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 워킹페이퍼에서 이승주 동아시아연구원 무역•기술•변환센터 소장(중앙대학교 교수)은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주의와는 차별화된 바이든 행정부의 다자주의 전략을 설명하며, 이러한 전략은 중국을 타겟으로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존 보호주의는 상대국의 수입을 제한하는 현상이었지만,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코로나19로 수출 제한과 더불어 수입 확대 조치를 함께 추구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고 덧붙입니다. 미중 기술 경쟁,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심화된 무역 질서의 불확실성 속에서 한국 차기 정부는 양자, 지역, 그리고 다자 차원의 국제 협력 강화 및 국내 제도적 차원에서 경제와 안보 영역의 연계를 위한 체계적 대응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무역 3대 정책과제

 

1. 미중 전략 경쟁으로 인해 공급 사슬 재편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활용하여 전략적 가치를 높임으로써 한미 협력을 생산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대중 무역 및 생산 관계에 있어서 다변화를 점진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전략적 기조를 기반으로 21세기 무역 규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기 위한 중견국 협력을 동시에 추구할 필요가 있다.

 

2. 아시아 지역에 RCEP가 발효될 경우, 두 개의 메가 FTA가 운용되는 데 따른 기능적 비효율성과 지정학적 경쟁의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CPTPP 가입을 한미일 협력의 틀 속에서 접근함으로써 조기에 해결하고, 지역 경제 질서의 안정을 위해 CPTPP와 RCEP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도록 역내 국가들과의 연대 외교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

 

3. 미중 전략 경쟁이 확대되는 가운데 경제-안보 연계가 강화되는 세계적 추세에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국내제도적 기반을 신속하게 조성할 필요가 있다. 경제와 안보를 통합하는 제도 수립은 범부처 협력에 기반한 ‘전정부적’ 접근은 물론, 민관이 상시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전국가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I. 서론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로 촉발된 보호주의와 코로나19는 21세기 세계 무역 질서를 불확실성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다자주의의 복원을 위한 미국 리더십의 강화를 천명하면서 무역 질서의 재편을 위한 미중 경쟁이 양자, 지역, 다자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양자 차원에서 미국은 중국에 대하여 공세의 범위를 더욱 정교화하면서 압박의 수위를 높이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무역과 관련, 미국과 중국은 관세 전쟁보다는 경제와 안보의 연계 수준을 높여 핵심 기술과 산업 분야에 대해서는 수출 통제의 강도를 유지하거나 더욱 높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양자 차원에서 경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지역과 다자 무역 질서의 수립을 위한 국제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세계 무역 질서의 재편을 둘러싼 미중 경쟁은 한층 가시화될 수 있다.

 

무역 질서의 불확실성은 지역 차원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 기존 CPTPP에 이어 RCEP이 타결됨에 따라 아시아 지역의 경제 질서 변화가 불가피하다. 미국이 두 개의 메가 FTA에 모두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RCEP의 타결은 중국 중심의 공급 사슬의 유지 또는 확대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리쇼어링(reshoring)을 중심으로 한 공급 사슬의 재편을 추진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입장에서는 지역 경제 질서의 재편에 대비한 제도적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 바이든 행정부의 공급 사슬 재편 전략과 아시아 지역 질서 재편을 위한 제도적 통로를 제공할 수 있는 국가로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다. 2021년 5월 한미 정상회담은 이러한 면에서 양자 차원의 경제 협력을 넘어선, 지역 및 다자 차원의 협력을 위한 포괄적 합의라는 의미가 있다. 반도체 및 배터리 분야 협력은 한미 양자 경제 협력인 동시에 지역 차원의 공급 사슬 재편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지역 협력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글로벌 백신 파트너십은 지구적 도전에 대한 대응하는 다자 협력인 동시에 인도 태평양 지역에서 백신 생산과 배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지역 협력이기도 하다. 향후 한미 경제 협력은 양자, 지역, 다자 차원의 복합 협력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다.

 

II. 무역 질서의 현황

 

1. 바이든 행정부의 다자주의

 

