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 2020년 6월 16일 북한이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이후 남북관계는 또다시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하영선 EAI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정부가 대북전단 살포 금지나 '한미실무그룹' 해체 등 표면적으로 대응하기 보다, 김일성 시대부터 시작한 3대 혁명역량강화의 틀 안에서 북한의 전략을 분석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북한은 이러한 빛바랜 설계도를 허물고 21세기에 걸맞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며 한국도 21세기 3대 역량강화 설계도를 마련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국내정치의 역량을 새롭게 강화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북한은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에 따라 개설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2020년 6월 16일 폭파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영상을 보면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 오른 것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두 달 만에 열렸던 김일성 수상의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 기자회견이었다. 한국이 조국통일 3대원칙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며 7.4 공동성명의 비극적 미래를 예고했다.

그 내용으로는 첫째, 한국은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지만 뒤에서는 양면전술을 쓰고 있으며, 공동성명에 지적된 합의 사항들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털어놓고 말하여 나라를 자주적으로 통일한다는 것은 미제가 남조선에서 나가도록 하며 그밖에 다른 나라 세력이 우리나라의 통일문제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라고 말했다. 둘째, 무력적 방법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조국통일을 실현하자는 원칙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향한 대화에 긴장상태가 여전히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은 내부적으로 평화공세를 통한 남북한 관계개선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셋째, 민족적 대단결에 합의한 이후에도 한국의 당국자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을 개편하지 않고, 인민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루마니아 차우셰스쿠(Ceaușescu)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김일성 수상은 남북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세력을 신속하게 키우고 남한사회를 민주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이 처음으로 합의했던 7.4 공동성명은 1년여 만에 폐기되었다.

