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동아시아연구원(EAI)은 지난 15년간(2005-2020) <한국인의 정체성> 조사를 통해 변화하는 한국인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살펴보았습니다. 2020년 조사결과의 첫 번째 워킹페이퍼 시리즈인 “한국인이 보는 역사, 민족, 국가, 그리고 세계”의 첫 번째 보고서로 이내영 고려대 교수가 대표집필한 워킹페이퍼가 발간되었습니다. 본 워킹페이퍼는 해방 이후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과 역대 정부의 업적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의 내용과 변화 추이를 살펴봅니다. 한국인은 한민족의 역사와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대체로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2005년 이래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또한 해방정국의 주요 지도자와 정부가 미친 영향을 살펴본 결과 보수층, 60세 이상의 응답자들이 이승만과 미국정부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반면, 진보성향, 젊은 응답자일수록 미국정부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책임에 대해서는 북한의 책임이라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이념성향과 지지정당에 따라 전쟁발발 책임에 대한 인식에서 편차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학계나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진보와 보수 진영의 상반된 역사적 관점의 날카로운 대립과는 달리 대중들은 비교적 균형 있는 역사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정치권이 역사문제를 정치에 활용하거나 역사해석이 정치 쟁점으로 비화하는 역사해석의 정치화 현상은 과거의 갈등을 되살리고 국민들을 편 가른다는 점에서 퇴행적이라고 주장합니다.

 


※ 아래는 본 워킹페이퍼의 서론입니다. 전문은 상단의 첨부파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I. 서론

국민이 가지는 정체성은 집단적인 역사적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변화한다. 국민들이 자기 역사에 대해 자긍심이 높을수록 국가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이 높아지고 역사적 기억은 국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에도 영향을 미친다. 36년간의 일제 강점,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전쟁, 오랜 권위주의 통치와 민주화의 경험, 압축적 산업화와 경제적 도약 등 역동적인 역사적 변화를 겪었던 한국인에게 역사적 기억은 정치적 정체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의 경험은 반공주의와 국가안보를 강조하는 보수이념과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를 유지시키는 집단 기억으로 작용해왔다(김동춘 2011).

그러나 개인과 사회집단에 따라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기억과 인식은 다를 수 있고, 따라서 역사를 바라보는 상이한 관점이 충돌하기도 한다. 해방정국에서 단일민족국가 건설을 추구했던 정치세력에게 해방 3년은 좌절과 실패의 역사로 기억되지만, 이승만 지지자의 시각에서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국가건설을 이루어낸 성공의 역사이다. 또한 한국전쟁은 참전용사들에게는 조국을 수호한 자랑스러운 기억이겠지만, 양민학살 희생자의 가족들에게는 아픔과 배신의 기억일 것이다.

개인과 집단에 따라 같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기억과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역사를 보는 상반된 관점의 충돌이 한국사회의 이념갈등과 정치쟁점으로 연결되는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최근 백선엽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 논란과 광복절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와 결탁했다는 광복회장의 비판은 역사문제가 현재의 정치 쟁점으로 부각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사실 상이한 역사해석의 대결 현상은 민주화의 산물이다. 이승만 정부부터 권위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시기에는 반공 이념과 냉전질서의 제약이 강했기 때문에 현대사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유신체제 기간에는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한 역사교육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상반된 해석과 관점이 충돌하는 현상은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고 이념적 다양성이 허용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변화로 볼 수 있다.