바이든 행정부 대외정책의 핵심은 다자주의의 강화와 미국 리더십의 회복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정책 태세는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에 대한 근본적 수정이라는 점에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환영받고 있다. 다자주의 회복의 신호는 미국과 유럽의 협력 강화에서 감지되고 있다. 2021년 6월 개최된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국과 유럽이 17년이나 지속되었던 보잉(Boeing)과 에어버스(Airbus)에 대한 보조금 문제를 둘러싼 분쟁을 5년간 유예하는 데 합의한 것은 다자 무역 질서의 회복과 새로운 변화를 위한 미국과 유럽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이든 행정부의 다자주의 강화의 타겟이 중국이라는 점은 너무도 명확하다. 미국과 유럽은 코로나19의 확산과 홍콩 보안법 통과를 계기로 보조금, 국영기업, 정부 조달, 환경, 노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다자 무역 질서 침해에 대하여 보편적 가치와 규범에 근거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바이든 행정부가 군사 및 정찰 기술 산업 부문의 59개 기업에 대한 투자를 금지하고, EU가 ‘EU-중국 포괄적 투자 협정(EU-China Comprehensive Agreement on Investment: EU-China CAI)’에 대한 비준을 유예하기로 한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공급 사슬의 복원력 강화를 위해 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에 적극성을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의 ‘100일 공급 사슬 검토’ 행정 명령에 따라 착수하여 2021년 6월 ‘회복탄력적 공급 사슬의 구축, 미국 제조업의 재활성화, 포괄적 성장의 촉진’(Building Resilient Supply Chains, Revitalizing American Manufacturing, and Fostering Broad-Based Growth)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보고서는 미국의 ‘경제 안보’(economic security)를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회복탄력적 공급 사슬이 필요하다고 전제하였다. 미국이 회복탄력적 공급 사슬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혁신, 기술, 생산 시설의 생태계 형성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다양하고 건강한 공급자들로 구성된 생태계를 구성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 대만 등 기술과 생산 능력을 갖춘 국가들과의 협력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과제로 부상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바이든 행정부가 대외정책을 국내정치 어젠다와 긴밀하게 연계하기 때문에 일정한 범주 내에서 다자주의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소개한 공급 사슬 검토 보고서도 미국이 혁신 인프라를 향상하기 위해 양질의 일자리 창출, 소득 불평등의 완화, 미국 제조업의 공동화를 방지하기 위한 중소 제조기업의 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주요 산업의 리쇼어링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중산층 복원의 핵심인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Made in All of America”를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Made in America Office를 설치하고, 2021년 4월 AFL-CIO 출신 셀레스트 드레이크(Celeste Drake)를 국장으로 임명한 것은 바이든 행정부가 표방하는 다자주의와 국제협력의 범위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바이든 행정부는 미중 전략 경쟁이라는 대외적 차원과 중산층 복원이라는 국내정치적 차원 사이에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2. 코로나19와 불확실성 속의 다자 무역 질서

 

세계 무역 질서의 위기는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2018년 미중 무역 전쟁이 미중 사이의 관세 부과와 보복 관세의 부과에서 시작하여 주요국들의 보호주의를 촉발함으로써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위태롭게 유지되었던 세계 무역 질서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졌다. 미중 무역 전쟁에서 촉발된 보호주의의 확산 과정에서 WTO가 기능 부전에 빠진 것은 세계 무역 질서의 위기를 가속화하였다. WTO의 기능 부전은 다자 무역 질서가 표류하는 가운데 세계화 및 경제 통합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보호주의가 제도적으로 여과되지 못한 채 직접 분출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다자 무역 질서의 위기는 ‘세계화-민주주의-주권 사이의 트릴레마’를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적·제도적 토대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코로나19는 보호주의의 파고를 한층 더 높여 세계 무역 질서를 더욱 증폭시켰다. IMF의 추산에 따르면, 2020년 세계 무역은 3.5% 감소하였다. 세계 무역의 축소는 일차적으로 공급 사슬의 교란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지만, 코로나19를 이유로 주요국들이 경쟁적으로 자국 우선주의를 추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은 지구적 가치 사슬(global value chains: GVCs)의 주요 길목에서 병목 현상을 초래하였고, 이로 인해 발생한 공급의 지연과 부족 현상은 그동안 효율성을 최적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형성·운영되었던 지구적 가치 사슬의 취약성을 노출하였다.

 

코로나19 이후 세계 주요국들은 상대국으로부터 수입을 제한하는 전통적 방식의 보호주의가 아닌 수출 제한과 더불어 수입 확대 조치를 함께 추구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코로나19로 인해 GVCs가 심각하게 교란되자 개인보호장구, 의약품, 의료장비, 생필품 등을 생산하는 국가들은 이에 수출을 제한하는 한편, 긴급 수입의 필요성이 커진 국가들이 이 제품들에 대한 수입을 신속하게 확대하기 위하여 자유화 조치를 대거 취한 것이다. 2020년 1월부터 2020년 9월까지 91개국이 202개의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하였고, 105개국은 228개의 수입 확대 조치를 취하였다. 보호무역 조치들 가운데 대부분은 종료 시한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향후 새로운 보호주의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코로나19 이후 보호주의는 경제적 득실에 기반하여 분출된 보호주의와 달리, GVCs의 취약성이 일반 대중에게 각인됨에 따라 국가안보의 문제로 인식되는 이슈의 전환이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기존 보호주의와 차별화된다.

