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EAI는 2020년을 맞이하여 신년기획 특별논평 “EAI 2020 전망과 전략” 시리즈 총 6편을 아래와 같이 게재합니다.

1. 하영선: 북한의 2020년: 2대 난관의 정면돌파전  (2020년 1월 6일 발간)

2. 전재성: 2020년 한국의 미중관계 전략과 대미전략 (2020년 1월 8일 발간)

3. 이동률: 한중관계와 한국의 대중 외교전략 (2020년 1월 13일 발간)

4. 손  열: 2020년 한일관계와 대일정책: 시야를 넓혀야 보이는 갈등 해법 (2020년 1월 15일 발간)

5. 이승주: 미중 무역 전쟁과 한국의 통상정책: 다자주의의 회복과 지역 경제 질서의 재편을 위한 중견국 외교 (2020년 1월 20일 발간)

6. 최태욱: 2019년의 선거제도 개혁과 2020년의 총선: 전망과 과제 (2020년 1월 22일 발간)

 

신년기획 특별논평 "EAI 2020 전망과 전략" 시리즈의 여섯 번째 보고서로, 2019년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평가와 2020년 총선의 전망 및 과제를 제시한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논평이 발간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정치개혁이라는 과업을 완수해야만 한다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 역시 '혁신적 포용국가'를 위한 '협치와 분권의 민주주의' 확립을 정치개혁의 비전 혹은 목표로 삼고 있으며 각종 연설과 정부 문서를 통해 개혁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9년 12월 27일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하는 새로운 선거법은 지적되어 오던 지역과 인물 중심의 정당체계가 이념과 정책 중심의 체계로 발전하여, 대표성이 제고되고 기존의 구조화된 양당제의 폐해를 극복하는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하지만 저자는 개정 선거법이 두 거대 정당의 이기심과 꼼수로 본래 취지와는 거리가 먼 채 불완전한 상태로 합의되어 버렸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정치개혁에 있어 거듭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시민의회' 소집을 통한 민의 수렴 과정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1. 들어가며

2019년 12월 12일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발표한 <혁신적 포용국가 미래비전 2045>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문재인 정부는 '혁신적 포용국가'를 위한 ‘협치와 분권의 민주주의’ 확립을 정치개혁의 비전 혹은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다수제 민주주의(majoritarian democracy)' 체제를 ‘합의제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 체제로 전환해가는 것을 그 목표 달성을 위한 핵심 과제로 꼽고 있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비례대표제와 연정형 권력구조를 양대 축으로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이다.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와 승자독식 권력구조를 양대 축으로 하는 ‘87년 민주주의 체제’와는 거의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대안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합의제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중심의 현행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비례대표제로 개혁하고, 작금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등으로 개편해야 성취할 수 있는 과제라고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권력구조 개편보다 선거제도 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선 직후인 2017년 5월 19일 여야 5당 원내대표와의 회동에서 문 대통령은 선거제도만 제대로 개혁한다면 대통령제를 다른 권력구조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선거제도를 개혁하여 국회가 진정한 민의 대변 기구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한다면, 이어서 의회제로의 개헌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87년 체제의 대전환을 고대해왔던 학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정치권의 개혁 인사들은 문 대통령의 발언에 환호했다. 민심을 제대로 읽는 ‘촛불정부’의 순차적인 제도 개혁으로 드디어 양대 정당의 지역기반 기득권 체제가 타파되고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는 정치가 작동하여 증오와 대결이 아닌 소통과 상생의 합의제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도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정립해 나간다는 것은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그러한 제도 변화는 결국 국회를 통한 입법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출범 후 단 한 건의 정치제도 개혁 법안도 통과시키지 못한 채 2년 반을 그냥 보냈다. 2019년 12월 27일에 국회를 통과한 선거법 개정안이 그나마 최초의 개혁 법안이었다. 출범 후 2년 7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선거법이 과연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비례성 보장 정도가 충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 2019년 개정 선거법 평가

문재인 정부 들어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2018년 겨울이었다. 12월 15일, 우여곡절 끝에 여야 5당 원내대표가 모여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는 내용의 합의문을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자유한국당이 태도를 바꾸었다. 자유한국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검토’한다는 것이었지 ‘합의’하겠다는 건 아니었다며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구체화되는 것에 제동을 걸었다. 이후에도 자유한국당은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였고, 이에 따라 자유한국당 대 ‘여야 4당’(민주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의 대치 구도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야 3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이 그토록 바라던 선거제도 개혁연대가 자유한국당의 몽니 덕분에 만들어지는 형국이었다.

