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작년 7월 1일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시작된 한일 무역 갈등이 1년이 되었습니다. 한일 양국은 역사문제, 경제문제, 안보문제를 연계하며 악수(惡手)에 악수(惡手)로 대응하는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저자인 손열 EAI 원장, 연세대 교수는 문제의 핵심이 정부 간 불신과 감정 대립에 있다고 진단하고, 반일(反日)과 혐한(嫌韓)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강제 동원과 수출규제의 해법을 찾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자국중심주의에 빠진 미국의 중재 역할도, 정치권의 자정 노력도 기대하기 힘든 현 상황에서 한일 양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합리적 판단에 기초한 한일관계 재건축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 좌절과 시련을 넘어서기 위한 인고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망합니다.

 


 

7월 1일로 한일 무역 갈등 1년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한국을 향한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소재 3종 수출을 규제한다고 전격 선언을 하여 양국관계는 얼어붙었다. 이에 한국은 일본 상품 보이콧과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거치며 경제 보복을 주고 받은 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이하 지소미아) 종료 선언으로 갈등을 증폭시켜 미국의 개입을 불러왔다. 일본 기업의 강제동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 처리를 둘러싼 역사 갈등이 경제 갈등과 안보 갈등으로 비화된 3중의 갈등구조는 이제 일본 기업의 자산 매각과 현금화(現金化) 시한이 다가오면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일본 정부가 공공연히 보복을 예고하는 데 대해 한국 정부과 여당은 “지난 1년 기습적인 일본의 조치에 흔들리지 않고 정면돌파하면서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자평하면서 “소재, 부품, 장비 국산화 전략 시즌 2를 시작”하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양국 미디어, 정치권과 정부의 관심은 수출규제조치에 따른 양국의 손익계산서, 향후 일본의 추가 보복 가능성과 정도, 한국의 대항 조치 등 표면적인 이슈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정부 간 불신과 감정 대립이 위험수위에 접근하고 있다는 데 있다. 두 정부는 상호 무시와 보복 게임을 반복하면서 불신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다. 코로나 19로 양국이 사실상 자가격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상대방을 물고 늘어지는 비(非)대면 외교전에 여념이 없다. 이제 한일관계는 정상적인 외교 관계라 보기 어려운 상태에 돌입했다.

문제는 정치다. 양국 정치지도층과 정부는 현금화 시계를 늦추는 꼼수와 미봉책으로 보복과 항전의 제2라운드를 잠시 미룰 수는 있어도, 반일(反日)과 혐한(嫌韓)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강제 동원과 수출규제 해법을 찾기 어렵다. 정치는 코로나 19의 엄중한 사업환경 속에서 원치 않는 한일 경제 디커플링(decoupling)으로 고통받는 기업들, 그리고 한일 양국을 삼각안보협력과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묶고자 고심하는 미국에 좌절감을 가져다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풀리지 않는 갈등의 후과(後果)는 빛바랜 민족주의에 좌절하는 청년 세대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다.

 

