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EAI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양극화와 진영대결, 민주주의의 후퇴, 국가 개입의 확대, ‘차별’과 ‘불공정’ 시비 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이념으로 자유주의에 주목합니다. 4인의 저자는 한국 현대사에서 자유주의가 갖는 정파적 성격, 이론적 장점과 단점을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에서 고찰하고 미래 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가능성의 논거를 제시합니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됨에 따라 자유주의는 모든 사회적 부조리의 구조적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비판의 대상은 자유주의 이념 자체가 아닌 자유주의 가치를 반영한 사회제도 및 사회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성우 서울대 교수는 현시점에서 자유주의가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곳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유용한 이념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자유주의의 근본 가치를 돌아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본 보고서는 자유주의의 정치 사상적 기원을 분석하고 자유주의와 다른 이념과의 관계를 논하면서 자유주의의 가치를 확인합니다

I. 자유주의의 현주소: 과잉과 결핍의 역설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양극화가 노골화하면서 자유주의는 여러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자유주의는 모든 사회적 부조리의 구조적 원인으로 지목되곤 한다. 국내외적으로 편차가 있긴 하지만, 21세기 들어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담론이 거세다.[1] 이제 자유주의는 이념으로서 그 수명을 다한 것일까?

 

그런데 자유주의 비판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비판의 대상은 자유주의 이념 자체라기보다 그 이념과 친화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회제도 혹은 사회 현상에 관한 것이다. 이념과 사회 현상 간의 인과관계를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은 채, 불만족스러운 사회 현상을 전제로 이념을 비판하는 것은, 이념의 목적을 왜곡하고, 보존해야 할 가치를 부당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자유주의 비판에는 이러한 징후가 보인다.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종종 사회적으로 이목을 끄는 불공정 이슈나 불평등 이슈를 자유주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자유주의라는 이념을 희생양 삼아 자신의 정파적 이익을 추구한다. 이들에게 자유주의는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의 이념에 불과하다. 물론 자유주의를 열심히 변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유주의의 원초적 가치를 변호하기보다 자유주의 비판자들의 반대편에서, 역시 정파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자유주의를 활용할 뿐이다.

 

이념이 현실정치에서 정파적 도구로 쓰이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념이 전적으로 정파적 도구로 전락하게 되면 그 이념은 형해화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의 경우도 그 근본 가치는 후퇴하고, 정치적인 유불리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재단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가 왜 지금껏 자유주의를 옹호해 왔는지, 그리고 그 가치가 헌법에 담겨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잊어버릴 수 있다. 모든 이념은 적당한 때가 되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이념을 통해 수호해야 할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에 대한 편견으로 그것을 놓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자유주의의 근본 가치에 대한 재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현 상황에서 제기해볼 만한 첫 번째 질문은,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불만이 과연 자유주의 이념 자체, 혹은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가치 자체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의 적용 방식, 즉 자유주의가 적용되어야 하는 범위와 정도에 대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일견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혐오와 탄식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이 경쟁과 이익 추구라는 ‘시장 논리’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과 경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경제 영역에서 시장 논리를 수용하더라도, 정치, 교육, 문화의 장에서까지 시장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지나친 확대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 비판의 공통분모는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 자유주의의 ‘지나친’ 확대, 자유주의의 ‘과잉’에 대한 불만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의 ‘지나친’ 확장을 자제하고 그것의 ‘적정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자는 자유주의의 과잉에 대한 우려와는 정반대로 자유주의의 결핍을 문제 삼는다. 마땅히 지켜져야 할 자유주의의 가치가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러면 자유주의가 오롯이 유지되어야 하는 영역은 어디인가? 무엇보다도, 유지되어야 할 자유주의의 가치는 무엇인가? 시장 논리로 대표되는 경제적 자유주의 이외에 어떤 것들이 자유주의의 가치인가? 이 글은 이러한 자유주의의 과잉과 결핍과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을 짚어 보면서 궁극적으로 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와 국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이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한때, 자유주의가 이념으로서의 가치를 선명하게 드러낼 때가 있었다. 전체주의가 전 세계를 위협했던 2차 대전 전후의 얘기다. 당시 자유주의는 전체주의의 비인간적 행태에 대항할 인류의 이념적 보루였고, 정치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이상으로 여겨졌다. 이후 냉전기에는 공산주의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이념으로서 자유주의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제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의 위협은 상존하지 않는다. 자유주의를 이념적으로 선명하게 내세울 만한 ‘사악한’ 이념은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이념적 유용성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유주의의 가치와 그 유용성을 설득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자유주의의 정치사상적 기원을 살펴봄으로써 자유주의의 가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로써 자유주의에 대한 학술적 엄밀성을 추구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논하는 것은 학술적 엄밀성과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 그보다는 우리가 왜 자유주의를 비판하거나 옹호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로서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기원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글의 목적 중 하나는 자유주의의 정치사상적 기원을 검토함으로써 자유주의가 어떤 가치를 갖고 출발했는지를 보다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 가치를 계속 존중하고 유지할 것인지, 21세기에는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두 번째는 자유주의와 우리 공동체가 추구하는 다른 이념과의 관계를 논하면서 자유주의의 유용성을 타진하고자 한다. 예컨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공정 문제와 자유주의의 관계를 검토해 볼 것이다. 어느 사회든 공정은 중요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공정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횡행하는 것처럼 최근 공정의 문제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공정을 주장하는 이들 간의 갈등과 대립의 불씨가 되었다(김석호 외 2021). 이 글은 공정의 경우처럼 논란의 중심이 되는 이념과 자유주의와의 관계를 논할 것이다. 공정 이외에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있으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가치들에는 민주주의, 법치, 보수주의 같은 것들이 있다.[2]