 

3. 메가 FTA의 주 무대 아시아

 

RCEP 협상의 타결은 메가 FTA 시대가 본격화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2018년 12월 CPTPP가 발효된 데 이어, 2020년 11월 RCEP 협상이 타결됨으로써 아시아 지역에는 두 개의 메가 FTA가 공존하게 되었다. 아시아 국가들이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RCEP과 CPTPP는 여러 면에서 이질적이다. RCEP은 아시아 국가들로 구성된 ‘범아시아 FTA’(pan Asian FTA)라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아세안이 주도하는 형식을 취하는 가운데, 중국의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확대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RCEP의 누적 원산지규정은 참여국 기업들이 공급 사슬의 재편에서 보상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 중국 중심의 공급 사슬을 공고화하는 제도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이 공급 사슬 재편과 관련한 미국의 압박을 완화하는 중요한 제도적 기반이 될 수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 메가 FTA의 시대가 도래한 데 따른 전략적 의미도 상당하다. RCEP은 지역 협력의 리더십 경쟁을 하는 중국과 일본을 모두 아우르고, 미국이 참여하지 않고, 인도가 협상을 탈퇴한 메가 FTA이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다자주의 강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음에도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 견제를 위한 경제적 연계의 제도적 수단이 취약하다는 점에서 미국의 딜레마가 있다. 미국이 인도태평양전략 차원에서 인프라 협력과 쿼드(Quad) 차원의 5G 협력 등을 추진하고 있으나, 경제적 판인도태평양전략의 필요성은 여전하다. 일본, 호주, 인도가 ‘복원력 있는 공급 사슬 이니셔티브’(Resilient Supply Chain Initiative: RSCI)를 추구하는 것은 다변화를 통해 공급 사슬의 복원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이다. 전략적 차원에서는 지역 공급 사슬에서 중국의 중심성을 완화하기 위해 쿼드(Quad) 차원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II. 한국의 정책 평가

 

1. 보호주의 퇴치를 위한 국제협력 추구

 

미중 전략 경쟁과 코로나19로 인해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한국 통상정책의 최우선순위는 보호주의의 확산을 저지하는 데 놓였다. 미중 전략 경쟁은 무역 분쟁에서 시작하여 첨단 기술의 수출 통제, 해외 투자 심사 강화, 혁신 역량 제고와 같은 기술 경쟁으로 전선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주요국들이 보호주의를 우선적으로 추구한 결과 21세기 다자 무역 질서의 구축은 요원해지고 있다. 한국은 보호주의의 퇴치를 위해 양자, 지역, 다자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여왔다. 우선, 한국은 한미 FTA 개정 협상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한미 무역 불균형을 축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 공세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역 차원에서도 신남방정책 등을 통하여 유사 입장국들(like-minded countries)과 보호주의 퇴치를 위한 국제협력을 촉구하는 데 건설적 역할을 하였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코로나19 이후 GVCs 재편 과정에서 새로운 투자 대상으로 부상함에 따라, 지역 및 지구적 차원에서 자유무역질서를 유지할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한편, 한국은 다자 차원에서 2019년 10월 21일 WTO 개도국 지위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는 한국이 보호주의 퇴치를 위한 노력이 수사적 차원에 머물지 않을 것을 천명한 것이다.

 

다만, 21세기 보호주의가 과거와 달리 기술 보호주의의 양상을 띠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비와 다자 차원의 노력은 향후 보완될 필요가 있다. 21세기 무역 규칙 수립의 핵심은 ‘21세기 무역 현실과 20세기 무역 규칙’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데 있다. 다자 차원에서 ‘WTO 전자상거래 협상’에서는 데이터의 초국적 이동, 개인정보 보호, 디지털 조세 등 21세기 무역의 핵심인 디지털 무역 관련 규범과 규칙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며, 이 이슈들은 미중 전략 경쟁의 주요 쟁점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처럼 그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는 이슈에 대한 논의가 WTO 차원에서 치열하게 전개될 것에 대비하는 한편, 선례의 구축 차원에서 양자와 지역 차원에서 디지털 무역 규칙을 수립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2. FTA의 지속적 체결과 업그레이드

 

정부는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대응의 주요 수단으로 FTA의 체결에 주력해왔다. 한영 FTA(2019/6), 한-이스라엘 FTA(2019/8), 한-인도네시아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 CEPA) (2019/10 실질 타결)가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다. RCEP은 중국과 일본이 자국의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인도가 탈퇴하는 등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한국이 아세안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능동적 역할을 하여 협상 타결에 이르게 되었다. 정부는 이에 더하여 한-에콰도르 전략적경제보완협정 (Strategic Economic Complementation Agreement:SECA), 한-MERCOSUR (남미공동시장 혹은 메르코수르) FTA, 한-필리핀 FTA, 한-러시아 서비스 투자 FTA, 한-말레이시아 FTA 협상을 진행하고, 한-PA FTA, 한-유라시아경제연합 (Eurasian Economic Union: EAEU) FTA 협상 여건을 조성하는 등 FTA의 확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또한 정부가 한-ASEAN FTA 추가 자유화, 한-CEPA 개선, 한-칠레 FTA 개선, 한-중국 FTA 서비스 투자후속협상 등을 추진한 것은 변화하는 경제 현실을 반영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FTA의 지속적 추진은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서 일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단기적으로 우선 추진할 수 있는 대안이다. 다만, 주요국들을 중심으로 ‘상호의존의 무기화’ 현상이 확대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를 완화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서 다자 차원의 협력이 시급하다는 점에서 기존 FTA 전략과 다자 통상 전략을 병행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3. 미중 기술 경쟁에 대한 대응: 전략적 모호성에서 포괄적 파트너십으로

