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2년, 2004년 촛불, 그리고 2008년의 촛불

[표7. 촛불집회 비교표 참조]

 

촛불집회의 키워드 “대규모 축제” “네티즌” “Web2.0 쌍방향적 소통” “생활정치”

 

Web2.0

지난 5월 2일부터 시작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하며 시작된 촛불집회가 두 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시위로 국내 언론은 물론 해외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촛불문화제 초기 여중생, 여고생이 시위 주력부대로 등장하고, 핸드폰 ∙ 무선인터넷 ∙ 웹캠 등 정보기기를 활용한 1인 미디어가 활성화되어 각계각층의 참여와 관심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부 언론매체와 사회집단이 경쟁적으로 실시간 TV생중계를 진행하면서 네티즌과 일반국민들이 참여하는 쌍방향 소통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는 성과도 낳았다. 이러한 변화는 상당부분 2002년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와 2004년 탄핵무효 촛불집회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역대 최장기간, 최대 규모 촛불집회

5월 2일부터 두 달여간(7.12일까지) 연인원 55만(주최 측 추산 300만), 심야투쟁 일상화

이번 촛불집회에는 역대 촛불집회와 마찬가지로 과거 운동권이 주도하는 엄숙한 시위행태 대신 달리 대규모 군중이 장기간 참여할 수 있는 축제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집회는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군중이 가장 장기간 촛불시위를 지속시켜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5월 2일부터 7월 12일까지 주최 측 추산 2,994,400명(경찰 추산 556,600명)이 참여했다. 특히 2008년에는 72시간 릴레이, 48시간 릴레이 시위처럼 장시간에 걸친 마라톤 시위가 등장하는가 하면 촛불문화제로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경찰과 대치하는 철야새벽시위도 일상화되었다.

 

2002년 효순이∙ 미순이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의 경우 2002년 11월 시작하여 2003년까지 총 300여 차례에 걸쳐 연인원 500만명이 참여한 사례에는 못 미친다. 2003년 이후에는 이라크 파병 반대 등 다른 이슈들을 포함한 결과이며 ‘미군 처벌 ∙ 부시대통령 사과 ∙ 소파개정’이라는 애초의 이슈를 기준으로 하면 12월 31일까지 총 32일간 30여 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에는 한나라당 ∙ 민주당주도로 국회에서 탄핵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을 계기로 ‘탄핵무효 ∙ 부패척결’을 위한 촛불집회가 3월 12일부터 29일까지 16일간 연인원 150만 명이 참여했다.

 

대책위는 50만(경찰추산 5만)이 참여한 7월 5일 촛불집회를 기점으로 평일시위를 중단하고 휴일에 집중 시위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첫 주말집회인 12일에는 2만명(경찰추산 3700명)이 참여하는 데 그쳤다. 인터넷이나 일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촛불시위의 동력을 이어가기 위해 연일 촛불시위를 계속하고 있지만 12일 이후에는 200~300명 규모에 그쳤다.

 

촛불의 전개, 네티즌이 발동 걸고 시민단체/운동단체가 받는다

온라인에서의 광우병 괴담, 이명박 탄핵서명(5/4 100만 돌파)이 촛불의 사회적 분위기 성숙

2008년 촛불집회의 장은 안티이명박카페와 미친소닷넷 등 온라인 단체의 제안과 준비로 시작되었다. 안티이명박카페가 5월 2일 1차 촛불문화제를, 미친소닷넷이 3일 촛불문화제를 제안하고 여기에 각각 1만 명 이상(경찰추산 5000명, 7000명)의 시민이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온라인에서 촛불시위를 제안하여 발동을 걸고, 참여연대 ∙ 진보연대 등 진보적 시민단체가 가세하여 집회를 주관해나가는 전개양상 역시 2002년과 2004년의 경험과 다르지 않다. 2002년 촛불집회의 경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였던 김기보(ID:앙마)가 범대위 게시판에 촛불집회를 제안했고, 2004년 탄핵시기에는 친노 온라인 단체인 국민의 힘과 노사모가 시작한 촛불집회에 광범위한 시민들이 결집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각양각색의 계층이 참여하는 축제로 시작, 2008년에는 촛불소녀의 등장

2004년 촛불집회에서 이미 2002년 주목받은 넥타이부대 ∙ 유모차부대 ∙ 가족 및 연인단위 집회 참여가 주목받았고, 2008년 촛불집회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예전 운동권 주도의 집회에서는 주최 측의 일방적인 주도로 과격한 구호와 투쟁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촛불집회에서는 온라인에서의 사전토론과 준비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위도구(예: 스티커, 유니폼 등)를 스스로 준비하고, 준비된 연사의 정치연설을 참가자들의 자유로운 토론을 대체했다.

