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I 워킹페이퍼] 자유주의 시리즈 ②_ 사회적 자유주의와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 문제
자유주의 | 워킹페이퍼 | 2022-03-16
최태욱
한국리버럴아츠센터 센터장
자유주의는 경제적, 진보적, 사회적이란 수식어와 함께 다양한 형태로 변해 왔지만, 최태욱 한국리버럴아츠센터 센터장은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자유주의의 목표는 늘 같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 대다수인 약자의 이익을 대표할 대리인이 없으므로 한국의 87년 체제는 제대로 된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설명합니다. 본 보고서는 사회적 자유주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EAI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양극화와 진영대결, 민주주의의 후퇴, 국가 개입의 확대, ‘차별’과 ‘불공정’ 시비 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이념으로 자유주의에 주목합니다. 4인의 저자는 한국 현대사에서 자유주의가 갖는 정파적 성격, 이론적 장점과 단점을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에서 고찰하고 미래 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가능성의 논거를 제시합니다.
I. 서론: 만인 평등사상인 자유주의와 그 구현 방안
국가 혹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자유를 누리는 일이 과연 가능한 걸까? 이상에 불과한 거라면,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그 이상에 근접할 방안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이 글에서는 적어도 한국의 경우에서는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방안일 거라고 주장한다.[1] 왜 그렇다는 것인지 그 논거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형성된 자유주의는 만인 평등사상에 의거한 시민혁명을 통해 절대군주제와 신분제 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평등한 시민사회를 건설하는데 기여한 진취적인 사회사상이었다(이근식 2009). 그런데 19세기에 들어 그 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자유시장주의로 변질되면서, 즉 자유주의란 곧 경제적 자유 지상주의인 것처럼 왜곡되면서 자유주의의 평등 지향적이며 역동적인 정신은 시장과 자본가들에 의해 결박되었다. 자유주의는 무기력해졌고, 그것은 그저 권력과 돈 많은 사람들을 더 이롭게 하는 수구 이념으로 전락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이 터무니없는 상황을 바로잡고자 자유주의의 진보성 회복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존 스튜어트 밀, 토머스 힐 그린, 레너드 홉하우스 등이 앞장섰던 ‘사회적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수정주의의 부상이 그것이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시대라고 불리던 19세기의 전 기간 동안 유럽 선진국들에서는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국부는 엄청나게 늘었으나 빈부격차의 심화로 인해 노동자 등 시민의 대다수는 오히려 더욱 비참한 환경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사회적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시민 대다수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빈곤, 실업, 대자본가의 횡포, 공공재 부족 등과 같은 자본주의의 폐해인 세상이 되었으며,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시장 개입이 필수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경제적 자유주의로 변질된 ‘고전적 자유주의’로부터 벗어나 사회적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독자적 자유주의 노선이 탄생한 것인데(Kloppenberg 1986), 그것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의 빈곤과 소외, 그리고 공포로부터의 자유 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자유주의 이념이었다. 이후 최소정부주의 혹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앞세우거나 수용하는 그 이전의 자유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 사회적 자유주의류의 사상을 ‘진보적 자유주의’로 부르기도 했다.
사회적 자유주의의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인 J. S. 밀이 『자유론』에서 강조했던 그 유명한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를 서병훈의 번역문을 통해 상기해보자(밀 2013 177). “각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에 해를 주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칠 때 사회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각 개인의 자유는 타인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을 때에만 허용된다는 것인데, 이근식은 이를 밀이 천명한 자유주의의 제 1원칙이라고 하였다(이근식 2011 38-39).
