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범식 교수는 러시아 국립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지난 2011년 8월 24일, 200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Vladimir Putin) 당시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회동한 이후 9년만에 러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이후 한반도정세 변화의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는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 러북 정상회담을 단지 김정일의 구걸 외교로만 보려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이는 러시아의 적극적 행보에 담겨진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양국 정상회담의 합의내용과 그 전략적 의미를 살펴보면 이 회담은 향후 한반도 주변 정세의 변화를 견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러북남 가스파이프라인 연결사업의 경우 그 성사 여부에 따라서는 동북아 지역정치의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향배는 11월 초로 예상되는 한러 정상회담에서 그 가닥이 잡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과연 다가오는 한러 정상회담을 준비하며 한국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의 변화 가능성을 어떻게 포착하고 활용할 수 있을까?

 

러북 정상회담과 러북 양자관계

 

러북 정상회담의 합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회담이 어떤 배경에서 추진되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러시아의 입장을 살펴보면, 이번 러북 정상회담은 “유럽-태평양국가”(Euro-Pacific State)로서의 정체성 강화를 위해 아시아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자국의 영향력 증진을 꾀하는 러시아의 전략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그간 이런 러시아의 노력은 경제력의 약화, 잘못된 외교적 지향성 설정, 러시아의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통로 상실, 북핵문제와 북미대결, 동북아에서 러시아의 기회주의적 외교 행태, 아시아에서 전략적 행위자로서의 입지를 재구축 하려는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견제 등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에 의하여 제한되어 왔다. 하지만 에너지자원을 통한 영향력 행사가 어느 정도 가능해진 러시아는 최근 들어 일정한 값을 치르고라도 한반도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 러시아는 북한의 수해와 관련하여 5만톤의 식량을 제공하고 다시 5만톤의 식량 지원을 검토하는 등 각종 지원의 물꼬를 트고 있으며, 다양한 협력 의제를 다시 활성화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동북아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핵심 통로로서 북한과의 관계를 전략적 협력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러시아는 1차 북핵위기시 4자회담 프로세스에서 배제된 외교적 패배를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며, 동북아 문제의 핵심이 되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영향력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소련 붕괴 이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러북 간 전략적 협력의 불씨를 되살리려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러북 경제협력위원회가 다시 가동되기 시작하였고, 러북 경협의 가장 커다란 관문인 채무문제에 대한 논의가 재개되고 있는 상황은 한반도 북핵위기가 해법을 찾아가던 것처럼 보였던 2006-2007년 러북 사이의 논의를 연상시킨다. 방코델타아시아(Banco Delta Asia: BDA)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이후 해빙기 한반도에서 철도연결 및 에너지협력 등을 통해 자국의 경제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던 러시아의 기회주의적 접근은 북핵 협상의 파행으로 무위가 되었다. 그런데 2007년 이후 중단된 경제협력위원회가 한반도 주변 정세가 긴장과 대립의 국면으로 치닫는 현 상황에서 다시 가동되고 채무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러시아가 일정한 비용을 지불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사실 100억불 전후로 알려진 북한의 대러 채무는 러시아에게 그리 큰 돈이 아니다. 다만 이를 해결해야만 러시아와 북한 사이의 본격적인 경제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는 문제는 러시아에게 전략적 선택의 의미를 가진다. 즉,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러시아가 북한과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신호가 되는 것이다. 이번 러북 정상회담으로 이런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같은 러시아의 움직임은 북한의 필요와 잘 부합된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은 금강산과 개성공단을 통해 확보해왔던 경화 수입의 감소를 경험하였고, 미국과의 대화도 난항을 겪어왔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으로 고조된 한반도 주변의 긴장상황에서 북한은 경제적으로나 안보적으로 중국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12년 강성대국 원년을 앞둔 상황에서 주체의 나라 북한에게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완화하는 것은 절실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북한의 러시아에 대한 접근을 북한이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을 완화하려는 “의존성의 균형”(balance of dependence)이란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언론에 노출된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 경로와 일정을 보면, 중국 경제개혁의 성과들을 찾아 다니며 북한 경제의 향후 개혁 지향성을 암시하거나 선전하려 했던 기존의 행태와 달리 북한이 현실적으로 필요로 하는 전력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레야(Bureya) 수력발전소와 스코보로디노(Skovorodino)의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East Siberia~Pacific Ocean Oil Pipeline: ESPO) 분기점을 들렀다는 점이 주목된다. 귀국 여정으로 택한 중국의 동북 3성 통과시 김 위원장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석유파이프라인이 연결되어 있는 다칭(Daqing) 유전지대를 들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에너지와 전력에 대한 북한의 갈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메드베데프(Dmitry Medvedev) 러시아 대통령이 발표한 러북 간의 합의 내용과 이후 성과들에 대한 언론보도를 분석해 보면 이처럼 양국의 필요가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상당한 타당성을 가진다. 러시아가 세계 언론을 통해 부각시키려 했던 것은 북한과의 관계강화가 아니었다. 김정일이 북한을 관통해서 한국으로 향하는 가스관 건설에 동의했음을 맨 앞에 내세웠다. 가스관 건설을 위한 ‘러북남 3국 특별위원회 발족 합의’도 발표했다. 이처럼 러시아가 러북남 가스관연결 사업에 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러시아의 천연가스 시장 개척을 위한 필요 때문이다. 러시아가 천연가스 판매에 거는 기대는 매우 크다. 중국이 파이프라인을 연결하여 중앙아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수입하게 되고, 미국이 국내 혈암(shale) 가스 개발로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게 되면서 러시아는 새로운 천연가스 시장으로 일본과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라는 자원이 가지는 ‘전략적 재화’(strategic commodity)로서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러시아가 천연가스 판매를 통한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에너지 외교정책은 경제적 논리 이외에 외교안보적 논리가 함께 고려되어 결정된다. 러시아가 유럽에 대하여 가지는 가스 수출국으로서의 지위는 유럽의 에너지안보와 관련하여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를 공급하며 유럽 구석구석까지 촘촘하게 뻗어있는 파이프라인망이야말로 유럽에 대한 러시아 영향력의 핵심적 통로이다. 최근 러시아가 아시아에 대한 에너지공급 파이프라인 구축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시아를 향해 뻗어오는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ESPO)’의 건설과 ‘동부가스프로그램’(Eastern Gas Program)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러시아의 중요한 영향력 통로가 될 것이다. 러시아는 자국 내 중요 에너지운송 기간망을 아시아 방면으로 구축하는 한편 이 기간망과 이웃국가들을 연결하려는 파이프라인 연결 노력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이미 2009년에 스코보로디노(Skovorodino)까지 연결된 ESPO 라인으로부터 중국의 다칭(Daqing)에 이르는 송유관을 연결하여 러시아산 석유를 중국에 공급하게 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가 에너지동맹을 체결했다는 주목을 끌기도 했다.