 

특히 대중연예인들의 참여가 촛불집회를 대중화하는 데 한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2002년에는 신해철, 윤도현, 김장훈씨 2004년에는 권해효, 문소리 씨가 가세했고, 2008년에는 낯익은 얼굴들 외에도 햄버거 논란을 일으킨 김민선, 하리수 등이 온라인 상에서 미 쇠고기수입에 대해 비판하여 관심을 끌었다. 이승환과 김장훈 등 톱가수들의 참여로 5월 17일 촛불문화제에는 주최측 추산 6만명, 경찰 추산으로도 처음으로 1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하여 촛불집회를 확산시키는데 역할을 했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 참가집단 중 가장 눈에 띄는 집단은 역시 “촛불소녀”로 상징되는 10대 여중생 ∙ 여고생들이다. 10대 청소년들의 경우 인수위 시기이래 정부가 제시한 교육경쟁 심화정책(영어몰입, 특목고 확대, 0교시 수업 허용 등)에 대한 불만이 결합하면서 촛불집회 초기에는 참가자의 50~60%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명박탄핵서명 첫 제안자가 안단테라는 아이디의 고2 학생이었을 뿐 아니라 57만 회원이 참여하고 있는 “미친소를 몰아내는 10대연합”, “전국청소년연합”등의 10대 인터넷 카페가 초기 촛불집회의 주력부대 역할을 했다.

 

생활정치(탈물질적 가치에 기반한) 이슈가 참여 폭 확대

참여계층의 확대는 대책위에 가입한 단체 수에서도 확인된다. 2002년 여중생 범대위가 반미성향의 자민통/전국연합/민중연대 등 130여개 시민운동단체가 참여한데, 2004년 탄핵반대 국민행동에는 참여연대, 환경연합 등 550여개 단체가 가입했다. 2008년 광우병 대책위에는 5월 2일 1513개 단체가 가입하였고 7월 6일 현재 1837개 단체로 확대되었다.

 

2002년, 2004년 촛불집회가 부시 대통령의 사과와 소파개정, 탄핵 무효라는 정치적 이슈를 두고 일어남에 따라 대체로 이념적 성향에 따라 찬반이 나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촛불집회 초기에는 미 수입쇠고기 안정성 여부와 같은 생활정치적 이슈를 중심으로 촛불집회가 개최되어 ‘icoop생활협동조합’ 등 비정치적 단체들이 대책회의에 대거 가입했다. 주부 카페 ‘U-mom', 요리커뮤니티 사이트 ’82cook' 가입자 들이 유모차부대를 이끌고 집회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2. 국면 별로 본 촛불집회 2008 촛불집회의 전개과정

 

[그림1] 촛불집회 전개도 [표8] 국면별로 본 촛불집회 특징

 

2008 촛불집회가 완전히 종료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5월 2일 1차 촛불집회가 개최된 이래 7월 12일까지의 과정을 보면 크게 네 국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점화기] 5월 2일 ~ 5월 23일 (촛불문화제)

 

5월 들어 두 인터넷단체가 촛불문화제를 연이어 개최하면서 촛불집회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5월 2일 1차 촛불문화제는 이명박탄핵국민운동본부가, 5월 3일 2차는 미친소닷넷인터넷카페가 개최하여 각각 1만명 이상이 참여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촛불집회가 시작되기 이전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미 쇠고기협상결과 및 정부의 졸속처리과정에 대한 비판여론이 조성되어 있었다. 4월 18일 쇠고기협상 타결이후 소위 ‘광우병 괴담’이라 일컬어지는 미쇠고기 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면서 4월 초 온라인에서 시작한 이명박 탄핵서명운동이 탄력을 받았다. 4월 29일 10만명을 돌파한 이래 3일 후인 5월 2일 50만, 5월 4일에는 1백만 명을 넘어섰다. 4월 29일 방영된 PD수첩이 영향을 미쳤다. 7일부터 시작한 국회청문회에서 정부의 졸속협상과 부실대응이 드러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되고 촛불집회에 대한 관심을 높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속적인 촛불집회 개최와 효율적 준비를 위해 광우병 대책회위가 결성한 것이 그 즈음(6일)이며 이후 대책회의가 전면재협상을 요구하며 촛불집회를 주관해나가기 시작한다.

