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하영선_ EAI 이사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장, 미국학연구소장, 한국평화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통령 국가안보자문단 자문위원, 통일준비위원회 민간위원이다. 저서 및 편저로는《하영선 국제정치 칼럼 1991-2011》,《복합세계정치론 : 전략과 원리 그리고 새로운 질서》,《한일 신시대와 공생복합 네트워크》,《변환의 세계정치》등이 있다.

 

 

 


 

 

중국의 빠른 부상과 함께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 건축 논의가 미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지역에서 본격화되고 있다. 동아시아 질서는 역사적으로 전통 천하질서, 근대 국제질서, 현대 냉전질서를 겪은 후 미래 복합질서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복합화 시대의 동아시아 신질서 건축은 현재 두 핵심 문제에 직면해 있다. 첫 번째는 ‘팍스-차이메리카’(Pax Chimerica)의 부상이고, 두 번째는 아시아-태평양 복합질서의 미래이다.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역사적 변환

 

동아시아의 정치 공간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천하질서 속에 짜여져 왔다. 19세기 중반 서구의 근대 국제질서와 본격적으로 부딪칠 때 까지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천하질서의 기원은 서주(1046-771BC)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천명을 기반으로 한 천하국가의 명분체계를 시도하는 기원전 천 년의 전진(前秦)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 5패시대(771-453BC)에는 문화의 우열을 명분으로 하는 화이관이 등장하고 전국 7웅시대(453-2221BC)에는 보다 구체화된 구주도(九州圖)와 오복도(五服圖)의 천하질서관을 만나게 된다. 중국의 중원이 처음으로 통일된 진나라(221-206BC)와 한나라(206BC-220AD)를 거치면서 조공(朝貢)과 기미(羈縻)를 기반으로 한 포괄적 위계질서의 천하질서는 2기에 들어서서 명실상부하게 중국 전역을 포함하였으며, 위진남북조의 분열시기를 넘어 수(581-618)와 당(618-907)의 제국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송(969-1279)의 군사적 약화와 요(907-1125), 진(1125-1234), 원(1271-1368) 제국의 부상으로 “다국질서 속의 중국”(China among equals)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함에 따라 천하질서는 3기를 맞아 힘의 균형에 기초한 다국질서를 세우는 동시에 전통적인 조공제도를 유지하고자 했다. 천하질서는 명(1368-1644)과 청(1644-1911) 시기에 4기로 접어들어 역사이래 가장 복합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구체적으로 18세기 청조의 건륭제는 북쪽의 중가르 제국을 정복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티베트에 대해서는 강력한 매력공세를 펼치는 동시에 한국과는 전형적인 조공 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동아시아의 천하질서는 19세기 중반 유럽의 국제질서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중국은 1840년대에 아편전쟁을 겪었고, 일본은 1853년에 미국의 흑선(黒船)을 맞이했다. 한국은 조금 뒤늦게 프랑스와 병인양요(1866) 그리고 미국과 신미양요(1871)를 치렀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우여곡절 끝에 서양의 근대국제질서를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여야 했고,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지역 제국주의의 격렬한 각축에 휩쓸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아시아 질서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냉전질서의 틀 속에서 재건되었다. 1947년 미국은 서유럽에 소련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규모의 경제원조로 소련에 대한 비군사적 봉쇄정책을 시작했다. 1950년 6월,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도발로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미국이 개입하면서, 유럽에 한정되어 있던 비군사적 봉쇄정책은 아시아를 비롯하여 전세계에 걸쳐 군사적 수단까지 포함시킨 전면적 봉쇄정책으로 확대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상호 적대적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상호억지체제와 국내정치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일단 긴장완화 국면을 맞이했고 미국과 중국도 키신저-주은라이의 역사적 협상을 통해 긴장 완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한국과 북한은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긴장 완화에 실패하고 냉전의 악순환으로 되돌아 갔다. 1970년대의 데탕트 국제질서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기로 다시 신냉전 분위기로 되돌아 갔으나 1985년에 등장한 소련의 고르바쵸프가 내세운 새로운 정책 노선은 결과적으로 냉전 국제질서의 막을 내리게 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단순히 전세계적 냉전질서의 종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냉전질서의 퇴장은 곧 새로운 복합질서의 등장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21세기의 주인공, 무대, 그리고 연기의 역사적 변환은 19세기 동아시아가 경험했던 혁명적 변화에 버금가는 문명사적 변화를 예견하고 있다. 근대 국민국가들이 부강무대에서 벌여 온 치열한 경쟁과 갈등은 여전히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동시에 “네트워크 국가”라는 새로운 주인공들이 부강과 신흥의 복합무대에서 공동진화의 복합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21세기 동아시아 질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지속적 경제 성장이 계속되면서 동아시아에서는 ‘팍스 차이메리카’(Pax-Chimerica)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복합화의 세기를 맞이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복합 질서 건축 논의가 새롭게 진행 중이다.

