰에서 우위를 점하고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시각이다. 물론 트럼프 정부에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도구적으로 사용된 점이 강하지만 가치·규범은 이렇게만 이해할 수는 없다. 가치·규범 외교는 다음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차기 정부도 이를 염두에 두고 외교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첫째, 가치와 규범은 다른 분야와 구분되는 논리로 움직이는 독자성(autonomy)이 있다. 가치·규범은 군사, 안보, 경제, 기술 영역과 영향을 주고받으나 다른 영역의 문제가 해결됐다고 이 영역의 갈등도 자연스럽게 풀리지는 않는다. 둘째, 가치·규범은 다른 분야와 긴밀히 연계(linkage)되어 진행될 것이다. 미중 관계에서 통상과 가치·규범이 연계돼 갈등을 증폭한 사례가 트럼프 정부에서 있었고, 바이든 정부도 이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바이든은 임기 초부터 필수 공급 망이란 형태로 첨단기술과 가치·규범의 새로운 연계를 만들고 있다. 가치·규범을 규칙 기반 국제질서(rule-based international order)로 넓게 본다면 이미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과 같이 안보 영역과도 연계가 형성됐다. 셋째, 가치·규범 영역은 여론과 민족주의, 문화와 문명 등 감정 및 정서 요인에 근간을 두고 있어 잠재적 폭발성(potential volatility)을 지닌다. 또한 가치·규범은 국내와 국제, 두 수준에서의 일관성을 지향하므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코로나19 대응과 트럼프의 반중 공세로 등장한 중국의 애국 여론이나 트럼프 이후에도 지속되는 미국의 반중 정서는 가치·규범 갈등을 격발할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이다.

 

II. 현 상황 분석과 현 정부 평가

 

현 정부는 미중 간 가치와 규범 갈등이 본격화된 시점에 있었다. 임기 초인 2017년 7월, 류샤오보의 사망과 아내 류샤의 출국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과 EU는 중국 인권에 대한 기존의 비판을 재확인했고, 중국은 주권과 내정불간섭으로 반박했다. 유사한 문제가 우간, 셰양, 천젠강 등 구속된 인권 변호사 사례이고, 미국과 EU는 이례적인 공동성명을 통해 석방을 촉구했다. 2017년 여름 홍콩 송환법 시위로 시작된 중국 인권·민주주의 논란은 2018년 신장·위구르 강제수용·노동 및 인공지능, 안면 인식, 유전자 정보 등 첨단기술을 이용한 억압 문제, 2019년 톈안먼사건 30주년 문제로 불거졌다. 미국은 2019년 홍콩 인권과 민주주의 법, 2020년 위구르 인권 정책 법을 제정하며 공세적으로 대응했고, 코로나19는 갈등을 증폭시켰다. 미국의 인종 문제(Black Lives Matter), 대선의 부정선거 시비와 의사당 난입 폭동, 홍콩 보안법 제정은 미중 간 공수를 바꿔가며 문제를 제기할 기회를 주었고 갈등을 키웠다.

 

이 시기 우리 정부와 관련된 가치와 규범 외교의 사안은 (1) 홍콩 송환법 시위와 보안법 논란, (2) 신장·위구르 강제수용소와 인권탄압이다. 이외에도 미중 갈등과 연관은 적지만 (3) 한일 간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과 일본군 위안부 판결, (4) 북한 인권과 대북 전단 금지법을 둘러싼 논란, (5) 2021년 2월 쿠데타로 시작돼 무고한 시민의 학살로 이어진 미얀마 사태가 있다. 후자의 세 이슈도 정부의 가치·규범 외교의 중요한 사안이었고, 미중 갈등 사안에도 간접적 영향을 미쳤다. 다섯 사안에 대한 현 정부의 정책을 평가하면 미얀마 사태 대응을 제외하고는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현재까지 정부는 미얀마 사태에 대해 신속하고 단호하고 실효성이 있는 정책을 시행했다. 정부는 네 차례 매우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고, 대통령과 총리도 SNS를 통해 견해를 밝혔다. 외교부는 두 차례 차관 면담을 통해 미얀마 대사와 유학생을 만났고, 법무부 장관도 체류 중인 미얀마인을 직접 만났다. 정부는 국방 및 치안 분야 신규 교류 및 협력 중단, 군용물자 수출 불허 및 산업용 전략물자 수출 엄격 심사, 인도적 사업을 제외한 개발 협력 재검토, 미얀마인에 대한 인도적 특별 체류 등 실효적 조치도 취했다.