 

초기 촛불집회의 경우 야간시위 금지규정을 피하기 위해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50~60%가 10대 교복부대(소위 촛불소녀)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유모차 부대와 30대 넥타이부대, 40~50대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동참하고 이승환, 김장훈 등 인기연예인이 문화제에 참석하면서 참여인원이 5월 17일에는 주최측 추산 6만명(경찰추산 1만1천명)까지 불어났다.

 

표 1. 대통령 지지율 추이(3월~5월)

 

이명박 대통령은 5월 2일 “쇠고기협상 논란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힌 데 이어 경찰 역시 “촛불시위는 불법이며 사법처리 방침”을 밝히며 시위확산을 막는 데만 주력했다. 그러나 촛불집회 참가자가 증가하고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이 22.6%로 까지 덜어지면서 대통령이 “소통이 부족”(13일),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길 것”(15일), “국민에게 송구”(22일)하다며 자세를 낮추고 15일로 예정되었던 ‘미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를 미루게 되었다.

 

[절정기] 5월 24일 ~ 6월 10일 : 1차 물리적 충돌과 70만(경찰 8만) 참여한 6∙10

 

정부 및 미국의 재협상 불가입장을 명확히 한 조건에서 5월 24일부터 촛불문화제 이후 가두행진이 시작된다. 정부가 6월 3일 재고시를 예고하자 시위가 점차 격화되기 시작하여 30일부터는 문화제 후 “가자! 청와대로”가 등장했다. 거리행진을 막기 위해 세워둔 전경버스를 훼손하고 밧줄로 견인하는 과정에서 시위대와 경찰 사이의 충돌이 빚어졌다. 5월 31일 첫 물대포 진압이 등장하고, 경찰버스에 올라탄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 경찰특공대가 투입된 후 물리적 충돌이 격화되었다.

 

표 2. 촛불집회에 대한 여론(6월 초)

 

정부에 대한 불신 광범위한 상태에서 정부가 강경대응에 나서자 국민여론은 시위대 보다는 정부를 탓하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6월 초 여론조사에서 촛불집회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60% 전후에 달했다. 특히 서울대 여대생이 전경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이 온라인을 통해 확산되면서 정부의 강경대응에 대한 비판여론이 확산되었다. 이 시기에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10%대로 추락한다.

 

표 3. 대통령 지지도(6월 초)

 

6월 4일 재보선을 앞둔 한나라당에서 정부 대응에 문제제기를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이다. 6월 2일에는 6월 3일 예정된 고시게재를 다시 연기하고, 경찰은 시위대에 대한 진압대신 온건대응으로 선회했다. 이로써 일단 정부와 시위대 사이의 물리적 충돌은 잦아들었다. 촛불집회는 6월 5일부터 8일까지 72시간 릴레이집회에 이어 6월 10일에는 주최 측 추산 70만(경찰추산 8만)의 최대군중이 운집함으로써 촛불집회의 절정에 달했다.

 

[변환기] 6월 11일 ~ 6월 29일 : 5대 정치이슈로 전환과 관보게재 후 2차 충돌

 

정부는 쇠고기협상국면을 진정시키기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 재협상에 준하는 추가협상을 통해 민심을 안정시킨다는 전략으로 6월 13일부터 19일까지 미국과 추가협상을 진행하여 △ 30개월 미만 쇠고기만 수입 △ 광우병 위험 우려 있는 4개 부위 수입금지 △ 한국정부의 검역주권 강화 등을 이끌어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쇠고기 파동에 뼈져리게 반성”한다고 발표하고 20일에는 청와대 비서실장 및 수석 8인 중 7인의 교체를 단행하였다. 6월 25일에는 그 동안 미루었던 추가협상 결과를 토대로 미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관보게재를 관철시켰다.

