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덕 국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는 현재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3월 25일 헤이그에서는 핵 안보 정상회담을 계기로 오바마 대통령이 주선한 한미일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가까스로 한일 정상 간의 첫 대면이 성사되었다. 22개월 만에 열리는 정상회담이기도 하고 두 정상이 정부 수반으로 취임한 이래 첫 만남이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내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베 총리가 친근감을 표하기 위해 한국어 인사말을 꺼내고 이에 박 대통령이 얼굴을 외면한 채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 장면이야 말로 한일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회담에서는 한일 간 최대 쟁점인 과거사 문제는 의제에서 배제된 채 북핵 문제 등 안보 현안과 관련하여 한미일 3각 공조 및 협력을 재확인하였다.

 

꽉 막혔던 한일 간의 경색상황이 이 회담을 계기로 다소나마 개선될 모멘텀을 마련했다고는 하나 한일관계가 복원되어 정상화되기에는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아베총리가 국회에서 고노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 내부에서는 고노담화 검증에 관한 언급이 나오고 있고 4월부터 국장급 접촉이 이뤄진다 해도 위안부 문제가 속 시원하게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점쳐지기 때문이다. 한국이 일본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한일관계 개선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 원칙을 고수하는 가운데 일본이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서 근본적인 정책 변경을 시도하지 않는 한, 양국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고 한일 국민감정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보면 한일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빠진 근본적인 원인은 지도층 간의 소통부재와 양국 미디어의 편향 보도에 매개된 극단적인 국민감정의 확산에서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현재 한일관계의 심각한 냉각 현상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된다. 여기에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한일관계에서 전략적인 관점이나 사고 자체가 무시되거나 점차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인식 문제와 안보, 경제, 문화 등의 이슈는 분리되어 취급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연계가 점차 깊어지고 있고 상대방에 대한 양국 국민의 호감도는 위험한 수준까지 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인식: 아베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 경계

 

한국은 한마디로 아베 총리가 지배하는 일본이 위험한 우경화의 길로 치닫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한국인의 이러한 인식에 불을 당긴 것은 아베 스스로의 언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 총리는 ‘고노담화 철회’ 가능성을 언급하였고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하여 2015년 새로운 역사담화를 내놓겠다고 발언하였다. 더불어 그는 일본의 전후정치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져 왔던 헌법개정, 안전보장 정책의 전환을 시도하며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의 미디어는 일제히 아베 정권 자체를 매우 위험한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일본이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부추기는 언설을 쏟아내었다.

 

마치 이러한 인식을 확인이라도 해 주듯이 최근 일본정계에서는 문제 발언이 속출하였다. 아베 총리의 ‘침략전쟁 정의 발언’ 하시모토 시장의 ‘위안부 발언’, 아소 부총리의 ‘나치 식 개헌 발언’ 등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으며 고노담화를 검증하려는 움직임마저 가시화되었다. 게다가 헌법-안보정책을 둘러싸고도 심상치 않은 사태의 전개가 꼬리를 물고 나타나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의 허용 움직임, 일본판 NSC의 창설 등 안보정책의 근본적인 수정 움직임이 가속화됨에 따라 한국의 아베 정부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경계론, 우려론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한국의 일본 인식에는 아베의 모든 행보를 극우적인 것으로 단순화하여 파악하고 있는 특징이 보인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에서는 아베 총리가 주도하는 역사 관련 언행, 헌법 개정 움직임, 안보정책 전환 그리고 영토정책을 우경화라는 패키지로 묶어서 보고 있다. 박 대통령이 아베 수상과 정상회담을 꺼리는 것은 이러한 인식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일본의 한국인식에도 지나친 단순화와 객관성의 결여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일본의 한국인식이 최근 급속하게 부정적으로 기울게 된 것은 아마도 2012년 여름 이명박 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방문과 천황사죄 발언 그리고 일본 저평가 발언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이와 더불어 헌법재판소의 위안부 관련 위헌판결과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압박이 가중되고 대일 보상요구가 표면화되면서 일본사회 일각에서는 사죄 피로 현상 내지 혐한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인식의 이면에는 최근 한국이 일본의 강력한 경쟁국, 경합 상대로 등장하게 됨에 따라 과거 수직적이었던 양국 관계가 점차 수평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는 것에 대한 부적응 상태가 자리잡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일본사회에는 미들 파워 한국의 대두를 막연하게 두려워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정서가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인식: 한중 ‘역사동맹’ 우려