 

반면, 미·중 관계의 핵심에 있는 홍콩과 신장 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원론적인 기존의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정부는 보안법 통과 전까지는 사안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주시”한다는 원론적 처지만 밝혔다. 보안법 통과 직후 “정부는 1984년 중영 공동성명의 내용을 존중하며, 중영 공동성명과 홍콩 기본법에 따라서 홍콩이 일국양제 하에서 고도의 자치를 향유하면서 안정과 발전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제까지 언급하지 않은 ‘고도의 자치’를 언급한 것은 분명 새로운 보다 적극적 의사 표명이다. 하지만 정부는 중영 공동성명과 함께 홍콩 기본법을 언급했고, 홍콩이 추구할 가치로 중국이 주장하는 ‘안정과 발전’을 언급해 균형을 맞췄다. 또한,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영국, 캐나다, 일본 등 27국이 공동으로 발표한 홍콩 보안법 관련 성명에는 “제반 사항을 고려”해 참여하지 않아 더 이상의 개입은 자제했다. 더 나아가 정부는 신장·위구르에 관해서는 “상황을 예의주시”한다는 의미 없는 발언을 넘어선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2019년 한중정상회담 직후 “한국이 홍콩과 신장 문제가 중국의 내정으로 본다”라는 중국의 발표에 대해 “시진핑의 설명을 잘 들었다는 취지의 발언”이라고 소극적으로 대응한 모습은 아쉬움을 남긴다.

 

이런 신중한 태도는 국제정세가 변하지 않는 상황에는 현상 유지의 바람직한 방향일 수 있으나, 가치·규범 외교의 지형이 급변하는 현 상황에서는 자칫하면 외교정책의 주도권을 잃거나 정책의 의미를 주도적으로 해석·설정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자의적 해석에 맡기는 난처한 상황에 이를 수 있다. 국내와 미국 정가에서 제기되고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중국경사론”이 그 예이다. 국가안보실이나 외교 자문, 외교부도 이는 잘못된 인식이며 한미는 동맹으로 한중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운영하고 있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설명했지만 국내외 여론을 충분히 설득시키지는 못했다. 특히 바이든 등장 이후 블링컨 국무장관이 명시적으로 홍콩, 신장, 티베트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동지국가(like-minded states)와 공동 대응하겠다고 밝힌 상황에서 이전 입장만을 고수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회적이나 간접적으로 가치·규범 외교를 시도할 수 있는 방식이 얼마든지 있었고, 미중 갈등의 초기에 중국 인권·민주주의에 대해 우리의 정체성과 부합하는 실험(testing the waters)을 해볼 기회를 놓친 것도 아쉽다.

 

홍콩 송환법 사태 때 중국 유학생들의 위협적 태도와 공세에 대한 원론적 대응 이상의 입장 발표, 2019년 한중정상회담 직후 중국의 홍콩·신장 관련 일방적 발표에 대한 적극적 해명 요구, 관련 이슈에 대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라고 답변한 것에 대한 보다 적극적 항의, 홍콩 보안법이 가져올 수 있는 홍콩 체류 한국인에 대한 잠재적 위해에 대한 우려 표명 등은 정당한 문제 제기이고, 중국의 인권·민주주의 관련 사안에 관해 우리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하지만 명확히 표현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본다. 미얀마 외교도 우리와 중국의 입장의 명확한 차이를 드러낼 수 있었던 기회로 본다. 중국은 4월 3일 왕이 외교부장의 성명을 통해 미얀마 사태 해결을 위해서 피해야 할 요인으로 유엔 안보리의 “부당한 개입(不当介入)”과 “외부세력의 조장(助澜)”을 지목했다. 이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있어 한국이 지향하는 것과 명백히 다른 구식 주권 논리이며, 주권 불간섭에 대해 상당한 진전을 이룬 국제 합의를 무시하는 지나치게 보수적 해석이다. 한국이 미얀마 외교를 집행하며 이런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는 것도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었던 우회적이나 명확한 대중 가치·규범의 외교이다.