 

표 4. 촛불집회에 대한 여론(6월 말)

 

6월 10일 이후 열흘 동안 촛불집회에 대한 여론이 반전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국정지지율은 20% 초반대에 머물렀지만 촛불집회를 중단(자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60% 전후로 올라갔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위대의 규모도 14일 이후에는 500~1000명 규모로 급감함으로써 촛불정국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는 관측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추가협상 결과가 기대보다 좋았고, 오랫동안 지속된 촛불집회에 대한 피로도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광우병 대책위와 강경노선의 온라인 단체들을 중심으로 쇠고기재협상 문제에서 5대 정치사회의제(△ 공영방송 장악기도 반대 △ 대운하 건설 반대 △ 의료 민영화 반대 △ 교육 자율화 반대 △ 공기업 민영화 반대)로 확대하려는 시도도 촛불 참가자들의 감소를 가져온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생활정치 이슈에서 출발한 촛불집회가 정치화되면서 일반참가자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한 것이다. 촛불집회의 동력이 약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6월 25일 관보게재가 강행되자 온라인 및 기존 시민운동단체 소속 참가자를 중심으로 한 강경노선이 주류로 등장했다. 정부 역시 이에 6월 1일 이후 사라졌던 물대포가 25일만에 다시 등장했다. 물리적 충돌이 격화되면서 “비폭력하려면 집에 가라”는 큰 목소리에 촛불 본연의 비폭력 노선을 주장한 시민의 목소리는 묻혔다. 소위 ‘깃발’이 ‘촛불’을 대체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쇠퇴기] 6월 30일 ~ 7월 12일 촛불집회 정당성 위기와 명예회복...이후 소모전 가능성

 

뼈저린 반성을 얘기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6월 25일 관보게재를 앞두고 “국가정체성을 위협하는 세력은 엄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24일). 29일 검찰도 “폭력시위 연루자는 철저히 색출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촛불집회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초동진압에 나섰다. 이러한 태도변화는 여전히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진정성에 대한 의혹을 사면서 역풍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5월 말 정부의 강경대처에 대해 수십만 군중이 참여하는 촛불집회를 통해 대통령의 사과성명을 이끌어냈던 것과 달리 촛불집회는 자체의 자정능력과 정국 주도력을 상실하게 된다. 오히려 촛불집회 중단 여론이 고조되고 자체 토론을 통해 촛불 본연의 비폭력노선으로 복귀하는 것도 여의치 않게 된 것. 쇠고기 정국의 촉발제가 되었던 PD수첩 취재과정에서 정보의 왜곡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 것도 촛불시위 자체의 정당성 위기를 가속화했다.

 

6월 30일~7월 2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주재한 시국미사, 3일과 4일 개신교와 불교계가 촛불집회에 가세하면서 7월 5일 6.10 이래 최대 인파를 동원(주최 측 50만, 경찰추산 5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촛불집회의 정당성 회복이라는 일종의 명예회복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수배 받은 대책회의 간부 6인이 7월 5일 집회 후 조계사로 피신농성에 들어간 것은 두 달여간 지속된 촛불집회가 기존 방식으로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대책회의는 평일 촛불집회를 중단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 후 12일, 17일 촛불집회에 주최 측 추산 각 2만(12일 경찰 추산 3700명, 17일 3000명)이 집회에 참석하는 데 그쳤다.

 

이미 미국산 쇠고기의 국내시판이 재개되고 촛불집회에 대한 중단을 바라는 국민 여론이 높다는 점에서 촛불집회가 이전의 군중참여를 다시 이끌어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쇠퇴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현재 정부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강경대응 방식 역시 반감을 사고 있다. 결국 촛불이 급격하게 꺼지거나 되살아나기 보다는 정부와 시위대 간의 공방 속에서 소모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3. 촛불집회의 교훈

 

정부의 조기 진화는 불가능했나, 두 달여간 광범위한 대중이 참여했나? 

정부, 괴담론과 배후설만으로 정국돌파 어려워, 정부신뢰 회복이 관건

 

괴담(루머)는 불신을 먹고 자란다.

최근 촛불집회를 촉발시킨 “PD수첩”방송분이나 인터넷에서 횡횡한 괴담(초기 광우병 괴담: 물과 공기를 통해 전염, → 정부폭력진압과 관련한 괴담 : 여성 시위대 성폭행설, 질식사설)이 초기 촛불 시위대의 확산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사과성명에서 스스로 인정했듯이 정부 스스로의 소통 부족과 졸속협상의 책임, 사후 해결과정에서의 미숙 등으로 국민들과 시위대의 불신을 스스로 자초한 측면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정부 스스로 정부 불신을 자초했다.

현재 국민들의 정부불신은 (1) 인수위 활동과 인사파동 (2) 총선 전후 배제의 정치 (3) 국민생명과 주권의 경시 (4) 실력 없는 정부라는 인식 (5) 오락가락 정책, 진정성에 대한 우려 차원으로 구성된다. 인수위 때부터 시작된 고집스러운 인사스타일로 중산층과 서민들의 괴리감이 심화되고, 총선 전후 공천과정에서 다수 탈당파를 양산했다. 초기 70-80%대의 높은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그 결과 총선 직전에는 한 때 과반수 의석이 위협받기도 했다.