그렇다고 여야 4당 연대가 굳건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사실 민주당의 대다수 의원은 선거정치에서 자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공산이 큰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에 상당한 불안감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정부와 당 지도부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공수처 설치와의 연관성 때문에 야 3당과의 개혁연대 형성에 대놓고 반대하지 못할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과 2017년 대선 때 선거제도 개혁을 연달아 공약으로 내놓았으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 2015년 이후의 당론이었다는 점도 민주당 의원들이 개혁 논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던 또 다른 이유였다. 결국, 선거개혁 정국 속 여야 4당 연대는 소속 의원의 대다수가 마지못해 당 지도부를 따라가는 소극적인 여당과 새로운 선거법을 통해 지분을 확대하려는 적극적인 야 3당의 대비되는 구도 속에 가까스로 조금씩 움직여갔다.

그 느려터진 행보가 축적된 결과가 바로 2019년 4월 30일 소위 ‘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안의 정개특위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이었다. 흔히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불리는 ‘온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여야 4당 연대의 결성 초기부터 이미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명확하였다. 민주당의 반대가 워낙 거셌기 때문이었다. 이후 논의의 초점은 연동형의 틀은 유지하되 그것이 보장하는 비례성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모였다. 2015년 중앙선관위가 제안했던 개혁안(지역구 200석, 비례 100석, 비례성 보정율 100%)에서 출발하여 협상을 거듭하면서 비례성을 줄이고 줄인 마지막 안이 바로 그날 정개특위에 오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지역구 225석, 비례 75석, 비례성 보정율 50%)였던 것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넉 달 후인 8월 29일에 정개특위 전체회의에서 공식 의결되어 일정한 기간만 지나면 국회 본회의에 자동 상정될 수 있는 입법안으로 확정되었다.

학자와 전문가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후한 편이었다. 물론 온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보다는 못하겠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비례성이 제공되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느 정당이든 전국에서 10%만 득표하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의 유력정당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 정도 비례성이라면 작금의 지역과 인물 중심 정당체계가 차츰 이념과 정책 중심 체계로 발전해갈 것이며, 그에 따라 계층과 부문, 그리고 직능 대표성도 점차 제고되어 나갈 것이 거의 확실시되었다.

문제는 그 후에 벌어졌다. 패스트트랙 개혁안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기 전에는 얼마든지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으니 좀 더 '현실적인' 안으로 손질하자는 민주당의 주장 때문이었다. 민주당은 비례대표 의석을 75석에서 60석, 그리고 다시 50석으로 줄이자고 했고, 그에 더하여 (본래의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처럼 100%를 보정해주는 대신) 50%를 보정하자고 했던 준연동형을 조금 더 약화하여 30석에 소위 ‘캡’을 씌워 그 범위 내에서만 연동형 보정을 시행하자고 고집했다.