 

가치와 규범 외교 측면에서 봤을 때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과 일본군 위안부 판결이나 북한 인권과 대북 전단 금지법을 둘러싼 논란도 아쉽다. 두 이슈 모두 일본과 북한이라는 대상과의 관계에 집중해 논의가 진행됐고, 문제가 가진 가장 근본적 핵심인 보편적 가치 및 인권, 민주주의 측면은 전혀 드러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우선, 한일 관계에 있어 여러 해법이 있겠지만,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과 일본군 위안부 판결은 근본적으로 대일 정책은 아니다. 인권, 사법 독립, 피해 구제 등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과거 인권 침해에 대한 적절한 해결이 국내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논의됐고, 강제 동원과 위안부 판결도 그 맥락에 있다. 사건 발발 당시 일본이 권력기관이어서 일본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 것일 뿐이고, 제주 4.3사건이나 여순 사건 등 미 군정기에 일어난 사건 혹은 노근리와 같이 한국전쟁 중에 일어난 사건도 유사한 요구가 미국을 향해서도 있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배상 등의 요구는 피해자 중심(victim-centered) 논의로 반일이나 반미와는 결이 다르다. 따라서 문제가 발생한 초기에 대외적으로 이를 설명하고 갈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적극적 노력이 없었음은 아쉽다. 또한, 보편적 인권 문제에 대해 일본이 양자 문제로 대응했을 때 우리 정부도 똑같이 양자 문제로 대처해 수렁에 빠져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최근 인권이사회 등 다자외교에서 위안부 문제를 “분쟁하 성폭력 문제”로 언급하며 보편 가치를 내세우고 있지만 늦은 감이 있다.

 

북한 인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가치·규범 외교에 있어 가장 큰 걸림이 단연 북한 인권이다. 이는 홍콩, 미얀마, 중국의 인권 문제가 불거지고 한국의 적극적 대응이 요구될 때마다 끊임없이 따라붙은 문제이다. 현 정권은 임기 내내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공동 발의, 북한 인권재단의 출범, 북한 인권대사의 임명, 북한 인권 관련 단체에 관한 지원, 대북 전단 금지법 제정, 미 의회 청문회 등 논란이 많았다. 이렇게 논란이 많았다는 사실 자체가 현 정부의 북한 인권 정책이 순조롭지 못했다는 증거이고, 원칙과 선례 존중 없이 정책을 추진했음을 보여준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활동, 2016년 북한인권법 제정 이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북한이 인권 개선의 명확한 증거를 국제 사회에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부는 보편적 인권을 고려하고 2016년 여야 합의를 존중해 북한인권법의 주요 내용은 일관되게 추진했어야 한다. 남북 교류와 정상회담과 별도로 추진했어야만 가치·규범 외교의 큰 틀이 유지되는 것이다. 혹시, 양자 외교에서 인권 논의를 대북 협상을 고려해 톤-다운 하려 했으면 유엔 등 다자외교에서는 일관되게 문제 제기를 이어갔어야 했다. 어느 정도의 일관성과 원칙이 유지됐더라면 지금과 같이 한국의 북한 인권 정책에 대한 미 의회 청문회까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된다.