감정 대립의 소용돌이 구조

한일 갈등은 10년을 바라보고 있다. 유례없는 사태다. 지난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천황 사죄 요구 발언으로 본격화된 갈등은 2013년 아베 총리의 침략 부인 발언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2014년 위안부 해법 공방과 국제 공공외교전으로 이어졌다.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 이후 갈등은 오히려 깊어졌다. 부산소녀상 설치 소동, 대선후보 5인의 합의 파기·재협상 공언, 위안부 합의 재검토, ‘화해·치유재단’ 해산 등을 부단히 비판하며 아베 정부는 한국을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로 매도, 자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한국이 역사문제로 “골포스트”를 옮겨 가며 끊임없이 자국을 괴롭히는 행태를 묵인할 수 없다며 공세적인 한국정책으로 전환하였다. 한국 대법원 판결을 “국제법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국제법 위반 상황을 조속히 시정”하라는 강공을 펼치며, 나아가 무역 보복이라는 과격한 공격 카드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한국 때리기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아베 정부의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수출 규제 선언은 한국경제의 급소를 겨눈 비수였으나 금수(禁輸) 조치로 이어지지 못해 애당초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했다. 명분상 자가당착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베 정부는 문재인 정부에 국제법 질서 위반 상태를 시정하라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강제동원 판결과 같은 정치 이슈에 대한 보복으로 수출 규제를 가해 정경분리 국제규범을 훼손하는 이율배반적 행동을 드러냈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주도하며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를 주장해 온 일본 정부는 국제적 신뢰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여, 수출 규제가 “안전보장을 목적으로 수출 관리의 적절한 시행을 요구하는 조치”라며 강제동원 보복 논리를 부인하였고, WTO 무역 규범에 위배되지 않는 사안으로 포장하기 위해 한국기업에 대한 수출허가를 내어 주고 이 사실을 특별히 공개하는 고육책을 썼다. 이런 가운데 한국기업들은 제3국 조달이나 국내 생산 등으로 공급망 재편에 나서면서 피해를 적절히 관리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의 대응은 일본의 약점을 파고드는 기민함과 집요함을 보여주기에 역부족이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반일감정이 고취되면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강한 경제,” “일본으로부터 자립”을 추구하는 슬로건과 함께 일본 상품 보이콧 등 강렬한 반일 정책이 이어졌으나 국내적 단일대오 차원의 의미를 넘지 못했다.

더 큰 실책은 지소미아 종료 선언을 통해 일본의 수출 규제 철회와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철회란 두 쟁점을 연계하는 전략을 추진한 것이다. 한국은 지소미아란 안보 이슈로 미국의 개입을 유도하여 일본의 변화를 촉구하고자 하였으나, 미국은 대중 공동전선을 흔드는 사안으로 인식하여 한국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지소미아 종료 선언은 일본 안보의 급소를 찔렀다기보다는 오히려 한국 안보에 흠집을 내고 아베의 실책을 외교적으로 덮어 준 무리수였다.

돌이켜 보면 한일 양국은 악수(惡手)에 악수(惡手)로 대응하는 어리석은 공방을 펼쳤고, 한국 내 반일감정, 일본 내 혐한 감정을 고양하여 양 정부 간 불신을 위험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 본래 국가간 불신과 갈등의 소용돌이는 이익의 대립에 따른 안보 딜레마 상황에서 전개되는 데 비해, 한·일의 경우는 이익보다는 감정이 갈등의 소용돌이를 부채질하고 있다. 상호 감정 대립이 공유된 이익을 해치는 부정적 파급효과를 초래하고, 나아가 이익의 훼손이 다시 감정 대립을 악화시키는 악순환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수출규제와 지소미아 논란으로 가속화된 갈등의 소용돌이는 코로나 위기 국면에서도 멈출 줄 모르고 있다. 수출관리체제 향상을 위한 한국 측의 성의 있는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변변한 이유 없이 규제를 풀지 않는 데 대항하여 한국측은 일본에 대한 WTO 제소절차를 전격적으로 재개했고 지소미아 카드 재활용을 암시하고 있다. 출입국 갈등에 이어 해묵은 군함도 산업유산 유네스코 등재공방을 벌였고, 일본측이 한국의 G7 참여 반대 의사를 보이자 한국측은 “몰염치로는 세계최고수준”이라며 말폭탄을 쏟아 냈다. 불신과 감정이 빚어낸 외교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디커플링과 미국의 중개역할

이렇듯 감정 싸움의 악순환을 억제하는 요인은 두가지를 꼽을 수 있다. 경제적 상호의존과 제3국의 중재 역할이다. 지난 위안부 합의 교섭의 경우를 보면 박근혜 정부의 대일 강공 드라이브에 의해 한미일 협력이 약화되어 미국의 전략적 우려가 커지고, 경제거래 축소로 경제계의 피해와 비즈니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증가하면서 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졌다(손열 2018). 역사문제에 의한 갈등의 소용돌이 효과에는 하방경직성이 있다는 뜻이다.