 

이제 러시아는 한반도에 대한 가스파이프라인의 연결을 통하여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의 통로를 굳건히 하려는 본격적 행보를 시작하였다. 가스관 연결을 통하여 강화된 영향력을 바탕으로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감당하고 동북아 지역정치에서 러시아의 위상을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러시아가 비용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러시아의 또 다른 이익이 있다. 이 가스관 연결사업은 향후 전력망(electric power grid) 연결사업, 철도 연결사업 등과 같이 러시아가 아시아와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다른 프로젝트들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이러한 프로젝트들의 추진은 다시 러시아의 극동 및 시베리아 지방을 개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인적•물적 자원을 확충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10월 13일 이미 러시아 하산에서 북한 나진에 이르는 철도의 개보수 작업을 자국 비용을 들여 마무리하고 시험열차의 가동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가졌다. 만약 여기에 더하여 남북철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연 20피트 컨테이너 20만량의 수송이 가능해 진다. 이런 과정은 러시아의 극동 및 동시베리아 지방을 동북아 경제권과 자연스럽게 통합시키면서 국내적으로는 국토 불균형발전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러시아의 아태국가로서의 면모를 일신함으로써 “유럽-태평양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여 명실상부한 글로벌파워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북한으로서도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 고리를 회복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이번 러북 접촉과정에서 북한은 러시아에 신형 전투기와 같은 군사무기의 제공을 요청하고 군사협력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물론 러시아의 입장에서 동북아 전략균형에 변화를 주고 군비경쟁을 부추길 수 있는 전략무기를 북한에 제공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시 북한의 군사대표단이 양국 간 군사협력에 관한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보이고, 언론보도를 통해 양국이 조만간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군사 분야에서 러북 양국의 협력은 무엇보다 북한의 안보불안을 완화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나진항 부두 임대 이후 중국 군함이 나진항에 출몰하게 되면서 고조되는 지역 내 중국세력의 확장을 견제한다는 측면에서 북한의 균형외교에 화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러북 정상회담은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의 분산 및 실질협력을 통한 경제적 지원의 확보가 필요한 북한과 아시아정책의 적극화를 위해 잃어버린 영향력의 통로인 러북관계를 실질적으로 복원하고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러시아의 정책이 함께 만난 지점이었다.