 

2021년 5월 한미 정상회담은 성과와 함께 숙제를 남겼다. 가치·규범 외교의 측면에서는 이룬 성과보다 남은 숙제가 더 많다고 판단된다. 일단 성과부터 살펴보면 가치·규범에 있어 한미 두 국가가 원칙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재확인했다. 공동성명에 나타난 “국내외에서 민주적 규범, 인권과 법치의 원칙이 지배하는 지역의 비전을 공유”한다는 표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한국전 참전군인의 명예훈장 수여식이나 공동의 가치를 기반한 공급망, 첨단기술, 보건 및 백신 협력의 합의 등에서도 잘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성과는 동시에 쉽지 않은 과제도 남겼다. 미일 정상회담과 같이 중국의 민주주의나 인권과 직접 관련 있는 홍콩과 신장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한미 정상은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를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 유지 차원에서 언급했고, 같은 부분에서 “국내외에서 인권 및 법치를 증진”할 의지도 밝혔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인권, 법치, 민주주의를 “국내외”에서 “증진”한다는 표현이 길지 않은 공동성명에서 총 세 차례 반복된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는 현 정부의 태도를 고려했을 때 미국의 강한 주문이라고 판단되고, 이는 단지 한미정상회담을 위한 일회성 요구가 아니라 향후 장기적인 미중 대치 관계를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인다. 이런 모습의 파편이 남아공, 인도, 호주와 함께 초청된 G7 정상회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치·규범에서 미국 외교의 방향은 G7 정상회의 공동성명과 네 개의 초청국도 참여한 “2021 열린 사회(Open Societies) 성명”에 잘 표현돼 있다. 이는 5월 EU-G7 외교·개발 장관회의의 공동성명에서 제시된 내용과 유사하고, 미국과 EU가 구상하는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구도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특정 국가를 겨냥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고 설명했지만, 한미정상회담 직후 나온 싱하이밍 대사의 발언과 같이 “중국이란 말은 없지만, 중국을 겨냥해서 하는 것”은 분명하므로 불필요한 논평이라고 본다. 이와 유사한 논평이 정상회담 직후 나온 대만해협에 관한 성명이 “일반적이고도 원칙적인 수준”에서 포함했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2021년 6월 현재가 미국의 구상이 마무리되는 단계가 아니라 기획하는 단계이므로 점차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우선 미국은 G20 정상회의, 유엔, 민주주의 정상회의(US Summit for Democracy)에서 구체적이고 강력한 조치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단지 중국이란 단어가 없다거나 일반적 수준이라는 방식으로 미국의 가치·규범 외교와 거리를 둘 수만은 없고 명확한 가치·규범 외교의 원칙과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차기 정부는 이 점에서 현 정부와 차별화된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III. 차기 정부 정책 제언: 원칙과 세부 전략

 

차기 정부가 맞이할 국제정치는 한편으로 심화하는 미중 갈등과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리더십 부활 시도가 공존하는 애매하고 중첩된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미중 중심의 국제관계는 남북, 한일, 한중, 한미라는 양자 외교 중심의 지역 질서와 겹쳐서 존재한다. 또한 이는 보수·진보, 여야, 세대, 성별, 계층 간 갈등이라는 또 다른 국내적 상황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마지막으로, 현 정부를 포함한 이전 정부의 외교 성패 또한 고스란히 다음 정부의 외교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치·규범의 영역도 다른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공간적으로는 국내, 지역, 국제 수준을, 시간적으로도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는 구상이 요구된다. 따라서 차기 정부는 다음 원칙을 바탕으로 가치와 규범 외교의 세부 전략을 펼쳐야 한다.

 

1. 원칙. 우리 고유의 가치와 규범에 기반한 보편적 가치·규범의 일관된 추구

 

한국은 세계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미중 두 강대국의 영향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이 경우 국제규범과 원칙, 즉 명분과 정당성에 기댄 외교는 우리에게 중요한 힘이 될 것이다. 물론 대북정책, 대중 외교 등 구체적 사안과 상황에 따라 기민한 전략과 한시적 양해도 요구되겠지만, 정부는 이제까지 우리가 이루어낸 민주주의, 인권, 법치, 시장 경제 등 우리의 국내 가치와 규범을 기초로 한국 외교가 큰 틀에서 추진할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규범과 원칙을 설정하고 이를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인권, 민주주의, 법치, 자유무역 등 국제 사회가 강력히 합의해 쉽게 부정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원칙이 가지는 힘 자체를 의존하는 것이다. 물론 열린 사회 성명에서 제시된 선거 개입, 정보 조작(manipulation of information) 등과 같이 최근 문제가 되어 새롭게 합의가 필요한 영역도 많이 있다. 이런 문제들은 합의에 이르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므로 대원칙인 민주주의, 인권, 법치에 기반해 차차 판단해 나가면 된다.