 

그러나 아마도 일본의 부정적 한국 인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있는 것은 한국의 중국 경사론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강화된 것은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수뇌부의 외교 행보 및 대일 발언에서 비롯되었다. 박 대통령은 일본의 올바른 역사인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관계정상화가 곤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반복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미국, 중국, 유럽의 주요국가와 정상 외교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공공연하게 일본의 역사인식을 비판한 것에 대한 불쾌감이 확산되었다. 또한 박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한편, 일본보다는 중국을 중시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인식이 일본사회 전체에 만연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미디어와 우익계 잡지는 이른바 최근 들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한중 역사동맹’ 현상을 맹비난하는 특집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일본의 대중 인식은 한 마디로 중국 위협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은 그 “위험한 중국”을 너무도 순진하게 보고 있다는 사고방식이 일본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최근 센카쿠를 둘러싼 중일 갈등이 첨예화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일본인들은 중국을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고도 경제성장과 정치군사 대국화를 달성했지만 그 내면에는 사회경제적 격차, 정치적 독재와 부정부패, 민족문제, 버블경제 등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한국은 그러한 중국에 대한 경계는커녕 역사인식 문제 등에서 일종의 반일 연대를 추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양국의 뒤틀린 상호인식이 점차 수그러들기는커녕 시간이 경과하면서 더욱 악 순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다. 양국 미디어의 편향적인 보도 경향과 양국 정치지도자 간의 의사소통과 대화의 부재가 이러한 악순환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비정상적인 한일관계 악화를 극복하고 관계 개선을 위한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는 조기에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현안 문제를 두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어 해결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 상황을 놓고 볼 때 정상회담 개최까지는 상당한 난관이 예측된다. 관계 개선과 협력의 필요성이라는 구심력이 역사문제에 기인하는 골 깊은 대립이라는 원심력을 누를 수 있을 때까지 당분간 정상회담이 개최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상회담이 우여곡절을 거쳐서 전격적으로 개최된다면 이 자리에서 양 정상은 첫째, 아베 정부의 기존의 역사인식 및 역사 정책 계승 입장의 확인, 둘째, 양국 관계의 긴급 현안인 위안부 문제와 징용자 보상 문제에 대한 해결 원칙 합의, 셋째, 한일 간 미래협력 2015 선언의 채택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양국 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정상 간의 만남이 어렵다면 반대로 이 3대 사항에 대한 실무차원의 사전 협상과 조율을 거쳐 정상회담의 개최를 시도하면 될 것이다.

 

출구모색을 위한 관민 역할분담

 

어떤 식으로든 향후 개최될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정부는 국교정상화 50년을 맞이하는 2015년에는 19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한층 업그레이드 한 형태로 “21세기 한일 신시대 선언 2015”를 채택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 문제 및 전후 보상 문제의 두 현안과 관련해서는 가칭 “한일 역사 화해를 위한 새로운 공동기구”를 조직하여 2015년까지 공동연구를 추진하고 나름의 해법을 도출하도록 전담시키고 정부 당국은 안전보장, 경제, 문화 등 현안에 집중하는 일종의 출구전략을 구사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공동 기구의 구성은 양국의 전문가, 법조계, 시민사회의 대표를 망라할 수 있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며 이 점에서 이 공동기구는 학자들 중심으로 조직, 가동했던 기존의 역사공동 위원회보다 더욱 포괄적이고 사실상 1.5 트랙의 형태가 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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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사업

한일관계 재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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