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EAI는 2020년을 맞이하여 신년기획 특별논평 “EAI 2020 전망과 전략” 시리즈 총 6편을 아래와 같이 게재합니다.

1. 하영선: 북한의 2020년: 2대 난관의 정면돌파전  (2020년 1월 6일 발간)

2. 전재성: 2020년 한국의 미중관계 전략과 대미전략 (2020년 1월 8일 발간)

3. 이동률: 한중관계와 한국의 대중 외교전략 (2020년 1월 13일 발간)

4. 손  열: 2020년 한일관계와 대일정책: 시야를 넓혀야 보이는 갈등 해법 (2020년 1월 15일 발간)

5. 이승주: 미중 무역분쟁과 통상정책: 다자주의의 회복과 지역 경제 질서의 재편을 위한 중견국 외교 (2020년 1월 20일 발간 예정)

6. 최태욱: 2019년의 선거제도 개혁과 2020년의 총선: 전망과 과제 (2020년 1월 22일 발간 예정)

 

신년기획 특별논평 "EAI 2020 전망과 전략" 시리즈의 네 번째 보고서로, 2020년의 한일관계 전망과 대일정책에 대한 전략을 제시한 손열 EAI 원장(연세대학교 교수)의 논평이 발간되었습니다. 2019년 한국 외교가 겪은 최대의 사고는 한일갈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 갈등으로 시작하여 경제보복, 그리고 지소미아(GSOMIA) 종료 선언이라는 안보 갈등으로 이어진 한일갈등은 간신히 열린 양자 정상회담으로 소강상태에 이르렀지만, 관계 개선의 여지는 협소해 보이며 언제든 위기에 놓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저자는 작년의 외교 참사가 일본의 내부사정을 경시하고, 한일관계를 규정하는 구조적 변수인 미중관계를 간과하며, 과거사에 매몰되어 전략적 협력의 기회를 놓친 것에 기인한다고 지적합니다. 나아가 저자는 교착상태에 놓인 한일갈등의 해법을 제시하면서 한국 외교가 과거의 우(愚)로부터 교훈을 얻어 보다 시야를 넓히고, 대일전략의 기본원칙을 세워 협력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I. 들어가며

2019년 한국 외교가 겪은 최대 사고는 한일갈등이다. 크고 작은 파열음이 이어지다 7월 1일 아베 총리의 수출규제 선언으로 굉음을 내고 폭발한 한일관계는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이란 역사갈등을 거쳐 경제갈등과 지소미아(GSOMIA) 종료 선언이란 안보갈등으로 이어진 외교 참사라 할 수 있다. 양국이 상황을 오판하지 않았다면 외교로 막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12월 24일 한중일 정상회담 자리를 빌어 간신히 양자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사고 수습 차원을 넘어 관계 개선으로 이어지기는 지난한 형국이다.

일견 소강상태에 있는 한일관계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2019년 대법원 판결에 따른 집행 절차에 따라 강제매각을 통한 현금화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를 막지 못하면 일본의 보복 조치와 함께 양국관계는 다시 위기를 맞을 것이다.

2020년대를 여는 새해, 세상은 강대국 전략경쟁으로 점점 험악해지고 한국과 같은 중견국의 입지는 줄어들고 있다. 일본과 잘잘못을 따지고 서로를 탓하며 얼굴 붉히다 시대의 대세를 놓치지 않으려면 우선 작년 대일외교로부터 교훈을 찾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첫째로 일본의 내부사정을 경시한 점, 둘째로 양자관계를 규정하는 구조적 변수로서 미중관계의 동학(dynamic)을 간과한 점, 끝으로 과거사 프레임에 매몰되어 전략적 협력의 기회를 놓친 점을 꼽을 수 있다. 요컨대,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안에서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전인수격 대응을 하지는 않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시야를 넓혀야 한일협력이 보인다.

 

II. 2019년 한일갈등의 교훈

2019년 한일관계는 출발부터 험난했다. 2018년 10월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의 해체가 결정된 데 이어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이 나면서 아베 정부는 한국에 보복하겠다는 생각으로 거칠게 압박했다. 먼저 일본은 대법원 판결이 “폭거이자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라 규정하며 공세를 펼쳤고, 12월 동해상 초계기 레이더 조사(照射)를 놓고 날 선 진실 공방을 벌였다. 다음으로 2019년 1월에 들어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제3조 제1항에 근거하여 외교적 협의를 요청하였고, 5월 같은 협정 제3조 제2항에 근거하여 중재위원회를 요구한 뒤, 7월 1일 전격적으로 수출규제를 발표하여 보복의 칼을 뽑았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이런 상황을 오판한 측면이 있었다는 데 있다. 한일관계 전문가들은 위안부 합의 문제보다 강제동원 재판 결과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을 지속해서 강조해 왔다. 또한 일본 내 한국에 대한 분위기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점, 따라서 한국에 대한 정부의 강경책이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된 바 있다(손열, 3.1운동 100주년의 길목에서).