군소야당과 개혁진영 시민사회의 반발은 당연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거의 다 관철시켰다. 결국, 12월 23일 소위 ‘4+1 협의체’(민주당, 바른미래당 당권파, 정의당, 민주평화당 + 대안신당)에서는 처음보다 상당히 낙후된 안(지역구 253석, 보정율 50%짜리 연동 비례 30석, 병립 비례 17석)이 최종안으로 결정됐다. 그리고 이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이 4일 후인 12월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예측이 틀리길 바라지만, 이 개정 선거법이 제공할 비례성은 구조화된 다당제나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견인해낼 수 있을 정도인 것은 아닐 듯하다. 정의당과 여러 면에서 유사한 정책 중심의 전국정당인 K당이 새 선거제도로 총선을 치러 정당 득표율 10%를 기록하고 지역구에서는 3석을 확보한 경우를 상정해보자. 이때 K당의 병립 비례 의석 수는 17석의 10%인 2석 정도일 것이다. 독일식이나 뉴질랜드식과 같이 온전한 연동제라면 K당은 총 의석의 10%인 30석에서 지역구 3석을 뺀 27석을 보정 받아야 하나, 이 제도에선 30석에서 지역구 3석과 병립 비례 2석을 뺀 25석의 50%, 즉 13석가량만 보정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보장된 것은 아니다. 보정에 사용할 수 있는 연동 비례 의석 수가 총 30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K당과 비슷한 정도의 성적을 받은 작은 정당들이 전부 셋이라고 가정하면, 즉 세 정당이 각각 13석 내외의 보정을 받아야 한다면, K당은 최대 10석 정도를 보정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K당은 10%의 득표율로도 원내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하는 15석짜리, 즉 의석 점유율 5%짜리 군소정당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

요컨대, 새 선거제도에서는 전국 득표율 10%를 달성해도 유력정당이 되리란 보장이 전혀 없다. 보정에 쓸 수 있는 의석을 30석으로 한정해놓은 까닭에 보정율이 50%에도 미치지 못할 공산이 (보정 받을 정당이 많을수록 더욱더) 크기 때문이다. 물론 지역구 1등을 충분히 많이 배출하면 되겠지만, 지역 기반이 없거나 취약한 이념 혹은 정책 정당이 그렇게 하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3. 2020년 총선 전망과 향후 과제

그렇다고 새로운 선거제도가 아무런 변화도 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2020년 총선에서는 국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는 정당이 출현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거대 양당은 여태까지와 같이 자당의 지지율을 상회하는 만큼을 지역구와 병립 비례 의석에서 가져갈 것이고, 이에 따라 연동형 보정에 쓰일 30석은 거의 다 군소정당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연동 비례 의석 덕분에 (일단 정당 득표율 3% 이상이라는 진입장벽만 넘어가면) 군소정당에게 돌아가는 몫이 과거보다 커질 것은 확실하므로 원내 진입을 시도하는 정치세력의 숫자는 필경 늘어날 것이고, 따라서 그만큼 원내 정당의 수가 늘어날 공산도 크다. 그러니 지금까지와 같이 양대 정당이 번갈아 가며 단독 집권당 행세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웬만해선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양당제 시대가 막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양당제 대신 소위 ‘양대진영체제’가 들어설 수도 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새 선거법이 보장하는 비례성은 보정율 100%인 ‘온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물론 보정율 50%인 원래의 ‘준’ 연동형 비례대표제보다도 상당히 낮은 것이다. 선거정치의 최종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여전히 각 정당의 지역구 성적일 것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지역 기반이 약한 정책이나 이념 중심의 군소정당은 과거보다는 물론 낫겠지만 제3의 유력정당이 될 정도로 의석 수를 크게 늘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양당제를 구성해오던 두 정당은 (단독 과반 정당이 되긴 어렵겠지만) 거대 정당의 지위는 계속 누리게 될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 지위를 이용하여 비슷한 성향의 군소정당을 끌어들여 소위 ‘자기 진영’을 구축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두 거대 정당이 각기 이끄는, 예컨대, 좌파연합블록(혹은 좌파연정)과 우파연합블록(혹은 우파연정)이 서로 대결 양상을 띠며 민주주의를 다시금 다수제적 방식으로 운영해가는 퇴행적 체제가 들어설 수도 있다. 그러한 체제에서 정치나 사회적 합의주의의 발전이 순조로울 가능성은 낮다.