 

특히 초기 대응에 문제가 많았다.

실제 촛불집회로 많은 국민들의 불만이 본격적으로 표출한 데에는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쇠고기수입조건 협상을 졸속으로 서두름으로써 불가침의 국민의 생명과 주권을 한미동맹과 ‘거래’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더구나 청문회나 TV 토론과정에 나선 정부관계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심지어 ‘협상합의 내용’에 대한 오역 파동 등으로 이명박 대통력이 강조해온 국정능력과 실력에 대한 의문이 증폭된 바 있다.

 

대국민 정책적 대응에 일관성도 없었다.

물론 여론 변화에 맞게 유연하게 정책을 집행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관된 법집행 원칙을 천명하면서 일부각료는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대통령의 “뼈저린 반성” 회견 직후 공격적인 진압전술로 급선회하는 등 오락가락한 대응은 오히려 법질서 유지도 시위대의 분노를 잠재우는 데도 실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진정성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시위대의 감정적 대응을 더욱 격화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정부 신뢰회복이 촛불을 끄는 근본적 해결책 

현재 촛불집회를 중단, 자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6월 20일(중앙선데이) 다수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우려는 가라앉지 않았다. 또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전의 정국주도력을 갖기는 힘들겠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이 촛불집회를 유지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한 정부에 대한 신뢰회복만이 촛불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각계의 비판을 국정운영에 반영하여 새로운 신뢰기반을 구축하는 데 힘쓸 때이다.

 

‣ 대의제의 위기와 정부-국민 갈등 첨예화

 

• 대의제의 위기, 신뢰의 위기

• 국회와 정당, 조정과 타협의 중재역할 할 수 없어

 

대의제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다. 지난 두 달간 촛불집회 과정에서 시민사회와 정부는 직접 대결을 펼쳐왔다. 시민사회와 국가 사이의 매개자이자 완충막이 되어야 할 국회와 정당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국회와 정치권이 다양한 시민사회의 요구와 갈등을 대변하여 제도적으로 조정 해결하는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시민사회가 대통령과 정부와 직접대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AI가 2004년, 2008년에 실시한 기관별 신뢰도 조사와 2001년 서울대 조사 결과를 보면, 국회의 경우 조사대상 11개 기관 중 최하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 주요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평가를 봐도 마찬가지이다. EAI가 중앙일보와 함께 매년 조사해온 파워기관 신뢰영향력조사 결과를 보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한나라당을 제외한 열린우리당, 민주당, 민주노동당이 조사대상 기관 중 최하위권에 머물러 왔다. 2006년, 2007년에는 10위권에 포함되어 있던 한나라당이 2008년에는 21위로까지 떨어졌다.[표5],[표6]

 

이렇게 국회와 정당에 대한 국민신뢰가 매우 낮아서 이들이 국가와 시민사회, 혹은 시민사회 내부의 이해관계 충돌을 중재하거나 조정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2008년 촛불집회가 두 달을 넘게 지속되어도 이들이 전혀 정부와 국민사이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제도적으로 해소하기위한 중재에 나서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신뢰받는 조정자 및 완충자가 없는 조건에서 양 집단 사이의 갈등은 첨예하게 장기화되기 십상이다.

 

[표5] 기관별 신뢰도 점수 순위(2001~2007)

 

EAI 사회신뢰조사(2004, 2008),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2002)

 

[표6] 주요정당 신뢰도 순위(2006~2008)

 

EAI ∙ 중앙일보 파워기관 신뢰영향력조사(2006-2008)

 

촛불과 민주주의

 

촛불이 보여준 집단지성의 한계 : 리더십의 공백

 

왜 청와대 행을 고수해야 했나? 불필요한 강경대응 유발

정부에 대한 불신과 미숙한 대처가 촛불시위를 확산시킨 근본적인 원천이었다고 해도 촛불시위가 진행되면서 촛불시위대의 한계와 문제점도 심화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1차 관보게재 연기(14일)이후 5월 24일 부터는 청계천에서의 문화제 형식을 넘어 가두행진으로 번지고 30일부터는 줄곧 청와대 진출을 시도하면서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일상화되었다.