반면, 한국 정부는 남북한 화해협력과 북한 비핵화를 외교안보정책의 최중요 사안으로 설정하였고, 북한에 대한 제재 일변도의 아베 정부와 입장 차이가 선명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고려가 낮았다. 이런 가운데 한국 정부는 삼권분립을 핵심가치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로서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견지하며 이렇다 할 대응책을 내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양국 최고 재판소의 판결이 상이한 상황에서 자국 재판소의 판결에만 절대적 가치를 부여할 때 상대국의 이해를 얻기는 어려웠으므로 일본의 공세는 예정된 수순이라 하겠다. 일본의 외교 공세에 대응하여 정부는 6월 22일 청구권 협정 수혜 한국 기업과 강제노동에 동원한 일본 기업들의 기금 형성을 통한 해결안(이른바 “1+1”안)을 제시하였으나, 이미 아베는 보복 조치를 결심하고 있었다.

두 번째 상황 오판은 국제정세와 관련된다. 예기치 못한 아베의 강경책에 문재인 정부도 예상을 넘는 수위의 맞대응으로 나왔다. 수출규제를 경제침략으로 규정하여 당·정이 함께 규탄에 나서는 한편, 8월 22일 지소미아(GSOMIA) 종료 선언이란 초강수를 두었다. 이는 보복 차원에서 대화에 응하지 않는 일본의 자세 변화를 촉구하는 충격요법이었다.

문제는 한일관계를 주로 양자관계로 인식한 데 있다. 구조적으로 한일관계는 미중관계란 상위 변수에 영향을 받는다. 미중 전략경쟁이 고조되면서 미국은 중국의 세력권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태평양과 인도양 네트워크의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전면에 내걸고 있다. 여기서 지소미아는 단순히 한일 간 정보 공유 시스템이 아니라 인태 전략의 주요 구성요소인 한미일 네트워크의 핵심 부속품이다. 한국은 지소미아란 한일 안보 이슈로 미국의 개입을 유도하여 일본의 변화를 촉구하려는 의도를 가졌으나, 미국은 대중 공동전선을 흔드는 사안으로 인식하여 한국 정부의 조치가 중국과 북한에 이익이 된다며 오히려 한국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일본의 반응 역시 한국의 강력한 압박의 결과라기보다는 미중 경쟁의 동학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일본이 취한 수출규제가 실질적인 금수(禁輸)로 연결될 것이라는 7월 당시의 우려와 달리 한국경제에 실질적 악영향을 그다지 크게 미치지 않은 까닭은 한국의 저항과 대응조치 때문이 아니라 경제보복이 지니고 있는 모순이었다. 아베 정부는 문재인 정부에 징용 판결에 따른 국제법 질서 위반 상태를 해소하라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징용과 같은 정치 이슈에 대한 보복으로 수출규제를 가해 정경분리 국제규범을 훼손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였다. 더욱이 정경분리 규범은 그동안 일본이 센카쿠 문제에 따른 중국의 경제보복을 비판하며 내세워 온 논리이다.

일본은 자유주의 이념과 원칙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수호하고 진전시키는 데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왔다. 일본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구상(FOIP),”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을 주도해 온 것은 미중 양 강대국의 군사력 세력균형에 기반한 질서 혹은 이들에 의한 강권정치를 회피하려는 전략의 산물이다. 이런 차원에서 일본 정부는 수출규제가 WTO 무역규범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실제로 한국기업에 대해 수출허가를 해 주었고 이 사실을 특별히 공개하기도 하였다.

한국 역시 정경분리 규범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경제 사안에 대해 안보 사안인 지소미아를 걸어 경제보복과 안보보복을 거래하는 방식을 취했다. 통상협상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쟁점연계(issue linkage) 전략일 수 있으나, 지소미아라는 안보 카드를 사용함으로써 자유주의 국제규범의 정신과 배치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III. 2020년 대일전략의 기본원칙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미중 전략경쟁의 동학 속에서 변화하는 국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강경 대응을 주고받는 우(愚)를 범했고 결국 한발씩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2020년 대일정책의 기본원칙은 이러한 오류를 교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첫 번째 원칙은 한일관계를 역사적으로 특수한 양자관계가 아니라 미중관계란 구조적 조건하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미중 전략경쟁은 자국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국제규범을 훼손하거나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행동을 가져오는 동시에 지역 아키텍처 경쟁으로 주변국의 입지를 축소하는 사태를 가져오고 있다. 이는 역으로 주변국들 간의 이익의 수렴과 집합행동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10여 년 전 중국의 부상에 따른 지역질서의 변화 속에서 한일 양국은 중국을 보는 시각이나 국익 정의에서 상당한 편차를 보였던 것에 비하여 현재 미중 경쟁 구도 속 양국의 상호 이익은 상당히 수렴되고 있다.