 

현재 우리 사회는 여러 이념의 적용 범위와 정도, 그리고 가치 간의 우선순위 등을 두고서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여러 이념과 자유주의의 관계를 논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이념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자유주의의 거울에 비춰보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가 다른 모든 이념과 가치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이념이라거나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을 검토하고, 다른 가치들과의 관계를 설정해 봄으로써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우리 자신의 이념적 자화상을 그려보자는 것이다.

 

II. 자유주의의 정치사상적 기원: 홉스, 로크, 밀의 자유주의

 

자유주의가 서구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 서구의 사상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의 사상적 가치를 우리가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자유주의의 가치를 공감하는가? 그 가치는 어떤 사상적 기원을 갖는가?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으로 지목할 수 있는 첫 번째 인물은 17세기 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다. 절대 왕정을 옹호한 것으로 잘 알려진 홉스의 정치철학을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례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철학자인 레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홉스야말로 자유주의의 지평을 새롭게 연 인물이다(Strauss 2007).

 

홉스를 자유주의 사상의 명실상부한 사상적 기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가 근대국가의 성립을 개인들 간에 맺어진 신약, 즉 사회계약의 결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렇게 사회계약의 결과로 출현한 리바이어던은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가진 괴물이다(Hobbes 1996). 따라서 리바이어던 치하에 사는 개인들은 밀이 옹호하는 소극적 자유를 누리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이 리바이어던의 존재 이유가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들의 의사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게 절대권력을 부여한 것도 최악의 상태로 묘사된 자연상태로 되돌아가지 않겠노라고 판단하는 개인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다. 자연상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상태에서 개인은 자유는커녕 생존조차 보장받기 힘들다. 국가권력이 부재한 자연상태가 홉스가 사고한 대로 전쟁상태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홉스가 개인의 생존과 자유의 보장을 국가의 존립 근거로 삼는 최초의 근대적 사회계약론자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실질적으로 개인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국가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 이유는 바로 개인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홉스의 구상에 동의한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나타나기 이전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국가의 존재 이유는 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 혹은 자연의 은밀한 목적(telos)을 수행하기 위한 경로로 이해됐다(Strauss 1965). 홉스 이전에는 개인의 존재보다 국가의 존재가 우선했다. 홉스에 와서 비로소 개인의 권리를 전제로 국가의 성립을 논하게 된 것이다. 홉스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개인의 생존과 자유로 규정함으로써 자유주의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근대국가가 탄생한 이래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의 문을 연 장본인이 홉스라는 사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홉스적 자유주의는 국가는 결코 개인보다 선행할 수 없고, 개인의 의사에 따라 만들어진 인공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개인은 결코 국가의 일부분이거나 부속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적어도 암묵적으로 국가의 존재보다 개인의 존재를 우선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홉스적 자유주의와 같은 진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홉스적 자유주의는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다. 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보장해 줄 명분으로 국가가 성립했지만, 절대권력을 가진 주권자가 언제든지 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홉스에게는 이러한 절대권력의 탄생은 그가 가정하는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결과다. 절대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개인은 결코 최악의 상황인 자연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존재를 국가의 존재 보다 우선시하면, 역설적으로 홉스적 국가의 탄생이 불가피한 것인가? 또 다른 근대 사회계약론자 존 로크는 개인의 생존과 자유를 우선시하는 홉스적 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도 절대권력을 가진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킬 방안을 고심한 정치사상가다.