1980년대에 민주화가 진행되고 이념적 제약이 줄어들면서 보수적인 주류 역사해석에 대한 도전이 진보진영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박태균의 표현처럼 1980년대는 진보세력이 학문적 시민권을 획득한 시기이다. 냉전과 보수 이데올로기의 제약이 줄어들면서 민주화운동의 이념이 종속이론과 좌파 이론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김호기·박태균 2019). 특히 <해방전후사의 인식> 시리즈 6권은 박현채, 강만길 등 진보성향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한국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 책들은 해방 전후의 사회변동을 분단체제의 형성과정으로 제시하였는데, 냉전의 구조화라는 국제적 상황과 좌우합작, 농민과 노동운동의 국내적 변동을 ‘민중적-민족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해방전후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획기적으로 확대하였다(송건호 외 2004; 강만길 외 1985; 박현채 1987).  더불어 진보 학계는 한국전쟁의 발발 책임과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재조명, 박정희 정권의 폭압적 성격과 노동 통제에 대한 비판적 평가 등을 통해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박정희를 근대화를 이끈 지도자로 미화해왔던 주류 시각에 도전하였다(박명림 외 2006; 손호철 2011).  

2000년대에 진보진영의 역사해석에 대한 반론이 새로운 우파를 의미하는 뉴라이트(New Right) 세력에 의해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뉴라이트 시민운동단체가 2004년 출범한 자유주의연대이고 2007년 뉴라이트 전국연합으로 확대되었다. 뉴라이트를 이끄는 다수 인사는 기존 우파가 아닌 진보세력과 주사파 등 운동권 출신에서 전향을 한 사람들이다. 뉴라이트는 기존 보수의 퇴행적 행태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진보진영의 낡은 이념과 극단적 대립을 극복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뉴라이트 진영은 진보 진영의 민족지상주의와 민중주의에 치우친 역사적 관점, 현대사를 좌절과 반칙의 역사로 보는 부정적인 역사해석,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 노력을 비판하였다. 뉴라이트 진영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 체제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이후의 빠른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성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적 시각을 제시하였다(이인호 외 2009).   

민주화 이후 학계를 중심으로 상반된 이념적 시각에 기초한 역사해석간의 대립, 즉 역사해석의 이념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학계의 대립에 정부와 정치권까지 개입하는 역사해석의 정치화 현상이 진행되어왔다. 역사해석의 정치화를 촉발시킨 계기가 한국사 국정교과서 논쟁이었는데 학계, 시민사회, 정부가 역사해석 논쟁에 가담하여 충돌하였다. 2003년부터 검인정교과서가 교육현장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보수 언론과 시민단체가 검인정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비판을 주도하는 학자들이 뉴라이트 세력이었는데, 2005년 ‘교과서포럼’을 설립하고 진보학계의 역사해석에 대항하는 저작과 대안교과서 출간을 시도하였다. 학계와 시민사회 내에서 진행된 역사해석 논쟁에 이명박 정부가 개입하여 근현대사 검인정 교과서의 내용을 수정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역사학계의 반발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는 2015년 전격적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였는데. 과거 유신체제처럼 역사해석을 정부가 독점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역사학계와 시민단체, 그리고 야당의 거센 반발과 비판에 직면하였고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정권교체 이후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중단되었다(임병철 2016; 심용환 2015).  

한국 현대사에 관한 이념적 대립과 논쟁을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요약하면 두 가지 상반된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진영의 현대사를 보는 관점은 현대사를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유례없는 성공의 역사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긍정적 역사관은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정체성을 고양하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권위주의 체제하의 인권침해와 국가폭력을 눈감거나 기득권세력의 반칙과 불의를 정당화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반면 진보진영의 현대사를 보는 관점은 한국 현대사를 정당성이 취약한 분단체제가 고착화되고 불의와 반칙이 만연한 좌절의 역사로 인식한다. 이러한 역사관은 구조화된 불의와 적폐를 청산하는 지속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이룩한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성취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더불어 과거의 적패청산과 개혁에 대한 강조가 지나치게 되면 미래지향적인 국가 비전과 정책이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상반된 관점과 더불어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연령대, 출신 지역, 이념성향, 지지정당에 따라 상반된 평가가 대립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국부로 보는 긍정적 평가와 분단을 초래한 독선적 권력자로 평가하는 부정적 시각이 대립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보는 견해는 이승만은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에 대한 현실주의적 인식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유영익 2013). 단독정부 수립은 당시 미국과 소련간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경쟁이 본격화되는 국제정치적 상황과 북한과 소련의 유착과 사회주의 국가 수립 진행 상황 등을 고려하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변호한다(한배호 2008). 