 

 

팍스-차이메리카의 등장

 

탈냉전 이후 21세기 변환기 무대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국민국가 또는 국민제국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무정부적 국제질서 속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은 개별 국가가 우선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국내정치와 달리 국제정치에는 중앙정부가 없고, 생존과 번영을 위한 국제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부상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운데,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맞이하게 될 새로운 시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우선 동아시아 질서에서 군사력 분포를 살펴보면, 전세계 군사비 총 지출액(2014년 기준) 1조 7,800억 달러 중 6,100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는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비 지출은 현재 막대한 정부의 예산 적자 문제로 축소되고 있으나 여전히 세계 군사비 지출 상위 열 나라들의 총액을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미국의 군사력은 핵무기, 재래식 무기, 최첨단 무기 등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한편, 중국의 군사비 지출은 사상 최초로 2,000억 달러를 넘어섰고, 뒤이어 러시아가 845억 달러, 일본이 458억 달러, 한국이 367억 달러의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다.

 

다음으로 국민총생산(GDP)규모를 통해 동아시아 질서의 경제력 분포를 살펴보면, 2014년에 전세계 GDP총액 77.3조 달러 중 미국은 17조 4,000억 달러(22.5%)로 1위, 중국은 10조 4,000억 달러(13.5%)로 2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은 이미 2010년에 GDP 규모에서 당시 5조 달러의 일본을 앞질렀다. 2014년을 기준으로 아세안은 2조 3,000억 달러, 러시아는 1조 9,000억 달러, 한국과 호주는 각각 1조 4,000억 달러의 GDP를 달성하였다. IMF의 2020년 세계 GDP 추정치에 따르면, 미국은 22조 5,000억 달러로 세계 1위를 유지할 것으로 애상되나, 세계 2위의 중국은 미국 GDP의 70% 이상인 16조 2,000억 달러를 달성함으로써 세계 3위의 일본과의 격차를 점점 더 크게 벌릴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으로 동아시아질서의 지식력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2014 세계 싱크탱크 톱 20’ 조사에서 상위 20개 싱크탱크들 중 절반 이상이 미국에 위치하고 있어서 미국은 명실상부하게 이 분야의 세계 최강임을 입증했다. 그 밖의 주요 싱크탱크들은 모두 유럽에 소재하고 있으며, 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유일하게 일본 국제관계연구소(JIIA)가 선정됐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군사력, 경제력, 지식력의 분포 상황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첫째, 중국의 부상이 무엇보다도 눈에 띄며, 둘째. 미국의 상대적 우위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세에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국 대통령은 2014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이 축사를 했다. “미국은 단연코 세계 최강의 국가입니다.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는 주장은 역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당파 정치에 휩쓸린 사람들의 억측일 뿐입니다. 세계 어느 국가도 미국의 국방력을 따라오지 못합니다. 