 

러시아의 역할 확대와 한반도 문제

 

러북 사이에 전략적 협력이 회복되면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시각이 상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러북 간 전략적 협력의 회복은 한반도를 둘러싼 대립적 정세를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북한의 균형외교 전략이 러시아를 통해 중국뿐만 아니라 북핵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해 사전조치를 요구하는 한국, 미국,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북한이 균형외교 전략을 취하고 러시아가 극동개발과 동북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면 6자회담 재개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회담의 결과를 보면 러시아는 그동안 한미일 대 북중의 외교적 대치구도 속에서 지속해 온 ‘중간자’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하여 그간 북중과 보조를 맞춰 “조건없는 6자회담 조기 재개”를 주장하면서도 한미일의 입장을 두둔하며 북한을 향해 “비핵화 사전조치”를 촉구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여왔다. 러북 회담의 결과를 보아도 이와 같은 절충을 시도하려 했던 러시아의 노력이 엿보인다. 크레믈린(Kremlin) 대변인은 “북한은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6자회담에 복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밝혔다”면서 “그러면 6자회담 과정에서 북한이 핵물질 생산 및 핵실험을 잠정 중단(모라토리엄)할 준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표면적으로는 러시아가 그간 북한이 중국과 함께 주장해 온 조건 없는 6자회담의 재개를 지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북한이 핵 물질 실험을 잠정 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힌 것 자체가, 물론 회담이 열린 뒤라고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도록 유도한 러시아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이는 러시아가 한편으로는 ‘조속한 대화 재개’와 ‘대화를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 원칙’을 강조하면서 중국과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동시에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절충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러시아와 북한의 전략적 협력 강화가 한반도 주변 정세의 대립적 성격을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큰 타당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비슷하지만 또 다른 시각은 그간 전략적 모호성 내지 기회주의적 등거리 외교를 견지하던 러시아가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면서 북한과 중국 진영에 가세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북중러로 이어지는 신북방 삼각 대 한미일로 연결되는 신남방 삼각 사이의 대립구도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남방삼각 대 북방삼각의 대립구도에 대한 전망은 그 타당성이 더욱 낮아 보인다. 이번 러북 정상회담으로 가장 큰 불편함을 느꼈을 나라는 중국이다. 이는 중국이 북한의 나진항을 장기 임대하였을 때 러시아가 느낀 불편함 이상일 것이다. 동해로부터 오호츠크해 사이는 북한, 러시아, 그리고 일본 선박이 주로 다니는 해로이다. 이곳은 중국 선박이 지나갈 이유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중국은 동북3성의 배후 항만으로서 나진항을 장기 임대하였으며, 이는 북한 유사시 러시아가 남진하는 것을 견제하는 중국의 근거지로 사용될 수 있다. 지난 봄 중국 군함의 나진항 입항은 자국 상선과 항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앞바다와 동해를 거쳐 러시아-북한의 국경까지 중국 군함이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나진항의 자국 재산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해군이 남한 전체를 봉쇄하고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할 수 있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는 이번 러북 정상회담에서 논의한 러북남 가스관 사업을 통해, 중국이 획득한 해상에서의 지정학적 우위를 육상에서의 봉쇄로 견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러시아와 중국의 전략적 협력이 와해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러시아와 중국의 전략적 협력관계는 지구적 수준과 유라시아 지역적 수준에서의 전략적 소통과 조율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동북아에서도 상당 정도의 협력 수준이 유지될 것이다. 다만 그간 심각한 영향력의 후퇴를 경험해 온 러시아가 급격하지는 않지만 점진적인 속도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회복을 통하여 새로운 세력 균형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려는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은 동북아 정세와 관련하여 중국에 편승하던 기존의 정책으로부터 벗어나 좀 더 균형적인 입지를 모색하는 북한에게도 하나의 지향점을 마련하게 해 줄 것으로 보인다.