 

로크의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해 국가권력을 법에 귀속시킨다. 법은 국가권력에 권한을 부여함과 동시에 제한도 규정한다. 현대인에게는 법치를 통해 국가권력의 제한을 명문화하고 있는 로크의 자유주의는 홉스의 자유주의보다 친숙하다. 홉스적 자유주의가 개인의 권리를 강조했다면, 로크적 자유주의는 그것의 실질적인 보장을 위해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법을 통한 국가권력의 제한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절대권력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부정해야 한다. 홉스가 국가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한 근거는 자연상태의 비참함이었다. 홉스에게 자연상태는 최악의 상태이므로 그것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든 정당화될 수 있다.

 

로크는 홉스가 지정한 자연상태의 성격을 수정한다. 로크의 자연상태는 상시적인 전쟁상태가 아니라 대체로 평화로운 상태이며 자연법이 작동하는 상태다. 다만 종종 자연법을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하므로 이를 저지하고 또 침해된 권리를 회복시키기 위한 판단자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입법자가 맡아야 하고, 입법자는 사실상의 주권자로서 국가권력의 행사를 제한한다. 그런데 이러한 로크적 자연상태론은 다분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르면, 자연상태의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므로 신이 허락하는 한 인간 상호 간에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또한 자연상태는 완벽하게 조화롭지는 않지만, 인류 전체를 소멸시킬 정도로 파괴적인 속성을 지니지도 않았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인류 전체를 스스로 보존할 수 있는 내적인 능력 즉 이성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고, 이 이성을 통해 인간은 타인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서는 안 되는지를 규율하는 자연법을 알 수 있다. 홉스적 자유주의와 로크적 자유주의가 상정하고 있는 자연상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에서 벗어난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제한이라는 로크적 자유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성을 통해 자연법이 발견되고 준수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아울러 인간에게는 인류 전체의 보존이라는 기독교적 가치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Locke 1996).

 

로크적 자유주의의 한 축이 법치주의라면, 또 다른 축은 개인 소유권의 인정이다. 로크는 자연상태에서 이미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은 자연 전체를 인간에게 공유물로 부여했고 여기에 개인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귀속된 노동을 투하해서 나온 결과물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Locke 1996). 로크는 나아가 이 소유권을 개인이 국가로부터 보장받아야 할 핵심적인 권리로 삼았다. 국가는 사인 간의 관계에서 소유권 보장해 줘야 할 뿐 아니라, 개인에게 치안과 안보 이상의 비용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로크적 자유주의가 토대로 삼는 것이 국가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법치주의 그리고 개인의 소유권 보장이라면 이러한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제한된 정부,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이런 맥락에서 로크적 자유주의는 복지국가와 거리가 멀다.

 

