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서 본 EAI  [뉴시스] “한·일 新시대 개막, 두 정상 물러날 2018년 이후 가능”

언론에서 본 EAI  [环球网] 韩专家:朴槿惠和安倍离任后两国关系或应进新时代

 


 

저자

손열_EAI 일본연구센터 소장, 연세대학교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도쿄대학교, 와세다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채플힐(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방문교수를 거쳤다. 주 연구 분야는 일본 및 국제정치경제, 동아시아 지역주의, 글로벌 거버넌스 등이다.

 

 


 

복고적 신년사

 

“전후 70년”을 맞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신년 소감은 상당히 복고적이다. 그는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혹독한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금메달을 쟁취한 여자배구팀 다이마쯔 감독이 즐겨 쓴 “하면 된다”라는 구호를 상기하면서 “개혁단행의 일년”의 각오를 피력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여자배구팀의 헌신이 올림픽 개최의 성공을 가져다 주고 일본을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시켰던 영광의 과거를 본받자는 것이다.

 

이른바 문건 파동의 충격파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국제시장”의 파독 광부와 베트남 외화벌이, 국기에 대한 경례로 상징되는 조국근대화를 추억하고 있다. 애국심으로 4대개혁과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통해 대한민국의 재도약을 다짐하는 복고적 분위기의 신년사를 내어놓았다.

 

두 정상의 미래는 50년 전 과거로 회귀하고 있고 그 시절 주역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박정희를 만나고 있다. 아베 총리는 공공연히 자신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의 아들이지만 외조부(外祖父)인 기시의 DNA를 이어 받았다고 발언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부친으로부터 정치를 배웠고 그의 정치적 복권을 위해 정치를 한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러나 기시와 박정희의 국력신장의 셈법은 19세기식 부국강병(富國强兵)론이어서 이들을 정치적 롤모델로 충실히 좇을 경우 1965년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성취한 한일국교정상화란 감옥에 갇혀 한 발짝도 나가기 어렵다. 한일 양국은 국교정상화 이래 최악의 상태인 양국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경주해왔고, 50주년인 올해 더 큰 각오로 나서겠지만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기시 노부스케의 유산

 

기시는 쇼와(昭和)의 요괴(妖怪)라 불릴 만큼 1945년 이전에는 명석한 경제관료로서 일본의 산업정책을 주도하고 만주국을 경략한 장본인이었고, 패전과 동시에 A급 전범으로 수인(囚人)의 신세였으나 냉전의 수혜로 복권되었고, 불사조처럼 총리직에 올라 고도성장으로 일본의 부흥을 이끈 정치가였다. 그는 만주국에서 전략적 계획경제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여 국방력을 확충하고 다시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는 이른바 부국강병의 전형을 보여주었고, 패전 후에는 평화헌법과 냉전의 압력이란 한계 속에서 미국에 안보를 위임하고 경제성장에 진력하는 국가전략을 펼쳤다. 그가 국민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밀어 붙인 이유는 부국의 조건으로서 미일동맹에 대한 필요가 컸던 데 있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일본의 진정한 독립, 즉 부국과 함께 헌법개정으로 강병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 기시는 조약개정으로 군사동맹을 공고히 하고 동맹을 위해 자유롭게 무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 제9조를 개정한다는 명분으로 개헌공작을 펼쳤으나 속내는 자주헌법을 갖고 자주국방을 이루어야 독립이 완성된다는 신념이었다. 이런 점에서 기시에게 재무장과 군사대국화는 도덕적 이슈라 할 수 있다.

 

그는 전후 일본의 사명은 지난 전쟁의 의도와 행동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민족적 조화와 왕도정치의 실험장으로서 만주국이 진정한 근대국가인 동시에 아시아의 희망이었음을 전세계에 널리 이해시키는 일이라는 우익적 주장을 피력하곤 했다. 패전 후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두 차례 동남아를 역방하면서 아시아개발기금을 설치하여 원조를 제공하고 한국과 수교를 위한 본격 접촉에 나선 이유는 과거 대동아공영권 건설처럼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미국을 대신하여 아시아 반공연대를 구축하려는 시도이었다. 요컨대 기시는 보통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독립을 성취하는 중간단계로 경제성장 우선, 미일동맹 강화, 아시아 외교의 복원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아베 신조는 조부로부터 강한 일본을 향한 민족주의적 열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2012년 총선거에서 대승하여 정권을 탈환한 그 주말 기시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진정한 독립”이라는 선대의 사명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는 “보통국가” 상태를 의미하며 “보통”이란 군사적인 동시에 특별히 사과할 것이 없음을 지칭하는 것이어서, 과거에 대한 진실된 사과를 보통국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는 한국과 중국의 입장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아베에게 국력의 한 축은 국가에 대한 자긍심(애국심)이고 자긍심의 기초는 과거의 축복에 있다.

 

아베의 기회

 

아베는 2006년 집권 시 “전후 레짐으로부터 탈각”이란 이념적 외교안보적 이슈를 전면에 내걸었다가 경제개혁을 원하는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잃고 1년 만에 실각한 쓰라린 기억을 안고 있다. 그 교훈으로 2012년 재집권하여서는 정책의 수순을 바꾸어 경제회생과 안정된 복지를 염원하는 민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전략을 펼쳤다. 아베노믹스란 이름의 대담한 금융완화와 TPP 교섭 참가라는 경제메뉴를 전면에 내걸고 지지세를 넓혀 2013년 7월 참의원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설치와 특정비밀보호법 가결, 야스쿠니신사 참배,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각의 결정 등으로 보통국가로의 색채를 분명히 드러내었다.