밀의 이 원칙은 자유는 만인 평등사상을 전제로 하는 가치임을 다시 한번 명확히 밝힌 것이다. 만인이 평등하게 중요하므로, 누구의 자유도 부당하게 침해 되서는 안 되는 것이며, 따라서 각 개인의 자유는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원칙대로라면, 과거 유럽에서 일반 시민들이 왕족과 귀족들이 전유했던 정치권력 혹은 정치권력 행사의 자유를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시민혁명을 통해 제한했듯이,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한 19세기에는 부자와 대기업 등 경제권력자들의 시장에서의 자유를 사회적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규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젠 (과거 민주주의 이전 시대의 정치권력자와 비슷한 양상으로) 경제권력자의 무제한적인 권력 행사가 일반 시민들에게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사회적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는 이제 경제권력자들의 자유를 민주적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 사회적 자유주의 사상은 널리 퍼져나갔고, 그 결과 적어도 구미 선진사회에서는 자유주의란 곧 사회적 자유주의를 의미하는 진보적 이념인 것으로 인식될 정도가 되었다. 영어 단어 리버럴(liberal)이 진보적인 혹은 진보주의자라는 뜻으로 쓰이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자유주의는 그렇게 본래의 진보성을 회복해갔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그 진보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복지국가 혹은 수정 자본주의 체제가 선진 각국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상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주의는 어느 때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다른 때에는 경제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다. 경제적 자유를 외치던 고전적 자유주의가 사회적 자유를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로, 그리고 심지어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로까지 발전해가는 까닭이다. 강조점은 이처럼 시의에 따라 적절히 달라지나,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늘 동일하다. 모든 개인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자유,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의 자유 수호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지상과제이다. 이 자유를 훼손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집단이나 조직의 권력은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제한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 권력은 정부일 수도 있고, 대기업이나 언론, 혹은 종교 집단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가 그리도 중시하는 만인의 평등한 자유는 무엇으로 수호하는가? 사회적 자유주의는 일반 시민들의 가난과 불안,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는데, 과연 그 사회적 자유를 이를테면 경제권력자로부터 보호할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유 수호의 구체적 기제에 대한 질문이다.
II. 사회적 자유주의의 방법론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활성화
상기한 바와 같이, 자유주의의 형성기부터 그 주창자들은 자유 수호의 제도적 기제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꼽았다. 즉 모든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전제로 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의해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결정한 법, 제도, 정책 등에 따라 그 범위 내에서 국가가 시장경제에 개입하고 조정함으로써 사회정의와 사회평화를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 민주국가 혹은 민주사회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요컨대, 사회적 자유주의의 방법론은 민주주의 확대론 그 자체이다. 자유 시민을 부당하게 옥죌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권력에 대하여 민주적 통제를 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결국 민주 정치의 운영을 통해 강자와 부자에 대한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대항력 혹은 ‘길항력’(countervailing power)을 길러주고 유지해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사회적 자유주의 실현의 핵심 기제가 바로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정치적) 길항력의 제공이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사실, 교과서적 개념을 따르자면, 한국의 87년 체제는 제대로 된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라고 하기도 어렵다. 대의제 민주주의란 민주국가의 주인인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그들을 통하여 국가공동체를 간접 운영하는 민주주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수의 시민이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를 갖지 못하고 있다면, 즉 대표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어있다’라고 한다면, 그러한 상태에 있는 국가를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라고 인정하기는 곤란하다. 그런데 한국 시민의 대다수는 자신들의 선호와 이익을 대표하는 유능한 정치적 대리인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그들 중 누가 자신들의 유력한 정치적 대리인을 갖고 있는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본 소임은 일반 시민들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줌으로써 그들이 사회경제적 강자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길항력을 갖추게 하는 데에 있다. 노동이 자본과, 중소상공인이 대기업과, 청년이 장년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과 적어도 정치의 장에서는 동등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자유와 평등을 수호할 수 있는 정책과 법, 제도 등은 적절하게 공급될 수 있다. 87년 체제의 수립 이후 만약 대의제 민주주의가 본령대로 활발히 작동하고, 따라서 정치가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시장에서의 길항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왔더라면, 한국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수준, 따라서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자유의 수준은 지금쯤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87년 체제는 약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했다. 그들을 정치 및 정책 과정으로 포용해내질 못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양극화의 고착이 그 결과였던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국가 구성원의 대다수인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선호와 이익, 즉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기만 한다면, 사회적 자유의 제도적 보장, 곧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은 지금부터 시작해도 충분히 달성 가능한 일이 된다. 단, 그러기 위해선 헌정체제의 개혁이 불가피하며, 그 핵심 목표는 정치적 대표성을 시민들에게 두루 보장함으로써 ‘포용의 정치'(politics of inclusion)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한다(Crepaz and Birchfield 2000).