작은 정부에 의한 개인의 소유권 보장은 부의 축적을 조장하고 결과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 로크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이러한 결과의 불평등은 같은 조건으로 개인이 행한 선택과 노력의 결과이므로 정당하다.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대한 평가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장에 의해서 결정된다. 누군가 이러한 시장의 논리에 개입하는 것은 인위적인 간섭에 해당하므로 그것이 사인에 의해서 이뤄지든, 국가에 의해서 이뤄지든 부당한 것이다. 시장주의는 개인에 정당하게 자신의 몫을 가져가는 원리일 뿐 아니라, 공동체를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원리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개인의 자유를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이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의 공존을 고려할 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자유 추구는 타인의 자유 추구와 충돌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개인의 자유 추구는 곧바로 자유의 제한과 맞물리고, 개인의 자유 보장은 결국 자유의 제한을 제한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무엇이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를 동시에 보장하는 기준이 되는가? 적어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나의 행위는 자유롭게 보장받아야 하지 않는가? 이런 사고의 흐름에 동조한다면, 우리는 19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밀은 국가나 사회로부터 개인이 보장받아야 할 자유를 강조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인의 삶의 방식이나 개성, 무엇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광범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밀의 자유주의는 설령 이러한 자유의 보장이 당사자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개인이 내린 결정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나 사회는 이미 성인이 된 개인에게 후견인 노릇을 해서는 안 되고, 개인의 행복은 전적으로 개인의 결정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국가나 사회로부터의 간섭받지 않을 자유, 즉 소극적 자유다. 공리주의자인 밀은 이러한 소극적 자유의 보장이 궁극적으로 사회의 발전과 진보에 이바지한다는, 즉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진한다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적용한다(Mill 2007).

 

우리도 소극적 자유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국가나 사회가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는 것은 이러한 사고의 반영이다. 그러나 현대인이 밀이 주창하는 만큼 소극적 자유의 보장을 엄격히 지키고 있는가는 의심스럽다. 이미 현대 국가는 광범위한 차원에서 개인의 행복을 책임지고 있다. 국방이나 치안과 같은 전통적으로 부여된 책임을 넘어 개인의 교육, 보건, 노년의 삶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개인의 복지를 책임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상당한 정도의 개인 정보를 관리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국민 보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권한은 훨씬 강화됐다.[3] 이런 상황에서 적어도 밀이 주창한 전통적인 자유주의로의 회귀는 불가능한 듯하다. 그러나 소극적 자유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소극적 자유의 포기는 곧 전체주의를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국가의 책임과 권한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소극적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라는 밀의 원칙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조건만 갖춰지면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남에게 해를 끼친다’라는 것의 판단은 보기에 따라서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언뜻 보면 전적으로 행위자 개인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위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밀은 마약과 도박이 개인의 삶을 피폐하게 할 뿐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들이게 함으로써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한 어느 것도 남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소극적 자유를 보장하기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밀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 혹은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매우 좁게 정의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극적 자유는 언제든지 국가나 사회에 의해서 간섭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밀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 국가의 책임과 권한은 우려할만한 수준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현대 국가의 책임과 권한의 확대는 20세기 이래 개인들이 끊임없이 국가에 대해서 요청한 결과다. 문제는 이로 인한 소극적 자유의 위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극적 자유의 회복을 위해서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국가에 대해서 개인의 삶에 관해 더 큰 책임을 요구할 때, 소극적 자유의 축소가 뒤따른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에 개인의 삶과 복지에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에는 계산서가 따라온다. 밀의 자유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국가의 권한과 책임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소극적 자유의 보장을 얼마나 확보하길 원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특히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정부에 대해서 어디까지 개인의 건강, 나아가 삶과 죽음을 책임지라고 요구할 것인지, 이로 인해 우리가 지급할 수밖에 없는 소극적 자유의 축소라는 계산서는 어느 정도 용인할 것인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유주의에 대해 여러 ‘불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붙들고 있는 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을 통해서 확인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홉스는 국가권력의 절대성을 주창했지만, 그의 절대주의에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 전제되어 있다. 로크는 법치주의를 통해 국가권력의 제한하고 개인의 소유권 보장을 국가의 주요 역할로 삼았다. 밀은 소극적 자유의 보장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의 권력 남용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적 기원이 있는 자유주의적 요소들이 우리가 여전히 자유주의를 버릴 수 없는 이유다. 홉스적 자유주의, 로크적 자유주의, 밀의 자유주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근본 이유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자유주의 중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한편으로 국가권력으로부터의 간섭을 거부하지만, 다른 한편 국가권력의 최고성, 국가의 주권성을 인정한다. 한편으로 국가의 주권성은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 국가의 권력 행사는 법에 의해서 제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편으로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권리, 특히 소유권 보장에 있다고 여기지만, 다른 한편 그로 인한 극심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국가가 재분배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역할의 균형점은 어디에 있는가? 소극적 자유, 국가의 주권성과 제한, 개인 소유권의 보장은 자유주의의 중요한 가치이며 나름대로 사상적 기반을 갖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것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자유주의의 여러 요소가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유지할 것인가는 자유주의와 다른 가치와의 관계를 조율할 때 좀 더 분명해진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자유주의뿐 아니라, 공정, 정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도 우리 사회가 반드시 따라야 할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 이제 자유주의가 이러한 가치들과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좀 더 밝혀 보고자 한다.