따라서 미국이 외부의 어떤 국가의 위협에 노출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으며, 실제로 우리가 냉전 시기에 겪었던 위험 수준에 미치지도 못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경제는 전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우리의 기업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입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미국의 에너지 자립도 또한 높아지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세계 역사상 어떠한 국가도 필적할 수 없는 초강대국으로서 동맹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바마는 급변하는 세계가 기회일 수 있지만 새로운 위협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미국의 미래 세대가 풀어야 할 질문은 미국이 세계를 주도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 어떻게 주도할 것인가에 있으며, 미국은 본국의 평화와 번영을 달성하는 데에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평화와 번영을 확대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전 국무부장관은 2011년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에 기고한 “미국의 태평양시대”에서 처음으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재균형전략(rebalance strategy)을 소개했다. 재균형전략은 6대 행동 방침으로 양자 안보동맹 강화, 중국 등 신흥세력들과의 관계 강화, 지역 다자기구의 참여, 무역과 투자 확대, 광범위한 해외 주둔군 유지, 민주주의와 인권의 증진을 들었다. 특히 클린턴 장관은 “우리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 서로 두려움과 오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국 일부에서는 중국의 부상을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으며, 중국 일부 역시 미국이 중국의 성장을 막으려고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번영하는 미국이 중국에 유익이고 번영하는 중국이 미국에 유익하다는 건 기정사실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2008년 개혁개방 선포 30주년 기념식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개혁개방이 신해혁명(1911) 및 사회주의혁명(1949)과 함께 중화민족의 부흥을 이끈 3대 혁명이고,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는 2021년까지 중국은 “높은 수준의 번영을 누리는 사회(高水平的小康社会)”를 건설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100주년을 맞는 2049년까지 “부강하고 민주적이고, 문명과 조화의 사회주의 현대화국가(富强民主文明和谐的社会主义现代化国家)"를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명 중국 2049”의 꿈을 이루려면 중국은 세 가지 딜레마를 극복해야 한다. 첫째, 중국은 지난 30여 년 간의 고도 경제성장에 성공하면서 그 결과 현재 성장과 복지가 충돌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동시에 중국경제가 장기적인 고성장을 달성하려면 공산당 1당 체제를 넘어서서 21세기형 정치체제를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중국은 21세기형 선진국이 되려면 기존의 편협한 일국중심의 민족주의 시각을 넘어서서 폭넓은 지구적 민족주의 시각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21세기 중국은 단순한 구미유형의 근대화를 넘어서서 지역화와 지구화를 동시에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 중국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신속하게 세 딜레마를 해결하느냐에 따라 그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시진핑 주석이 제시한 미국과의 ‘신형 대국관계’와 주변국들과의 ‘신형주변외교’를 골자로 하는 ‘신형 국제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중국 외교정책의 첫 번째 원칙으로 천명된 중미 신형대국관계에는 첫째, “분쟁 혹은 전쟁 방지”(不冲突、不对抗), 둘째, “상호존중”(相互尊重), 셋째, “상호 윈-윈을 위한 협력”(合作共赢) 등이 있다. 이는 중국이 적어도 2021년까지는 미국에 대하여 도광양회(韬光养晦) 전략을 유지할 것임을 보여준다. 중국은 21세기 전반기에는 군사적 대결은 회피하고 경쟁과 협력의 경제관계에 주력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지역질서를 구축하고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둘 것이다.