포용의 정치란 이해관계가 서로 부딪히는, 즉 갈등 관계에 있는 주요 정치 및 사회경제 세력들이 한 정치체제 안에 모두 ‘포용 되어’ 그 내부의 정치 및 정책 과정에 항상 ‘동등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정치를 일컫는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모든 갈등 주체들이 정치 및 정책 ‘권력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 간의 갈등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스스로들 풀어가게 하는 정치를 의미한다. 갈등이 심한 나라에서 권력 공유라는 이 해법을 통해 약자의 사회적 자유가 부당하게 침해되는 것을 막아주고, 그럼으로써 사회통합을 성공적으로 유지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런데,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갈등 관계에 있는 집단과 시민들의 정치 및 정책 과정 참여는 기본적으로 정당을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 중소상공인, 청년구직자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익과 선호는, 자본가와 대기업 등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을 대변하는 유력 정당들이 존재할 때에만 정책 결정 과정에 효과적으로 반영될 수 있다. 따라서 (경제) 권력에 대한 상시적인 민주적 통제는 이들 약자집단을 포함한 사회의 주요 갈등 주체들을 제대로 대표할 수 있는 복수의 정당들이 의회에 포진해있고, 그들이 정부를 구성하며, 국가를 운영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결국, 정당정치의 발전이 정치적 대표성의 공평한 보장, 대의제 민주주의와 포용 정치의 순작동, 그리고 사회적 자유주의 구현의 전제라는 것이다.
III. 사회적 자유주의의 구현을 위한 정당정치의 발전과 선거제도 개혁
1. 한국의 전근대적 정당 체계와 그 원인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요 상품은 정책, 법, 제도 등이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곳에서) 상품의 주 공급자는 정당이다. 그리고 소비자는 각기 1인 1표를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이다. 시장이 공정하고 자유롭다면, 다수의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잘 만들어 적시에 제공하는 정당은 성하고, 그렇지 못하는 정당은 쇠하기 마련이다.
작금의 한국적 상황에서 가장 많이 팔릴 정치 상품은 필경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구직자 등과 같은 소위 ‘약대(弱大) 집단’의 필요와 선호를 겨냥한 정책, 법, 제도 등일 것이다. 그들은 각기 800만, 700만, 600만 명 등으로 헤아려질 정도로 그 규모가 큰 집단들인 데다, 사회경제적으로는 취약하기 그지없는 약자들인지라 자기들을 보호해줄 정치 상품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듯 구매 의욕이 강렬한 거대 소비자 집단이 여러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시장에는 이들을 주 고객으로 삼는 유력한 정당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기이 하달만큼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1987년을 기점으로 정치시장의 자유, 곧 정치 민주화가 선포된 지 3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말이다.
87년 민주주의 체제에서 성하다는 정당은 이 거대 소비자 집단이 원하는 상품을 공급하겠다고 하는 계층 기반 정당들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그저 특정 지역을 대표하겠다고 하는 지역 기반 정당들이다. 성장, 분배, 안보 등과 관련된 주요 정책, 법, 제도 등에 관한 지역별 선호와 그 강도 차이가 크게 다를 리가 없는데도 그러하다. 예컨대, 호남과 영남의 비정규직 노동자나 영세자영업자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에 대한 정책 선호를 서로 달리하면 얼마나 달리하겠는가?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상당한 규모와 세를 갖춘 ‘호남당’이나 ‘영남당’은 있어도 ‘노동자당’이나 ‘소상공인당’ 혹은 ‘청년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은 한국의 정치시장에서 소외 또는 배제돼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자신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품을 구하지 못해 늘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민주화를 이룩한 지 30여년이 지나도록 한국의 정당 체계가 여전히 전근대적이기 때문에 이런 기이하고도 안타까운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데, 정당 체계가 아직 그 모양인 까닭은 87년 헌정체제가 소위 ‘독종’ 다수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최태욱 2014, 82-83). 87년 체제는 기본적으로 양대 정치제도에 의해 운영된다. 하나는 소선거구 1위 대표제 중심의 국회의원 선거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제왕적 대통령제이다. 문제는 이 두 제도 모두 (지역주의와 결합하여) 인물 혹은 지역 중심의 독과점적 정당 체계의 형성 및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2] 이것이 바로 포용이 아닌 ‘배제의 정치’(politics of exclusion)가 작동하는 87년 체제의 핵심 문제이다.