 

III. 자유주의의 실천과 적용: 보수주의, 민주주의, 공정

 

홉스, 로크, 밀에 정치사상적 기원을 두고 있는 자유주의의 가치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띤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가치의 실천과 적용은 시대적으로 또 각국의 사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미국의 자유주의가 건국 초부터 공화주의와 대조를 이루며, 진보적이며 다원적인 사회 이념의 흐름을 대표한다면, 유럽의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 대조를 보이며, 개인주의적이고 시장중심적인 흐름을 대표한다. 또한, 미국의 자유주의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고 ‘큰 정부’를 용인하는 반면, 유럽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역량을 강조하고 국가의 간섭을 견제하는 성격이 강하다.[4] 미국과 유럽의 자유주의가 완전히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맥락에서 자유주의의 적용 방식은 전혀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정치사를 돌아볼 때, 한국의 자유주의도 시대적 맥락에 따라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자유주의는 전통적인 국가관에서 벗어난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국가관 그리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대표 이념으로 이해됐다. 민주화 시기의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동일시되거나, 비민주적인 국가 기제에 저항할 수 있는 이념적 도구로 받아들여졌다(문지영 2011). 한편 민주화 이후 한국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적인 흐름과 더불어 뉴라이트 운동과 연결되고, 대체로 보수주의와 보수 정당의 이념적 토대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선망의 이념으로 간주되는가 하면, 기득권을 영구화하는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간주되기도 했다.

 

한국 자유주의의 현 상태가 보수주의와 상당부분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관계를 논할 필요가 있다(강정인·김현아 2006). 우선, 보수주의가 단순히 보수 정당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나름의 독특한 정치이념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보수는 무언가를 유지하고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정치적으로 제도나 가치, 이념 등을 보수하려는 태도나 성향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보수적 성향은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버크의 보수주의를 원형으로 삼자면, 보수주의는 기존의 제도와 전통을 인간 이성에 의해 산출된 합리적 결과물로서 존중하고, 그것에 대한 변화를 매우 신중하게 접근한다. 이러한 태도는 명백한 개선이나 진보를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혁명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선호한다(Kirk 1986).

 

보수주의가 점진적 개혁을 전제로 한 전통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보수주의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주로 지배 권력이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런 이미지로 인해 보수주의는 종종 공격의 대상이 되고, 보수주의를 지지한다고 밝히는 것을 꺼리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조성된다. ‘샤이 보수’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용어다. 그런데, 단순히 지배 권력의 기득권 보호를 보수주의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소위 민주화 세대, 586으로 일컬어지는 민주화 세대가 기득권을 주장하는 행태도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이들은 분명 보수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이들이 기득권자로 여기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 앞세대 소위 권위주의 세대이고, 이들과 뿌리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이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여러 차례 민주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기득권도 순환되고 있다. 그런데도 상대 진영에게 보수주의의 ‘나쁜’ 이미지를 덮어씌우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것은, 그들이 만든 나쁜 보수주의에 스스로 빠져 있는 것이다.

 