 

인권, 법치, 민주주의, 자유무역 등의 가치·규범은 국내의 가치·규범에서 도출됐고, 우리의 정체성과도 밀접히 연계됐기 때문에 미국이나 중국도 쉽게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국내 정치와 외교에서 일관된 모습만 견지한다면 큰 어려움은 겪지 않을 명분이다. 문제는 북한 인권과 같이 우리 스스로 국내와 국제 사회에서 이중 잣대나 선택적 적용의 허점을 드러내게 될 경우이다. 원칙과 실리가 충돌할 때 실리를 위해 원칙을 쉽고 가볍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최근 미 의회의 청문회 개최와 같은 외교적 압박에 쉽게 노출될 것이다. 원칙과 관련해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 형성도 매우 중요하다. 사드 배치의 경우처럼 국내 여론이 나뉘는 부분에서 정부는 외국의 압박에 취약하다. 따라서 차기 정부는 적어도 국가의 명운이 걸린 외교 원칙 설정에 있어서는 정계, 외교가, 언론, 학계에서 합의를 이끌어야 하고, 적어도 임기 중엔 이를 유지하거나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이기 위한 정무적 노력과 메시지 관리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원칙에 일관되게 기대는 외교는 초기에는 어려울 수 있지만, 선례가 쌓이고 유사 사례에서의 기록이 쌓인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수월한 외교이기도 하다. 그런 원칙은 향후 구체적 사안에서 우리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지켜낼 수 있는 든든한 뒷배가 될 것이다. 이는 단지 권위주의 국가인 중국이나 러시아에 국제적으로 대응하는 방편만은 아니다. 미국도 트럼프 행정부에서 보여준 것처럼 언제든지 국제기구나 합의를 무시할 수 있고, 이해관계에 따라 일방적으로 가치·규범 영역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바이든 행정부도 현재까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의 신속한 중재,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사에 대한 개인 제재 해제, 사우디의 자말 카쇼기 살해 공개, 코로나19 백신 지재권 면제 지지 등 가치·원칙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책을 집행했지만, 국제규범을 무시하는 일방적인 무역 관행이나 WTO 상소기구의 무력화 등 우려스러운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국내에서도 미국이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하기에 앞서 가치·규범 영역에서의 국내적 문제를 먼저 해결하거나 국제적 약점을 먼저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의 가치·규범 외교 원칙은 미국 내의 이런 합리적 목소리에 일부 기반을 두어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견제할 필요가 있다.

 

2. 세부 전략

 

1) 민주주의 정상회의 혹은 민주주의 10개국(D10)

