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해양법협약 제7부속서에 따른 중재재판소가 지난 12일 내린 남중국해 분쟁에 관한 첫 판결은 당사국인 필리핀 못지않게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첨예하게 대립해온 미국에게도 큰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중국이 주장하는 소위 ‘구단선’(nine dash line)은 해양법협약에 위배되며, 스프래틀리 군도(Spratly Islands, 남사군도)의 어떠한 지형물도 배타적 경제수역이나 대륙붕을 향유할 수 없다고 한 판결은 미국의 남중국해 정책에 법적 근거를 제공한 셈이다. 미국은 재판에 참여도 하지 않고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중국을 국제 사회의 기본적 책무도 부정하는 나라로 공격해 소프트 파워를 약화시킬 명분까지 얻었다.

 

물론 남중국해 분쟁은 직접적으로는 중국을 비롯한 필리핀, 베트남 등 역내 국가 간의 분쟁이지만, 그 이면에는 서태평양에서 지배적 지위를 누려온 미국과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 간의 거대한 세력 다툼이 있다. 미국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자체에 대한 개입은 피하면서도, 항행 및 상공 비행의 자유를 내세워 동 해역에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견제해왔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저지하지 못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누리던 미국의 패권적 지위와 역내 국가들의 신임을 잃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남중국해 분쟁은 이미 197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지만, 지난 2009년 중국이 ‘구단선’을 표기한 지도를 첨부한 공한을 유엔에 제출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어 시진핑 체제가 출범하면서 남중국해를 중국의 핵심적 이익으로 간주하고, 동 해역에서 필리핀이나 베트남의 어업 및 해저자원 탐사활동을 저지하는 등 일련의 고압적 조치를 취해왔다. 미국 워싱턴 소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이러한 중국의 단계별 행보를 남중국해를 지배하려는 ‘살라미 슬라이싱 전략’(salami-slicing strategy)으로 명명한 바 있다. 중국의 급속한 군사력 증대를 우려해 온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은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겪고 있는 지역 국가들이 해경 활동을 강화하고 해양 정보를 실시간 공유하는 등 긴밀히 협력할 것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 간 힘겨루기는 2013년 말부터 중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산호초 등 지형물에 인공섬을 조성하고 비행장이나 군사시설을 건설하면서 가속화되었다. 미국은 분쟁 지역인 남중국해에서 이러한 활동을 동결할 것을 제안했지만 중국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2015년 4월 중국이 파라셀 군도(Paracel Islands, 서사군도) 두 개의 섬에서도 확장 공사를 감행하자 미국과 필리핀은 1만 2천 명의 병력이 참여하는 해상 합동 군사훈련으로 대응하였고, 5월에는 미국과 중국의 함정이 남중국해에서 충돌 직전까지 가는 대립 상황에 이른다. 2015년 9월 25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재확인한 이래, 미국은 10월 27일 구축함 라센호를 남사군도 수비환초 12해리 내로 진입시킨다. 이에 중국은 미국 구축함을 추적하는 것으로 맞대응을 했고, 역외 국가인 미국이 남중국해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킨다며 비난하였다. 2016년에 들어서면서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 양국 간의 물리적 갈등은 잦아들었지만, 지난 5월 초 미국 구축함 로렌스호가 남사군도 인근 해역에 진입하는 등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군사 행동을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를 수호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본다. 군사 초강대국인 미국에 있어 항행의 자유는 생명줄과 마찬가지다. 남중국해에서도 당연히 항행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중국의 과도한 영유권 및 관할권 주장으로 이러한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바다의 헌법이라고 불리는 유엔해양법협약은 모든 국가는 공해 상에서 항해의 자유를 누리며 이러한 자유는 연안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에서도 적용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항행의 자유에 군사 훈련이나 정찰 및 정보 수집 등과 같은 군사 활동이 포함되느냐를 두고 미국과 중국의 입장이 엇갈리는데 있다. 미국은 항행의 자유에 당연히 군사 활동도 포함된다고 보는데 반해, 중국은 배타적 경제수역에서의 군사 활동은 반드시 연안국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중국해에서 미 해군의 활동이 어느 선까지 적절하냐를 두고 미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중국의 도발에 대해 강력한 신호를 보내기 위해 분쟁 도서들 수 해리 안까지 군함을 보내야 한다거나 다른 국가들을 설득해 자유 항행에 동참하게 하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남중국 분쟁 당사국들이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하자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에 무기 수출제한을 해제한 데 이어 지난 5월 말에는 공동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한편, 남중국해의 평화적 현상유지를 위해 미국이 군사 활동을 중단하고 중국과 관련 당사국들이 해양자원 공동개발과 같은 협력을 하도록 독려하여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은 필리핀에 이어 베트남이나 여타 분쟁 당사국들도 중국과 양자협상의 틀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국제법적 해결을 추구하길 바란다. 그러나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들은 집행력이 결여된 재판으로 과연 중국의 태도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분쟁만 격화시키지는 않을지 고민할 것이다. 이들이 필리핀의 전례를 따라 국제법과 재판에 호소하는 전략을 선택할지는 상당부분 이번 판결 이후의 미국과 중국의 대응에 달려 있다. 앞으로 전개될 워싱턴과 베이징의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저자

이숙종 EAI 원장·성균관대학교 국정관리대학원 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외교부, 통일부,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The Trilateral Commission, 싱크탱크세계평의회(Council of Councils: CoC)의 회원으로 정책연구와 관련하여 국제적인 네트워크 형성에 힘쓰고 있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미국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 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대학원(Johns Hopkins University, SAIS) 교수강사, 독일 German Institute for Global and Area Studies 방문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최근 저술로는 "South Korea Aiming to Be an Innovative Middle Power",Transforming Global Governance with Middle Power Diplomacy: South Korea's Role in the 21st Century (편),《글로벌 개발협력 거버넌스와 한국》(편), "The Demise of 'Korea Inc.': Paradigm Shift in Korea’s Developmental Stat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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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프로젝트

세부사업

미중경쟁과 한국의 전략

중국의 미래 성장과 아태 신문명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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