양국은 대외의존적 체제의 속성으로 강대국의 일방주의적 횡포, 무력에 의한 자의적 강권정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규칙기반 질서를 지탱하는 데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 비록 규칙과 규범 역시 강대국 주도로 제정되는 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이지만, 정의된 규칙과 규범의 네트워크 속에서 주고받기식 국제정치가 이루어진다면 중견국의 행동반경은 확대되고 강대국 정치의 비극을 피할 여지가 생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대일전략의 중점은 자유주의 이념과 원리에 기초하고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지지하는 양자적, 다자적 노력을 경주하는 데 두어야 한다. 일본은 이러한 점에서 주요한 파트너이다.

한일 양국은 한반도 문제를 넘어 CPTPP와 RCEP 등 자유무역 질서의 확산, WTO 강화 등에서 협력의 여지를 갖고 있다. 더욱이 작년 11월 한국과 미국이 인태 협력을 위해 마련한 “공동선언”과 “공동설명서(Joint Fact Sheet)”에서 중점 사업으로 열거한 에너지, 인프라, 개발금융, 디지털 연계성 등의 사안에 대한 협력은 예외 없이 일본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협력의 여지가 있는 분야는 그간 역사문제의 그늘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해 온 바 있다. 2020년 한일 전략 협력은 이러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시작되어 한미일 삼각협력의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러한 실질적 협력은 상대방에 대한 전략적 위상 제고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아베 정부는 장기집권을 바탕으로 전략적 외교정책을 추구해 왔으며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위상을 확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을 건너뛰고(Korea passing) 역내 국가들의 협력을 결집할 만큼 역량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한국 역시 한일관계가 지니는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일정책을 강제동원 문제, 지소미아 문제, 수출규제 문제 등, 당면한 현안을 해결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한국 외교의 전략적 공간을 넓히고 장기 국익 추진의 수단으로 설정하여야 한다.

두 번째 원칙은 동아시아 국제경제질서의 중심 규범인 정경분리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두 강대국에 의한 “무역의 무기화(weaponization of trade)”에 의해 경제와 안보 사이의 “부정적 파급효과”가 빈번히 나타나는 현실에서 한국과 일본이 정치, 안보와 경제 이슈를 연계하여 갈등국면을 이어가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제살깎기 경쟁이다. 한국은 강제동원 판결 처리와 수출규제, 지소미아를 분리하여 세 트랙(three-track)으로 대응해 가야 한다.

수출규제 문제에 대해 한국 측은 징용문제에 대한 보복이므로 되돌려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일본이 여기에 동조해 올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전략물자관리제도 운용상의 문제라는 일본 경제산업성의 프레임을 받아 WTO 레짐 속에서 시장의 변화를 반영하며 자연스레 협의의 진전을 기할 수 있다. 지소미아 종료 유예 조치에 관해서는 수출규제 진전과의 연계 전략을 접고 안보상 심각한 변화가 없는 한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 원칙은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다. 지난 위안부 합의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역사문제는 이해당사자와 국민의 이해 및 동의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한 정부 간 합의로 해소되지 않는다. 1월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분명히 밝혔듯이 강제동원 해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피해자의 동의를 받는 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건은 어렵다. 이번 한일갈등이 초래한 최악의 결과는 정부뿐 아니라 민간 수준에서 양국 간 신뢰가 위기 상태에 빠진 일이다. 일본을 불신하고 경원하는 현상이 만연한 가운데 한국 정부가 피해자, 강제동원 지원단체 등과 합의하여 일본과 외교적 협의가 가능한 안을 도출하기는 어렵다. 역으로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해법을 내어놓을 가능성도 낮다. 이런 난관은 오직 대통령이 결기를 갖고 피해자 집단과 국민에게 설득의 리더십으로 나설 때 돌파할 수 있다. 2020년은 문재인 정부 5년 대일정책의 성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

 

 

저자: 손 열_ EAI 원장·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장, 언더우드학부장, 현대일본학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정치경제, 일본외교정책, 동아시아 국제관계 등이다. 최근 저서로는 Japan and Asia's Contested Order (2018, with T.J. Pempel), 한국의 중견국외교 (2017, 김상배, 이승주 공편), Understanding Public Diplomacy in East Asia (2016, with Jan Melissen)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윤준일 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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