적어도 민주주의, 인권, 법치에 관한 사안에 대해서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것을 촉구하는 선에서 일관되고 불편부당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EU-G7 외교·개발 장관 공동성명은 중국의 신장, 홍콩, 티베트의 인권 침해와 이를 해소할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중국을 강하게 압박했다. 해결 방안 제안과 티베트에 대한 언급은 빠졌으나 G7 정상회의의 공동성명도 이와 유사한 톤을 유지했다. G7 외교·개발 장관 성명은 또한 북한에 대해서도 핵과 미사일보다 인권 문제를 우선 언급하며 정치범 수용소의 인권 침해와 납북자 문제에 대해 압박했다. G7 정상회의 성명도 유사한 톤을 유지했다. 이는 미국이 구상하고 있는 민주주의 정상회의 혹은 D10 연합체의 최초 시험 무대이며, 예상대로 국제정치 전반에 대해 매우 구체적이고 방대한 제안을 공동성명에 담았다.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현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부분이고 이미 G7 회의의 두 차례 초청과 열린 사회 성명 참여를 통해 상당 부분 발을 들여놓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차기 정부도 향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규범의 다자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의 행보를 보면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방향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차기 정부는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 세 가지 방안이 있다. 첫째, 민주주의 정상회의의 참여에 관해 우리의 민주주의 정체성과 인권의 성숙도를 고려했을 때 전혀 주저하거나 고민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다. 최근 우리는 아시아 교류 및 신뢰 구축회의(Conference on Interaction and Confidence Building Measures in Asia: CICA), 역내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 참여와 사드(THAAD) 배치에 있어 최종 참여 여부를 떠나 참여 과정에서의 주저함과 눈치 보기, 태도 표명의 타이밍 등으로 비판받았다. 따라서 이런 사안에 대해 미리 입장을 정하고 제안이 오면 신속하게 결정할 필요가 있다. 여러 영역 중 이 작업이 비교적 수월한 부분이 가치·규범 영역 즉, 민주주의 정상회의이다. 오히려 이 영역에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중국이나 북한에 대한 선제적이거나 요구되지 않은 배려의 모습은 국내외적으로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대한 적극적 기대표명과 활동은 우리가 민감하게 여겨 참여를 주저할 수도 있는 쿼드 플러스, 자유의 항행 작전(Free and Open Indo-Pacific: FOIP), 경제번영 네트워크, 클린 네트워크 참여의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둘째,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통해 가능하면 우리에게 민감할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가치·규범 외교의 초점과 역량을 모으고 일관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다자 플랫폼에서 진행되는 가치·규범 외교는 양자 외교보다는 개별 국가의 부담이 적고, 사안의 특별한 진전이 없는 한, 이곳을 통해 일관된 외교를 유지할 수 있어 양자 외교에서 어느 정도 운신의 폭을 확보할 수 있다. 중국은 이제까지는 인권과 민주주의 등 가치·규범 공세에 있어 양자관계에서 보이는 거센 반박과 거친 보복을 다자 관계에서 보이지 않았다. 물론 최근 홍콩 민주주의와 신장 인권탄압에 대한 EU의 제재에 대해 보복 제재를 시행했고, 향후 이를 뒷받침할 입법도 준비하고 있으나 아직은 G7 공동성명이나 인권이사회 결의안에 대해 특정 국가를 비난하거나 보복하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미뤄볼 때 다자 조치에 대해 우리가 열린 사회 성명의 경우처럼 특정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수세적 변명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최근 외교부 대변인의 발언처럼 이러한 다자 성명이 우리가 국내적으로도 믿는 가치·원칙의 연장선에 있음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셋째, 열린 사회 성명이 제시했듯이 향후 민주주의 정상회의에서 다루어야 할 의제는 상당히 많다. 미국이 가치·규범에서 중국에 대응할 많은 분야에서 국제법이나 규범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가치·규범 외교도 세부적으로 보면 공세(anti-China)와 방어(pro-democracy)가 있다. 신장, 홍콩, 티베트 등 중국이 민감해하는 사안에 대한 비판과 촉구는 공세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가치·규범 외교의 핵심은 아니다. 민주주의 정상회의에서 한국은 공세는 다른 국가에 맡기고, 방어 차원의 민주주의 증진 의제를 발굴·선점하고 제안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은 중국과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갖는 독특한 경험이 있고 이를 이용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규칙 기반한 국제질서 측면에 있어 중국이 통보 없이 침범하는 대한민국 방공식별구역(Korea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 KADIZ)이나 서해 해상 경계선 문제가 있다. 또한 인질 외교(hostage diplomacy), 사이버 공격, 정보 조작, 영향력 공작, “우마오당(五毛党)”으로 불리는 인터넷 여론 조작 등도 있다. 특히, 한국은 중국의 공격적 민족주의(combative nationalism)나 문화 우월주의(cultural supremacy)에 대해 입증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2004년 동북공정과 최근의 윤동주, 한복, 김치 논란이 대표적이다. 2008년 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과 2019년 홍콩 시위 관련해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주한 중국인의 폭력도 민주주의 국가들이 공동으로 대처할 부상하는 권위주의 중국의 부작용이다.