 

미중 전략 경쟁이 기술 분야로 확대됨에 따라, 한국은 5G 및 반도체와 같은 개별 첨단 기술뿐 아니라, 공급 사슬의 재편 및 쿼드 참여 등 미중 사이에서 구체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이슈들이 대거 대두하였다. 2020년 상반기부터 미국의 5G 국제협력 요구에 협조하는 국가들이 증가함에 따라, 한국은 기존 입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또한, 미 국무부의 Clean Network 참여 요구에 대해서도 한국의 KT와 SKT가 “Clean Telcos”에 포함되었다.

 

한편, 바이든 행정부가 공급 사슬의 재편을 더욱 가속화하는 가운데, 국제협력을 더욱 강조함에 따라, 한국은 미국에 대한 협력과 중국의 경제 보복을 초래하지 않는 선택 사이의 균형을 찾는 기존의 수세적 방식과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변화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바이든 행정부가 공급 사슬의 복원력을 강화하고, 주요 첨단 산업의 생산 역량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데 대하여 한국은 양자 차원의 협력과 백신 글로벌 파트너십을 구축하기로 합의한 데서 나타나듯이 지역 및 다자 차원의 협력을 강화하였다. 한국 정부가 한미 협력의 방향 전환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것은 바이든 행정부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와 규범에 입각한 국제협력의 새로운 환경을 활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IV. 차기 정부 제언

 

1. 양자 차원

 

1) ‘기술-생산-소비의 생태계’의 형성을 위한 양자-지역 협력의 결합

바이든 행정부가 미중 기술 경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양자, 지역, 다자 차원에서 국제협력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체계적 대응 전략의 수립이 필요하다. 바이든 행정부는 다자 차원에서는 ‘기술 민주주의(techno-democracies)’와 ‘기술 전제주의(techno-autocracies)’의 구도, 지역 차원에서는 일대일로에 대응하는 인도·태평양 전략 기반의 ‘기술-생산’ 생태계를 형성하는 전략을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바이든 행정부는 양자 차원에서 기술-생산 파트너십에 필요한 국가들과의 협력을 탄력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디지털 무역, 환경, 노동 등 주요 이슈에 대한 미국의 선호가 반영된 양자 FTA를 다자 무역협상을 위한 선례로 활용하는 전략을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이 주도하는 다자주의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으며, 특히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과의 국제협력이 필수적이다. 한국은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 주도의 다자주의를 추진하는 데 따른 전략적 의도에 대한 세밀한 이해의 토대 위에 바이든 행정부의 다자주의에 전략적 협력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략 경쟁의 차원에서 기술을 매개로 한 중국 압박 전략의 수위를 높이고 공급 사슬의 안정성을 높이는 한편, 미국 내 생산 능력의 확충과 리쇼어링 또는 니어쇼어링(near-shoring)을 위한 국제협력을 추구한다.

 

한국이 일차적으로 모색해야 할 전략적 협력의 방향은 미국과 기술 및 생산을 연계한 파트너십이다. 한국은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경제정책과 국내정치적 필요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협력의 우선순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CEO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삼성전자가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설비 투자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은 중국과의 전략 경쟁과 미국 내 생산 역량의 확충이라는 대내외적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47%인데 반해, 반도체 생산 점유율이 12%에 불과하다는데 미국의 고민이 있기 때문에, 바이든 행정부는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국내 반도체 산업에 대하여 500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제공하는 동시에, 공급 사슬의 안정성 확보 차원에서 한국 및 대만과 파트너십을 추구한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경제정책에서 리쇼어링과 국제협력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이다. 한국은 이러한 방향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배터리 분야의 경우, 바이든 행정부가 파리기후변화협약 재가입을 통한 다자주의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적 차원의 친환경 산업 육성 및 대 중국 의존도 감소를 위해 미국 내 생산 능력 확충과 공급 사슬의 형성이 미국에게는 필수적이다. LG에너지솔루션, SK이노베이션, 삼성 SDI 등 한국 배터리 제조업체가 GM, 포드, 스텔란티스(Stellantis) 등 미국 자동차 제조업체들과 공급 사슬을 형성함으로써 장기적 협력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바이든 행정부의 ‘100일 공급 사슬 검토’에서 ‘국내 공급 사슬의 완결성 확보(secure an end-to-end domestic supply chain for advanced batteries)’를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한국은 ‘기술-생산’ 협력을 기반으로 바이든 행정부가 ‘기술-생산-소비’의 더욱 완결성이 높은 생태계를 위한 국제협력을 추진하도록 조력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2019년 기준 미국의 반도체 수출 가운데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 36%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한국 기업뿐 아니라 미국 기업에게도 소비를 포함한 협력의 생태계를 구성하는 것은 중요하다. 소비가 뒷받침되지 않는 기술-생산 협력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미국 국내적 차원의 생산 역량의 확충과 기술 경쟁에서 중국에 대한 압박의 효과를 제고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국제협력을 확대하는 것은 지속가능성 면에서 필수적이다.