보수주의의 근본 문제는 누가 기득권자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수할 것인가, 무엇이 보수의 가치인가의 문제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보수의 가치는 내용으로 정해진 것이 없다. 한국정치사에서 보수주의는 반공, 한미동맹, 산업화 등을 대변해 왔지만, 이것 자체가 보수의 가치라고 할 수는 없다. 보수주의는 어떤 고정된 가치를 지향한다기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급진적인 변화를 거부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하는 태도와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을 급진적인 변화를 거부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가 지켜야 할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앞서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을 통해 확인했듯이, 자유주의는 근대 이후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규정해 온 가장 보편적인 가치이며, 현대 국가가 전통적 가치로 삼을 만한 이념적 요소를 갖고 있다. 되풀이하건대, 보수주의는 무작정 이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다. 즉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결합하면 자유주의의 원칙을 지키되, 현실적으로 그것의 변용할 수 있는 개혁이 가능하다. 예컨대, 국가의 권한과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원칙이지만, 얼마나 제한하고 허용할 것인지는 현실에서 자유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코로나 사태에 대한 대응책으로 국가의 사생활 간섭을 얼마나 허용할 것인지,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 국가의 시장 개입을 얼마나 허용할 것인지는 자유주의냐 반자유주의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자유주의를 어떻게 실천하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는 불만을 개선하기 위해서 자유주의를 어떻게 보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렇게 보면,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의 원칙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서 수용되고 또 개선되어야 하는가를 말해 주는 자유주의 변용의 한 방식이다. 또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가 어떤 가치를 지킬 것인가를 말해 주는 자유주의의 콘텐츠다. 예컨대 국가가 개인의 소유권을 보장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의 안전뿐 아니라 복지를 책임지고 나아가 불평등의 개선을 위해서도 책임이 맡겨진다면 개인 소유권의 제한은 불가피하다. 자유주의의 변용은 국가가 개인의 소유권을 제한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그 정도와 범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국가가 경제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개인의 소유권을 어느 정도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개인의 소유권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급격하게 제한하는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이든 자유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보수주의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변화의 정도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기제될 수 있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의 변용을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반면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에 본질적 가치를 제공하면서 상호의존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의 연관성을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이념이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조화로운 이념적 조합으로 이해된다. 민주주의를 전제정치나 독재와 대립되는 정체, 즉 국민이 주권을 가진 정체로 이해한다면, 민주주의야말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정체의 종류로서가 아니라, 다수의 의사에 따라 공동체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다수의 지배 정치 이념으로서 이해하면,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다수의 지배는 다수의 횡포나 인기영합주의와 혼동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횡포나 인기영합주의는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민주주의가 다수의 정당한 지배를 넘어 다수의 횡포가 되는지를 가려내기는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또한, 민주적 정당성의 획득을 위한 여론 정치와 인기영합주의가 선명하게 구분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가치는 민주주의 남용과 탈선의 시점을 자각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에서 확인한 바 있듯이 자유주의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허용하지만, 그 제한의 근거를 법치에 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와 법치는 긴장 관계에 있다(Maravall and Przeworski 2003). 무엇보다 현존하는 다수의 의사가 과거의 죽은 자에 의해서 제정된 법에 따라서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에서 그러하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법이 무시된다면, 법은 더 이상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해 줄 수 없다. 그래서 법치의 최후의 보루로 헌법이 존재한다. 물론 민주적 의사에 의해서 헌법도 개정될 수 있지만, 그 절차는 매우 까다롭고 헌법의 기본 정신을 바꾸는 것은 종종 혁명을 수반한다. 우린 헌법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는 기본 원리로 삼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헌법이 추구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민주적’ 의사라는 명분으로 법치를 무시하고 헌법에 담겨 있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훼손하려 든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남용과 탈선이 시작된다는 징표로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는 공동선을 위한 국가의 간섭을 허용한다. 그런데 이 공동선에는 치안과 국방과 같이 최소주의적 공동선뿐 아니라, 복지와 불평등 해소, 지구적 가치 실현과 같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확대된 공동선도 포함될 수 있다. 공동선의 확대는 민주주의를 통해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남용과 탈선은 자칫 공동선의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 법치를 토대로 헌법에 내재한 자유주의적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다수의 횡포나 인기영합주의로 전락하거나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을 막아 줄 것이다. 자유주의는 엄연히 우리 헌법이 추구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사회구성 원리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문지영 2019).

 

마지막으로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는 공정과 자유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어느 사회든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고,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공동체는 붕괴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공정과 정의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위기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공정을 둘러싼 사회적 위기에 어떤 시각을 제공할 수 있는가?