 

2) 양자 가치·규범 외교

양자관계, 특히 대(對)중국 가치·규범 외교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우선, 중국 외교정책에 대한 성찰을 통해 명분이 서고 격과 급에 맞는 일대일 대응(tit-for-tat)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급에 맞는 대사의 임명, 중국 외교사절의 대우, 평등한 소통 채널, 올바른 의전 등 기본적 조치의 복귀가 필요하다. 최근 “중국경사론”을 주장하는 쪽에서 지적하는 부분이 한국이 신중함을 넘어 중국의 굴욕적인 처사에 대해서도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드 배치 때 중국은 경제 보복과 동시에 2016년 왕이 외교부장은 로이터 인터뷰에서 “항장무검 의재패공”(項莊舞劍 意在沛公)이라는 고사를 인용해 한국을 미국의 부하로 암시하며 비하했다. 연이어 시진핑은 두 차례에 걸쳐 두 명의 대통령 특사를 영접하며 상석에 앉는 외교적 결례를 의도적으로 범했다. 왕이 부장은 G7 정상 회의 참석 직전에 외교장관과 통화에서 한국에 “옳고 그름을 파악”(握是非曲直)하고 “편장단에 쓸리지 말 것”(不被带偏节奏)을 주문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최근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의 연설을 보면 중국은 향후 자국이 핵심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에 대한 비판이나 공격에 대해 공세적으로 나갈 것임을 분명히 천명했다.

 

이는 다만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다. 가치·규범 영역에서 중국 외교는 아직 세련되지 못하고 거친 부분이 많다. 호주의 사례만 보아도 코로나19 기원 조사를 요구한 이후 당한 경제 보복이 있다. 통상의 합법 규정을 이용한 치졸한 징벌 이외에도 중국 대사관은 “14개의 불만 사항”(List of Fourteen Grievances)을 제시해 호주에게 굴욕을 주었다. 최근 전랑외교(战狼外交)로 불리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중국을 선전하는 외교는 여러 면에서 문제를 드러냈다. 홍콩 보안법 지지를 위한 왕이 부장의 유럽과 아시아 방문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파라과이 등 대만 수교국에서 벌이는 백신을 이용한 압박 외교나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벌이는 백신 외교도 긍정적 결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치·규범의 양자관계에서 중국과 대등하게 관계 맺기 위해 중국의 방식과 담론을 탐구해 이에 대응하는 외교를 해야 한다. 2016년 남중국해 판결을 거부한 대응 담론, 2013년 일방적으로 발표한 중국 방공식별구역(China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 CADIZ)에 대한 일본, 호주, 미국 등의 비난에 대한 대응 논리 등은 우리가 중국에 역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다행인 점은 서해 해상수역 등에서 중국에 대해 철저한 상호성에 기반한 일대일 대응이 실무적 차원에서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를 포괄해 적어도 가치·규범 영역의 양자 외교 원칙을 확정할 필요가 있다.

 

대중 외교의 민감성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양자 측면에서 적극적이고 일관되게 하기 어렵더라도 다자, 1.5트랙 혹은 투-트랙의 적어도 어느 한 지점에는 가치·규범 외교의 끈을 이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민주주의 정상회의 등 다자 플랫폼에 참여하고 여기서 문제를 끊임없이 공동으로 제기하는 방법이다. 현재 국제정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미중 양자 사이에 놓이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우리는 미중의 첨예한 대립 속에 끼는 어려움을 사드 배치 때 경험했고 같은 일을 캐나다와 호주 등이 겪고 있다. 세계 질서로서의 미중 관계는 많은 국가에 유사한 영향을 미친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경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더 큰 영향을 받고, 분단 상황이 유지되고 북한과 적대적 관계가 지속되는 한 중국의 비중은 줄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고압적 태도는 계속될 확률이 높다. 중국은 이제까지 누려온 비대칭적 한중 관계를 고수하고 선점한 유리한 위상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한국은 양자관계에서 가치·규범의 갈등이 생기면 최대한 다자주의를 활용해야 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다자주의는 미중 갈등의 힘의 정치를 완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우리가 겪어온,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문제가 우리만의 문제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빈번한 방공식별구역의 의도적 침범도 일본, 대만과 함께 대응할 수 있다. 서해 해상경계의 중국 선박의 접근은 모호한 국경 지역의 잠식과 분쟁화 시도로 인도, 일본, 필리핀, 베트남 등 중국과 국경을 인접한 국가가 처한 공통 문제이다. 우리가 경험한 민간과 정부를 넘나드는 모호한 보복 행위는 일본, 호주, 필리핀, 캐나다, 스웨덴, 노르웨이와 같이 대응할 수 있다. 다자에서 제기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민감한 사안이라 정부가 전면에 나설 수 없다면 국회·정당, 사법부, 기업, 시민단체, 여론이 주도적으로 대응하고, 정부가 이들을 지지하고 엄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차선의 방법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미중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다양한 비전을 제시하는 시기에는 현 정부와 같은 지나치게 신중하고 보수적인 접근보다는 과감한 결정이 요구된다. 지난 3월 31일, WHO의 코로나19 기원 조사 보고서에 대해 우리의 전문성에 근거해 판단하고 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미국, 영국 등 14개국 공동성명에 참여한 것이 좋은 시작으로 보인다.