 

2) 공급 사슬의 다변화를 위한 정책적 지원

미국의 공급 사슬 재편 시도는 한국에게는 도전 요인이기도 하다. 2021년 3월 안토니 블링컨(Antony Blinken) 국무장관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공급 사슬의 안정성을 강조하기는 하였으나, 미국과 중국 사이에 완전한 디커플링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를 감안할 때, 미국의 향후 디커플링 전략은 완전한 디커플링보다는 부분 디커플링(partial decoupling) 또는 부분 디커플링 이후 전략적 재연결(strategic recoupling)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미중 간 산업의 해체와 재연결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를 하되, 이를 미중 전략 경쟁 맥락 속에서 미중 사이 선택의 문제가 아닌 공급 사슬의 강건화와 복원력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구체적으로 미중 공급 사슬의 재편에 대비하여 ‘중국+α’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미국 상공회의소가 2020년 3월 실시한 서베이에 따르면, 84%의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생산 시설과 공급 사슬을 중국 내 다른 지역 또는 제3국으로 이전할 계획이 없는 반면, 생산 및 공급 사슬을 중국 내 다른 지역 또는 제3국으로 이전을 계획하는 기업은 1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내 미국 기업들이 미중 전략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음에도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공급 사슬의 탈중국화를 시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중국 소비 시장의 규모와 공급 사슬의 중심으로서 중국의 매력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내 다른 지역 또는 제3국으로부터 부품 조달을 계획하는 기업들이 24%에 달한다는 것은 미국 기업들이 탈중국화가 아니라 공급 사슬의 다변화를 추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미중 디커플링이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 미국 기업의 비율이 2019년 66%에서 44%로 불과 일 년 만에 20% 이상 감소하였다는 점은 미중 전략 경쟁을 보는 기업들의 공급 사슬에 대한 시각이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은 공급 사슬의 다변화를 통한 복원력 강화 차원에서 ‘중국+α’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다만, 한국은 이러한 시도가 탈중국 또는 중국 봉쇄로 읽히지 않도록 세심하면서도 일관성 있는 신호를 발신할 필요가 있다.

 

3) 한미일 협력의 강화와 지역 경제 질서 재편을 위한 한일 협력의 복원

한국은 CPTPP의 발효와 RCEP의 타결을 계기로 본격화된 메가 FTA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아세안과 협력을 바탕으로 인도의 협상 탈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RCEP 협상 타결을 이끌어내는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메가 FTA 시대 한국의 대응은 두 가지 차원에서 검토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CPTPP 가입을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과 전략을 수립하여야 한다. 한국 정부가 이미 CPTPP 방침을 정하였기 때문에, 가입 시기와 구체적인 방법론이 숙제로 남아있다. CPTPP에는 미국이 참여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중국도 가입에 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CPTPP에 가입하는 데 따른 전략적 선택의 부담은 적은 편이다. 한국이 단독으로 CPTPP에 가입할 경우 GDP 1.09% 증가 효과가 있고, 미국과 중국이 함께 가입할 경우 GDP 증가 효과는 6.39%로 더욱 커진다.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칠레, 싱가포르 등이 한국의 가입에 긍정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한국은 이를 일본을 설득하는 데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CPTPP에 가입하고 메가 FTA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첫째, 일본은 미국이 TPP를 탈퇴한 상황에서도 CPTPP 협상을 타결시키고 발효시키는 데 ‘예외적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내용 면에서도 미국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슈들에 대해서는 동결 조항으로 처리함으로써 미국의 복귀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더 나아가 일본은 RCEP에 참여함으로써 한중일 3국 가운데 CPTPP와 RCEP에 모두 참가하는 국가로서 ‘추축 국가’(pivotal state)가 되었다. 한국의 CPTPP 가입이 향후 지역 경제 질서 재편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특히 RCEP과의 관계 설정을 위해 한국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발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임으로써 지역 질서의 재편을 고리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과 협력의 가능성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국은 양자 차원에서 한일 협력을 회복하는 현실적 방안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미일 협력의 강화를 통해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정상회담을 통하여 한국과 미국은 5G, 반도체, 백신 등 핵심 이슈를 포함한 광범위한 협력에 합의하였다. 이러한 협력의 성과는 한미 협력과 미일 협력의 공통분모를 대폭 확대하였다는 점에서 한미일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한미일 협력의 강화는 한일 협력을 복원하는 데 간접적으로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국은 한미 협력과 한미일 협력의 연계를 통해 한일 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2. 지역 차원

