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 스페셜리포트에서 배영자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중 기술 패권 갈등 속, 대만의 반도체 부문 전략을 설명합니다. 대만의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는 2014년 이래 세계 최고의 공정 기술을 보유한 파운드리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중 반도체 갈등이 본격화되자 미국과 중국 기업 모두와 돈독한 관계를 맺어온 TSMC는 미국이냐 중국이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높은 TSMC 의존도를 보이고 TSMC 역시 미국산 장비에 의존하고 있는 한편, 중국 IT 기업들과의 유대관계 및 잠재적 시장으로서의 중국의 위상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TSMC가 “미국 리스크”와 “중국 리스크”에 직면해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만이 주요 경제 파트너인 한국과 협력하여 반도체 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반도체 기술 혁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1. 들어가며

2015년 ‘중국제조 2025’ 공표 이후 수면 위로 떠 오른 첨단기술을 둘러싼 미중 갈등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수출 규제로 본격화되었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첨단기술 부문에서 중국의 굴기를 저지하고 미국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장기적이고 정교한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중국 역시 글로벌 첨단기술 공급망에서 자국의 취약한 곳을 미국이 정확히 공략하며 코너로 몰고 있는 상황을 ‘다모클레스의 칼’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로 비유하면서 자주창신을 통한 지속적인 기술혁신 강화 결의를 굳히고 있다. 미중 첨단기술 경쟁은 당분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이며 이는 세계 각 국가의 첨단기술혁신 전략이 시장 요인을 넘어선 지정학적 고려와 선택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난 3년 동안 미국과 중국이 벌여온 첨단기술 갈등 속에서 특히 대만과 TSMC가 주목을 받아왔다. 중국이 내세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공식적인 합의를 기본으로 그동안 대만에 대한 미중의 잠재적 갈등이 봉합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대만과 인근 지역을 둘러싼 미중간 군사 전략 경쟁으로 서서히 가시화되기 시작하고, 여기에 반도체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이 겹치면서, 대만이 미중 패권경쟁의 주요 무대로 단번에 떠 올랐다. 반도체 공정 부문에서 대만이 구축해 온 대체 불가능한 역량은 미중 기술패권 갈등의 와중에 대만의 전략적 가치를 급상승 시켜 미국과 중국 모두 대만과 더욱 긴밀한 이해관계로 얽히게 되면서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은 비껴갈 수 없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본 글에서는 미중 기술패권 갈등의 핵심에 놓인 대만의 전략을 반도체 부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대만 반도체 산업, 특히 TSMC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현재의 역량을 확보해 왔는지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이후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갈등 속에서 TSMC가 어떤 전략을 취해왔는지 검토해 본다. 그리고 향후 미중 반도체 갈등과 대만이 맞고 있는 도전을 전망한다.

 

