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동아시아연구원(EAI)은 지난 15년(2005-2020) 동안 <한국인의 정체성> 조사를 네 차례 진행하였습니다. 2020년 조사결과의 첫 번째 워킹페이퍼 시리즈인 “한국인이 보는 역사, 민족, 국가, 그리고 세계”의 두 번째 보고서로 강원택 서울대 교수의 워킹페이퍼를 발간하였습니다. 집필자는 '한국인의 조건’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주목할 점은 ‘국적의 유지’나 ‘대한민국의 정치제도와 법을 준수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 시민적 정체성을 중시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에는 ‘국가 자부심’의 변수가 작용하였는데, 한국사회 발전에 대한 자부심 속에서 혈연적 특성보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적, 시민적 의미의 정체성을 강화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지난 15년 동안 한국인들의 정체성에는 혈연적, 인종적 의미의 민족 정체성보다, 시민적, 정치적 의미의 국가 정체성이 강화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5년 첫 조사 결과에 대해, “혈연에 기초한 막연하고 애매한 한민족, 한국인이라는 자기정의로부터, 이제는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근대적 속성을 함께 내포한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강원택 2006, 38)라고 평가했는데, 이제 그 속성은 시간이 갈수록 이전에 비해 훨씬 강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 아래는 본 워킹페이퍼의 서론입니다. 전문은 상단의 첨부파일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I. 서론

장구한 시간 동안 우리 민족은 한반도라는 지리적 공간 속에서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그 역사적 과정에서 다른 민족과의 접촉과 교류가 있었고 그러한 관계는 인구 구성에도 반영되었겠지만, 한국인들은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대체로 동질성을 유지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 정체성 간의 구분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서구에서 민족 국가가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명되었거나’ ‘상상된’ (Hobsbawm 2004, 41; Anderson 1991) 것이었다면, 한국에서는 근대 이전에도 이미 국가와 민족은 하나의 형태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과 결합된 국가의 정체성은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이민족의 침략과 공세에 대한 저항 속에서 더욱 강화되어 왔다. 즉 한국인이라는 것은 한반도라는 제한된 공간에 거주하고 있고, 일본과 중국과는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민족적으로 구분되는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 국가 정체성과 민족 정체성의 구분이 의미를 갖게 된 것은 한반도가 분단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국가가 민족의 지리적 범위를 모두 포괄하지 못하게 되면서, 하나의 민족이 남북의 두 개의 국가로 나뉘게 되면서, 이 두 가지 정체성은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더욱이 사실상 완전한 단절의 상태로 70년 이상을 보내면서 남북의 주민들은 서로에 대한 기억과 공유된 경험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단절은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과거와 다른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 가도록 이끌었다. 강원택(2006)은 남한의 젊은 세대가 그들의 정체성의 지리적 공간을 한반도의 남쪽, 즉 대한민국에서만 찾으려 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대한민국 민족주의’라고 부른 바 있다. ‘대한민국 민족주의’는 혈연적, 언어적, 문화적 동질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정체(polity)라고 하는 정치적 요소와 긴밀하게 연계된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과거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남한만을 대상으로 하는 정체성이 강화되어 가는 것과 동시에, 남한 사회 내부의 인구 구성의 문화적, 인종적, 지역적 다양성이 증대되어 왔다. 우선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주민 등 외국에서 한국에 들어와 거주하게 된 외국인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민족 정체성과 관련하여 남한 사회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남한 사회의 인종적 구성이 다양화될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장기간 체류하는 외국인의 경우와는 달리, 결혼이나 귀화를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의 수가 늘고 있다. 또한 중국 출신 한민족, 즉 조선족의 경우에는 같은 민족이지만 국적이 다르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 간의 문제를 야기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그동안 정체성과 관련하여 서로 상반된 두 가지 흐름을 동시에 경험해 왔다. 즉 한편으로는 정체성의 ‘분리’와 또 한편으로는 정체성의 ‘다양화’가 동시에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온 지난 15년 동안 더욱 가속화되어 왔다. 한국 사회 내 거주하는 외국인의 수는 2005년에는 74만여 명이었지만, 5년 뒤인 2010년에는 126만여 명으로, 2015년에는 거의 190만 명으로 증가했고, 2019년 말까지는 25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2005년에 비해서 2019년에는 국내 체류 외국인의 수가 거의 네 배 증가한 것이다. 조선족의 경우에도 한국에 거주하는 인구가 2005년 167,589명이었던 것에 비해 2019년에는 701,098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은 지난 15년간 그 규모에 있어 크게 증가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난 15년간 일어난 보다 주목할 변화는 남북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동안 남북 간 정치체제의 문제는 지난 15년간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하게 남한 사회에 각인되고 있다. 2005년 이후 전개된 남북 간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한에서는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을 실시했고 2009년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와 2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2013년 3차 핵실험, 2016년 4차, 5차 핵실험과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 시험 발사를, 2017년에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시험 발사를 했다. 이로 인해 한반도 주변에서 미국과의 군사적 긴장 관계가 고조되었다. 또한 2011년 김정일의 사망과 함께 김정은으로 3대 세습을 이어갔다. 그 이후 2013년 김정은은 자신의 고모부 장성택을 사형에 처했고, 2017년에는 이복형인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독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남북 관계를 살펴보면 2007년 10월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만, 2008년에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다. 2010년 3월에는 천안함 피격 사건,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다. 2016년에는 한국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북한의 김여정이 김정은의 친서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한 이후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고,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간의 싱가포르 회담도 2018년 실시되었다. 이처럼 2005년 이후 남북 관계는, 2018년 초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악화되었고, 남북 간 교류 협력도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에 비해 남한 사회에서는 2007년과 2017년 선거에서 여야 간 정권 교체가 두 차례 발생했고, 2008년 쇠고기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 2016년 박근혜-최순실 관련 촛불집회, 그리고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경험했다. 또한, 문화적으로 아이돌 그룹 BTS 열풍,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손흥민 등 스포츠 스타의 활약, 그리고 2007년부터 2016년까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재임 등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도 높아졌다. 결국 지난 15년 동안 일어난 이러한 한국 사회의 변화와 함께, 북한은 핵무장, 김정은의 3대 세습의 과정을 거치면서 남한 사회와의 이질감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이질감의 증대는 한국인들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것이 이 글에서의 출발점이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이 글에서는 지난 15년간 일어난 한국인들의 정체성 변화를 북한, 통일, 영토 등 국가 정체성의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 저자: 강원택_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영국 런던정치경제대(LSE)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정치학회장, 한국정당학회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한국 정치, 의회, 선거, 정당 등이다. 주요 논저로는『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2019), 『사회과학 글쓰기』(2019), 『한국 정치론』(2019), 『시민이 만드는 민주주의』(2018, 공저), 『대한민국 민주화 30년의 평가』(2017, 공저), 『대통령제, 내각제와 이원정부제』(2016)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서주원 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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