정당정치 차원에서 말하자면, 포용의 정치란 국가의 정치 및 정책 과정에 모든 정당이 (지지율에 비례하는) 참여 권한을 두루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그리하여 각 정당이 대표하는 모든 시민과 이익집단이 정치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강자와 다수자를 대표하는 한 두 정당이 여타 정당 모두를 밀어내고 입법부와 행정부의 정치권력을 독과점하는 배제의 정치 혹은 승자독식 정치와 대립하는 개념이다.
이 포용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이른바 ‘포용 국가’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경제 정책이나 사회 정책 결정 과정에 항상 약자를 대표하는 유능한 정당이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나라라고 한다면, 그 나라에서 약자가 선호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강화 정책 등이 채택될 가능성은 항상 높기 마련이다. 정당정치의 활성화가 포용의 정치를 작동케 하고 그 포용의 정치가 경제의 민주화 수준을 높여 (노동자나 중소상공인 같은 경제적 약자를 중시하는) 포용 경제를 견인하며, 복지국가 발전 수준을 높여 (장애인, 다문화인, 청년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포용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그래서 정확한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포용의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선, 즉 약자의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헌법과 법률의 관련 조항들을 모두 손질하여 현대적 정당 체계가 들어서고 정당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대표성을 보장하는 현실 주체는 결국 정당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다양한 이익집단들을 균형 있게 효과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여러 정당이 포진해있고, 국가의 정치적 결정이 이들 정당에 의해 이루어질 때 포용의 정치가 작동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예컨대 노동이나 중소상공인 등과 같은 주요 이익집단들을 대표하는 정당(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무력한 경우에는 사회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선호와 요구는 정치과정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반면 대기업과 같은 특정 강소집단의 이익은 과도하게 대변될 수 있다. 그런 데서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의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약자 배제의 정치가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포용의 정치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포함한 모든 시민의 이익과 선호를 있는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유력 정당들의 상존을 핵심 요건으로 한다는 것이다.
상기한 대로, 87년 헌정체제에서는 호남이나 영남과 같은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거대 정당 중심으로 정당정치가 이루어져 왔다. 정당의 구심점은 이념이나 가치 혹은 정책 기조라기보다는 특정 지역민 즉 호남인이나 영남인 등의 기대와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역 명망가가 제공해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러한 전근대적인 지역 혹은 인물 중심 정당 체계는 (전국에 산재해있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정치적 대표성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한다. 당의 주 기반이 사회경제적 계급, 계층, 부문 등이 아니라 단순히 특정 지역이기 때문이다.
현시기 한국의 사회경제 상황에서 정치적 대표성 보장이 가장 시급하고 절실하게 요청되는 집단은 누가 보아도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이다. 그들 중의 상당수가 아직도 가난과 실직, 기타 사회경제적 공포로 인해 불안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에게도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자유를 제공해야 한다. 정치적 해법 말고는 달리 취할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현 정당 체계 내에는 이들을 대표하는 유력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지금의 헌정체제 아래에서는 앞으로도 그런 정당은 등장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2.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과 선거제도 개혁
한국의 사회적 자유주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헌정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87년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정치제도를 과감하게 뜯어고쳐야 한다. 제도 개혁의 방향은 정해져 있다. 승자 독식형 다수제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권력공유형 합의제 민주주의로 발전해가도록 해야 한다.