 

셋째, 러북 경제협력이 진전을 이룬다면 한반도 정세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러북남 가스관 연결은 3국 모두에 이익이 되는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번 회담이 3국 간 협력을 구축하는 한 계기가 될 수 있으며, 이 삼각 협력의 발전은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외교구도를 변화시킴으로써 한반도 정세를 안정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이 과도한 “대중국 쏠림현상”을 조정하면서 북중 및 북러관계의 균형점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향후 북러 간 전략 협력의 성과에 따라서는 한반도 정세의 전개 과정에서 중국이 구축하고자 했던 주도적 영향력 발휘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간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6자회담 및 동북아 안보구도에 러시아가 변수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적극적 역할의 강화를 통하여 동북아에서 이런 변화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동북아 세력망 구도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바로 북한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구조적 공백”(structural hole)이다. 북미, 북일, 그리고 남북관계는 동북아의 세력망 구도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구조적 공백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구조적 공백 이외에 우리가 그간 주목하지 못했던 관계가 바로 러북 관계와 미러 관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북핵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미중을 중심축으로 구축된 6자회담 구조가 간과하고 있었던 이 구조적 공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러시아와 북한 사이의 전략적 협력이 온전한 수준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러시아는 지난 1990년대 북한과의 전략적 협력을 단절하면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물론 한반도와 동북아 전역에서 그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제 채무문제 해결과 전략적 성격을 지닌 가스관 건설, 철도 연결, 전력망 연결과 같은 프로젝트를 통하여 러시아는 북한과의 전략적 협력의 링크(link)를 확실하게 회복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러북남 가스관 연결사업은 네트워크이론(Social Network Theory)의 시각에서 더욱 흥미로운 추론을 제시해 준다. 기존의 안보 및 동맹연구는 에너지운송망의 연결이 양국 간 전략적 협력을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작동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를 고려해 볼 때, 러시아가 가스관 연결을 통해 북한에 대한 긴밀한 전략적 협력을 수행할 수 있는 영향력의 통로를 확보하게 되면 러북 간에는 전략적 협력의 링크가 구축될 수 있다. 이는 그간 동북아 국가들 간의 힘의 상관관계가 구성하는 네트워크상에서 ‘구조적 공백’을 메우는 새로운 링크가 구축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 결과 전략적 협력과 경쟁의 관계로 구성되는 동북아 “지정학적 세력망”(network of geopolitical powers)의 구조에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러시아와 북한 사이에 형성되는 새로운 전략적 협력의 링크가 중국과 북한 사이의 기존 전략적 협력 링크와 차별화되면서 다른 지향성을 추구할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을 것인가가 한국에게는 중요하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러북 간 새롭게 구축된 전략협력의 링크는 중국과 러시아 간 이해득실에 약간의 변동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기존 역내 정치구도를 크게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하지만 러북 전략협력의 링크로 동북아 세력망 구도의 구조적 공백의 일부를 메우면서 러시아가 한국이나 미국 등과도 협력하는 전략을 추구하게 될 경우, 이 링크는 동북아 지역질서의 변동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으며, 나아가 동북아의 지역 협력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도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신호는 러시아가 이 사업의 주요한 파트너로서 한국의 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이 러북남 에너지운송 네트워크 구축사업을 한국의 에너지안보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고려하고 대러정책을 면밀하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러시아 정부도 어떤 협력 지향이 동북아에서 러시아의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이익을 보장하게 될 것인가를 면밀히 따져보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과 러시아 양국은 이 문제를 전략 협력의 과제로 인식하고 양국 간의 진솔한 전략적 소통을 진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동북아 지역 차원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협력이 구축되어야 한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는 지난 냉전시기 소련이 향유하던 초강대국의 지위를 분명히 상실하였지만, 다층적 체제전환의 어려운 과제를 관리하면서 2000년대 이후 세계무대에서 군사, 에너지, 그리고 지정학적 강대국으로서의 위상과 유라시아 지역정치의 중심축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러시아가 왜 동북아 지역정치의 수준에서는 충분한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이미 지적한 러북 전략 협력이 깨지면서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의 통로를 상실한 점 이외에도 미국의 동북아 정책이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 전략적 행위자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하도록 견제해 왔기 때문이다. 탈냉전기 미국과 러시아는 지구적 수준에서의 협력을 논하면서도 동북아 지역 수준에서의 전략적 협력의 링크를 구축하지 못하였다. 지난 20년 간 미국은 동북아에서 러시아를 다룰 전략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국가이익을 방치하여 왔다. 그동안 미국은 동북아에서 한시적인 북미 링크를 가동하여 1차 북핵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 집중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중국을 끌어 들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역시 교착상태에 빠져있다. 미국은 동북아 지역 수준에서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관계를 구축하여 좀 더 총체적이며 네트워크적인 접근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러북, 러미 사이의 전략적 상호작용을 불능화시킨 탈링크(delink)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구조적 공백은 아직까지 동북아에서 협력적 질서의 출현을 저해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러북남 가스관연결 사업으로 표출되고 있는 러북남 삼각협력 사업을 우회적으로 지원하면서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 링크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정부는 러시아와 미국 그리고 한국이 참여하는 3자대화의 틀을 제안하고 활성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추진해 봄직하다.