2. 대만 반도체 산업과 TSMC의 부상

한국이 1970년대 대기업 중심 수출경제로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한 것과 달리 대만의 초기 경제발전은 중소기업 위주의 수출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대만의 중소기업들은 기술력과 자본의 부족으로 자체 연구개발은 물론 값비싼 첨단기술을 외국으로부터 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대만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해결해야 할 주요한 도전이었다. 대만 정부는 자국 중소기업의 기술혁신을 지원하기 위해 1974년 ITRI(Industrial Technology Research Institute, 工業技術研究院)를 설립하였고 여기에서 기획된 공동연구, 컨소시엄, 공동라이센싱 등이 대만 기술혁신의 구심점이 되었다. 대만 정부는 자국 IT산업의 장기적 발전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1985년 미국 반도체 기업 텍사스 인스투르먼트(TI)의 부사장을 지낸 모리스 창(張忠謀)을 ITRI의 원장으로 영입하였다. 대만 IT산업 발전 방향을 고심하던 모리스 창은 1987년 ITRI의 스핀오프 기업으로 세계 최초로 반도체 공정만을 담당하는 파운드리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 臺灣積體電路製造股分有限公司)를 신쭈(新竹)공업단지에 설립하였다. TSMC 창업에 대만 정부가 자본의 절반을 투자하였지만, TSMC는 1990년에 민영화되었고 현재 대만 정부의 지분은 약 6%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당시 반도체 업계에서는 설계 공정 조립을 하나의 기업 안에서 모두 수행하는 종합반도체기업 모델이 일반적이어서 파운드리 특화 모델(Pure-Play Foundry)의 성공 여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30년 동안 미국 반도체 업체에서 종사한 모리스 창은 반도체 설계와 생산이 분리될 것을 예견하고, 정부가 요구한 종합반도체기업을 육성하는 것보다 대만이 경쟁력을 보유한 분야인 제조에 특화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며 파운드리 특화기업을 설립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예상대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퀄컴, 브로드컴, 엔비디아 등 설계 기업들이 생겨났고, 이들이 높은 인건비와 장비 투자를 요구하는 제조를 아웃소싱하면서 TSMC는 이들의 주문을 받아 반도체 칩을 제조하였다. 설계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회사의 기밀이 담긴 반도체 설계도를 다른 회사에 넘겨주고 생산을 맡기는 것에 위험이 뒤따른다. 이 때문에 파운드리 모델의 성공에 대해 모두가 회의적일 때에,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모토를 내세우며 철저한 비밀보장과 성실한 안전 관리로 신뢰를 쌓아갔고 마침내 세계 주요 반도체 설계 기업들과 지속해서 거래하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파운드리 모델이 자리 잡으면서 많은 대만 기업들이 뛰어들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UMC가 한때 TSMC와 근접한 수준에 도달하며 도전하였다. 하지만 결국 TSMC가 지속적인 선진공정 도입 투자에 앞섬으로써 대만 파운드리 업계의 맹주로서의 지위를 굳혔고 이후 대만 반도체 산업 발전을 견인해 왔다. 2000년대 중반 인텔, IBM, 삼성 등이 파운드리 부문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였고 TSMC 역시 투자 증대 압박을 받는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타기업들이 투자를 줄이는 동안 TSMC는 오히려 투자 규모를 늘려 초대형 파운드리를 건설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를 걸었지만, 경제침체로 위기에 봉착한다. 2005년 퇴임했던 모리스 창은 2009년 7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TSMC로 다시 복귀하였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TSMC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과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특히 2011년 말부터 TSMC는 100여 명으로 구성된 연구팀을 미국 애플 본사에 파견하는 협력을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아이폰6의 메인 칩인 A8을 양산하는데 필요한 20나노 팹을 대만에 구축하였고, 이를 토대로 치열한 각축전 끝에 이전까지 삼성이 담담하던 아이폰용 칩 공정을 따내는 데 성공하였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경쟁자인 삼성이 자사 제품 스마트폰에 들어갈 칩을 제조하는 것을 우려하여 탈삼성을 원했던 애플의 이해와 최고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애플의 칩 공정을 수주하여 경쟁자인 삼성을 뛰어넘고자 했던 TSMC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이루어진 성과였다. 2014년 TSMC가 제조한 A8칩을 탑재한 아이폰6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TSMC는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의 공정 기술을 보유한 파운드리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굳힐 수 있게 되었다.

TSMC가 창업 이후 30년 동안 이룬 성공은 창업자금 투자, 공장 부지 및 용수 등 각종 편의 제공, 세금감면 등 대만 정부의 다양하고 지속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 가능했다. 아울러 TSMC가 필요로 하는 우수한 인력이 충분하게 공급된 것도 성공의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적절한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공격적으로 추진하며 TSMC를 이끌어 왔던 모리스 창의 리더십에 주목할 수밖에 없고 왜 대만에서 그가 반도체의 대부로 불리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모리스 창은 평소 도량과 식견을 의미하는 ’기식(器識)‘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하였고 논어에 나오는 ’내 길은 한가지로 일관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는 말을 신념으로 삼아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한 강연에서 밝힌 바와 같이 TSMC는 정부 기업 인력풀이 대만식으로 결합한 매우 독특한 성공모델이고 이는 다른 곳에서 복제되기 쉽지 않아 보인다.

 