상기한 바와 같이, 사회의 주요 갈등 주체들을 대표하는 복수의 유력 정당들이 의회에 (이념과 정책 기조의 차이에 따라) 좌우로 배열해있고, 그들이 (주로 연립의 형태로) 정부를 구성하며, 국가를 (승자독식이 아닌 권력 공유의 방식으로) 운영해가는 것을 정당 민주주의의 활성화와 그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개 다수제가 아닌 합의제 민주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발전상이다. 합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적 특성은 정책과 이념 중심의 다당제가 발전해있다는 것인데, 그 다당제는 비례성 높은 의회 선거제도와 연정형 권력 구조와 상호 맞물려 작동한다. 말하자면,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가 정책과 이념 중심의 다당제를 견인하고, 유력 정당이 여럿인 까닭에 어느 한 당이 단독과반을 차지할 수 없는 상황이 일상화되면서 합의제형 권력 구조가 제도화되며, 그것은 다시 다당제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대한 정당 체계 결정 변수는 선거제도이다. 예컨대, ‘뒤베르제의 법칙’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로,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양당제를,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견인한다. 결국,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점유율 간의 비례성이 보장되는 새로운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우리 사회의 다종다양한 선호와 이익을 제대로 대리할 수 있는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이 공히) 10%대인 정당(들), 20%대인 정당(들), 30%대인 정당(들) 등이 다채롭게 부상함으로써 포용 정치 작동의 전제 조건인 정책, 가치, 이념 중심으로 ‘구조화된 다당제’가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19년의 선거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선거제도는 여전히 비례성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중심의 것이다. 더구나 이 불 비례적 선거제도는 지역주의와 결합하여 작동하고 있다. 그러니 선거제도가 야기하는 민의 왜곡 현상은 심각한 지경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특정 정당에 의한 지역 독과점 체제의 유지가 그 문제의 핵심 중 하나이다.
한국과 같이 지역주의가 여전히 선거 정치의 주요 변수로 작동하는 나라에서는 이념이나 정책을 중심으로 결성된 전국 정당 후보가 소선거구에서 해당 지역에 뿌리내린 기존의 지역 정당 후보들을 제치고 1위에 당선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영남당이나 호남당 등과 같이 지역에 기반을 둔 거대 정당 출신 후보는 소위 지역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으므로 ‘외지’ 정당이나 전국 정당 출신의 경쟁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늘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반드시 50%가 넘는 득표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자들에 비해 단 한 표라도 더 얻으면 1위로 당선되는 상대다수대표제는 필요하면 언제든 지역감정에 호소하여 지역표의 동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지역 정당 후보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선거제도이다. 요컨대, 지역주의와 결합한 소선거구 일위대표제가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중심으로 남아있는 한, 이념과 가치, 정책 중심의 다당제가 발전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전면 비례대표제의 도입이나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로의 개혁은 지금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한국의 정치적 과제이다. 2019년의 선거법 개정은 (개악이 아니라고 한다면 기껏해야) 미완의 개혁으로 그쳤기 때문이다.
의회 선거제도의 비례성이 낮은 국가들 가운데에서 정책과 이념 중심의 구조화된 다당제가 발전하여 포용의 정치와 합의제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작동한 예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발전 수준이 높은 나라, 곧 사회경제적 약자의 이익과 선호를 제대로 보호하고 보장해주는 나라는 거의 예외 없이 비례대표제-합의제 민주주의 국가이다. 한국에 있어 사회적 자유주의의 구현은 선거제도의 개혁을 필요로 하는 일인 것이다.
IV. 결론: 또다시 선거제도 개혁!
2019년은 한국이 드디어 비례대표제 국가가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충만한 해였다. 그 직전 해인 2018년 12월에는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의 소위 ‘야3당’ 지도자들의 단식과 천막 농성, 그리고 시민사회의 개혁 촉구 운동 등이 혹한 속에서 열흘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그리고 여론은 선거제도 개혁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과 현재의 국민의힘인 자유한국당(이하 ‘자한당’)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그 두 거대 정당은 상당한 부담을 느끼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비로소 개혁 논의에 진전이 생겼다. 그리하여 결국 그달 중순에 여야 5당 원내대표가 모여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한다’라는 내용의 합의문을 발표했다. 그 후에도 수차례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어쨌든 2019년에 들어서면서 선거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선거법 개정의 취지는 물론 시민사회의 오랜 염원에 부응하여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논의 과정 중에 양대 정당은 끊임없이 정파적 이기주의 행태를 보였다. 그로 인해 법 개정의 취지는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2019년 말에 새 선거법이 도입되긴 했으나, 그 덕분에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비례성이 안정적으로 올라가고 그에 따라 다당제가 발전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로 새 법의 내용은 부실했다.
사실 87년 체제에서 양대 정당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도 양당제의 혜택만큼은 공유해왔다. 따라서 두 당은 공히 다당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의 도입을 꺼려왔다. 그런데 2019년에 들어 민주당이 바뀌었다. 공수처법의 통과에 필요한 군소정당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그들이 간절히 바라온 선거제도 개혁에 협력할 용의가 생긴 것이다.