 

이 와중에 경제가 하강하면서 내각 지지율 하강의 경고음을 내자 아베 수상은 선제적으로 작년 12월 소비세 인상 시점의 연기를 내걸고 아베노믹스에 대한 지지를 묻겠다며 국회해산을 단행, 총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연립정권이 2/3란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하게 된 이번 승리로 아베는 당내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는 속에서 올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고, 또한 자민당에 대항할 경쟁야당이 부각되지 않는 속에서 4년 간 집권 연장은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보통국가와 진정한 독립이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사안이다. 의원내각제 하에서 다수의석을 보유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강력한 권력을 갖는 대통령적 총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52%란 전후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한 점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유권자의 절반이 선거에 불참한 이유는 정치무관심이 아니라 정치불신이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여론조사에 따르면 불참자의 43%는 그 이유로 “투표해도 정치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 하였고, 18%는 “투표하고 싶은 정당이나 정치인이 없다”라고 답했다. 또한 이번 여론조사에서 아베노믹스를 평가하지 않으며(51%), 경기회복을 실감하지 않는다(75%)는 유권자 다수가 자민당에 표를 던진 이유는 야당에 대한 불신이 컸다. 자민당을 지지한 유권자의 72%는 “야당이 매력 없기 때문”이라 답했다. 자민당이 획득한 압도적 의석수에 비해 유권자의 지지는 단단하지 않다.

 

야당인 민주당은 11석을 더 얻었으나 73석으로 자민당의 1/4에 불과한 약세이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를 당수로 선택하여 “원점회귀”로부터 당을 추스리고자 하나 당분간 자민당 도전세력 역할을 하기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점은 연립파트너로서 탄탄해진 공명당의 지위이다. 아베의 이념 프로젝트를 지지해 줄 우익 성향의 차세대당은 사실상 궤멸하여 대안이 사라졌고 연립정권 내에서 공명당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아베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에 관해 해석 변경의 한계를 설정한 공명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베는 국회에 의석수 2/3란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콘크리트 지지도는 갖고 있지 않다. 지지율은 경제성과나 야당 하기에 좌우되고 개헌에 비판적인 공명당이 있어 당장 염원인 보통국가를 위한 안보체제 개편에 나설 형편은 아니다. 그는 긴 안목에서 아베노믹스로 경제를 성장궤도에 올려놓고 미일동맹 강화와 외교적 성과로 점수를 따면서 중국과 북한 위협을 적절히 활용하여 강병과 개헌의 타이밍을 찾을 것이다.

 

부국강병을 넘어서

 

아베는 보통국가를 향한 4년의 긴 정치게임을 벌이고 있다. 2014년 한 해 아베가 야스쿠니에 가지 않은 까닭은 국내 보수 지지세력의 실망보다도 중국과의 격렬한 외교전과 미국의 비판이 보통국가의 길에 더 큰 걸림돌이 될 것이란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의 단기적 성과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아베는 최악의 상태로 전락한 양국관계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한국 측으로부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전향적 자세를 요구받고 있으나 이를 만족시키지 않아도 부국과 강병 양면에서 일본이 감내해야 할 손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고노담화의 계승 수준을 넘는 사과를 할 가능성은 낮다. 그의 조부가 처한 상황, 즉 당시 미국의 냉전적 필요에 조응하면서 아시아 시장을 확보하고 전략적 영향력 획득을 위해 한국과 손을 맞잡을 필요가 컸던 상황과는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2015년을 개혁의 골든타임을 규정하고 4대 구조개혁을 통한 경제성장과 튼튼한 안보라는 부국강병의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속에서 아베의 일본으로부터 원하는 바가 크지 않다. 50년 전 선친은 부국강병을 위해 일본의 경제지원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민족적 자긍심에 흠결을 내면서도 한일기본협정의 결단을 내렸던 상황과는 다르다. 박정희와 기시가 서로를 필요로 하였다면 박근혜와 아베는 그렇지 않다.

 

양국이 성장일변도의 부국관념과 국방위주의 안보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서로에게 기대할 것도, 내어줄 것도 크지 않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21세기 국력 개념은 변화하고 있어서 군사력과 경제력이란 하드파워뿐만 아니라 문화, 생태환경, 규범, 지식력 등 소프트파워와 네트워크파워가 보다 중시되는 국제정치적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 또한 시대의 추세는 고용 없는 성장, 불균형 성장보다는 포용적(inclusive)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며 지역과 지구의 공생이란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일 양국은 새로운 발상의 협력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위안부 문제를 탈정치화하는 노력과 함께 장기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되, 다른 한편으로 탈냉전, 지구화의 여러 협력과제들을 선정하고 풀어가는 건설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양국이 냉전기 부국강병의 프레임을 넘지 못한다면 한일 신시대의 개막은 아마도 두 정상이 물러날 2018년 이후로 미루어질 것이다. ■

 

 


 

 

[EAI 일본논평]은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일본연구센터에 참여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기획하고 발표합니다. 일본에 관한 주요 현안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과 분석을 제공하며, 바람직한 정책 개발을 위한 의견을 개진합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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