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지 뜻을 먼저 세워야만 한다. 반드시 스스로 성인(聖人)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한 개의 터럭만큼도 자신의 능력을 낮게 보고 그 목표로부터 물러서거나 다른 일로 미루려는 생각을 지녀서는 안된다.”


조선시대 ‘공부의 신’ 율곡 이이가 후학들에게 올바른 공부법을 알려주기 위하여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 제1장(立志)의 첫 부분입니다. 공부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대학원에 들어간 저에게 EAI 사랑방은 초심으로 돌아가 공부에 대한 뜻을 세우게 해주었습니다. 그 소중한 경험을 여러분들과 담백하고 솔직하게 나누고자 부족한 글 솜씨에도 불구하고 키보드 앞에 앉았습니다.

 

사랑방 손님과 하영선

 

제가 사랑방의 문을 두드리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하.영.선.이라는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국제정치학도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하영선 교수님과 함께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치학과 역사학 사이에서 학문적 정체성을 고민하던 저에게 사랑방에서 공부할 내용들은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방 제7기에 지원하였고,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의 한 구절처럼 사랑방은 저에게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아래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제가 두드리고 연 것은 사랑방의 문이었지만 사랑방이 두드리고 열어준 것은 저의 두뇌와 가슴이었습니다.

 

‘월화수목금금금’의 한 학기

 

한 주 한 주가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대학원과 사랑방을 병행하면서 한 학기 동안 ‘월화수목금금금’을 살았습니다. ‘월화수목’은 예습일기를 작성하기 위하여 리딩을 하느라 책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금요일의 연장 즉, ‘금금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금요일의 사랑방 수업이 끝나면, 교수님의 말씀과 리딩 내용들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서 이를 곱씹어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3일간의 ‘불금’을 보내고 내면 다시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서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사실 초반에는 ‘도대체 내가 지금 뭘 배우고 있는거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동주(東州) 이용희와 만청(晩晴) 하영선에서 시작하여 마키아벨리, 홉스, 칸트, 루소를 거쳐 카아, 니부어, 롸이트, 불, 모겐소를 넘어 모델스키, 왈츠, 포퍼, 쿤, 웬트 등에 이르기까지 정말 여러 학자들과 ‘지적 연애’를 하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학자들과 사랑에 빠졌었습니다. 모든 학자들이 매력적이어서 ‘지적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죄책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현실주의자야, 자유주의자야, 아니면 구성주의자야?” 이러한 물음을 머리에 이고 한 학기 동안 국제정치학의 역사를 달려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사랑방의 중반을 돌파했을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어지럽게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던 길들이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내가 왜 이 책들과 논문들을 읽고 있으며, 수업계획서가 왜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복합(複合)의 세계정치학, 그 빛줄기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서 혼란스럽고 어두컴컴했던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복합주의자가 되겠어!”라는 포부를 가슴에 품고 ‘나는 OO주의자인가’라는 물음의 짐을 머리에서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매주 양다리, 삼다리를 거쳐 숨가쁘게 지적 연애를 해서였을까요? 항상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제가 ‘모쏠(모처럼 쏠로)’로 보낸 한 학기였지만 외롭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외롭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랑방 동기들과 하영선 교수님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학문적 고민을 함께 나누던 사이에서 서로의 삶과 꿈을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하였습니다. ‘지적 유격훈련’을 같이 한 동기들 사이는 표현할 수 없는 유대감으로 뭉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영선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훈련병들이 해이해질 때면 따끔한 일침으로 전의를 다시 일깨우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내시지는 않았지만 항상 학생들 개개인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도해주셨습니다. 여러 학자들과 했던 ‘머리로 하는 연애’와 더불어 동기 및 교수님과 ‘마음으로 하는 연애’가 저의 두뇌와 가슴을 두드리고 또 열어주었습니다.

 

엉덩이로 하는 공부, 발로 하는 공부

 

한 학기 동안 연애도 했겠다, 우리는 식도 올리지 않은 채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2박 3일간의 일본답사는 ‘엉덩이’로 하던 국제정치학 공부를 ‘발’로 하는 신선한 체험이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가장 좋은 착상들은 책상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하며 찾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중략) 완만한 오르막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라든지 아니면 그와 비슷한 경우”에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러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책만 읽었을 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생각과 상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일본 근대사의 현장을 직접 거닐고 역사의 공기를 마시며 이론이 아닌 삶으로서의 국제정치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기들의 발표를 안내자로 삼아 데지마, 글로버 가든, 아리타 도자기 박물관, 일청강화기념관,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등에서 시공간여행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말(言)과 길(道)을 따라가다가 보면 어느새 저는 동양과 서양 그리고 전통과 근대의 교차로에 서있었습니다.

 

일본 근대사의 분기점이 된 장소들을 둘러보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매일 저녁 사케 한 잔과 함께 동기들 및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는 길지 않은 인생 동안 겪은 성공과 실패, 사랑과 실연 등 각자가 지니고 있는 삶의 빛과 그림자를 공유하였습니다. 개인의 인생을 하나의 역사라고 했을 때 모두가 역사의 분기점이라고 할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갈수록 서로에게 털어놓는 속마음도 깊어져 갔습니다.

 

사랑방을 나오며: 손님에서 주인으로

 

“사람에게 태어날 때부터 빈부귀천의 구별은 없다. 오로지 학문을 열심히 닦아 사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귀한 사람이 되고 부자가 되며, 무학(無學)인 사람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학문의 권장>의 한 대목입니다. 빈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에도 어떤 직업을 갖든 학문이 귀천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의 많은 부분은 학문 즉, 공부에 달려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자기완성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문을 통해 “일신(一身) 독립하고, 일가(一家) 독립하고, 일국(一國) 독립”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학문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지적으로 종속되지 않게끔 해주며 이러한 독립적 사고는 자유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유란 결국 내가 내 운명의 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국제정치학도로서 저는 지금까지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학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방 수업을 통해 동서고금 국제정치학을 살펴보면서 지적 독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나가 다가오는 복합의 세계에는 우리가 스스로 표준을 세우고 전파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신, 일가, 일국의 독립을 넘어 천하(天下) 독립의 기틀을 짜야만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지 못해서 겪어야만 했던 지배와 분단 그리고 전쟁이라는 지난날의 비극들과 단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두서 없이 길어진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사랑방의 문을 두드렸을 때 저는 비단 사랑방의 손님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에 있어서도 ‘손님’이었습니다. 주체적으로 사고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이론과 용어를 빌려서 세상을 바라보고 거들먹거렸습니다. 하영선 선생님과 사랑방에서의 한 학기 공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식론과 더불어 존재론적으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습니다. 일곱 번째 손님들 중 하나였던 제가 사랑방의 문을 나설 때는 내 삶의 ‘주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도 이제 사랑방의 ‘손님’이 되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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