 

1) 메가 FTA의 양면적 효과에 대한 대비

다자 무역 질서에 관한 미국과 중국의 접근은 대조적인데, 이러한 차이는 미국의 의도가 다수 반영된 TPP와 중국의 의도가 반영된 RCEP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TPP는 기본적으로 WTO 다자 무역 협상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는 이른바 WTO plus 이슈 관련 규정을 다수 포함하고 있는 반면, RCEP은 중수준의 무역 자유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이슈들에 대해서도 다수의 예외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WTO와의 정합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WTO-consistent)이다. 다자 무역 질서를 개편하는 데 있어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예상되는 지점이다.

 

WTO DDA가 교착 상태에 빠진 상태에서 메가 FTA는 자유무역과 경제 통합의 동력을 유지하는 요인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만, 메가 FTA에 내재하여 있는 위험성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전략적 대비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메가 FTA는 양자 FTA의 문제를 극복하는 유력한 방안이기는 하나, 가대되는 경제적 효과가 큰 만큼 안보 외부 효과를 수반한다. 세계 주요국들이 메가 FTA를 경제와 안보를 긴밀하게 연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메가 FTA의 과도한 안보화에 대한 치밀한 대응이 필요하다.

 

둘째, 디지털 경제 시대 기술 기업들은 지구적 서비스를 지향한다. 그러나 미중 기술 경쟁이 가속화됨에 따라, 디지털 산업에 대하여 상충적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미국과 중국이 독자적인 블록을 형성하는 ‘스플린터넷(splinternet)’의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다. 디지털 또는 데이터 산업에서 유럽과 인도 등도 미중 양국과 차별화된 접근을 하는 것은 문제의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또 다른 요인이다. 다자 차원의 무역 질서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메가 FTA의 확산은 상충적 또는 차별적 접근의 제도적 외연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 메가 FTA의 확대 과정에서 세계 무역 질서의 분할, 더 나아가 파편화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디지털 무역 관련 규칙을 선도하는 집합적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2) RCEP과 CPTPP 사이의 균형을 위한 중견국 협력

한국은 CPTPP에 가입할 경우, RCEP과 CPTPP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위한 노력을 선도할 필요가 있다. RCEP과 CPTPP는 무역 자유화의 범위와 새로운 이슈의 포함 정도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CPTPP는 디지털 무역, 노동, 환경, 국영기업 등 새로운 무역 이슈와 관련 구체적인 규범과 규정을 과감하게 도입하였다. 반면, RCEP은 누적원산지 규정에서는 상당한 경제적 효과를 낳을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 무역과 같은 새로운 이슈에 대해서도 RCEP의 타결은 중국이 RCEP 수준의 디지털 무역 규정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향후 디지털 무역 규범과 규칙의 수립과 관련 미국과 치열한 경쟁을 전개할 중국의 수용 가능한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RCEP의 기본 규정이 CPTPP와 거의 유사한 전자상거래를 독립 챕터로 두었다는 것 자체는 진일보한 것이며, 더 나아가 중국이 디지털 무역 관련 규범을 수용하였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RCEP 규정은 컴퓨팅 시설을 자국 내에 설치하도록 의무화하는 데 대한 판단을 회원국에게 맡겨두었다는데 커다란 차이가 있다.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동을 원칙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나, 회원국들이 데이터 국지화를 자율적으로 이행하는 방안을 사실상 허용한 것이다. 더 나아가 본질적인 안보 이익(essential security interests)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전자상거래 챕터가 데이터 국지화를 개별 회원국들의 자율적 이행에 맡기는 형식으로 결정된 것은 중국의 수용 불가 문구가 모두 제외된 결과이다. 반면, 아시아 지역의 또 다른 메가 FTA인 CPTPP의 전자상거래 챕터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주도한 TPP에 근거하였고, 미일 디지털 협정과 USMCA의 전자상거래 챕터에 준용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선호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높은 수준의 데이터 자유화를 요구하는 미국과 안보 이익 및 주권을 이유로 예외의 폭넓은 인정을 요구하는 중국 사이의 갈등이 본격화될 것이다.