 

IV. 결론

 

최근 G7 정상회의에 초청받아 열린 사회 성명까지 참여한 것이 보여주듯이 일본을 제외한 G7 국가가 한국에 가지는 기대 수준은 이전보다 명확해졌다. 하지만 다자 무대에서 누리던 한국의 위상은 한중 양자 무대나 미국과 유럽과 멀어지고 중국과 일본이 공존하는 동북아 무대로 복귀하면 급격히 쪼그라든다. 절대적 국력이 아닌 상대적 국력을 강조하는 국제정치의 힘의 작용이다. 상대적 비(非)강대국이 이를 거스를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법과 원칙에 기반한 가치·규범 외교일 수밖에 없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첨단 기술·경제·군사와 함께 가치·규범을 내세우는 상황은 차기 정부에게 기회이다. 가치·규범 영역에 있어 한중 외교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을 유일한 기회는 아마 향후 4년일 것이고, 이 작업을 미국의 외교정책에 기대어 할 수 있다. 물론 바이든 정부가 이제까지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대전제가 있어야 하고, 이는 가치·규범 외교의 어려움과 바이든 정부의 “중산층을 위한 외교” 원칙 때문에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미국 외교정책의 취약성은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두 전략의 큰 틀 안에서 다음 두 강조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가치·규범 외교의 다양한 영역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국제규범이나 국제법을 만들 것을 미국에 요구하고 규칙 제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중국의 디지털 권위주의, 외국에 대한 영향력 공작, 인질 외교, 비국가 행위자를 이용한 회색지대 공세 등은 명확한 법과 규범이 없이는 다루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부분에서 다자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기준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북한 인권이다. 바이든 정부의 정책 결정자들은 천편일률적인 반(反)중국 전선이 가능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019년 기고문에서 안보실장인 설리번과 중국 전략 수장인 캠벨도 동맹을 “그들의 방식대로 관여”(engage states on their own terms)시키는 것이 나은 정책이라고 했다. 이를 고려할 때 한국이 할 수 있고 미국의 세계 전략에 기여할 수 있는 요인이 북한 인권 문제이다. 가치·규범의 시각으로 보면 북한은 심각한 인권 침해, 독재 정권, 인질 외교, 종교 탄압, 국제법의 무시, 사이버테러와 해킹 등 미국이 중국에 대해 지적하는 부분이 모두 존재한다. 차기 정부는 미국의 가치·규범을 앞세우는 외교에 있어서 북한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이 부분에서 한국의 기여 가능성을 제시하고 확인받을 필요가 있다. ■

 


 

저자: 김헌준_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 (University of Minnesota)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호주 그리피스대학교 부교수 및 선임연구원, 미국 세인트올라프대학교 (St. Olaf College) 방문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관련 연구로는 The Massacres at Mt. Halla: Sixty Years of Truth-Seeking in South Korea, Transitional Justice in the Asia Pacific, “The Prospect of Human Rights in US-China Relations: A Constructive Understanding,” 등이 있다.

 


 

담당 및 편집: 백진경 EAI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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