 

중국 외교정책의 두 번째 원칙으로 시진핑 주석은 신형주변국외교를 특별히 강조했다. 주변국 외교는 친(親), 성(誠), 혜(惠), 용(容)의 네 가지 핵심 가치를 기반으로 한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신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의 두 가지 주요 정책을 골자로 하는 개발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장기적인 목표로서 시진핑은 주변국과 ‘아시아 운명공동체’ 건설이라는 용어를 최근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국외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다음의 3대 핵심 이익을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첫째, 중국의 기본 국가체제 및 국가안보를 수호한다(维护基本制度和国家安全). 둘째, 국가주권을 수호하고 영토를 보전한다(国家主权和领土 完整). 셋째, 중국 경제와 사회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추구한다(经济社会 的持续稳定发展).

 

특히 남중국해의 영토 분쟁, 한반도의 군사적 정치적 문제, 일본과의 영토 분쟁 등의 위험이 존재하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은 신형대국관계와 신형주변국외교를 하나로 결합한 신형국제정치 원칙을 추진하려고 한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최근 남중국해의 영토분쟁에서도 영토 주권과 해양에서의 권리와 이익, 국가통합 문제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미국과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신복합질서 건축

 

아시아 태평양에서 미국의 재균형전략과 중국의 신형국제관계론의 만남은 새로운 팍스- 차이메리카 건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은 여전히 근대 민족주의 시대에 편협하게 정의된 국가이익의 이름으로 치열한 세력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팍스-차이메리카는 안보딜레마, 경제위기, 감정적 갈등 및 탈근대적 도전과 같은 위험들을 내재하고 있다. 우선 현재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 형세를 보면, 상호 전략적인 불신으로 미국 주도의 동맹과 중국간에는 안보 딜레마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아시아-태평양 경제에서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 대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ADB), 역내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 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Strategic Economic Partnership: TPP)이라는 구도의 비생산적인 경쟁이 벌어질 잠재적인 위험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지역 제국주의와 냉전의 역사적 잔재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 질서는 감정의 국제정치를 쉽사리 벗어나기 어렵다. 동시에 팍스-차이메리카는 환경, 문화, 디지털지식, 지구 거버넌스 등의 분야에서 탈근대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미중 양국이 기성대국과 신흥대국의 깨지기 쉬운 안정성을 성공적으로 유지해 왔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상호 전략적 불신을 감안하면 양국 관계가 전략적으로 악화될 수 있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다가오는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은 ‘신형대국관계’의 신화와 현실에 대해 격론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공화당의 시각에서 볼 때, 중국은 서구문명의 기준을 자발적으로 채택하는 ‘책임있는 이해당사자(responsible stakeholder)’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미국은 21세기 중국 외교정책을 보다 공세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양국의 직접적 군사 충돌 가능성은 낮지만 전략적 악화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증가하는 안보 딜레마 속에서 중국은 ‘신형 주변국외교’를 추진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국의 핵심 이익을 지키려 할 것이기 때문에,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 군사적인 대립의 위험성이 증가할 수 있다.

 

중국경제의 빠른 성장과 더불어, 미일이 주도해 온 아시아-태평양의 경제질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중국의 성공적인 위기 관리를 보면서, 팍스-차이메리카 경제질서의 가능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이 일본의 GDP를 앞지른 2010년에 이 논의는 본격화됐다. 비록 중국이 ‘신창타이(新常態)’의 경제성장률 목표를 7%로 낮춰 설정하고 미국의 경기가 성공적으로 회복됨에 따라 활발하던 팍스-차이메리카 논의는 한풀 꺾이는 추세이지만 중국이 올해 AIIB를 성공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중국 주도의 새로운 동아시아 경제질서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AIIB가 ADB와 경쟁하고 RCEP은 TPP와 경쟁하면서 지역 경제질서에서 중국의 입지가 확대될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현재 중국 정부가 동아시아의 공동번영을 위해 협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동아시아에서 예상할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복합 네트워크 경제의 새로운 건축일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체성 형성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몇 가지 주요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전통적 세계질서의 영향력이 여전히 중요하다. 중국 외교부장 왕이는 ‘호혜공영’으로 이루어진 신형 국제관계는 중국의 풍부한 문화적 전통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둘째, 아시아 국가들의 정체성 형성은 지난 150여 년간 서구 근대 민족주의의 세계적인 팽창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유럽 국가들은 이제 근대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반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아직까지 민족주의적 각축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따라서 19세기와 20세기 초 식민과 전쟁의 경험으로 빚어진 역사적 적대감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동아시아는 여전히 감정의 국제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현재 팍스-차이메리카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한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현재와 미래의 지역질서를 복합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건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첫째, 미중관계는 과거의 냉전적 대결관계를 탈피하여 오늘날 심화되고 있는 미국 주도의 동맹 네트워크와 확장되고 있는 중국 네트워크를 함께 엮어서 새로운 복합관계로 진화해야 한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건축하기 위해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중국과 같은 신흥 강대국과 강력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며, 동아시아 지역기구들에 참여하는 등 과거에 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재균형” 정책은 냉전질서의 봉쇄정책이 아닌 복합질서의 평화정책으로서 틀을 잡아야 한다. 더 나아가 미국은 아시아-태평양 주요 국가들과 함께 복합 네트워크를 설계해야 한다.

 

동시에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중국의 변화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021년까지 높은 수준의 전면적 소강사회를 건설하고, 2049년까지 동아시아 신질서 건축의 문명 표준을 제시하려면, 중국은 핵심이익과 함께 동아시아 및 세계의 복합적 이해관계에 맞추어, 발전과 복지의 조화, 정치적 민주화, 그리고 명실상부한 세계화의 3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이 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이러한 노력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수적이다.