김일성 수상의 반세기 전 기자회견 내용이 여전히 중요한 것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폭파를 결정한 김정은 위원장의 생각은 당시 할아버지의 시야를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 수상은 1960년대 중반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전쟁통일론을 현실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북한, 남한, 그리고 다른 나라의 3대 혁명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혁명통일론을 채택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혁명통일론을 기반으로 북한은 1970년대 초반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조국통일 3대원칙으로 그 내용을 구체화했다. 이후 북한의 행보는 1991년 12월의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선언, 2018년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선언 등에서 3대 혁명역량의 기본 시각과 언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폭파된 연락사무소의 미래를 위한 효율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이 대북전단 살포 금지나 한미실무그룹 해체와 같은 피상적인 대증요법 마련에 부심할 것이 아니라 우선 2019년 2월 말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실패 이후 북한의 언행을 3대 혁명역량강화라는 생존전략의 시각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에서 “현 단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공화국정부의 대내외정책에 대하여” 라는 제목으로 3대 혁명역량강화의 기본 틀에 맞추어 시정연설을 했다. 첫째,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원칙으로 하는 자주의 혁명 노선, 인민대중제일주의, 당의 영도를 강조한 다음 둘째, 북한의 혁명역량강화를 위한 자립경제 발전, 정치 군사력 강화, 사회주의 문화발전, 인민정권기관의 기능과 역할 강화를 지적하고 있다. 셋째, 남한의 혁명역량강화에 대해서는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 공동선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한국이 진실로 남북 관계개선과 평화와 통일을 바란다면, “남조선당국은 추세를 보아가며 좌고우면하고 분주 다사한 행각을 재촉하며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여야” 하고, “북남관계개선의 분위기를 계속 살려나가자면 적대적인 내외 반통일, 반평화 세력들의 준동을 짓부셔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넷째, 국제 혁명 역량의 강화에 대해서는, 2018년의 6.12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을 의미 있게 평가한 대신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는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이 새로운 북미관계를 위한 근본 방도인 적대시정책을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최대로 제재함으로써 북한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오판했기 때문에 회담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3차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하려면 미국이 현재와는 다른 새로운 계산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시정연설 이후 8개월 만인 12월말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전대미문의 준엄한 난국을 정면돌파하고 나라의 자주권과 최고 이익을 끝까지 수호하며 자력 부강의 기치 높이 주체혁명 위업 승리의 활로를 열어나가기 위한” 설계도를 다시 한번 제시했다. 먼저 당면한 정세 분석에서 “몇 개월 동안 우리 앞에 봉착한 도전은 남들 같으면 하루도 지탱하지 못하고 물러앉을 혹독하고 위험천만한 격난이였으나 그 어떤 곤난도 공고한 전일체를 이루고 굴함없이 나아가는 우리 인민의 돌진을 멈춰 세울 수도 지체시킬 수도 없었다.”고 하면서, 전원 회의의 기본정신은 정세가 좋아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정면돌파전을 벌여서 객관적 요인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북한은 자신의 최대 위협으로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이 제시했던 미국의 새로운 셈법의 연말 시한이 가시적 성과 없이 지나가게 되자,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의 장기화는 조선반도 정세를 더욱 위험하고 엄중한 단계에 이르게 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북한은 상대방을 억제할 수 있는 군사력을 계속 강화할 것이며, 적대적 행위와 핵 위협이 증대되고 있는 현실에서 현재의 제재 해제를 위해 미래의 안전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 멀지 않아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확언했다. 동시에 제재는 자력갱생으로 대결할 수 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자력 강화를 위한 국가 관리와 경제사업 분야에서 바로잡아야 할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2019년의 난국을 정면 돌파하려는 북한의 노력은 2020년에 들어서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지구적 전파와 함께 더욱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국내 역량과 국제 역량의 강화는 현실적으로 벽에 부딪쳤다. 게다가 지난 2년 동안 이룬 남북관계의 개선은 국내와 국제 역량 강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따라서 북한의 김여정 제1부부장은 6월 중순 두 차례에 걸쳐 대북전단살포와 ‘한미실무그룹’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두 가지 잘못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우선 첫 담화에서 “우리는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하다.” 라고 말하고, 둘째 담화에서는 “어쨌든 이제는 남조선 당국자들이 우리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나앉게 되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저지른 두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노선을 선택하지 않는 한 남북관계의 미래는 없다는 위협이다. 대북전단 살포의 근본문제는 북한의 국내혁명역량의 강화를 위해 신성시하는 최고존엄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한국의 정책 담당자에게 7.4 공동성명의 민족대단결 원칙에서 배신자와 신뢰자의 갈림길에서 양자 택일하라는 주장이다. 다음으로 현재 남북문제와 관련해서 한미공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한미실무그룹’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단순히 실무적인 것이 아니다. 민족자주와 동맹 사대의 갈림길에서 최종적으로 갈 길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6월 23일 대남 군사행동 보류 지시에도 불구하고, 김여정의 위협 담화는 북한의 진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국내외의 관심은 대북전단 살포와 한미실무그룹의 두 문제를 전술적으로 풀어보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북한의 재건축 기본 설계도는 여전히 반세기 전의 3대 혁명역량강화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7.4 공동성명 당시처럼 북한의 설계도에 원칙적으로 합의하면 단기적으로 재건축을 시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북한의 빛바랜 설계도로는 21세기 한반도를 세계의 선진 문명국으로 건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후진국으로서 역사의 뒤안길을 오랫동안 헤매게 될 것이다.

시급한 것은 한국형 21세기 3대 역량강화의 설계도이다. 이러한 설계에 따른 진정한 햇볕정책은 21세기에 맞는 미래의 북한을 포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이 스스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생태, 기술의 모든 영역에서 21세기에 맞는 재조직화의 길을 걷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이 21세기 선진 문명국으로 새롭게 태어나서 주변 관련 당사국과 함께 북한의 선진화를 도와야 한다. 이러한 한반도 재건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21세기에 걸맞는 비전을 가진 새로운 국내 정치 역량의 강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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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하영선_ EAI 이사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장, 미국학연구소장, 한국평화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 및 편저로는 《복합세계정치론: 전략과 원리 그리고 새로운 질서》, 《한일 신시대와 공생복합 네트워크》, 《변환의 세계정치》, 《미중의 아태질서 건축경쟁》, 《한국 외교사 바로보기: 전통과 근대》, 《사랑의 세계정치: 전쟁과 평화》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서주원 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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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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