이런 우려가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히 새 선거법의 비례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니 2020년 총선에서 이념과 정책 중심의 유력한 제3당이 기대만큼 부상하지 못하거나 잠재성마저 보여주지 못하여, 여전히 지역과 인물에 기반한 거대 정당 중심의 정당체계가 지속될 것으로 판단된다면, 그야말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금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총선 이후에는 (설령 그 결과가 형편없이 나쁘다 할지라도)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일차적 관심은 선거법 재개정보다는 권력구조 개편 문제에 집중될 것이다. 무엇보다, 다음 총선은 4년 후이지만 대선은 바로 2년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때는 선거제도 개혁 문제도 개헌 이슈의 하나로 풀어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새삼 강조하거니와, 개헌 작업이 시작되면 이번만큼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고 반드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을 제대로 거쳐야 한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최근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꼽히는 개헌 방식은 ‘시민의회’의 소집이다. 예컨대, 아일랜드에서는 개헌이 필요한 경우 (대개 관련 조항들을 특정하여) 1년 시한의 시민의회를 소집함으로써 그 공론장을 중심으로 사회적 합의가 형성될 수 있도록 한다. 시민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개헌을 추진할 때 내용의 충실성은 물론 개혁의 실현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3월 말에 정부 개헌안을 발의한 바 있다. 기본권과 지방분권의 강화 등 나름대로 의미 있는 내용이 많이 담겼지만, 사회적 합의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수 엘리트에 의해 다소 급하게 작성된 안이었다. 당연히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얻는 데에는 실패했고, 따라서 국회에서도 무시됐다. 국회 본회의에서 이 개헌안에 대하여 정족수 미달에 따른 '투표 불성립'을 선언한 것이다. 사회적 합의나 국민적 공감대에 기반하지 않은 개헌안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시민의회 방식을 재삼 강조하는 이유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에는 ‘국회의 의석은 투표자의 의사에 비례해 배분되어야 한다’는 선거의 비례성 원칙이 명시되어 있었다. 간절히 바라기는, 2022년 대선 전에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이 원칙 조항이 새 헌법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헌법에서 천명한 비례성 원칙을 명분으로 내세워 선거법 재개정 작업을 당당하게 추진해갈 수 있다. 시간도 충분하다. 높은 비례성을 제대로 보장할 새 선거법은 빨라야 2024년 총선부터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4. 나가며

개헌만이 아니라 선거제도 개혁도 시민의회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추진해야 한다. 법을 만들어도 그 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이 법 취지를 존중하지 않으면 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모름지기 법은 합의의 산물이다. 합의의 수준이 높을수록 사람들이 법을 존중하는 정도 또한 높아진다. 자유한국당이 새 선거법을 무시하면서 ‘비례자유한국당’을 따로 만들겠다는 등 대놓고 꼼수를 쓰겠다고 나설 수 있는 건 근본적으로 새 선거법의 합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선거법의 직접 적용을 받는 당사자들의 상당수가 배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그들만의 밀실 합의’를 왜 존중해줘야 하느냐고 따진다. 만약 새 선거법이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감히 누가 국민의 일반 의사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독일이나 뉴질랜드와 같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자유한국당처럼 꼼수를 쓰겠다는 정당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 나라의 선거법이 사회적 합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발의제나 국민투표제가 없거나 부실한 한국에서 가장 간편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방식은 시민의회를 소집하는 것이다. 시민의회를 포함하는 선거제도의 개혁은 이미 캐나다와 네덜란드 등의 나라에서 주 정부 주도로 여러 번 시도되었다. 한국정치권에서도 시민의회 제도 추진 여부를 진지하게 논의한 바 있다. 이제 드디어 시행할 때가 온 듯하다. 다시 얘기하지만, 이번만큼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저자: 최태욱_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미국 UCLA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창비 편집위원, 참여연대 상집위원,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국회의장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복지국가의 정치경제, 동아시아경제통합 등이다. 최근 저서로는 《복지한국만들기》(편저), 《한국형 합의제 민주주의를 말하다》, 《청년의인당》 등이 있다.

 

■ 담당 및 편집: 윤준일 EAI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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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논평]은 국내외 주요 사안에 대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 정책적 제언을 발표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기획된 논평 시리즈입니다. 인용할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AI는 어떠한 정파적 이해와도 무관한 독립 연구기관입니다. EAI가 발행하는 보고서와 저널 및 단행본에 실린 주장과 의견은 EAI와는 무관하며 오로지 저자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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