3. 미중 반도체 갈등과 TSMC

올해 4월에 출간된 미국 반도체협회(SIA) 보고서에 따르면 설계, 소재, 장비, 공정, 조립 등을 모두 아우르는 글로벌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8%, 한국 16%, 일본 14%, 유럽 10%, 중국 9%, 대만이 8%이다. 각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만으로는 왜 미국이 중국 반도체 굴기를 그토록 저지하려고 하는지 왜 비중이 8%밖에 되지 않는 대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지를 알기 어렵다. 반도체 산업을 부가가치 중심의 밸류체인이 아닌 안정성을 염두에 둔 공급망의 관점에서 파악할 때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도체 설계 부문은 규모나 기술 수준이 다양한 기업들에 개방되어 있고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다. 물론 인텔, 엔비디아, 퀄컴 등 설계 부문의 강자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이 수많은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칩의 설계를 모두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대만 및 중국 기업들이 별다른 견제 없이 설계 부문에 진입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조립 부문의 경우는 요구되는 기술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고 이전이 용이하기 때문에 위험 발생 가능성이 낮다. 공급망 안정성 관점에서 볼 때 주목되는 부문이 장비와 공정이다. 특히 수많은 장비와 다양한 수준의 공정 가운데 최첨단 전자기기에 장착되는 7나노 이하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초미세 극자외선 노광장비(EUV)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하고 있으며, 7나노 칩의 공정은 현재 TSMC와 삼성만이 가능하다. ASML이 생산하는 최고사양 EUV의 주요 고객은 TSMC와 삼성이고, 삼성은 외주 파운드리 부문에서 TSMC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낮은 편이다. 반면 TSMC는 10나노 이하 최고 수준 외주 공정 부문에서 92%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 설계기업들이 TSMC와 거래하고 있고, 중국 주요 설계기업들과 TSMC 역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미중관계에서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이슈가 TSMC로 집중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제조 2025’ 이후 중국의 첨단기술 발전을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왔다.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 부문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최대한 지연시키고 미국 반도체 공급망 안정성을 제고하는 가운데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최첨단 파운드리나 메모리 부문에 중국이 진입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고 미국 내 첨단 반도체 제조 능력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다양한 정책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미국이 현재 역점을 두고 있는 수출규제를 통한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 반도체 동맹 구축, 미국 내 제조역량 강화는 모두 TSMC와의 협력 없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중국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 가운데 하나가 TSMC가 화웨이의 칩 공정을 중단했던 부분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미국 설계 기업들이 TSMC에 공정을 의뢰하고 있고 TSMC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공정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반도체 제조 역량 강화나 반도체 동맹 결성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다.

중국이 반도체 부문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최첨단 반도체 칩의 안정적 공급,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제조 및 장비 부문으로 지속적인 업그레이드, 한국과 대만 기업을 따라잡고 최첨단 반도체를 중국 내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반도체는 원유를 제치고 제1의 수입품이 되었으며 특히 중국이 목표로 하는 첨단 제조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최첨단 반도체 제조 능력의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중국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제까지 공식 비공식 루트를 통한 외국 첨단기술 획득 및 반도체 부문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해 왔다. 중국 내 기술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중국은 첨단 반도체 기술을 소유한 외국 기업의 인수합병, 중국 내에 투자한 외국기업으로부터의 기술이전, 최고급 인력 스카우트 등의 수단을 활용하여 빠르게 반도체 기술혁신 역량을 강화하여 왔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로 중국에 최첨단 반도체와 관련 장비의 공급이 차단되고 외주 공정이 중단되면서 반도체 굴기가 지연되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히 공정 부문에서 지속적인 기술혁신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 TSMC나 삼성과의 기술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더 중국에 중요하다.

2021년 현재 TSMC는 인텔 삼성과 함께 세계 3대 반도체기업 중의 하나이며, 세계 500여 개 기업으로부터 수주받은 반도체 1만1600여 종을 위탁 생산하고 있다. TSMC의 국가별 매출액은 미국이 60%, 중국이 17%, 대만 8%, 일본 6% 정도이다. TSMC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애플을 비롯한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과의 돈독한 관계 형성 및 지속적인 수주가 매우 중요했다. 실제로 미국 주요 반도체 설계 기업의 92%가 외주 공정을 TSMC에 의뢰하고 있어 미국의 TSMC 의존도가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미국산 장비 없이 TSMC는 팹을 건설할 수도 운영할 수도 없다. 한편 TSMC는 2010년 이후 중국 주요 IT기업들과의 거래를 꾸준히 증가 시켜 왔고 특히 화웨이의 경우 TSMC 매출의 15% 정도를 차지하면서 애플에 이어 제2의 고객이 되었다. TSMC와 중국 반도체 기업들과의 협력은 공식적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왔다. 예컨대 2000년 중국 정부가 자국 파운드리 SMIC를 설립할 때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리처드 창(張汝京)은 모리스 창과 미국 TI에서 함께 근무했었던 인물이다. 리처드 창은 대만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기업을 TSMC에 팔고 중국 본토로 건너가 SMIC를 설립했고 이후에도 TSMC의 인력들이 대거 SMIC에 합류하면서 각종 공식 및 비공식 기술 지원 관계를 형성하여 왔다.