 

대책위 측에서는 쇠고기 재협상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정부에 대해 보다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겠다는 의지였고, 정부의 강경대응이 폭력사태의 근원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정부권위의 상징이자 최고통치기관이다. 정부로서 심야에 수많은 군중의 청와대 시위를 허용하기는 힘들다. 촛불시위대가 청와대로 진출하려는 시도는 강경대응의 과거 가두투쟁이 일상적으로 열리고 정권퇴진운동이 활발했던 80-90년대 조차 청와대 시위를 고려했던 것은 80년 광주, 87년 민주화 시위 등 두 번 정도다. 그나마 스스로 자제했다.

 

대책회의 지도부가 정부의 강경대응과 시위대의 충돌을 통해 사태를 악화시킴으로써 쇠고기 정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이 정부 측의 해석이다. 대책회의는 정부가 강경대응으로 시위대의 폭력을 유발하여 촛불시위의 정당성을 훼손하려는 의도라고 본다. 그 진위는 이후 재판과정에서 보다 분명해지겠지만, 지도부건 네티즌 그룹이건 청와대 진출을 고집할 경우 정부의 강경대응은 불가피하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했어야 했다.

 

국민여론을 왜 외면했나? 촛불자제 여론의 확산, 시위행태는 오히려 과격해져

6월 20일 추가협상에 자신감을 얻은 정부가 촛불시위대가 요구한 재협상 대신 관보게재를 추진함에 따라 6∙10 대규모 촛불문화제 이후 동력을 잃어가던 촛불참가자들이 급격하게 폭력적 시위방식에 휩쓸리게 된다. 이 시기 일부 참가자들의 비폭력노선 고수를 외쳤지만, 시위대의 주류정서는 폭력시위 노선으로 쏠렸다. 이에 동조하지 않은 많은 시위대들이 이 때 이탈하고 종교계의 시국미사 전까지 시위대가 급감하게 되었다.

 

6월 20일 이후 촛불시위를 중단해야 한다는 국민여론이 57~58%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위참가자들은 이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촛불동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된다. 스스로 폭력노선의 철회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종교계가 다시 구원투수로 등장하여 비폭력노선으로 복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시민의 참여가 급감하고 정부의 강경대응이 거세지자 그 동안 스스로 거리를 두었던 민주당 등 제도권 정당의 참여를 요청하는 상황으로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자율결정의 한계 : 리더십의 공백과 배타성

네티즌 사이에 운동단체나 정치세력이 촛불문화제를 좌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동시에 온라인 혹은 현장에서의 토론을 통해 그 때 그 때 시위양식을 정해가는 것이 직접민주주의의 사례로 미화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점차 그 한계도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째, 리더십의 공백이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과 네티즌은 초기에 스스로 정치적 순수성과 비폭력, 자발적 참여 원칙을 지켜나가는 자정능력을 보여 주었다. 정부가 재협상 불가 원칙을 고수하고 6.10 이후 정부의 추가협상을 기울여 나름의 결실을 얻은 조건에서 재협상이라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물론 대책위 주도로 6월 16일 △ 공영방송 사수 △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 대운하 반대 △ 교육자율화 반대 △ 공기업 민영화 반대 등의 정치사회적 이슈로 확장을 꾀했다. 생활정치 이슈에서 정치적 이슈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경찰 및 보수진영과의 물리적 충돌이 늘어 나면서 자발적인 참가자들의 이탈이 두드러졌다. 시위방식과 방법 차원에서는 ‘횡단보도 건너기’, ‘1인 청와대 진입’ 등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드는 데는 지성의 힘을 발휘했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뀐 상황에서 촛불집회가 정치적 순수성과 비폭력, 자발적 참여 원칙을 지키면서도 어떻게 대처하고 변화해야 할 지 전혀 대안을 생산하지 못했다.

 

둘째, 촛불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혹은 동조하지 않는 집단에 대한 배타성과 불관용으로 스스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제한했다는 점이다. 특히 6.10 행사장을 찾은 정운천 전장관의 발언을 막은 것은 촛불 스스로도 정부와의 소통 의사가 없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당시 촛불집회에 동조하는 집단 내에서의 토론과 쌍방향적 소통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외 집단(관망 그룹과 반대그룹)에 대해서는 온∙오프 공간에서 강한 배타성을 보여주었다. 이번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보여준 집단지성은 동질적 그룹 내에서만 작동하는 한계를 보여주었고, 이는 그룹씽킹(group thinking)의 다른 모습이다.

 

6대 프로젝트

문화와 정체성

세부사업

한국인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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