 

상이한 수준과 범위의 메가 FTA가 공존한다는 것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경제적 효과가 반감되고 지정학적 리스크가 증대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중장기적으로 CPTPP에 복귀하는 결정을 할 경우, 디지털 무역과 같은 새로운 이슈를 둘러싼 미중 경쟁이 격화될 수 있다. 한국은 갈등 가능성이 큰 이슈들에 대하여 CPTPP와 RCEP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을 주요 회원국과 함께 해나갈 필요가 있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 다자 무역 질서를 자국에 유리하게 수립하기 위해 벌이는 전초전 성격의 경쟁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유사한 입장인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싱가포르 디지털 무역 협정, 싱가포르-뉴질래드-칠레 디지털 경제 파트너십 협정(Digital Economy Partnership Agreement), 호주-싱가포르 디지털 경제 협정은 디지털 무역 관련 선례로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일부 완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 다자 차원

 

1) 21세기형 이슈의 부상에 대한 대비

바이든 행정부는 RCEP 타결 직후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 세계 질서의 규칙을 써야 할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이는 향후 미국과 중국이 비단 지역 수준뿐 아니라 다자 수준에서도 질서 수립의 주도권을 다툴 가능성이 커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다자 무역 질서의 회복은 트럼프 행정부가 상소기구를 무력화한 데서 나타나듯이, WTO 분쟁 해결 메커니즘을 정상화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회원국들이 보조금 등에 대한 정보의 적시 제공을 거부하는 현상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분쟁 해결 메커니즘의 정상화는 시급하다. 상소기구를 포함한 분쟁 해결 메커니즘의 정상화는 회원국들의 정보 제공과 무역 자유화에 대한 이행 등 다양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더 본질적인 개혁은 WTO 본연의 기능인 다자 무역 협상을 위한 포럼의 제공과 새로운 무역 규칙을 수립하는 것이다. WTO가 규칙을 수립해야 할 이슈들은 디지털 무역, 기후 변화, 노동, 환경, 경쟁 등 21세기형 이슈들에서 미중 무역 전쟁의 핵심 쟁점인 지적재산권 탈취, 강요된 기술 이전, 보조금과 국영기업에 이르기까지 산적하다.

 

단기적으로 미국과 유럽은 중국을 겨냥한 보조금 문제를 다자 무역 협상의 테이블에 우선 올려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과 유럽이 보잉과 에어버스에 대한 보조금 분쟁을 일시 유예하기로 한 것은 역설적으로 중국 보조금 문제를 우선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보조금에 대한 WTO 기존 규정이 ‘정부와 공공 기관’으로 협소하게 정의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 국영기업이 규정의 허점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의 인식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보조금의 정의를 확대하는 한편, 보조금에 대한 입증 부담을 낮추고 보조금 지급의 보고 의무를 강화하는 등의 변화를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새로운 이슈가 다자 무역 협상에서 본격 논의될 가능성에 대비하여,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입체적인 대응 전략의 수립이 요구된다.

 

2) 다자 협상 방식 변화 가능성에 대한 대비

새로운 이슈에 대한 규칙 수립의 협상 방삭에서도 변화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에 대한 선제적이면서도 다면적 대응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규칙의 수립을 둘러싼 갈등이 선진국 vs. 개도국 또는 미국 vs. 중국이라는 중첩된 갈등 구조 속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용이한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합의될 때까지 아무 것도 합의된 것이 아니다”(Nothing is agreed until everything is agreed)라는 WTO의 일괄 타결 방식과 전자상거래, 디지털 무역, 기후변화, 보조금, 국영기업, 비시장 경제와의 무역 등 다양한 이슈들에 대하여 모든 회원국에게 동일한 규칙을 적용하는 협상 방식에 탄력성을 부여할 수 있는 운영의 묘를 살릴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 무역과 관련 WTO 전자상거래 협상의 경우, WTO 전자상거래 협상에 참여 의사를 밝힌 80여 개 국이 입장문을 제출하였다. 전자상거래 협상의 필요성 자체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반면, 개도국들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디지털 무역의 혜택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을 요구하고 있다. 전자상거래 협상과 관련 선진국과 개도국들이 목표가 아니라,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 경로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은 전자상거래 협상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다자 협상( multilateral negotiations) 방식과 복수국 간 협상(plurilateral negotiations) 방식에 대하여 WTO가 유연하게 접근할 가능성에 대비하고, 필요할 경우 효과적인 협상 방식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3) 경제 협력의 질적 업그레이드