미국은 물론 중국 기업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어온 TSMC는 2018년 이후 미중 반도체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미국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아 온 것으로 전해진다.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은 첫째 미국 내에 최첨단 반도체 공정 시설을 건설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중국 기업들과의 거래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 상무부는 2019년 화웨이 및 관련 중국 기업에 미국산 제품을 수출할 때 허가를 받도록 하는 수출제한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조치는 미국산 기술이나 소프트웨어 비중이 25% 이하이거나 미국이 아닌 제3국에서 반도체를 제조하여 화웨이로 수출하는 경우는 포함하지 않았고 TSMC와 화웨이의 거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화웨이가 건재하자 2020년 5월 미국 정부는 제재를 강화하여 제3국에서 제조한 반도체라도 미국 기술을 활용해 생산한 제품의 화웨이에 대한 수출을 규제한다. 미 상무부가 강화한 조치는 미국 반도체 장비를 쓰고 있는 TSMC에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조치들은 수출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허가받으라고 한 것이었지만 미국 정부가 TSMC를 예외로 두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TSMC는 이에 대해 2020년 5월 두 가지 결정을 통해 전략적 선택의 방향을 분명하게 표명한다. 즉 미국 애리조나에 최첨단 반도체 파운드리를 건설할 것이며 화웨이와의 거래에 대해서는 이미 수주받은 물량의 공급이 완료되는 9월 중순 이후 거래를 중단할 것을 발표하였다. 2021년 4월 미국 상무부가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군사 활동과 관련된다는 이유로 중국의 슈퍼컴퓨터 관련 기관과 및 기업 7곳을 수출 제한 명단에 올렸을 때 TSMC는 이번에도 즉각적으로 명단에 포함된 중국 설계업체 페이텅(飛騰)과의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하며 미국 측에 협력하였다.

미국 기업의 장비에 의존하고 있고 미국 설계기업으로부터 매출의 60%를 얻고 있는 TSMC로서 미국 측에 서는 것은 어찌 보면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TSMC와 중국 IT기업들과의 관계 및 유대나 잠재적 시장으로서 중국의 위상을 상기해 볼 때 이러한 결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TSMC는 미국의 반도체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보를 보이는 한편 중국 IT기업과의 관계도 미국의 제재 범위 밖에서 조심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TSMC의 행보를 상징적으로 볼 수 있는 사례가 있었다. 2020년 9월 단교 이후 대만을 방문한 최고위급 미정부 관료 크라크(Keith Krach) 국무부 경제차관을 환영하는 정부 공식 리셉션에 기업인으로는 유일하게 모리스 창이 참여하였고 만찬 직후 대만 총통실은 차이잉원 총통, 크라크 차관, 모리스 창이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였다. 대만 반도체 산업의 선택을 분명하게 밝힌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만찬이 진행되기 불과 4일 전, 미국의 화웨이 제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TSMC는 화웨이에 보낼 반도체 칩을 최대치로 생산하기 위해 쉬지 않고 팹을 가동하였고 칩의 공수를 완료하였다. 즉 공식적으로는 미국과 함께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물밑에서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크라크 차관 방문에 대해 중국은 대만 방공식별구역에 군용기를 출격 시켜 무력시위를 하였고 중국 언론은 미국 국무부 혹은 국방부 장관이 대만을 방문하면 중국군 전투기가 대만 섬 상공에서 훈련할 것이라고 위협하였지만 이 사진에 대해서는 비판이나 아무런 코멘트가 없었다. 중국 역시 TSMC와의 관계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처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SMC는 2021년 4월 중국 난징에서 운영하고 있는 자사 파운드리에 28억 달러를 추가 투자하여 28나노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증대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대만은 물론 중국 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특히 중국 내에서 TSMC가 미국 애리조나에 최소 120억 달러 5나노 생산라인을 건설하는 것과 비교하면서 TSMC의 중국 투자를 불쾌하게 받아들이고 보이콧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중국 관영언론은 TSMC의 투자가 중국 반도체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고 밝히며 논쟁을 가라앉혔다. 한 대만 언론은 조심스럽게 이어지고 있는 TSMC와 중국 IT 업체와의 관계를 중국 시장의 성장 잠재력, 중국 정치 상황의 불확실성, 중국기업으로의 기술 및 인력 유출 등을 뒤에 업은 늑대와의 춤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TSMC의 전략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일본 반도체 업체들과의 협력 강화이다. TSMC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쓰쿠바시에 반도체 연구개발 시설을 건설하기로 했으며 규슈에 16나노 28나노 파운드리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일본은 ‘반도체 등 디지털 산업의 기반 강화를 위한 새로운 전략’을 내세우며 자국 반도체 산업을 재건할 수 있는 기회로서 TSMC와의 협력에 공을 들여왔고, TSMC는 가뭄 재해로 인한 대만 내 생산 리스크와 중국 시장의 불확실성 등에 대응하여 해외에 파운드리 건설을 고려해 왔는데,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대만과 일본 반도체 부문의 협력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유럽 역시 역내 반도체 제조 역량 강화를 위해 TSMC와의 협력을 원하고 있다. 이제까지 TSMC는 주요 생산시설을 대만 내에서 운영해 왔고 현재까지도 타이난 등에 최신 공정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미중 반도체 갈등 속에서 대만 반도체 기업들의 전략적 가치가 상승하면서 이제까지와 달리 TSMC는 미국 일본 중국 등 해외에 생산라인 건설 및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미중 반도체 갈등 속에서 미국 주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할지, 반도체 공급망의 안정과 지속적인 세계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반도체 산업을 재편하게 될지 지켜보아야 한다.