경제적 상호의존은 국가간 갈등을 억제하는 안전판 역할을 한다. 미중 전략 경쟁이 본격적인 안보딜레마와 갈등의 소용돌이로 빠지지 않는 이유는 다층위에서 전개되는 복합 상호의존의 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일 경제관계이다. 감정적 요인으로 양국 간 경제적 상호의존 수준이 저하될수록 역으로 정치·전략적 갈등 수준이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일 간에는 일본의 반도체 품목 3종 수출 규제에서 보듯이 전략적 디커플링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 반도체 업체는 불화수소, 플루오린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의 국내 생산 혹은 제3국 조달 등 공급망 재편을 추구하고 있다. 경제 논리로는 순도 낮은 국산품을 사용할 이유가 없지만 정치적 불확실성을 고려하면 일본업체와의 디커플링은 불가피하다. 보다 장기적으로 <그림 1>과 <그림 2>를 보면, 2012년을 기점으로 한일 경제의 디커플링 현상이 현저하게 전개되고 있다. 2012년 대비 2019년 양국 간 교역량은 27% 감소했으며, 2020년 1-5월분은 전년도 대비 약 9.3% 급감하였다. 투자부문의 디커플링은 더욱 뚜렷하여 2012-2019년 일본의 대한 투자는 69% 대폭 감소했다. 거시적으로 미중 디커플링의 위험 속에서 한일 정책당국은 이에 대항하는 자유주의 연대에 나서야 할 판에 상호 디커플링을 부추기고 있다.

 

불신과 감정싸움을 경제효과로 막을 수 없다면 미국의 중재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존재, 미군의 주둔이 한일관계의 안정화에 기여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의 숨은 주역이고 한미일 삼각협력 틀 속에서 한일안보협력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역사문제에 개입하여 한일 감정싸움을 완화하는 역할에는 역부족이다.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미국 오바마 정부는 핵심적인 중개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결국 합의는 형해화되었고, 역사 개입의 어려움을 실감했다. 더욱이 국제협조주의가 쇠퇴하고 자국중심주의가 부상하는 오늘의 미국 국내 분위기를 감안하면 미국의 적극적 중재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한일관계 재건축을 위하여

현재 양국 정부와 정치지도층은 민족주의적 정열로 한일관계를 ‘나와 남,’ ‘아군과 적군’으로 날카롭게 나누어 감정 대립의 외교전쟁을 벌이고 있다. 위기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설령 미봉책으로 일본기업 자산 몰수와 현금화의 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해도,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적이 아닌 정당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권력 행사에 절제와 인내를 지키며 타협해 나가지 않는 한, 이에 근거하여 양자관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수반하지 않는 한, 강제동원과 수출규제 해법을 찾기 어렵다.

현재 양국의 정치 상황으로 보아 퇴행적 민족주의에 근거한 반일 및 혐한 감정이 정치권 내부의 자정(自淨) 노력으로 치유될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양국은 좀 더 싸워야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감정 대립과 미봉책이 교차하며 사회 전체적으로 좌절감이 무겁게 쌓여갈 때, 제2차 보복과 대항의 연쇄 속에서 서로 처절한 피해를 맛볼 때, 비로소 정치지도층의 자성과 개조가 나오지 않을까. 한일관계는 좌절과 시련, 재건축을 기다리고 있다. 

 

 

■ 저자: 손 열_EAI 원장·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장, 언더우드학부장, 현대일본학회장, 한국국제정치학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정치경제, 일본외교정책, 동아시아 국제관계 등이다. 최근 저서로는 《저출산 고령화의 외교안보와 정치경제》(2019, 공저), Japan and Asia's Contested Order (2018, with T.J. Pempel), 《한국의 중견국외교》 (2017, 공저), Understanding Public Diplomacy in East Asia (2016, with Jan Melissen) 등이 있다.

 

■담당 및 편집: 오승희 EAI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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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프로젝트

한일관계 재건축

세부사업

한일미래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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