 

공정은 기본적으로 공동의 목표를 향한 경쟁에서 그 규칙과 과정이 모든 참가들에게 공평한가를 문제 삼는다. 과정의 공정은 경쟁의 규칙이 참여자에게 공개되어야 하고 일관되고 유지될 것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과정의 공정은 경쟁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균등한 기회를 얻느냐가 중요하다. 누군가 남보다 앞선 출발선에 서 있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처음부터 참여가 배제된다면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자유주의는 공정한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경쟁의 속성상 모든 참가자가 각자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각자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서 차등적인 이익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자유주의 원칙에 따라 행동했으나 원하는 만큼의 이익을 얻지 못한 개인은 결과에 대해서 애석해할지언정, 규칙과 과정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도, 낮은 성과를 얻은 이들이 여전히 공정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것은 원래 공정의 개념이 경쟁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평등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자유주의는 이에 대해 한편으로 긍정적으로 답하면서도 단서를 단다. 과연 기회의 평등이 제대로 주어졌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는 개인이 기회의 평등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보이는 기회의 평등은 개인이 처해 있는 다양한 환경과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매우 제한된 평등일 수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풍족하게 사교육의 혜택을 받은 입시생과 불우한 환경에서 고학하는 입시생이 동등한 출발선에 서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과연 기회의 평등을 완벽하게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개인의 타고난 성향, 자질, 재능 등은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부모의 경제적 수준뿐 아니라, 가족의 분위기나 환경도 경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모든 경쟁자를 완벽하게 동일한 출발선에 세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맹점이 있다. 결과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은 출발선이 동일하지 않다는 과정의 불리함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과연 결정적이었는가를 밝히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좋은 가정환경에서도 실패하는 사람들, 어려운 조건에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해법은 자명하게 드러나는 차별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기회의 평등을 주되, 그것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결과로 나타나는 불평등을 가급적 보상하려고 노력한다. 결과적으로 나타난 불평등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불공정한 과정에 의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대부분이 결과는 그것들이 혼합된 결과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는 모든 결과를 정의롭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결과의 부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과의 부정의를 전제하고서, 모든 사회 체계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한다. 대학 입시의 예를 들자면, 자유주의는 될 수 있으면 모든 수험생이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결과를 완벽하게 정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 때문에 완전한 경쟁 방식이 아닌 약자 우대 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약자 우대가 완벽하게 정의를 회복하는 것은 아니다. 약자 우대만으로는 불완전하다. 그렇다고 입시의 기본 원칙인 경쟁 시스템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사회적으로 합의된 만큼의 보상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결과로서의 부정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차적으로는 과정상의 공정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것도 부족하면 결과적으로 드러난 부정의를 보상해 주는 것이다.

 

무엇을 결과적으로 드러난 부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최근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금융 소득의 비중 상승, 부동산 가격의 불균등한 상승, 경영자와 노동자 임금의 극심한 불평등 등이 지목된다. 자유주의는 이렇게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불평등을 온전히 정의롭게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그대로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자유주의는 불평등한 상태에 놓인 계층, 집단, 개인을 보상하는 것을 허용한다. 문제는 이러한 보상의 범위와 정도이다.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사회가 수용하고,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대체로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인정할 만큼,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구축될 수 있을 정도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어떤 계층이나 집단, 개인의 목소리가 보상의 대상으로 지정되어야 하는가는 논란의 대상이 된다.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그 기준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신뢰의 조성이 될 것이다. 공정한 과정이 완벽하기 정의로운 결과를 낳진 못하지만, 적어도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유지될만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IV. 결론

 

현실 정치에서 정치이념이 정파적 투쟁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자유주의라는 이념의 정파적 이용 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자유주의는 결국 정치사상사(史)의 유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정치이념은 우리가 몸담은 사회와 공동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사용되는 사유의 틀이자 가치관이다. 이런 맥락에서 만일 자유주의라는 이념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이념으로서의 가치를 다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것을 걱정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자문해 볼 것이 있다. 현시점에서 자유주의는 이념으로서 그 효용을 다했는가? 자유주의는 더 이상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곳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유용한 이념이 아닌가? 이 글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이념이 담고 있는 가치에 대한 재성찰해 봤다.

 

앞에서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원으로 홉스적 자유주의, 로크적 자유주의, 밀의 자유주의를 지목하고, 그로부터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들을 재확인했다. 홉스의 자유주의가 외견상 드러난 것과는 달리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지평을 열었다면, 로크의 자유주의는 개인의 소유권 보장을 중심으로 국가의 책임과 권한을 인정하되, 국가의 권한이 법치로 제한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밀의 자유주의는 이러한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후견인 주의를 배제하는 개인주의를 재확인했다.