 

4. 전망

미중 반도체 갈등 속에서 이제까지 대만 반도체 산업, 특히 TSMC는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신중하고 적절하게 대응해 왔으며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전략적 선택과 투자를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TSMC, 대만, 반도체의 앞날에 대해 쉽게 낙관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여기서는 TSMC와 대만 반도체가 당면하고 있는 도전을 전망해 본다. 첫째, 향후 TSMC와 미국의 협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 리스크가 존재한다. 현재 TSMC는 애리조나에 파운드리 건설을 시작했으며 애초의 예상 규모를 넘어 최대 6개의 생산라인을 건설할 예정이라고 보도된다. 대만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파운드리를 미국에서 운영할 때 필요한 인력의 적절한 공급과 함께 대만과 비교할 때 30% 정도 생산성 저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제까지 미국에서 반도체 공정 특화기업이 크게 성공할 수 없었던 시장 요인이 존재하는데 TSMC의 미국 투자는 시장보다는 안보나 동맹의 논리를 앞세워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향후 파운드리가 건설되고 운영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가 존재한다. TSMC의 미국 파운드리는 미국내 설계 기업과의 공고한 관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면서 TSMC의 미국내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 주도 반도체 동맹이 성공적으로 작동하면서 최고 수준 반도체 공정 부문에서 중국이 배제된 일정 정도 미중 디커플링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반도체 산업 구도가 재편될 수 있다. 이러한 미국과 대만이 바라는 최선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TSMC와 미국의 반도체 동맹이 잘 자리 잡아야 하고 이를 위해 현재 건설 중인 생산라인이 가동되는 2~3년 후를 넘어서 차기 및 차차기 미국 행정부로부터 이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인텔과 같은 미국 기업들도 반도체 공정에 대대적 투자를 계획하고 있고 삼성 역시 미국 내 최신 공정 시설을 건설할 예정이기 때문에 잠재적 경쟁자들의 도전에 대응해야 한다. 즉 TSMC의 미국 투자는 대만과 미국 반도체 기업의 협력으로 인한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며 미국 주도 반도체 동맹의 공고화 속에서 미국 대만 양국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지만 이를 위해 초과비용, 생산성 저하, 인력공급 등의 경제적 요인들과 미국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이라는 정치적 요소들이 오랫동안 잘 작동되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둘째, 향후 대만과 중국 관계, TSMC를 위시한 중국 반도체 기업들과 중국 기업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중국 리스크도 고려해야 한다. 대만과 미국 반도체 기업의 협력 강화 및 미국의 제재로 인한 대만 반도체 기업과 중국 기업의 협력 단절 등을 중국 정부가 어느 정도 선까지 인내하며 감수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수출 제재 이후 중국 정부와 기업들은 미국산 부품이나 장비를 제외한 자체 공급망, 소위 홍색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부품과 장비 및 생산과정 전체를 세밀히 분석하고 취약부문에서 자국 기업들을 육성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기술을 확보하는데 어려움과 좌절을 겪고 있는 중국에 TSMC를 비롯한 대만 반도체 기업의 기술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와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의 입장이 결합하여 언제 어떤 방식의 위기로 구체화할지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울러 시간이 흐르면서 장기적으로 자본과 시장과 강력한 의지 및 정부 지원을 확보한 중국 기업의 반도체 공정 기술 혁신 역량이 강화되어 대만에 도전하게 될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중국이 필요로 하는 첨단기술을 대만이 더 이상 확보하지 못하게 될 때 대만은 무엇을 내세우며 중국을 상대할 수 있을지 대비해야 한다.

