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아·태’ 지고 ‘인·태’ 뜨는 이유… 중국 포위하는 미국의 전략

  • 2024-02-17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국제정치학자가 본 ‘인도·태평양’

개념전쟁

손열 지음 | EAI | 368쪽 | 2만4000원

최근 들어 ‘아시아-태평양(Asia-Pacific)’이란 용어를 제치고 부상한 ‘인도-태평양(Indo-Pacific)’이라는 지역 개념이 자주 귀에 들린다. 인도양과 태평양의 연안을 연결하는 해양 공간을 지칭하는 용어인데, 아프리카 동부 해안부터 태평양 서부 해안까지 실로 광대한 영역을 포괄한다. 기존의 ‘아시아-태평양’과 비교한다면 대륙적 정체성이 약화되고 인도와 동남아 일대 해안이 부각되는 공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왜 이 용어를 사용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지극히 전략적”이라고 국제정치학자로서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이자 동아시아연구원장인 저자는 말한다. ‘인도-태평양’을 본격적으로 유통한 주체는 바로 초강대국인 미국이기 때문이다. 2017년 12월 트럼프 정부가 국가 안보 전략을 발표하면서 ‘인태’를 주로 전략적 이익을 갖는 영역으로 명기한 이후 정부·의회가 생산하는 모든 성명과 문서에 이 용어를 전면적으로 사용했다.

이 용어 변화의 배경에는 중국이라는 또 다른 강대국의 존재가 있다. 중국의 전략적 지평선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을 다루기 위한 공간을 새롭게 구획해야 한다는 전략적 고민이 ‘인도-태평양’이란 용어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인도-태평양’이란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주요 국가는 중국, 러시아, 북한뿐이다. “너무 먼 지역들을 인위적으로 합쳐 놨다” “지나치게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계략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우리는 ‘태평양’이란 용어를 들으면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아시아-태평양’이란 말은 그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을 함께 부르는 정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지역어의 개념 자체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한다. 세계 주요국의 전략적 틀에서 세심하게 창안돼 경계를 획정하는 역할을 하고, 이를 이용해 자국에 유리한 전략 공간을 조성하려는 목적을 수행해 왔다는 것이다.

과거 조선을 포함한 동양 국가들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天下)’ 개념에 익숙한 상태였으나, 19세기 중반 구미 세력과 만나면서 새로운 공간 개념이 필요하게 됐다. 일본을 중심으로 구미 제국주의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아시아’ 개념이 나왔고, 미국은 상업·전략적 이해를 담은 ‘태평양’ 개념을 내걸어 아시아에서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패권국의 지위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전략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아시아-태평양’이었다. 이 개념을 통해 자본과 재화·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시장자본주의와, 정치적 자유화로 세계 평화를 성취하는 자유주의 정치 이념을 확산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아시아 지역의 반발로 등장한 개념이 ‘동아시아’였다. 금융 위기를 거치며 초국적 자본에 대한 방화벽을 설치하고 아시아적 가치와 관행·제도를 강조하며 새로운 문명 개념까지 담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인도-태평양’ 개념이 국제적으로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다. 중국이 부상하고 주변국의 불안감이 커졌으며, 미국은 상대적으로 쇠퇴했고, 대국(大國) 인도가 등장하는 전략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가 일본이었고 ‘인도-태평양’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법치를 공유하는 호주·뉴질랜드·인도를 지역 구성원에 끌어들이려 했다.

한국은 뒤늦게나마 ‘인도-태평양’ 개념을 수용하고 나섰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12월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향후 핵심 외교 정책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저자는 그로 인한 국익의 논리가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는다면 미국을 추수하는 지역 전략으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지구적 맥락’에서 미래 변화를 담는 개념을 만들고, 인도·동남아에 대한 관여를 강화하며, 인도-태평양 전략의 대(大)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면서 중국에 대한 포용적 기조를 잃지 않는 ‘선진 중견국 네트워크 외교’ 또한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이 그동안 개념 전쟁에서 변방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한 까닭은 미래의 변화를 과거의 개념으로 읽어내 여전히 (동북아) 지역에 집착하려는 병폐 때문이었다”는 뼈아픈 진단도 잊지 않는다.