 

이러한 사상적 기원을 가진 자유주의는 그 실천과 적용에서는 여러 변용이 불가피하다. 특히 보수주의, 민주주의, 공정 이슈와 같은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이념이나 가치와 연결될 때, 자유주의는 순수하게 자유주의적 가치만을 추구할 수 없으며 여러 도전에 직하게 된다. 그런데도, 현재 정치 이념의 혼란과 혼재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자유주의는 일정한 유용성을 제공한다. 보수주의와의 관계에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가 실질적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를 제공하고, 반면 보수주의는 자유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변형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해 준다. 민주주의와 법치는 사실 이론적으로 오랜 긴장 관계가 존재해 왔는데, 자유주의적 가치는 그 중심과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 준다. 최근 공정성 논의에서도 자유주의는 건설적인 방향을 제시해 준다. 여러 정치이념이 좌충우돌하는 가운데 자유주의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우리 사회가 나갈 길이 어디인가를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다.■

 

참고문헌

Berkowitz, Roger & Taun N. Toay. eds. 2012.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Global Financial Crisis. NY: Fordham University Press.

Brown, Wendy. 2019. In the Ruins of Neoliberalism: The Rise of Antidemocratic Politics in the West. NY: Columbia University Press.

Deneen, Patrick J. 2018. Why Liberalism Fail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Hartz, Louis. 1955. The Liberal Tradition in America: an Interpretation of American Political Thought since the Revolution. NY: Harcourt Brace.

Hobbes, Thomas. 1996 (org. 1651). Leviathan. ed. Richard Tuck.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Kirk, Russell. 1986. The Conservative Mind: From Burke to Eliot. Washington DC: Regnery Publishing.

Locke, John. 1988 (org. 1689). Two Treatises of Government. ed. Peter Lasket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Maravall, José & Adam Przeworski. eds. 2003. Democracy and the Rule of Law.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Mill, John Stewart. 2007 (org. 1851). On Liberty and the Subjection of Women. ed. Alan Ryan. NY: Penguin Classics.

Strauss, Leo. 1965. Natural Right and Histor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Strauss, Leo. 2007 (org. 1929). “Notes on Carl Schmitt,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in Carl Schmitt. The Concept of the Political. trans. George Schwab.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강정인·김현아. 2006.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보수주의: 자유민주주의로의 수렴?” 『사회과학연구』 14(2).

김도균. 2020.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우리 헌법에 담긴 정의와 공정의 문법』 아카넷.

김석호 외. 2021. 『공정한 사회의 길을 묻다』 시공사.

문지영. 2011. 『지배와 저항: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 후마니타스.

문지영. 2019.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한국의 헌법 이념 : 헌법 전문 개정의 쟁점을 중심으로” 『인간 환경 미래』 23호(가을).

박성우. 2021.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인간성, 국가성, 세계성에 대한 성찰”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워킹페이퍼

 


 

[1] 2008년 금융위기와 자유주의의 연관성을 정치사상적으로 검토한 편집본으로 Berkowitz & Toay (2012)를 참조. 특히 신자유주의가 반민주적 정치 집단과 연계될 가능성을 비판한 연구서로 Brown(2019)을 참조.

[2] 우리 헌법에 담긴 공정과 정의의 가치에 대해서는 김도균(2020)을 참조.

[3] 코로나 사태 이후 국가의 권한의 확대와 이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서는 박성우(2021)를 참조.

[4] 미국 건국에서 자유주의적 토대에 대해서는 하츠(Hartz 1955)를 참조.

 


 

저자: 박성우_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시카고대학교 강사, 중앙대학교 부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국제정치사상과 고전정치철학이다. 저서로 《영혼 돌봄의 정치: 플라톤 정치철학의 기원과 전개》가 있고, 대표 논문으로 ‘이라크 전쟁의 레오 스트라우스 책임론에 대한 정치철학적 비판’, ‘국익추구의 도덕적 한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삶의 정치’ 등이 있다.

 


 

담당 및 편집: 윤하은_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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