셋째는 대만 자체 리스크가 존재한다. 대만의 대중 수출의존도는 홍콩을 경유하는 부분을 포함하면 대만 정부 발표 공식 통계수치를 훨씬 넘어 60%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만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30%, 이 가운데 공정 부문이 절반 정도 된다. 탈중국을 주장하는 민진당 집권 기간 동안에도 대만 경제의 중국 의존도는 감소하지 않았으며 반도체 이외 다른 부문의 성장률은 다소 정체된 상황이다. 게다가 대만 반도체 산업은 가뭄, 지진, 단전 등으로 생산이 이따금 중단되면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만 경제의 지나친 중국 및 반도체 의존도, 세계 외주 공정의 54%를 대만의 TSMC가 차지하고 있는 것은 대만과 세계 반도체 산업에 취약한 부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 TSMC가 이룬 놀라운 성과가 한편으로는 대만의 경제 및 안보에 기여하고 대만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 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이를 뒤집어 보면 특정 국가나 기업이 전체 경제나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 오히려 위험을 높이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현재와 같이 반도체 산업과 TSMC가 대만에 강력한 실리콘 방패가 되어 주고 있을 때는 문제가 드러나지 않지만, 이 방패가 언제까지 잘 작동할지 불확실하고 위험을 헤징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만의 서북쪽에 위치한 단수이(淡水)는 17세기 이후 대만과 외부 문명이 연결된 중요한 관문이자 요새였다. 이 지역에 위치한 홍마오청(紅毛城)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에는 스페인 네덜란드 명 청 영국 일본 호주 미국 대만의 8개 국기(国旗)가 꽂혀 있다. 1628년 스페인부터 시작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거나 조차했던 국가들의 깃발이다. 여기에 과연 지금처럼 대만의 국기가 맨 마지막에 위치하며 얼마나 오래도록 펄럭일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반도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만이 미중 패권 경쟁의 와중에서 안보와 번영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도체 공정 기술과 이를 이을 수 있는 차세대 첨단기술의 독보적인 우위를 가능한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중국 부상으로 인한 위협은 물론 미국과의 협력으로 인한 리스크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에다 지나치게 높은 대만 경제의 중국 및 반도체 의존도에 대한 해법도 마련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대만의 지속적인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걸어야 하는 길이다.

한국에게 대만은 수출입 규모 측면에서 6~7위를 차지하는 중요한 경제파트너이다. 한국이 대만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의 60%가 반도체이고 한국의 대만 전체 수출의 30%를 반도체가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 및 산업 내 협력 관계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중국은 반도체에서 주로 경쟁국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TSMC의 모리스 창은 자사의 유일한 경쟁상대가 삼성이라고 언급해 왔다. TSMC는 삼성과의 애플 스마트폰용 반도체 칩 수주 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의 공정기술을 보유한 기업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최근 삼성이 파운드리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자 격차를 벌리기 위해 더욱 공격적으로 파운드리를 확장하고 있다. 다른 한편 한국과 대만은 모두 중국과 반도체 의존적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고 미국 주도 반도체 동맹의 주요 파트너이지만 중국과의 관계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공통점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에 모두 반도체 제조 기술에서 독보적인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안보와 번영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반도체 부문에서 한국과 대만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양국은 전체 반도체 산업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 속에서만 지속적인 기술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상호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있다. 미중 기술패권 갈등 속에서 한국과 대만이 경쟁은 물론 상호 협력을 통해 세계 반도체 산업의 안정적 성장과 지속적인 반도체 기술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

 


 

■ 저자: 배영자_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분야는 국제정치경제, 해외투자의 정치경제, 과학기술과 국제정치, 인터넷과 국제정치, 과학기술외교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국제정치패권과 기술혁신: 미국 반도체 기술 사례》(2020), 《중국 인터넷 기업의 부상과 인터넷 주권》(2018), 《미중 패권 경쟁과 과학기술혁신》(2016), 《과학기술과 공공외교》(2013)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백진경 EAI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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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경쟁과 한국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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