 

중국의 빠른 부상에 직면하여 일본은 미국과 협력하여 19세기의 근대적 세력경쟁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복합시대에 19세기형 근대 모델을 추구함에 따라 일본은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주변국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일본도 당면하고 있는 21세기 과제를 21세기적으로 풀려면 동아시아 복합질서 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첫 번째 단계로서, 일본은 독도, 역사 교과서 왜곡, 평화헌법 개정 등의 문제를 비정치화시키기 위해 한국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두 번 째 단계로서 양국은 동시에 환경, 문화, 지식 같은 신흥 무대에서의 협력뿐 아니라 평화와 번영이라는 근대의 무대에서도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 세 번 째 단계로서, 장기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개별 정체성의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동아시아의 지역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현재의 단순한 자립과 협력의 외교 틀을 넘어서서 무대 위 다른 주인공들과의 복합외교를 개발하고 실천에 옮겨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한미일과 중국과의 관계는 냉전질서의 적대관계가 아니라 복합질서의 네트워크 관계로서 엮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심화되는 한미일 네트워크와 확장되는 중국 네트워크를 연결하여 함께 꿰매는 역할을 해야 한다. 더불어 한국은 21세기 복합외교의 일환으로 지역, 지구, 사이버 공간에 보다 촘촘하게 그물망을 넓혀나가야 한다.

 

북한은 20세기 중반 건국이래 19세기형의 반외세자주를 기반으로 하는 단순한 부강정책을 과도하게 강조해 왔다.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복합화의 21세기를 맞이해서도 김정일의 선군정책에 이어 경제-핵 병진노선을 생존전략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개발과 핵개발의 상호 모순 때문에 병진노선은 불가피하게 핵 없는 경제개발과 핵 있는 경제쇠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유럽과 달리 ‘근대적 사춘기’를 뒤늦게 겪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의 국제관계는 이해와 협력 대신 분쟁의 가능성이 항상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노력에만 의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국가 안팎의 복합적 주인공들을 엮어 긴밀하고 견고한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국제분쟁의 가능성을 줄이고 협력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둘째,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기존의 부강이라는 단순무대 대신 다보탑과 같은 삼층으로 된 복합무대 건설을 시작하고 있다. 이 복합무대에는 안보, 번영, 환경, 문화와 같은 이슈들이 중심 무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아래층에는 정보•지식의 기반 무대가, 맨 위층에는 정치 무대가 위치하고 있다.

 

21세기에 군사와 경제의 중심 무대는 국가이익뿐만 아니라 지역으로서의 아시아 태평양과 세계전체의 이해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 더욱이 중심 무대는 국내 시민사회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하는 번영과 안보의 무대로 변화해야 한다. 동시에, 근대 국제관계의 과도한 세력경쟁과 부의 경쟁이 빚어내는 부정적 효과를 완화하기 위해, 문화의 무대를 강화하여 국가정체성 및 지역정체성의 복합성을 양성토록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동아시아 지역이 당면하고 있는 환경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에너지•환경 무대의 중요성 또한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정보기술과 디지털지식의 급속한 발전이 복합 시대를 주도하면서, 지식 무대가 동아시아 ‘3층 복합무대’의 기반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지역 거버넌스를 책임지는 지역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복합 무대들을 성공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지역 거버넌스의 무대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셋째, 복합 주인공들은 복합무대에서 복합 연기를 펼쳐야 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여러 주인공들이 공생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무대를 오가며 자조(自助), 협력, 그리고 공진(coevolution, 共進)의 연기를 펼쳐야 한다는 얘기다.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주인공으로서 펼쳤던 연기를 보면 흡사 자기중심적인 늑대와 대단히 유사했다. 그러나, 세계의 주인공들이 정보혁명으로 인해 급속도로 상호 연결되면서, 주인공들은 보다 깊고 넓은 공간에서 먹이를 성공적으로 잡기 위해 끊임없이 그물을 짜는 거미의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21세기에 성공적 생존을 위해서는 늑대거미의 복합 연기를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아시아-태평양에서 21세기 배우, 무대, 연기가 복합변환에 성공한다면, 아름다운 복합질서가 건축되어 지나치게 편협한 근대 민족주의와 지나치게 광대한 미래 지구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태평양에서 21세기 배우, 무대, 연기가 복합변환에 성공한다면, 아름다운 복합질서가 건축되어 지나치게 편협한 근대 민족주의와 지나치게 광대한 미래 지구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다른 주인공들도 아시아-태평양의 복합질서를 미래 문명의 새로운 표준 모델로 채택하게 될 것이다. ■

 

※ 본 칼럼은 저자의 영문 논평인 “The Architecture of the East Asian Order in the Age of Complexity”를 수정 보완하여 국문으로 발간한 글임을 밝힙니다.

 

 

 


 

 

 

[EAI 하영선컬럼]은 국내외 주요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하영선EAI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의 분석과 전망을 통해 적실성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자 기획된 논평시리즈 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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