 

한러 전략협력을 위한 한러 정상회담의 과제

 

올 연말 어느 시점으로 예상되고 있는 한러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이러한 한반도 주변정세 변화의 가능성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2008년 한러 간 맺어진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현실화하기 위해 러북남 가스관연결 등과 관련된 삼각협력 프로젝트에 임하는 한국의 대응은 어떤 전략적 지향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한국 정부는 크게 세 수준에서 접근 가능한 안들을 치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첫째, 제한적 개입정책 안이다. 이는 한국이 이번 가스관 사업을 확대 해석하지 말고 제한적 의미로 북한에게 활로를 열어주어 북한 경제의 연착륙과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것을 정책적 목표로 지향하는, 즉 제한된 목표를 추구하는 대안이다. 둘째는 포괄적 개입정책 안이다. 러시아 극동지방의 동북아 편입을 한러 전략적 협력의 목표로 추구하면서 자연스럽게 북한의 개입을 유도하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서는 러시아의 극동지방과 북한접경 등을 아우르는 소지역(sub-regional) 협력의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정책 목표의 초점이 북한에 맞추어져서는 안 되며, 러시아가 명실상부한 아시아 국가의 일원으로 자리잡도록 협력하는데 맞추어야 한다. 다만 이를 실현하는 프로젝트가 북한을 흡인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동력을 가진 것이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지역형성(region formation) 정책을 통하여 동북아 지역정치 구도의 변화를 추구하는 안이다. 중견국(middle power)인 한국이 러시아와의 전략 협력을 통하여 준균형자연대(semi-balancing alliance)를 형성하고 미중 간의 경쟁을 완화하면서 동북아 지역정치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미중 간의 경쟁구도가 지배하는 동북아시아 지역정치를 보다 안정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한국은 이 세 가지 전략적 지향을 모두 염두에 둔 복합적인 전략을 잘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외전략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지역정치구도와 관련된 전략은 특정 정권의 외교가 아니라 초당적 외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외전략의 배경과 추진체계 등을 공고히 다지면서 동시에 차기 정권에서도 지속될 수 있는 액션플랜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가오는 한러 정상회담을 준비함에 있어서 실무그룹 차원에서의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3자협의를 서둘러 추진하기 보다는 러시아와의 양자 간 전략적 소통과 조율에 힘써야 한다. 더불어 주변국들과의 협의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한미러, 한러중, 한일러 등과 같은 다양한 3자 간 대화를 통해 이 프로젝트가 동북아에 미칠 영향과 다층적 협력의 목표들을 면밀하게 협의하여 중장기적 협력방안을 마련하는 수순을 차분히 밟을 필요가 있다. 그 연후에 러시아와 좀 더 확고한 목표와 실천전략을 합의하는 수순으로 가고, 그 뒤 3자협의 체제를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이 프로젝트를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APEC) 정상회담에서 지역적 협력의제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도 있다.

 

냉전 이후 동북아에서 러시아는 북핵문제나 동북아안보평화체제를 이야기할 때 안보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중국과 미국이 나서서 해결하면 경제적 문제와 관련하여 개입해 들어오려는 기회주의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값을 치르고서라도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를 동북아시아에서 일정한 지분을 지닌 전략적 행위자로 포지셔닝(positioning)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새로운 구도 속에서 미중 관계를 재조명하고, 북한이 지역정치 과정에 자연스럽게 개입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러북남 가스관 사업은 단순한 에너지문제로 파악되어서는 안 되며, 좀 더 포괄적인 지역정치의 문제와의 연관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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