실상은 부정적이거나 기껏해야 소극적이기만 하던 민주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드디어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자 군소정당은 흥분했다. 민주당의 태도가 바뀌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개혁을 마감해버리자는 욕심이 앞섰다. 그리하여 그들은 선거제도 개혁은 본래 합의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함인데, 그 개혁의 추진을 (합의 과정을 생략하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 붙여보자는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채택한 방식이 소위 ‘패스트트랙 연대’였고, 이른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그 ‘다수파 연대 전략’의 결과물이었다.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함이라는 선거제도가 ‘다수제’적 방식에 의해 상당히 강압적으로 채택된 것이다.
그러니 자한당은 대놓고 반발했고, 온갖 편법을 당당하다는 듯 동원했으며, 개정 선거법의 취지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려 들었다. 위성정당 세우기는 그 일환이었다. 그보다 더 가관인 것은 민주당의 태도였다. 군소정당들과 연대하여 선거제도 개혁을 완수하겠다던 민주당이 자한당과 똑같이 위성정당을 만들어 자기네가 앞장서 개정한 새 선거법을 형해화 시켜버린 것이다.
2020년의 총선 결과는 현행 선거제도 아래에서 한국의 정당정치 즉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향후 어떻게 전개되어갈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바로 양당제의 강화, 승자독식 민주주의의 심화, 배제의 정치와 대결 정치의 악화, 민주주의의 정치적 대표성 제공 기능 및 사회 갈등 조종 기능 약화 등이다. 이 상황에서 사회적 자유주의가 발전할 여지는 거의 없다.
선거제도 개혁은 다시금 추진돼야 한다. 그리고 그 개혁은 반드시 비례성 강화를 목표로 한 개혁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지역에 기반을 둔 작금의 독과점적 정당 체제를 혁파하고 민의 반영이 충분히 이루어지는, 즉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대표할 수 있는 포용적 정당 체제, 그리고 그에 기반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확립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한국은 이른바 ‘독종’ 다수제 민주주의 국가이다. 승자독식-패자전몰의 대결 정치가 난무한 한국의 정치에서 약자와 소수자의 자유가 효율적이고 지속적으로 보장되길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사회적 자유주의 수준이 유의미하게 높아질 가능성은 작금의 87년 다수제 민주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매우 낮다는 의미이다. 다수제 국가가 합의제로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가기 위해선, 그리하여 국민 누구나가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승자독식형 선거제도를 권력공유형 선거제도로 바꾸어야 한다. 제대로 된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사회적 자유주의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가장 효과적인 방안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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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식. 2011. “진보적 자유주의와 한국 자본주의” 최태욱 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서울: 폴리테이아
최태욱. 2011. “한국형 조정시장경제와 합의제 민주주의” 최태욱 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서울: 폴리테이아
최태욱. 2014.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 서울: 책세상
밀, 존 스튜어트. 2013. 『자유론』. 서병훈 옮김. 서울: 책세상
Crepaz, Markus M., and Vicki Birchfield, 2000. “Global Economics, Local Politics: Lijphart's Theory of Consensus Democracy and the Politics of Inclusion." eds., Markus Crepaz et al. Democracy and Institutions: The Life Work of Arend Lijphart. 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Kloppenberg, James. 1986. Uncertain Victory: Social Democracy and Progressivism in European and American Thought, 1870-1920.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Lijphart, Arend. 2012. Patterns of Democracy: Government Forms and Performance in Thirty-Six Countri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 이 글은 필자의 편저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의 서문과 8장에서 관련 내용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수정․보완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는 레이파트(Lijphart 2012)가 분류한 민주주의의 양대 유형의 한 축을 이루는 개념이다. 다른 축인 ‘다수제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를 승자독식형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이 합의제 민주주의는 권력공유형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2] 따라서 포용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는 선거제도의 개혁과 권력 구조의 개편이 양대 과제일 터이나 이 글에서는 선거제도 개혁 문제에 집중한다.
■ 저자: 최태욱_한국리버럴아츠센터 센터장. 미국 UCLA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동대 교수,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창비 편집위원,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복지국가의 정치경제, 동아시아경제통합 등이다. 주요 저서로는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편저), 《복지한국만들기》(편저),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 《청년의인당》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윤하은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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