한국이 21세기 세계 경제 질서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데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경제 협력을 질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최근까지도 대외경제정책에서 중상주의적 성향을 유지해왔다. FTA 경주에서 선발 효과를 누리기 위해 많은 국가와 FTA를 체결하고, 이후에도 FTA의 사각 지대를 찾아 지속적으로 FTA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에콰도르, 메르코수르(MERCOSUR), 우즈베키스탄, EAEU 등과 협상을 진행 중이거나 협상을 위한 여건의 조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한국은 이른바 ‘경제 영토 세계 3위’라는 결과를 성취하기도 하였다. 한편, 21세기 세계 경제 규칙을 새롭게 써야 하는 상황에서 경제 협력의 수평적 확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경제 협력의 질적 업그레이드이다. 노동, 환경, 투자, 정부 조달, 보조금, 디지털 무역, 국영기업 등 많은 이슈들이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다자 무역 규칙으로 확립되지 못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이 21세기 무역 규칙의 수립 과정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체결 FTA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4. 국내 제도적 차원

 

1) 경제-안보 연계를 위한 통합 전략 체제 수립

21세기 경제와 안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WTO 21조도 국가안보를 이유로 무역 제재를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기는 하다. 경제와 안보의 경계 약화는 국가안보 조항의 활용이 예외적이 아니라, 일상화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중국은 물론 동맹국에 대해서도 관세 부과 결정을 한 데서 이러한 가능성은 현실화되었다. 한국은 이처럼 경제-안보 연계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국내적으로는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제도적 기반을 갖추고, 대외적으로는 자유무역질서의 유지에 사활적 이해를 하고 있는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은 경제-안보 연계를 일상화시키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초래하고 있다. 특히, 사드(THAAD) 배치 결정으로 인한 중국의 경제 제재를 경험한 한국으로서는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될수록 선택의 부담이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가 공급 사슬 재편을 추진하고 쿼드 협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미국과의 협력 강화가 초래할 결과에 대한 부담이 다시 가중되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에서 기술을 매개로 경제와 안보를 긴밀하게 연계하고, 5G 네트워크 장비의 채택과 관련 상당수 국가들이 ‘안보’적 고려를 반영하고 있다.

 

일본이 국가안전보장국(NSS)에 경제반을 신설한 데 이어, 국가안전보장국, 경제산업성 등 정부 부처와 게이단렌을 포함한 경제 단체 및 주요 기업들일 참여하여 경제안보 중장기 전략을 수립하는 회의체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는 반도체, 회토류 등 전략 물자의 확보와 공급 사슬의 구축 등의 방안을 경제 안보 관점에서 포괄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 정부도 2017년 외교부 내 사이버 및 핵심 기술 대사(Ambassador for Cyber Affairs and Critical Technology)를 신설하는 경제와 안보의 연계는 더 이상 미국 및 중국과 같은 강대국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와 안보의 분리가 아니라 연계가 현실이라는 점을 토대로 국가 전략 차원에서 경제-안보 연계를 위한 통합 체제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 대중국 견제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한 미국의 기술 협력 요구,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 제재, 일본 정부의 한국 화이트 리스트 배제 등 경제-안보 연계로 인한 압박을 경험한 한국으로서는 경제-안보 분리를 넘어선 21세기 기술 경쟁 시대에 대비한 경제적 통치술의 필요성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21세기는 주요국들이 경제와 안보를 연계하는 통합 전략의 시대이다. 이와 관련, 미중 전략 경쟁의 현황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안보 연계 상황에 대하여 정부와 기업이 인식의 공유를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중국 견제 차원에서 수출 통제와 보호주의를 추진하며 기업에게 일방적인 협조를 요구했던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공급 사슬 검토와 재편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민간기업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식의 공유는 대응 전략의 첫 단추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제와 안보가 연계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기업이 직면할 수 있는 리스크를 완화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기업의 선택 범위를 넓혀줄 필요가 있다. 공급 사슬의 재편은 기업의 입장에서 불확실성이 매우 큰 작업이다. 정부 정책의 일관성, 투명성, 개방성 등은 기업이 의사결정을 하는 데 불확실성을 완화하여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공급 사슬 재편 정책에 협조하여 미국에 생산 시설을 확충하여 공급 사슬을 구축하는 것이 기업의 입장에서 공급 사슬이 원거리화되는 데 따른 리스크가 커지는 것은 사실이다. 정부는 리스크의 증가를 완화함으로써 경제와 안보가 연계되는 현상에 대한 기업들의 대응을 측면 지원할 필요가 있다. ■

 


 

저자: 이승주_ EAI 무역•기술•변환센터 소장 • 중앙대학교 정치국제학과 교수.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분야는 국제정치경제, 통상의 국제정치, 글로벌 디지털 거버넌스 등이다. 주요 저서 및 편저로는《사이버 공간의 국제정치경제》(이승주 편), “Institutional Balancing and the Politics of Mega FTAs in East Asia,” 《Northeast Asia: Ripe for Integration?》(공편),《Trade Policy in the Asia-Pacific: The Role of Ideas, Interests, and Domestic Institutions》(공편) 등이 있다.

 


 

담당 및 편집: 백진경 EAI 연구실장
    문의: 02 2277 1683 (ext. 209) | j.baek@ea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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