반면 진보학계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 노선과 행적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더불어 해방 이후 미군정과 친일파에 기대어 권력을 장악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해서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권력욕으로 장기집권을 추구하다가 국민들의 저항으로 하야하는 결말에 이르렀다고 평가한다(강만길 외 1985; 민족문제연구소 2012).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그를 산업화의 주역으로 보는 긍정적 관점과 장기집권을 추구한 독재자로 평가하는 관점이 극명하게 대립해왔다(김일영 1995). 산업화의 주역으로 보는 견해는 근대화의 비전을 가지고 산업화를 주도한 박정희 리더십이 경제성장의 핵심 요인이라고 평가한다(송복 외 2017). 반면 진보진영은 그가 삼선개헌과 유신체제를 통해 민주주의 체제를 말살하고 장기독재를 추구하였고 이 과정에서 민주화 세력과 노동자 농민에 대한 체계적 억압과 배제를 자행하였다고 평가한다(조희연 2010). 더불어 한국의 경제성장의 핵심 요인은 박정희 리더십이 아니라 높은 교육열과 근면성,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탄압과 희생, 우호적인 국제경제 환경이라고 주장한다(서중석 2017; 손호철 2011).

이렇듯 한국의 현대사의 주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인식은 이념성향과 지지정당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나타난다. 현대사의 주요 사건에 대한 인식이 국민들의 정치적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고, 역으로 국민의 정치적 정체성에 따라 같은 역사적 사건을 보는 시각에서 극명한 차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본 장의 목적은 2020년 한국인의 정체성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한국인의 역사인식을 알아보고, 2005년 1차 조사부터 올해 4차 조사까지 네 차례의 조사결과를 비교하여 역사인식의 변화 추이를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정당지지와 이념성향 등 정치적 정체성에 따라 한국인의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차이를 나타내는가를 살펴보고, 한국인의 역사인식이 정치적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할 것이다. 본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해방 이후 주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의 내용과 변화 추이를 분석할 것이다. 한민족 역사와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 해방정국의 주요 지도자와 정부의 역할에 대한 평가, 한국전쟁 발발의 책임에 대한 인식을 연령대별, 학력 수준별, 그리고 지지정당과 이념성향별로 살펴볼 것이고, 나아가 2005년 1차 조사부터 2020년 4차 조사까지의 변화 추이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이승만 초대 정부부터 현 문재인 정부까지 역대 정부의 업적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를 정치영역과 경제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더불어 역대 정부의 업적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가 연령대, 출신 지역, 지지정당, 이념성향에 따라 어떠한 편차를 보이는가를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 국민의 정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정치 정체성을 이념성향과 정당일체감의 두 차원으로 나누어 분석할 것이다.

 


 

■ 저자: 이내영_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국회입법조사처 처장,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장, 고려대학교 평화와 민주주의 연구소장, EAI 정치사회여론조사센터 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비교정치, 선거정치, 의회정치 등이다. 최근 논저로는 "누가 세대 간 계층이동의 가능성을 비관 혹은 낙관하는가?" (2019), "Politics of Party Polarization in East Asia: A Comparison of South Korea, Taiwan, and Japan" (2018, 공저), "경제적 불평등은 어떻게 개인의 복지선호로 이어지는가? 한국인의 복지선호형성의 세부단계에 대한 유형화" (2018)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김세영 EAI 연구원

           문의: 02 2277 1683 (내선 208) sykim@eai.or.kr

 


 

[EAI 워킹페이퍼]는 국내외 주요 사안들에 대한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고 심층 분석한 학술 보고서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6대 프로젝트

문화와 정체성

세부사업

한국인의 정체성

Keywords

Related Public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